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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돌골, 성년식, 상사암, 송나라, 송림사
들돌골 지도
지도 上 <삼차>, <막차>라는 지명
산판 차량들이 드나들던 당시 명칭.
고목이 나뒹구는 등반로 따라 오르면 울창한 숲 속 평지.
뱀사골 산장과 야영장은 1978. 10. 8일 반야봉 산장터.
그 후, 개보수하여 지금은 80여 명 수용시설의 뱀사골 산장.
샘물은 풍부하지만 피서철 인파로 주변이 지저분한 것이 흠.
'산장에서 200m쯤 올라가면, 화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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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 온다.
지리산 반야봉의 반달곰이 포수의 화살에 맞았을 때
산신령 계시로 고로쇠를 마시고 나았다는 전설이 있다.
몸이 허약해진 변강쇠가 그 전설을 듣고 뱀사골에 찾아와
고로쇠를 마시고 회복했다고 한다. (고로쇠나무=단풍나무과)
고로쇠를 마시고 힘을 얻어 뱀사골을 내려와
들돌골에서 오백 근 들돌을 들었기에...' 들돌골.'
하여, 들돌골은 변강쇠 정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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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세계 제일인 분야는 정력제에 대한 맹신.
인구 비례로 <비아그라> 최대 소비국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 복용하고 혈압이 올라 죽는 사례도 무시못 할 정도.
정력제는 성욕을 증가시키고 발기력을 증강시키는 약.
의학용어 <애프로디시악> =<아프로디테를 받드는 제사>
미약(媚藥), 선약(仙藥), 영약(靈藥), 회춘약, 애정약
히포크라테스가 <성 = 쾌락> 이라고 정의한 후 최음약.
뱀이 정력제로 알려진 이유
성교 시간이 무척 길다는 것.
뱀술이 힘의 원천이라 믿는 이유는 뱀고기의 고단백질 탓
급성 신부전으로 사망 뉴스거리일 뿐 정작 효과는 없는 듯.
뱀탕 역시 정력제라지만 설사로 화장실만 들락날락 거릴 뿐.
고추잠자리도 정력제라 하지만
누에고치 번데기만 훨씬 못하다.
누에고치도 숫놈이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암수 구분이 불가하다.
녹용도 엄격히 말해 교미하지 않은 숫사슴의 뿔을 말하는 것이다.
건강한 장년층이 복용하면 부작용으로 피를 토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해구신은 원기보강에 좋다지만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부작용.
알래스카 에스키모인들은 한낮 쓰레기 취급을 했던 물건에 불과하다.
그 술을 마시고 오줌을 누면, 요강(盆)을 뒤집어 엎는다는 복분자 술.
그러나, 요강이 뒤집어지게 오줌 누는 경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발 비싼 돈 들여가며,
그런 것들 찾지 않았으면..'
성년식.
성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일깨워주고
자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
매년 5월 세 번째 월요일로 정해져 있다.
문헌 기록상 고려 광종 16년(965)첫 성인식.
세자 유()에게 원복(元服)을 입혔던 것이 시초
이조시대에 이르러 중류 이상 가정에서 보편화.
1975년 성년의 날 5월 6일로 지정(원래 성년의 날).
1985년부터 5월 셋째 월요일로 바꿔 성인식을 지정.
이날 대부분 직장 및 기관에서는 간단한 축하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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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스무살 들돌들기 성인식 풍습은 백제의 전통이다.
들돌골이 역사의 한 시점에 백제 영역이었음을 알려준다.
들돌 들기는 호남지역 논 농사권에서 만 볼 수 있는 풍습.
'대개 마을입구 정자 또는 당나무 아래 놓여있는 들돌.'
들돌의 모양은 타원이나 원형이며, 무게는 보통 세 단계.
곧 소돌, 중돌, 대돌로 나누어지며 특히 대돌은 <삼인력>
'머리 나이'라고 하며 일반 인부들의 두배 품삮을 받는다.
들돌들기는 정월에 거행하며 여천과 벌교에서 볼 수 있다.
