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 687년
옥중에서 밤을 보낸 조영은 이튿날 내준신의 험악한 얼굴과 대면해야 했다. 내준신은 원래 잘 생긴 얼굴이었으나 그 위에 온갖 포악과 거짓, 음란이 마치 십년 묵은 때처럼 덮여 얼 꼴을 심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내준신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조영을 째려보았다.
“흐흐흐!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겠지?”
내준신에게 걸려서 살아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내준신이 고문기구들을 보여주기만 해도 그 앞에 끌려온 사람들은 벌벌 떨며 없는 죄까지 줄줄이 자백하기 일쑤였다.
조영은 하늘의 임금께 잠시 묵도를 올리고 담대한 가슴을 얻은 후 대답했다.
“한 번은 내 대인과 대면해야 할 것을 알고 있었소.”
내준신은 작년에 고조영에게 경을 치른 적이 있는지라 그의 손에 수갑을 채움은 물론 다리까지도 족쇄로 묶어놓고 있었다.
결박당해 무릎을 꿇린 채 앉아있는 조영 곁에는 형옥의 관리들이 큰 칼을 들고 마치 지옥의 사자들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여차 하면 조영의 목이 날아갈 판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내준신이 실실 웃으며 물었는데, 그 웃음은 마치 지옥에서 온 귀신의 그것처럼 음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 죄를 내가 알지 못하겠소.”
“허허허!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한 놈은 일찍이 없었다. 고려 종자는 과연 듣던 대로 독하군.”
내준신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조영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요놈이 이렇게 기생오라비 같이 생겼으니, 여자들이 쪽을 못 쓰고 침을 질질 흘리는 게 아닌가?”
내준신이 곁에 선 자에게 말했다.
“불에 달군 인두를 하나 가져오라. 먼저 얼굴부터 지져주어야 하겠다.”
잠시 후 옥졸이 불에 달군 인두를 가져왔다.
“이놈, 얼굴을 온전하게 보존하려면 이실직고하렷다. 네가 어처 극시아를 꾀어 통정한 게 사실이지 않느냐!?”
“그런 적이 없소.”
그가 다시 아전衙前에게 소리쳤다.
“여봐라! 증거 자료들을 가져오라.”
조금 있으니 아전이 어디선가 한 뭉치 서류를 들고 왔다. 내준신이 그 서류를 받아 조영 앞에 내 팽개치며 말했다.
“이게 뭔지 똑똑히 봐라.”
조영이 흩어진 종잇조각들을 보니, 그것은 편지들이었다. 아전이 하나씩 자세히 보여주니, 그가 어처 극시아에게 보낸 몇 편의 서한들이 눈에 띄었다. 일전에 보낸 시문도 그 안에 들어있었다. 자신이 어처에게 보낸 편지들뿐만 아니라, 어처 극시아가 자신에게 보낸 서신들까지도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내게 보낸 편지들은 내가 진즉 불태워버렸는데, 이게 뭔가? 이것은 필시 처음부터 한 부 더 만들어놓았던 복사물일 것이다. 아!’
그제야 그는 어처 극시아의 접근이 자신에게 얼마나 무서운 함정이었는가를 퍼뜩 깨달았다.
아전은 그가 편지를 잘 볼 수 있게 하나씩 조영 앞에 펼쳐놓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라. 이런 물증이 있는데도 설마 내가 모함을 하고 있다거나 거짓말을 한다고 말하진 못하겠지?”
내준신이 징글맞게 웃었다.
“그 편지들을 이리 다시 가져오라.”
아전이 가져다주니, 내준신이 그 중 하나를 펼쳐보며 얼굴에 괴상망측한 웃음을 흘렸다.
“흠! ‘마치 어렸을 적 부모가 맺어준 정인情人을 뵈옵는 듯했습니다’? 요것들이 아주 잘 놀고 있구먼.”
그것은 어처 극시아가 조영에게 보낸 첫 편지의 한 구절이다.
“어허! 요것이 이놈의 집에까지 들락날락하며 볼 장 다 봤구먼?”
그는 실실 웃으면서 다 들으라는 듯 편지를 낭독했다.
“ ‘저는 궁 안에 갇힌 새가 되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임을 생각하노라면, 나오는 게 한숨이요 들이쉬는 게 고독입니다.’ 아쭈, 제법 시 같은 소리를 읊었네. 허허! 나도 이런 멋진 연애를 한 번 해보고 싶구먼.”
