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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그 여자를 인도하여 남자로 만들어 그 여자도 여러분 남자들처럼 살아계신 영이 되게 하겠습니다. 스스로를 남자로 만드는 여자가 천국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합당하지 못함이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보라. 내가 저를 인도해 저를 남자로 만들어 저도 너희 남자들과 같이 살아계신 영이 되게 하리라. 스스로를 남자로 만드는 여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리라.” 마리아복음 등에서도 베드로는 여성 차별적인 인물로 나온다. 여기 도마복음 마지막 절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를 놓고 여자들은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기에 마리아를 내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베드로의 이런 발언에 대해, 예수님이 그러면 “내가 그 여자를 남자로 만들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여성 혐오증(misogyny)을 조장하는 듯한 이런 이야기가 문맥과 상관이 없이 불쑥 들어가 있을까? 이런 여성 비하적인 사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한 절 때문에 도마복음의 신뢰도가 심히 의심스럽다거나, 한 편의 아름다운 교향곡이 끝에 나오는 불협화음으로 인해 심히 훼손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 많다. 덧붙여졌음에 틀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나그함마디 사본을 소장하고 있던 이집트의 파코미우스 사원의 필사자들이 덧붙인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한다. 그 당시 문헌들이 모두가 하나하나 손으로 필사한 필사본들이기 때문에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들에 의해 본문의 내용이 가감될 소지가 많았음을 감안할 때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있다. 제1절에서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고 한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풀이하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올바른 한 가지 풀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로서는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말씀도 화두처럼 붙들고 나름대로 그 속내를 알아보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변혁(transformation)’의 가능성과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베드로가 여성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한데 반하여, 예수님은 여자들도 구원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종의 만인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역시 남녀 차별 사상을 가지고 있던 분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이집트나 그리스 등지에서는 당연히 남자와 여자가 질적으로 다른 유에 속하는 별종으로 보았다. 플라톤의 경우만 보아도 그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악한 남자가 받는 일종의 형벌이라 여겼을 뿐 아니라, 여자는 남자와 짐승 중간 쯤 어디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여신 이시스(Isis)도 결국은 남신 오시리스(Osiris)와 하나가 되어 남신으로 변한 다음 구원을 받게 된 것이라 했다. 결국 그 당시 문화 코드에 의하면 ‘여자’란 ‘불완전한 인간’의 대명사였던 셈이고, ‘남자’란 ‘완전한 인간’을 가리키는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은 결국 불완전한 인간 마리아를 변화시켜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경험을 하도록 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 당시여자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신 것이다. 아니라 누구라도, 심지어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남성 제자들마저도, 지금의 성별과 관계없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 ‘완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 말씀이라 볼 수 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없다’는 것이다 (갈3:27-28). 아니고 단순한 여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라면 그냥 남자가 아니라 남자 같기도 한 여자, 여자 같기도 한 남자이어야 하며, 여자라면 그냥 여자가 아니라 여자 같기도 한 남자, 남자 같기도 한 여자--말하자면 남성성과 여성성이 온전히 갖추어진 ‘양성구유(兩性具有)’의 인간(androgyne), 혹은 칼 융이 말하는 아니무스(animus)와 아니마(anima)의 변증법적 융합을 이룬 온전한 인간을 함의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이런 합일을 이룬 인간은 사실 영적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한 새로운 인간인 셈이다. 이런 변화나 변혁이야말로 종교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 이것으로써 오강남교수님의 도마복음 114절 풀이가 모두 끝났습니다. 저역시 이글을 옮기며 많은 것을 배웠으며 앞으로도 교수님의 행보가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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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화경에도 이와 같은 비유가 있습니다. 법화경 제13장 권지품에 보면 "이 때, 라후라의 어머니인 야수다라 비구니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존께서 수기를 주시는 가운데 홀로 내 이름만을 말하지 않으시는구나.'부처님이 야수다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오는 세상에서 백천만억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보살의 행을 닦아 대법사가 되었다가, 점점 부처의 도를 갖추고 좋은 국토에서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라후라는 부처님의 아들이며 야수다라는 부처님의 아내입니다.
불경중 법화경에서만 여자도 성불하는 대목이 나옵니다만 조건이 붙습니다. 바로 대법사라는 남자의 권위적인 자리를 넘어섰을때라는 조건이 주어집니다. 대법사라면 배움을 실천할수 있는 용자를 의미합니다.가르친다는 것이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배움의 실천으로써 몸소 보여주는 이를 말하는 것이니만큼 그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또 법화경 제12장 '제바달다품'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주십니다."그대는 오래지 않아 위없는 도를 얻으리라 생각하나, 나는 그 일을 믿기 어렵노라. 그 까닭을 말하면, 여자의 몸은 때묻고 더러워서 법의 그릇이 아니거늘, 어떻게 위없는 보리를 얻겠는가. 부처 되는 길은 멀고 멀어서, 한량없는 겁을 지나면서 애써 수행을 쌓으며, 여러 가지 바라밀다를 구족하게 닦고서야 이루는 것이 아닌가. 또, 여자의 몸에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나니, 첫째, 범천왕이 되지 못하고, 둘째, 제석천왕이 되지 못하며, 셋째, 마왕이 되지 못하고, 넷째, 전륜성왕이 되지 못하며, 다섯째,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니라.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빨리 성불할 수 있겠느냐." -중략- 그 때, 여러 모인 이들이 보니, 용녀가 잠깐 동안에 남자로 변하여서 보살의 행을 갖추고, 곧 남방의 무구 (無垢)세계에 가서 보배로운 연꽃에 앉아 등정각을 이루고, 32 훌륭한 몸매와 80가지 원만한 모양을 갖추고, 시방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연설하였다. 이 때, 사바세계의 보살과 성문과 천룡 8부와 사람과 사람 아닌 이들이, 용녀가 성불하여, 모인 대중의 천상,인간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을 멀리서 보고, 마음이 크게 환희하여 멀리 바라보며 예경하였다.
범천왕,제석천왕,마왕,전륜성왕등은 사바계를 각각의 위치에서 다스리는 신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자가 이런 왕들이 될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범천왕등의 위치를 꿈꾸지 않는 소심한 존재로 묘사되었다고 봅니다. 그렇듯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서 세상의 모든것이 되고서야 부처가 될수 있다는 의미로 다섯번째에 부처가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어쨋든 여성만이 아닌 남성도 자신의 위치에서 탈피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여성을 때묻고 더러운 존재로 말하는 것은 시대적인 상황이 비유의 조건이 되어졌다고 봅니다. 몸이 때묻었다는 말은 비유인듯한데 세속에 물들어 탐욕을 부리게 만드는 근원으로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다 그렇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현대에 많은 여걸들과 깊은 생각의 여성분들은 남성보다도 우월한 분들이 많지요... 좀더 공부하여 좀더 만족스런 답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법화경과 신약성서'라는 민희식교수님의 책에서도 알수 있듯 법화경과 신약은 많이 닮아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