여천 벌교는 18세가 되면 진쇠라는 성인 품앗이꾼으로 인정
정월이 아닌 7월 칠석날 들돌놀이로서 성인을 인정하는 의례
여기서 진쇠가 되면 진쇠술을 내고 마을사람들은 흥겨운 놀이
진쇠턱을 낸 사람만 품앗이에서 동등한 임금과 노동력을 인정
전라도 지역에서 진서를 내는 날은 '술멕이날'이라고 부를 정도
들돌골은 백제시대 들돌들기 성인식에서 비롯된 지명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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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례와 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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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례.>
관례(冠禮)는 소년이 처음 관을 쓰는 성인 의식.
소년에게 어른이 되었음을 인식시키는 의식이다.
자부(自負)와 책임(責任)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
관으로는 복건, 초립, 사모, 탕건 등의 모자
관례가 행해지기 전까지는 동자(童子)이지만
이 관례를 치르면 사회의 일원인 어른이 된다.
성인이 되면 권리가 부여되지만 책임도 따른다.
관례는 중국 영향을 받은 의식으로 고려 때 시작.
문헌상 광종(光宗) 16년에 왕자에게 원복례(元服禮)
관례를 받으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른
즉 생리적인 변화기, 대체로 15∼20세 사이 즈음.
그러나 이조 시대 이후 10살 전후에 관례를 행했다.
이는 조혼 풍습에 따라 관례도 빨리 치뤘던 것이다.
관례 순서는 초가(初加), 재가(再加), 삼가(三加).
초가는 쌍상투를 합해 쪽지고 망건에 관을 씌우고
삼규삼을 벗고 심의(深衣)를 입히는 순서로 치룬다.
재가는 초가에서 쓴 관건을 벗기고 사모를 씌우고
심의 대신 조삼에 가죽띠를 매고 계혜를 신게 한다.
삼가는 복두를 씌우고 난삼에 띠를 띠고 가죽신 착용.
삼가례는 격식에 따라 행하며 축사를 낭독.
"오늘 좋은 때를 맞아 관례를 행하니
오늘부터는 어린 뜻을 버리고 순조롭게
덕(德)을 이룩하여 오래도록 수(壽)하고
많은 복을 받으며 잘 살라."는 뜻의 내용.
관례날에 예복을 갖추고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그 마을 웃어른은 축사 후 자(字)를 지어 주는데
이때부터 남들이 자로 호칭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삼가례가 끝나면 사당에 가서 고(告)하고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관례절차는 끝.
그러나 부모가 상중이면 관례를 행하지 않는다.
<계례>
여자 나이 14세 이상이 되면 계례를 행한다.
계례란 비녀를 꽂는 의식이며 어머니가 주관.
주례는 친척 중 예법에 밝은 부인으로 정해서
주례가 비녀를 꽂아 주면 배자(背子)를 입는다.
배자는 소매 없는 친의(내의 같은 속옷)로서
색깔이 있는 비단이나 명주로 만든 속치마.
차례로 설 때 어머니가 주인의 자리에 선다.
이어 제사를 지내고 자(字)를 부르고 나면
사당에 데리고 가서 참배 후에 손님을 대접.
우리나라 관례의식은 중국 가례(家禮)에서 유래.
하지만, 신라시대 원화(源花)나 화랑제도가 있었고,
고려사에 광종, 예종, 의종 때 왕태자의 관례 기록
고려 왕실에서도 유교적 관례를 행하였다.
이조 사대부 가문에서는 예서를 따라 관례
1894년 갑오경장 단발령 이후 사라진 관례
택일은 남자 15세에서 20세 사이 관례.
정월 초하루 또는 4월이나 7월 초하루
초례(初禮) : 술을 마시는 의례.
관례자가 정해진 자리 남향으로 앉으면,
빈객이 관례자 앞에 나아가 축사를 한다.
관례자가 두 번 절하고 술잔을 받으면, 빈객이 답례.
관례자가 술잔을 상위에 놓았다가 이것을 다시 들고
물러나 맛본 다음, 찬자에게 주고 빈객에게 두 번 절
자관자례 : 관례자에게 자(字)를 지어주는 의례.
관례자는 자관자례 후 사당의 조상에게 알리고
고사(告辭)를 읽으면 관례자는 두 번 절을 한다.
그런 다음 친척들과 빈객에게 두 번을 절한 뒤,
선생과 아버지 친구들을 찾아뵙고 절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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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15~20세의 남자는 성인.