내준신이 조영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봐! 그대는 비록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런 찰진 사랑을 얻었으니 행복한 놈이 아닌가?”
내준신이 다시 고개를 내려 서신의 한 구절을 읽었다.
“ ‘언젠가 뜻을 이루어 고토를 다물하고, 고려 백성들을 안위하실 때, 그 자리로 저를 함께 데려가 주실 수 없는가요?’ 이건 함께 반역을 꾀하자는 얘기구먼. 반역을 저지르는 것까지도 부족해 폐하의 아내까지 유혹해 데려갈 정도라면, 이 죄악은 삼족이 모조리 주살되어도 형벌이 가볍다 해야 할 대죄야.”
내준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조영에게 물었다.
“어때? 내 말이 지당하지 않은가? 내 말에 틀린 점이 있으면 지적해보라고.”
정말이지, 조영은 할 말이 없었다. 걸려도 제대로 걸린 것이다.
“ ‘부디 저를 환꽃 동지同志로 받아주세요.’ 환꽃동지가 뭔가? 환꽃은 고려국의 나라꽃이라고 들었는데, 이건 바로 고려를 다시 세우겠다는 반역의 이야기가 아닌가 말일세.”
내준신은 조영을 쳐다보며 실금실금 웃었다.
“흥! ‘그것은 어처 극시아의 일방적 이야기일 뿐 내 뜻이 아니었다’는 따위의 망발은 하지 않는 게 좋네. 내가 가장 경멸하는 인간들이, 여인에게 모든 허물을 죄다 뒤집어씌우고 자기는 홀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와 구차한 목숨을 벌려는 작자들이야.”
조영은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내준신이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어처와 통정한 죄, 어처와 함께 반역을 모의한 죄. 인정하는가?”
“인정할 수 없소.”
“허허, 이놈이 이런 물증을 앞에 두고도 인정할 수 없다니.”
그가 아전에게 소리쳤다.
“여봐라! 이 인두를 다시 달궈오라!”
그 시각 미시아는, 사형평사司刑評事 만국준萬國俊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이 명단이 역모를 꾸민 사람들의 명부가 아니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시 설명하란 말이다, 엉!?”
그가 앞에 놓인 탁자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애써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미시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내가 꿈속에 본 살생부록殺生符籙이오.”
“뭐라, 살생부록? 그건 또 뭔가?”
“낸들 어찌 아나요? 꿈에 본 것까지 내가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요?”
“이실직고하라! 이들은 역모에 참가한 자들의 명단이 아닌가?”
“대인도 딱하시오. 태평공주 마마나, 무유서 장군이 어찌 역모를 꾀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그리고 내가 그 종이에 적지는 않았지만, 꿈속에 본 살생부록에는 다른 이름들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내준신, 만국준, 주흥, 색원례 등의 이름이었습니다.”
만국준이 다시 한 번 탁자를 내리쳤다. 이들은 당시에 모두 무자비하고 혹독한 관리들로 악명을 날리던 인간들이다.
“뭐라! 이 계집이 지금 장난을 하고 있나?”
“내가 왜 그들의 이름은 적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만국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미시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종이에 기록해둔 이름들은 모두 생부록生符籙에 든 이들이었고, 누락된 성명들은 죄다 살부록殺符籙에 올라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사실인가?”
“믿거나 말거나.”
만국준이 느닷없이 벌떡 일어서더니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하지만 탁자를 걷어찬 발이 몹시 아픈지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미시아는 속으로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미시아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그 아름다운 눈망울을 찡긋하며 만국준에게 말했다.
“대인, 발이 몹시 아픈가보군요. 원래 헛발질을 하면 자기가 아픈 법입니다. 대인은 지금 저를 붙잡고 계속 헛손질, 헛발질을 하고 계십니다.”
만국준은 그녀의 태연한 비꼼의 언사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미시아의 곱고 아름다운 얼굴을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목소리를 갑자기 낮추어 물었다.
“네가 이실직고하면, 너는 혼자 죄를 면할 수도 있고 장차 내가 너를 잘 돌보아줄 수도 있지. 어떠냐?”
“대인의 호의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미 제가 이실직고했습니다. 무얼 더 말하라는 건가요?”
“네가 내 집에 들어오면 부귀영화는 이미 따 놓은 당상이다.”
