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박물관 주변에 핀 목화꽃입니다.
지난해에도 목화를 주변에 심었는데 보지 못하고 지나첬습니다.
올해는 유심히 보아왔습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금수품이던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들어와
진주에서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함께 3년 만에 목화재배에 성공했지요.
처음에는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을 줄 몰랐으나,
정천익이 호승(胡僧)·홍원(弘願)에게 씨를 빼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물레[繅絲車]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 이를 보급시켰습니다.
목화가 널리 전해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의복 재료가
종래의 삼베[痲布]에서 무명[綿布]으로 바뀌게 되었지요.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우왕 1) 전의주부(典儀注簿)에 임명되었으며,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전제(田制)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이성계파와 이색·우현보 등의 의견이 갈라졌는데,
이색 등과 함께 사전(私田) 혁파를 반대하다가 조준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게됩니다.
조선 태종 때 그의 공을 기려 참지의정부사·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사·강성군(江城君)을 추증하고,
두 아들을 사헌부감찰로 발탁했지요.
1440년(세종 22)에는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를 추증했고 충선공(忠宣公)이라 시호를 내렸습니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면화시배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곳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가 세워져 있지요.
목화의 전래와 재배, 가공 등에 대한 내용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실려 있습니다.
정순왕후 간택일화입니다.
1. 영조가 왕비를 잃고 계비를 맞이하는 중에 세 규수가 최후로 3간택이 되었다.
영조가 물었다.
"김한구의 딸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다른 처자는 저는 누구 딸입니다 하고 아버지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아서
내가 판단하기 좋게 하는데 말이다."
"저는 우리 아버지 딸입니다. 딸이 어찌 아버지를 깔고 앉겠습니까?"
"......"
영조는 이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이름이 수놓인 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닌가?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는 불효라는 말이다.
왕비가 안되어도 좋다. 효녀만 되면 된다.
효녀 이름이 밖에 크게 소문나지 아니하여도 딸로서 도리만 다 하면 된다.
왕비 이전에 딸노릇하는 딸이 되겠다는 말이다. 영조는 이것을 알고 묵묵히 있었다.
속으로는 갸륵하기도 하고 맹랑한 대답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2.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이 드는고?"
한 규수는 "대관령고개입니다."
다른 규수는 "추풍령고개입니다."라고 하는데
김한구 딸 김처자는 "보릿고개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보리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끼, 아니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리고개인데 김처자가 실로 넘기힘든 고개가 보리고개라고 하니 어렵게 살았나보다.
실제로 그 김규수는 어렵게 살았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충청도 서산 당진 홍성 쪽에서 가난하디 가난하게 살다가 살다가 못 살아서
서울에 가면 아는 사람 연줄로 좀 벼슬이나 살까 한 아버지 뜻을 따라
가마를 빌려타고 보모랑 같이 서울에 왔는데 도중에 노비와 숙식비가 없어서
갖은 봉변을 다 당하고 급기야는 벼슬을 살러가는 초행원님에게서 돈 좀 얻어
가죽옷도 얻어 입고 한겨울에 상경을 한 적이 얼마 전에 있었다.
그렇게 빈한한 김한구는 어찌어찌하여 벼슬을 살고 마침내 그의 딸이 이 간택에 뽑히게 된 것이다.
가난을 신물나게 겪어본 사람만이 보리고개가 가장 힘이 든 고개라고 할 것인데
바로 이 김처자가 그리 말을 한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의 국모인 왕후가 되려면 백성이 겪는 그 고통이라는 대명사인
보리고개를 알아야 할 것이다.
3. "음, 이번에 문제는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인고?"라고 하니
첫번째 간택 규수는 목련꽃이라고 하고 두번째 간택규수는 연꽃이라고 하는데
김처자는 "목화꽃입니다." 라고 하였다.
목화꽃이라? 이 꽃은 화사하고 예쁜 꽃은 결코 아니므로
일반 상식으로는 맞는 답이 아니라고 하겠는데,
그 꽃이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는 왕비라도 백성이 헐벗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왕은 마음에 들었다.
이리하여 경주 김씨 김한구 딸 김처자는 영조대왕 말년에 계비가 되었으니 정순왕후다.
貞純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745년{영조 21년} 경주(慶州) 김씨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한 뒤,
1759년{영조 35년} 15살의 나이에 당시 66세였던 영조의 계비(繼妃)로 가례를 올립니다.
정순왕후는 특히 사도세자(思悼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사도세자의 폐위(廢位), 아사(餓死)에 적극 동조했으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에서도 항상 벽파를 두둔해,
정조(正祖)를 이어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역시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첫댓글 고진감래 잘 체험한분이지만 결과적으로 목화꽃같이 온 백성을 포근하게 잘 감싸지 못한것같군요 인생은 역시 황혼기의 여유있는 햇살이 필요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