어른이 되었다는 표시로 상투를 틀어 갓을 씌우는 예식
어른 앞에서 술 마시는 예법을 배우는 초례를 치루었다.
어른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고 본명 외에 '자'를 지었다.
'자'는 성년이 되었음을 알리는 본명 이외 호칭을 말한다.
여자의 경우는 쪽을 쪄서 올리고 비녀를 꽂는 의식을 행했다.
우리 나라는 1985년 이후 5월 셋째 월요일이 '성년의 날'이다.
만 19세 이상의 청소년들을 성년으로 규정하고 행사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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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60일에 한번씩 전국민이 밤샘 풍습.
도를 닦으면 신선이 되어 영원히 죽지 않으며
자연을 사랑하라는 도교사상의 영향 때문이다.
노자, 장자에 의하면 60일에 한번 삼시충이 외출
삼시충은 곧장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를 만난다.
그리고 몸 주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고해바친다
옥황상제는 죄질에 따라 수명을 단축시킨다.
지은 죄에 따라서 최소 3일, 최고 300일까지
그래서 삼시충이 못빠져 나가도록 밤새 놀이.
중국 송나라에서 행해지던 풍속인데,
송나라와 무역이 성행했던 고려 풍습.
600년 가까이 행해졌던 고려시대 풍속
힘들게 일하는 머슴들에게 단하루의 휴가.
머슴들은 양반집 등에서 정말 힘들게 일했다.
명절에는 오히려 잡일이 더 많아서 고된 일과.
그나마 농사가 끝나는 겨울에는 좀 한가로웠다.
하여, 음력 2월 1일은 머슴이 쉬는 '삭일'
조정에서 농사준비를 하라고 당부하는 날이다.
사람들도 겨울 내내 쉬고나서 한해 농사를 준비.
주인은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해 배불리 먹이고,
머슴들에게 술을 듬뿍 줘서 취하도록 마시게 했다.
콩, 팥, 꿀, 대추, 미나리 중 하나를 넣은 흰송편
머슴이 자기 나이만큼 먹이고 어린 머슴은 성인식.
일부 지역은 머슴끼리 모여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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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중기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귀고리를 했다.
선조가 귀고리는 오랑캐 풍속이라며 금지령을 내렸다.
귀고리는 신라시대부터 유행했던 풍습이다.
경주 박물관에 옛 무덤에서 출토된 귀고리들
금, 은, 청동, 금동 중 금귀고리는 신라 귀족용.
남자 귀고리 중 가장 화려했던 화랑들의 귀고리.
화랑들은 15~18세의 귀족 자제 중에서 뽑았는데
그 무리끼리 경쟁하듯 얼굴에 분을 곱게 바르고
몸 단장후 화려한 옷과 모자를 쓰고 금은 귀고리
'그야말로, 여자처럼 예쁜 신라의 화랑들.'
그러나, 화랑의 성인식은 용감무쌍한 의식.
북한산 정상의 뜀바위를 건너뛰고 이름적기.
어지간한 담력으론 뛰어 넘을 수 없는 거리.
실수로 떨어지면 죽음을 면치 못할 높이.
그 성인식을 통과해야 만 화랑이 되었다.
화랑의 일당백 기백을 짐작케 하는 뜀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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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식은 세계각국의 나라마다 풍습이 다르다.
아프리카는 고통 극복의식을 통해 성인 여부를 결정.
하마르 족의 경우에 소년을 우클라(당나귀)라 부른다.
성인식 이전에는 '아직 사람이 아니다' 라는 의미이다.
이 종족은 성년식은 '발가벗고 4번 소 등을 뛰어넘기'
무사히 통과하면 축하받지만 소등에서 떨어지면 놀림감
또는 마을의 여자들로부터 채찍질을 받는 수모를 겪는다.
그런가 하면, 남태평양의 여러 섬에서는 '미혼자 가옥'
2~3년간 합숙생활 후 성인 모습으로 부족사회로 돌아온다.
<아마존 유역 티구나족> 소녀는 초경이 시작되면 성년식
남자 출입금지 헛간에서 1년간 어머니로부터 교육 받는다.
1년후 소녀는 위토 열매즙으로 검게 칠하고 깃털 관을 쓴다.