만국준은 엉뚱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부언했다.
“네가 내 집에 들어온다고 약속하면, 네 말을 다 믿어줄 수 있다.”
만국준의 말은 미시아를 자기 첩으로 삼고 싶다는 뜻이다. 미시아는 속으로 역겨웠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벌써 폐하이신 태후마마께서는 절더러 흑치상지 장군을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지금 흑치상지 장군은 전장에 나가고 없지 않느냐?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내가 폐하께 간청하겠다.”
“제가 그렇게 약속하지 않으면, 이 명부에 관한 제 진언을 믿지 않으실 참인가요?”
“그렇지. 바로 그런 뜻이다.”
“제가 폐하께 이 사실을 아뢰어도 상관없습니까?”
“네가 날 물로 보는가 보구나. 네가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단 한 길, 내 요청을 들어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제가 만일 이 난국을 모면하고자 대인께 거짓으로 약속해 놓고서, 그걸 지키지 않고 폐하께 딴소리하면 어떡하실 참인데요?”
“여긴 너와 나 단 둘 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알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것은 미시아를 향한 협박이었다. 에두른 표현이다. 미시아는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졌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대꾸했다.
“호천상제昊天上帝, 하늘의 하나님이 아시고 땅이 알고, 대인께서 아시고 나도 아는데, 알 사람이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봐야 내 마음을 얻기는 고사하고 대인의 명망에 먹칠만 할 따름입니다. 내가 밖에 나가서 입을 나불거리면 어떡하실 작정입니까?”
“누가 너를 밖에 내보낸다고 했느냐?”
만국준이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을 보자 미시아는 속으로 덜컥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다. 손발이 묶여 있으니 자칫하면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당할 판이다.
“내가 착한 마음으로 널 구제하려 했으나 네가 거부하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만국준의 눈빛이 흉악한 이리처럼 변한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몸을 일으키다가 갑자기 손으로 미시아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미시아는 내력內力을 끌어 모아 저항하려 하다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돌리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
“어쭈! 이게 피해?”
그가 징글맞게 웃으며 우수로 미시아의 볼을 어루만졌다. 미시아의 전신이 부르르 떨린다.
“허, 고것 참···.”
입맛을 다시던 만국준은 목이 마른지 곁에 두고 있던 푸른 색 병을 기울여 잔에 음료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다른 붉은 색 병을 집어 들면서 말한다.
“이것아! 너도 목마르지 않느냐? 이건 참으로 맛이 좋은 술이다. 한 모금 마시게 해주마. 이게 내가 너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니라.”
그가 잔에 술을 따라 직접 미시아의 코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입을 벌리라.”
잔에서부터 독한 기운이 코를 강렬하게 자극했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미시아는 머리가 아찔하더니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위의 두 사건이 일어나기 전 날 저녁, 무 태후는 가물거리는 등불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가끔씩 한숨을 쉬었다가 얼굴에 어떤 결연한 빛을 띠기도 하고, 때로 처연한 색을 드러내는가 하면, 마치 배우처럼 실실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무 태후는 곁의 비자를 불렀다.
“속히 태평공주를 내 앞에 대령하라.”
얼마 후 태평공주가 그녀의 면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마마마는 잠도 주무시지 않나요? 내일 만나서 얘기하면 될 것을 가지고, 오밤중에 왜 절 부르고 난리예요?”
“이것아, 게 앉아라.”
태평공주가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고승과 임장청이 내가 베푼 은혜를 잊고 역모를 꾀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꼬?”
무조가 자탄하듯, 독백처럼 말했다.
“누가 그래요? 그 분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손주와 손녀가 뻔히 내 수중에 잡혀 있음을 알면서도 망동을 일삼고 있으니,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손주와 손녀란 고승의 손자 고조영과 임장청의 외손녀 미시아를 말한다. 태평공주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힐문했다.
“그래서 어쩔 셈인데요?”
“모조리 도륙해야지.”
무 태후는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 중얼거렸다.
“고승과 임장청이 우리 대당에 투항해 온 이후, 난 선황과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으로 그들에게 대장원大莊園을 주고 거만금巨萬金을 들여 집까지 지어주었다. 하지만 은혜를 모르는 것도 분수가 있어야지, 지난겨울 우릴 붙잡아 큰 욕을 보인 것도 모자라, 이제 이 나라를 뒤집어엎으려고 하니, 내가 누굴 믿고 살아야 할까?”
