어제 저녁 현대건설 김정위 상무가 멀리 경주에서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이곳까지 와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너무 미안하고 반가워서 바로 흥분하고 말았다. 이런 기분에 어찌 한 잔 안 할 수가 있나? 옛날 잘 나가던 시절의 얘기를 하며 결국 취하고 말았다. 김정위 상무는 내가 아내와 함께 걷기여행을 하는 것이 제일 부럽단다. 상대를 기분좋게 하는 참 좋은 후배다. 내가 인생을 그리 헛되게 살지는 않았나보다. 대전의 박창용 씨가 '좋아 하시는 쏘주 한 잔은 왜 못하시는 거죠? 한 잔 하시고 주무시면 피로가 확 풀리실텐데!! 혹시 사모님 때문은 아니시겠지요. ㅋㅋㅋ'하며 의아해 한다. 술을 못 마시는 이유? 내 왼쪽 눈에 포도막염이 생긴 탓이다. 뿌연 연기가 낀 것처럼 잘 보이질 않고 시력이 04이하로 떨어졌다. 갑갑하고 책을 읽기도 힘들다. 포도막염에는 술이 독이라니 아무리 술을 좋아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래서 좋아하는 술 친구들 민나기를 꺼려왔다. 그러나 어제의 경우는 예외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 어찌 한 잔이 없을소냐? 김정위 상무는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돌아갔다.
아침을 또 걸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마침 24시간 매생이국 식당이 있어서 든든하게 요기를 할 수 있었다. 해변가 식당치고는 맛이 좋다. 오늘 날씨는 정말 화창하다. 아침부터 바닷물에 반사된 햇살이 눈부시다. 진하해수욕장을 빠져나오면 바로 간절곳삼거리다. 간절곳은 호미곳처럼 아주 잘 가꾸어져 있어서 젊은이의 데이트 장소로 아주 좋겠다. 그러나 오늘은 화요일인데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아무도 조용하다. 간절곶은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그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다가 돌이 되었다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자기의 소망을 옆서에 써서 보내는 커다란 우체통이 있다. 사람이 직접 우체통에 들어가 옆서를 쓴다. 공짜란다. 나도 하나 보낼까 했더니 다 떨어지고 없다. 나보다 더 간절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우체통 안은 낙서로 가득하다. 하긴 간절히 남편이 돌아오기를 빌었던 아낙도 소원을 풀지 못하고 돌이 되었다니 옆서를 보낸들 무슨 소용이랴.
'원장님 잘 계시죠? 전 감기때문에 무지 고생했어요. 지금도 조금 남았구요. 궁금해서요. 제가 지독한 다이어트를 해서 술 마시자구도 못 해요. 3개월 간은 인간관계 꽝이예요.' 지반공학회 강현옥 부장이다. 한 동안 뜸하더니 몸이 불편했구나.
'어이구, 또 미인은 괴로워 한 명 생기겠네. 난 울산에서 기장으로 가는 길이야.'
'ㅎㅎㅎ. 여행? 업무? 날씨 추운데... 조심해서 다니세요 ^^. 보고싶어요.'
'오늘은 날씨는 춥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맑은 날씨라서 걷기에는 좋겠습니다. 좋은 소식 많이 주세요. 화이팅!' -박창용.
'참 좋은 날씨입니다. 감사. 땡큐.' 내 여행기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몇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글을 좀 더 질 쓰면 얼마나 좋을까?
과수원의 탱자나무 울타리가 길옆으로 삐져나와 나의 뺨을 긁는다. 걷는 사람도 좀 생각할 일이지 원. 탱자나무가 자라는 걸 보면 과연 남쪽은 남쪽이구나.
'아침에 벌써 글이 올라왔네. 술이 몹시 고프던 차에 한 잔 해서 기분이 좋았나? 오늘도 파도소리가 요란하지?' 최병은이다. 바람은 좀 불어도 오늘은 파도가 아주 잔잔하다. 오늘의 바다는 아주 순하고 착한 모습이다.
'어제 한 잔 했더니 컨디션 최고. 날씨도 좋고 곧 일광에 도착 예정.'
'그럼 벌써 부산 근처까지 진격했다는 소리? 내일 부산에서 KTX 타고 상경?'
'내일 해운대 도착. 김상규 교수 만나고 올라갈겨.'
부산이 가까워 온다니 새삼 옛 생각이 난다. 옥이는 아직 부산에 있을까?