이때 헛간 앞에서 친척과 주민들이 소녀를 반갑게 맞아준다.
이 때부터 소녀는 성년식의 엄청난 고통을 참아야 한다.
처음에는 친척이 차례로 소녀의 머리카락을 뽑고 나중엔
마을 여자들이 돌아가며 소녀의 머리카락 전부를 뽑는다.
이 과정이 끝나면 사흘동안 소녀의 성년을 축하하는 잔치
잔치가 끝나면 소녀는 남자들 손에 이끌려 아마존강에 간다.
그곳에서 목욕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성년의식이 끝나게 된다.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는 성년식을 '마따따하' 라 한다.
소년 소녀 송곳니를 작은 망치로 치고 줄로 앞니처럼 연마
송곳니를 자르지 않으면 몸에 악마가 들어온다는 믿음 때문.
<남태평양 펜타코스트 섬 원주민>의 성년식은 목숨건 사투.
일정한 나이가 되면 발목에 포도넝쿨이나 칡뿌리 등을 감고
30m 높이의 탑에서 뛰어내려 땅위 1m 높이에서 멈춰야 한다.
이곳 성년식 통과의례가 뉴질랜드에서 요즘 번지점프로 발전.
<이스라엘>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에게 성지 중의 성지이다.
유대인 남자는 13세가 되면 통곡의 벽에서 바르미즈바 성년식
이때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까지 가족과 친지를 데리고 참석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3500년 전 민족의 뿌리와 역사를 들려주면
아들은 몇시간에 걸쳐 이를 암기해 유대 민족의 일원이 되는 것.
<유럽>은 법으로 정한 성년의 날이 없지만 만 18세가 성년
독일과 스위스는 정신연령을 측정해 18세부터 성년신고 허가.
성년신고를 마치면 20세 이전이라도 성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
<프랑스>는 15세 이상이면 성인의 길을 열어주고,
결혼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성인으로 대우를 받는다.
독일은 만 18세 생일에 가족이 함께 모여 성년을 축하.
<미국>은 매년 5월 셋째주 일요일 '시민의 날'
선거권을 갖는 성년에게 축하잔치를 베풀어왔다.
성년이 되는 나이가 주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의 주에서는 18세가 되는 해의 생일에 성년식.
친척을 초청해 축하하고 책임의식을 갖도록 가르친다.
<일본>은 1월 8일이 '성인의 날' 이며 국가 공휴일.
18세가 되면 기모노를 입고 사진관에 가서 기념사진
성년의 날 팔소매가 땅까지 끌리는 후리소데를 입고
화려한 허리띠, 머리장식 등으로 한껏 멋을 부린다.
부모들은 아들에게는 지갑을, 딸에게는 핸드백 선물
그 안에 재물운을 기원하는 뜻으로 1만엔이 있다.
일본은 미성년자들에게 술을 팔지 않는 규칙이 있다.
성인이 되면 술을 마실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다.
상사암.
우리나라에는 상사암에 관한 전설이 많다.
상사암은 상사병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
남녀 간의 사랑도 다정이 지나치면 병이 되듯
남녀 사이에 못잊어 그리움이 지나치면 상사병.
연병, 화풍병, 회심병 등으로도 불리우는 짝사랑
웃다가도 울고, 식사를 전폐하기도 하는.. '상사병'.
때로는 오한이 들다가도 후끈 달아올라 얼굴이 붉어지며
몸은 답답하고 권태로우며 식은 땀이 나거나 하혈도 한다.
이성을 지나치게 사모하여 '상사몽'을 꾸며
환상 속에서 성교하는 귀교(鬼交) 우울 증세
상사병 남자 혼이 상사뱀으로 환생하기도 한다.
'사모하던 여자 몸에 붙어다니는 상사뱀.'
남자 상사병에는 여자 음모를 태운 재가 약.
여자 속옷의 옥문이 접촉된 부분을 태운 재
또는 소녀의 자주빛을 띤 첫 월경을 먹는 것.
여자 상사병 약에는 오직 그 남성과 관계 뿐.
그 남성은 사정해서는 안되며 일주일이면 치료
또는 유황을 태워 음부에 그 김을 쏘이게 하며
동시에 녹각 분말을 1숫갈씩 하루 3회 복용하기 .