“흥! 자업자득이지 뭐.”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먼저 고것들부터 죽인 후 계성 북문 밖의 고가장하고 임가장원을 뿌리째 뽑아버려야겠다.”
“고것들이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영월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고조영과 미시아다.”
“그건 안 돼요.”
“왜? 아직도 고조영에게 미련이 있느냐?”
“그들을 죽이고 임가장 고가장을 뿌리뽑아 보아야 우리에게 득이 될 게 뭐가 있어요?”
말이야 틀린 게 아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 노인들은 저절로 죽을 터인데, 그들을 죽이면, 그렇지 않아도 폭발 일보 직전인 고려인들과 거란인들의 마음에 불을 당기게 될 걸요?”
무조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내 분통은 어디에 어떻게 터뜨린단 말이냐?”
“왜 그렇게 분이 나셨는데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고조영 때문이라는 사실을.
“흥! 빤하지 뭐. 고조영이 고분고분하지 않았죠?”
그것은 완곡한 표현이다. 고조영이 무조의 간곡한 수발요청을 다시 거부했다는 뜻이다.
“엄마는, 그 연세에···.”
태평공주가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연놈이 이미 부부의 연 같은 깊은 인연을 맺은 것 같구나.”
“어머, 그게 사실이에요?”
“내가 그냥 추측한 거다.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일 거다.”
“무슨 근거로요?”
무태후가 대답을 회피하고 태평공주의 얼굴을 은근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 둘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고조영은 놓아두고 미시아에게 유배형을 내리세요.”
태평공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먼저 고조영 그놈의 미끈한 얼굴부터 손 좀 보고, 미시아의 몸도 좀 매만진 후 둘 다 유배지로 보낼 참이다.”
이영월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네 맘대로 생각하려무나.”
“엄마, 고조영만은 안돼요.”
“내 그럴 줄 알고 미리 너에게 통보하기 위해 부른 것이다. 이젠 단념해라.”
천정을 쳐다보는 무 태후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제 그 고씨, 고가놈들을 생각만 하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린다. 모조리 도륙할 거다.”
무 태후가 이토록 악수惡手를 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때로, 지난 연말과 연초에 영주에 올라갔을 때 임장청과 고승의 무리에게 당한 수모를 상기하노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울화가 치밀어 입맛도 없어졌다.
비록 여행 탈진증을 치료받고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나, 그들은 실질적으로 자신을 거기에 상당한 시일 동안 붙잡아 둔 가운데, 고려 고토를 되돌려 달라고 강청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 그녀는 표면상으로나마 이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회고할수록 괘씸한 생각이 들며 증오심이 불타올라 이를 갈던 무조는 마침내 손수 모조리 없애기로 작심한 것이다.
영주를 떠날 때, 조문홰에게 고승과 임장청을 제거하라고 은밀한 지시를 내렸건만, 어인 일인지 조문홰로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문홰는 양다리를 걸친 기회주의자로서, 후고구려 고중상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 태후에게 붙어 고승과 임장청을 제거한다면, 영주의 거란인, 말갈인, 고려인, 해족 등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그의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이 그의 셈이었다.
반면에 무 태후의 밀명을 거부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거부는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그는 하루하루가 좌불안석이었다. 그 무렵에 후고구려의 고중상으로부터 영주도독부로 밀사가 도착했다.
밀사는 고중상의 친서를 내밀었다. 조문홰가 읽어보니, 그것은 영주의 고승과 임장청, 고려인, 신라인, 말갈인들을 잘 돌보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후고구려와 신라가 기뻐하지 않으리라는 은밀한 협박도 서신 속에 들어 있었다.
조문홰는 후고려의 사신들이 떠나자 즉시 동도 낙양성으로 고중상의 편지와 함께 사자를 파견했다.
갖은 말로도 무 태후가 설득당하지 않자 근심스런 얼굴로 무 태후의 침전을 물러나온 태평공주 이영월은 그 길로 황제 이단이 거처하고 있는 별전으로 달음질한다.
이영월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이단이, 그 때까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이영월을 맞이했다.
“이 밤중에 도대체 웬일이냐? 무슨 난리가 난 거냐?”
(다음회로 계속)
**********************
샬롬.
2024. 11. 8. 늦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