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賞)을 꿈꾸지 않는다. 실험하고 연구하는 것만이 나의 영원한 꿈이다.”
코로나에서 인류를 구한 이 여성 과학자는 지난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뒤에도 여전히 “한 가지만 더!(One more thing!)”를 외친다고 했다. 한 번 더 의심하고, 한 번 더 질문하고, 한 번 더 실험하고…. 과학계의 외면과 조롱에도 40년을 몰두해온 mRNA가 코로나 팬데믹을 돌파한 무기가 된 것도 이 집요한 주문에서 시작됐다.
회고록 ‘돌파의 시간’(까치글방) 한국어판을 출간한 커털린 커리코 교수를 이메일로 만났다. “나는 논리적이고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 은유나 뜬구름 잡는 묘사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의 답변은 짧지만 명쾌했다.
- 모더나, 화이자 등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 회사들은 막대한 돈을 벌었지만 당신은 대학으로 돌아갔다.
“모교인 헝가리 세게드 대학의 교수직을 수락했다. 나는 여전히 미국에 살고 있지만 (강의와 연구를 위해) 1년에 몇 번씩 헝가리로 간다. 현재 나는 노보노디스크 재단이 지원하는 국제 mRNA 콘퍼런스를 조직하고 있다.”
- 백신을 개발하기 전까지 당신은 펜실베이니아대(유펜)에서 괄시받는 연구자였다. 연구비를 따오라는 압박에 시달렸고, 교수에서 연구원으로 강등됐으며, 실험실이 강제 폐쇄되기도 했다.
“유펜의 내 상관이었던 이들도 나의 노벨상 수상을 기뻐하고 축하해줬다. 나를 강제로 내보낸 보스를 나는 비난한 적이 없다. 그는 (내 실험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외과 의사였고, 나의 원대한 프로젝트가 NIH(미 국립보건원) 전문가들에게 거절당했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커리코 박사는 회고록에 한스 셀리에의 책 ‘생명의 스트레스’를 인용하며,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실패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남을 비난할 시간에 차라리 더 많이 배우고,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창의력을 발휘하면 불운에 대처할 길이 열린다”고 썼다.
-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연구를 밀고 나간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시간에 출근해 온종일 실험하는 일이 즐거웠다. 남들 눈엔 지루한 풍경이겠지만, 내 머릿속엔 원대한 아이디어가 흘러넘치고 소용돌이쳤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mRNA의 성능은 계속해서 향상됐고, 그로 인한 연구의 진전으로 나는 프로젝트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
- 학교 복도의 복사기 앞에서 전염병 학자인 드루 와이스먼을 우연히 만난 것이 코로나 백신 개발의 결정적 순간이 됐다.
“면역에 대해 알지 못하는 RNA 과학자와 RNA 연구 경험이 없는 면역학자가 만난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8년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mRNA 기술로 우리 몸이 염증을 일으키지 않고 항원을 생산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변화의 시작이었다.”
- 공산주의 체제의 헝가리에서 푸주한의 딸로 태어났다.
“열두 살 때부터 돼지 잡는 일을 해야 했던 아버지에게 나는 ‘힘든 일’ 또한 삶의 일부라는 걸 배우며 자랐다.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하면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것도. 아버지는 비록 정치체제에 떠밀려 다니며 고통받았지만,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에 맞섰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었을 때도)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할 방법을 찾는 데만 집중했다.”
- 가난한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부끄러웠던 적은 없는지.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정육점에서 해고돼 술집에서 일할 때 나와 언니는 아버지를 도와 테이블을 닦고 담배꽁초를 버렸다. 아버지는 손님들에게 늘 다정했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런 아버지가 나를 자랑스러워하도록 더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려고 했다.”
- 다시 태어나도 과학자가 될까?
“과학자가 아닌 삶은 상상해본 적이 없다.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고 실험하고 발견하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은 없다.”