상사병 치유법은 가슴에 맺힌 그리움 풀어주기.
이 경우에는 그 대상과 의육체적인 사랑도 포함
당사자 간 직접 만나게 해주는 것이 최선책이다.
'상사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진 비방.'
첫사랑을 못잊었던 강화도령 철종 임금
황토방에서 요양하고 황토 은단을 복용.
상사병 원인은 애간장 타는 그리움과 못이룰 사랑이다.
기쁨, 성냄, 우울함, 그리움, 슬픔, 공포, 놀램 : 七情.
그리움이 지나치면 소화기 계통 비위가 손상된다는 한방.
상사병은 모든 감정과 감각을 한 사람에게 집착.
체력소모, 수척, 오한, 열병, 식은 땀 또는 하혈.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눈빛은 항상 허공을 맴돈다.
걸음도 헛딛고 방치하면 정신 이상으로 발전한다.
밤낮으로 애태우고 사모하며 상사몽(相思夢) 증세.
성적 불만족, 우울증 탓에 꿈이나 환상 속에서 몽정.
'여자 마음에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도 서리.'
여자 상사뱀은 없지만 이따금 능구렁이로 환생.
꿈 속에서 남자 온몸을 칭칭 감고 사랑을 호소.
봄이 오면 노곤해지는 춘곤증(春困症),
일명 ‘봄을 탄다’는 증상이 곧 상사병.
식욕부진과 나른함, 권태와 무기력 증후군.
춘곤증은 병은 아니지만
1개월 이상 지속되면 병
반드시 원인규명이 필요.
잎과 꽃이 같이 바라볼 수 없는 비운의 전설을 간직한 '상사화'.
선운사 숲 속은 난초같은 잎줄기를 갖고 있는 상사화의 자생지.
봄마다 얼마나 많은 상사병 혼들이 그 숲에서 꽃으로 환생할까?
.................상사화 전설........................
옛날 산골마을 처녀가 한 스님을 짝사랑했다.
그래서 매일 절에 찾아가 스님에게 사랑을 호소
끝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절마당에서 숨졌다.
그녀가 죽은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상사화.
상사화는 꽃필 때 잎 없이 꽃대만 올라와 핀다.
봄에 잎사귀만 자라다가 모두 녹아 사라진 다음
꽃대만 갑자기 솟아올라 꽃피는 것이 상사화 특징.
'꽃과 잎이 절대 만날 수 없기에 상사화.'
잎과 꽃이 평생 한번도 만나지 못해 일명 이별초
이처럼 상사화는 남녀의 애간장을 녹이는 화초이다.
하지만 이것을 먹으면 온몸에 독이 퍼지는 무서운 독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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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 우울증에 허덕이는 황혼기 늦가을 바람기.
20/30대 이성 매력에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늪.
남성 체취를 깊이 느끼고 탐하는 40대 여인의 방황
'상사화 독초와 같은 못이룰 사랑의 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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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상징.
그 아래 뱀사골은 뱀에 관한 전설이 많다.
뱀은 상사병 전설에 약방 감초와 같은 존재
이조시대 결혼 풍습은 거의 대부분 중매 결혼.
우리나라 역사 상 연애 결혼한 사례는 드물다.
하여, 상사병을 앓는 청춘 남녀가 무척 많았다.
한마을에 살았던 소꼽친구..'갈돌이와 갑순이'
둘이 사랑하면서도 서로 전하지 못했던 속마음.
겉으로는 안그런척 모른척 고까짓껏 했기 때문.
황진이를 흠모하다 죽음에 이르렀던 마을 총각.
결국, 상사병으로 죽자 그후 기생이 된 황진이.
하여, 우리나라에는 상사병에 관한 전설이 많다.
특히, 지리산 일대는 삼한시대부터 접경지.
전란이 잦아 이룰 수 없는 사랑도 많았던 듯.
하여, 우리나라 상사병에 관한 전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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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에 얽힌 상사병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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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산과 들에 파릇파릇 솟아 입맛을 사로잡는 쑥부쟁이 나물.
'쑥부쟁이'는 12 자식을 쑥쑥 낳은 부장이(불쟁이 =대장장이)의 큰딸
그녀가 꽃으로 환생했다는 '쑥부쟁이'에는 상사병에 관한 전설이 있다.