대학 3학년에 만난 옥이. 그 녀는 내가 가정교사로 있던 집의 양녀였다. 먹고 살기 어렵던 그 시절에는 형편이 어려운 여자아이들이 부잣집에 양녀로 들어가 일을 해 주다가 적당한 나이가 되면 결혼해서 그 집을 떠나곤 했었다. 말이 좋아 양녀지, 사실은 하녀나 식모인 셈이다. 당시 나는 양정중학교 1학년인 김주완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주완이가 부산아이였다. 워낙 집이 부자라서 서울로 유학을 왔고 한 아이를 위해서 집을 사고 가정교사를 두고 두 사람을 위해서 집안 살림을 하도록 옥이를 올려 보냈었다. 그러니까 주완이와 나 그리고 옥이 이렇게 세 식구가 한 집에서 살았다. 옥이는 본 이름이 명옥이였으나 부산 사람들은 그냥 옥이라고 불렀다. 옥이의 나이가 19살이고 나는 24살이었으니 불과 5살 차이여서 지금 생각하면 연애도 할 수 있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 때는 옥이를 어린 애로만 생각하고 옥이도 나를 오빠로만 생각했었다. 또 그 당시 나는 지금의 아내와 열렬한 연애를 하고 있던 중이어서 옥이가 삐지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만약 지금의 아내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약 반년 동안 같이 살면서 우리 세 식구는 아주 즐거웠다. 지금 생각하면 옥이는 정말 눈이 크고 예쁜 처녀였다. 늘 명랑하고 나를 잘 따라서 나도 옥이를 무척 사랑했었다. 더구나 나는 외톨이로 자랐고 옥이도 정에 메마른 환경에서 자라서 우리는 더욱 따뜻한 감정을 가졌었다. 그 해 여름, 방학이 되어 세 식구가 부산에 내려갔을 때였다. 까치섬으로 놀러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수영복차림의 옥이를 업어준 일이 그만 집안 식구들의 눈에 거슬렸던 가보다. 방학이 끝나고 옥이는 다시 서울에 올라오지 못했다. 그것이 옥이와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지금 옥이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녀도 벌써 환갑이 되었겠구나. 한 번 만나보고싶다. 그 곱던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까.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열어 본 옛 사진첩에서 옥이는 여전히 젊고 예쁜 얼굴로 웃고있었는데... 혹시 이번에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나아리를 지나면서 미역을 다듬는 노인들을 만났다. 미역 줄거리의 짭짤한 맛이 소주안주로는 제격이겠다. 날더러 왜 일 없이 돌아다니느냔다. 아무도 할 일을 주지 않아서 그냥 돌아다닌다고 했더니 한 아주머니가 대뜸 '되도 않은 소리' 말란다. 돈 다 벌어놓고 세상구경 다니는 것 아니냐며 팔자 좋은 사람이란다. 아무렴 어떼. 없게 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서생면 농협에 들려 의젓하게 커피도 한 잔 마시고 화장실에서 세수도 하고나니 기분이 좋다. 나올 때 여직원의 인사까지 받으니 세상만사가 다 뜻대로 되는 듯 하다. 서생면을 지나자 고리원자력발전소가 해안을 틀어막고 있어서 산쪽 길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참, 발전소가 넓기도 하다.
11시 40분, 발전소 정문을 지나 월내로 들어서니 초입에 복어전문점이 보인다. 조금 이르지만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며 쉬어가자.
'어딘고? 여기는 태안이다. 오바.' -심재구.
'아니 태안은 어쩐 일로... 나는 고리원자력 앞에서 복매운탕으로 점심 때리는 중.'
'이 박사와 쏘주 못 마싱께 입맛이 별로 안 나서 "꽃게탕"으로 입맛 좀 돋굴려구.'
'핑게 좋고 살 맛 나네. 난 혼잔데 누구랑?'
'쏘주 못 먹으니까 외간여자 다 떨어져서 마눌님 하구만...근데 목숨 걸 일 없으면 복요리는 가끔씩만...' 참, 팔자 한 번 좋다. 봄 바람 쐬러 갔구만. 틀림없이 골프치러 간 걸꺼야. 심재구 씨 내외는 둘이서 곧잘 골프를 치러가더라.
월내의 모습은 마치 30년 전 읍내의 모습 그대로다. 옛날 영화를 찍으려고 세트를 만들어 놓은것 처럼 고풍스럽다. 월내역도 마찬가지다. 왜 여기는 다른 곳 처럼 현대화 되지 않았을까? 혹시 도시계획에 묶였나? 1시 40분, 버스정거장에서 잠시 쉬면서 김상규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내일 아무 약속도 없단다. 해운대의 조선호텔 로비에서 12시 반에 만나기로 했다. 김상규 교수님은 70이 넘어서도 스태미너 왕성하게 일을 하고 싶어한다. 어쩌면 내가 너무 빨리 늙어버렸는지도 몰라. 섭섭치 않게 해드려야 하는데...
임랑해수욕장을 지나면서 -정훈희와 김태화의 '꽃 밭에서'-라는 카페가 보인다. 가수 정훈희가 여기 사나? 정훈희라면 우리와 거의 같은 세대일거다. 나도 '꽃 밭에서'라는 노래를 아니까. 그런데 김태화는 누굴까? 남편? 괜한 호기심이다. 들어가 볼까? 에이, 그냥 가자. 일광으로 들어오니 바닷가에 예쁜 레스토랑이 보인다. 그래, 저기서 차 한 마시며 쉬어가자. 마레(mare). 이태리언 레스토랑이다. 평일인데도 의외로 손님이 가득하다. 과연 분위기도 좋다. 바다가 환히 보이고 실내도 완전 이국풍이다. 마치 샌프란시스토 쏘살리토 해변의 레스토랑에 앉아있는 기분이다. 아내가 왔더라면 아주 좋아했을텐데... 국산차가 없어서 따뜻한 레몬네이드을 마셨다. 부산에서는 꽤 이름이 난 곳인가 보다.
5시가 다 되어서 박제건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오후부터는 풀린다더니 계속 춥네. 추운데 고생하지 말고 올라오지. 따뜻할 때 하고...'
'부산 거의 다 왔어. 기장이야. 여기서 자고 내일 부산으로 갈거야.'
한국유리공장을 지나 드디어 기장에 들어선다. 아, 오늘도 무사히 끝나는구나. 잠이나 푹 자야지.
※마레(mare)이태리안 레스토랑/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이천리/051721-1441
타샤모텔/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705-6/051-724-3100
오늘 걸은 길 : 진하해수욕장-간절곶-서생면-나사리-고리원자력-월내-임랑해수욕장-칠암-일광-기장읍 청강리 타샤모텔. 26.2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