- ‘돌파(Breaking Through)’가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는 성공보다 실패에서 가장 많이 배운다. 다만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 중요한 건 남과의 비교 대신 자신이 할 수 있고 컨트롤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성공하려면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서 방향보다 그 방향으로 향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윤동한, [우보천리 동행만리], 가디언, 2023, 5쪽)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4/08/05/XZZ6RIPXSVDJHAWEVE56273IQE/
1928년 여름휴가를 마치고 연구실을 찾은 스코틀랜드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특이한 푸른 곰팡이를 발견했다. 실수로 열어놓은 배양 접시 안에서 자란 이 곰팡이는 플레밍이 연구하던 포도상 구균을 파괴하고 있었다. 인류가 첫 항생제이자 ‘20세기 최고 발명품’이라는 페니실린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플레밍 사례처럼 세상을 바꾸는 혁신은 뜻밖의 행운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1997년 펜실베이니아 의대 전염병 학과장으로 갓 부임한 드루 와이스먼과 계약직 여교수 커털린 커리코(Katalin Kariko·1955~)의 만남도 우연이었다. 전혀 다른 부서의 두 사람은 학교 복도의 제록스 복사기 앞에서 자주 마주쳤다. 도서관에서 논문을 구해 일일이 복사하던 시절이었고, 두 사람은 비슷한 시간에 먼저 복사기를 차지하려는 경쟁을 벌이다 친해졌다. 와이스먼은 에이즈를 비롯한 바이러스 연구에 단백질을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와이스먼에게 커리코가 말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이 바로 내가 하는 일이에요.” 이 대화가 생명공학과 의학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둘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커리코는 실험광이었다. 동료들에게 “실험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당신의 기대가 실수할 뿐”이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을 자주 들려줬다. 1995년 학교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학교는 커리코에게 정교수직을 제안하면서 메신저 리보핵산(mRNA) 연구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mRNA를 고집하면 연구원으로 강등하고 연봉은 절반 줄이겠다고 했다. 당시 과학계에서 mRNA는 계륵(鷄肋) 같은 존재였다. 1961년 프랑스 과학자들이 생체 내에서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mRNA의 존재를 처음으로 밝혔다. 질병과 싸우거나 예방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가능성에 수많은 과학자가 뛰어들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사람 몸이 외부에서 들어온 mRNA를 바이러스의 침입으로 여기고 염증을 비롯해 강력한 면역반응을 일으켰다. 커리코를 비롯한 극소수만 mRNA의 가능성을 믿었지만 1990년대에는 아예 연구비 지원조차 끊겼다. 커리코는 승진 대신 강등과 연봉 삭감을 택했다. 모두 ‘멍청한 선택’이라며 비웃었다. 영주권도 없었고, 대학생 딸의 학비도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뉴욕타임스는 “커리코는 실험실을 옮겨다니며 계약했지만, 연봉은 6만달러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1995년은 커리코의 굴곡진 인생에서도 유독 잔인한 해였다. 아파트 관리인이던 남편이 미 영주권을 받으러 헝가리에 갔다가 문제가 생겨 돌아오지 못하는 사이 커리코는 암 진단을 받고 두 차례 수술을 견뎌야 했다. 끝없는 고난 속에서 1997년 우연히 와이스먼을 만나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실험실에서는 얼마든지 원하는 단백질을 유도하는 mRNA를 만들 수 있었지만, 동물실험은 번번이 실패했다. 해결책을 찾는 데 8년이 걸렸다. 2005년 RNA의 한 종류인 전달RNA(tRNA)를 이용해 면역반응을 회피하는 mRNA 합성법을 찾아낸 두 사람은 특허를 등록하고 논문을 썼다. 사이언스, 네이처 등 저명 학술지들은 연구 성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게재를 거부했다. 결국 ‘이뮤니티(면역)’에 발표한 논문조차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몇 년 뒤 스탠퍼드대 박사 후 연구원 데릭 로시가 이 논문을 읽고 사업을 구상했다.
모더나와 바이오엔테크의 목표는 mRNA로 암 면역 치료, 심혈관 및 대사 질환 치료제 같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단숨에 세계 바이오 시장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성과가 없자 바이오엔테크는 차선책으로 화이자와 인플루엔자 mRNA 백신 개발 파트너십을 맺었다. 가능성을 낮게 본 화이자는 연구비조차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몇 년 뒤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바꿨다. 펜데믹에서 mRNA 백신이 구세주로 떠올랐다. 모더나는 임상에 필요한 백신을 25일 만에 만들었다. ‘빛처럼 빠른 개발’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최소 4년이 걸리는 종전 방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은 “수십 년에 걸친 커리코의 집착이 백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코로나 백신 개발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이 억만장자가 됐지만 ‘백신의 어머니’ 소리를 듣게 된 커리코의 선택은 달랐다. 커리코는 지난해 바이오엔테크를 떠나 세게드대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mRNA로 모든 질병을 극복하는 것이 꿈이라는 이유였다. 커리코와 와이스먼의 mRNA 기술을 현재 의학·바이오 업계에서는 ‘게임 체인저’라 부른다. 내년에 mRNA 독감 백신이 등장하고, 암과 에이즈 백신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2일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대 노벨위원회는 커리코와 와이스먼을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뉴욕타임스는 “두 사람은 세계적으로 수십억 회 투여한 코로나 백신의 전례 없는 개발 속도를 이끌었고, 암과 같은 수많은 치명적 질병에 걸린 인류를 구하는 백신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했다. 커리코는 “2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가을마다 ‘네가 노벨상을 받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면서 “그때마다 ‘난 연구비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던 이민자이자 여성인 무명 과학자가 30년간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그만둬라’ ‘포기해라’였다. 커리코는 “’난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고 했다. 미련할 정도로 고집한 그의 신념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고, 앞으로 구하게 될까.
https://www.chosun.com/economy/science/2023/10/10/JVOZBWREYRDWTKJEBSQDK4YB6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