옛날 옛적 아주 깊은 산골에 가난한 대장장이 가족이 살고 있었다.
가난한 대장장이 아버지와 병든 어머니, 11 동생과 함께 살던 큰 딸.
큰 딸도 나물을 캐어 죽쑤고 장에 내다 팔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서 쑥을 캐고 있는데 상처를 입고 쫓기는 노루.
그녀는 쫓기던 노루를 숨겨 주고 다친 상처까지 치료해 보내 주었다.
그후 그녀는 멧돼지를 잡으려 파 놓은 함정에 빠진 사냥꾼을 만났다.
그 사냥꾼은 아주 잘생기고 씩씩한 청년이었다.
첫눈에 반한 그녀는 그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청년은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났다.
한해가 가고 두해 가을이 지났지만 소식 없는 청년.
그녀는 그리움을 견딜 수 없었기에 산신령에게 치성.
마침내, 몇 년 전 목숨을 구해 주었던 노루가 나타났다.
'보랏빛 주머니에 담긴 노란 구슬 세 개.'
"구슬을 입에 물고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질 것 입니다."
노루는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구슬을 주고 사라진다.
그녀는 그 노루가 산신령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첫 번째 구슬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데 썼다.
두번째 구슬은 그 청년을 만나 함께 사는 소원을 빌었다.
그런데, 그 청년을 만나보니 이미 결혼해 처자식이 있는 몸.
이미 결혼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있는 사냥꾼.
원망스러웠지만, 아버지가 없을 아이들이 불쌍했다.
셋째 구슬은 사냥꾼을 가족에게 돌려 보내는데 썼다.
그녀는 사냥꾼을 보내고도 못내 그리워하다가 죽고 만다.
그녀가 떨어져 숨진 절벽 아래 노란 구슬 셋을 품은 보라 꽃.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쑥을 캐는 불쟁이의 딸'이라 불렀다.
하여, 그 줄임말 '쑥부쟁이'는 봄처녀 가슴 속 '설레임의 상징'.
'보랏빛 주머니 같은 꽃잎과 구슬 세 개를 닮은 노란 꽃술'.
죽어서도 배고픈 동생들을 위해, 쑥으로 다시 환생한 그녀.
아직도, 쑥은 봄바람이 불면 까닭 모르게 女心을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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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병(相思病)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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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송(宋)나라는 강왕의 포악으로 인해 망했다.
강왕은 송나라 영토를 확장한 인물이라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교만한 강왕은 후궁을 많이 거느리고도 부하인 한빙의 아내를 탐냈다.
하여 그녀를 강제로 데려와 후궁으로 삼고 남편 한빙은 변방으로 보냈다.
한빙은 낮에 변방을 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는 고된 일을 했다.
강왕의 후궁이 된 하씨는 강왕 몰래 남편 한빙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찌할 길이 없지만
만날 수 없으니 죽고 말 것을 하늘에 맹세합니다."
그후 한빙은 죽어서라도 아내와 만나려 자살했다.
그 아내 하씨도 산책하다가 성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녀를 감시하던 왕의 신하들이 급히 옷소매를 잡았다.
그러나, 그 옷소매만 찢어져 끊어지고 하씨는 떨어졌다.
그녀는 옷소매를 잡아도 찢어지게 미리 준비를 한 탓이다.
그리고 그녀 옷소매에는 강왕에게 남긴 유언이 적혀 있었다.
"임금은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만
저는 죽는 것을 다행으로 알고 갑니다.
부디 제 시신을 남편 곁에 묻어 주십시오."
강왕은 화가 나 부부의 무덤을 따로 떨어뜨려 만든다.
그러나, 밤 사이에 두 무덤에서 각각 큰나무가 자라났다.
두 아름드리 나무는 뿌리가 서로 얽히고 가지가 맞닿았다.
그리고, 나무 위에서 한 쌍의 새가 서로 목을 안고 울었다.
너무 애처롭고 다정해 사람들은 한빙 부부의 넋이라 여겼다.
하여, 부부 금실이 좋은 나무 위에 새 한쌍을 원앙새라 불렀다.
'원앙새의 원(鴛)은 암컷, 앙(鴦)은 수컷.'
훗날, 사람들은 그 나무를 상사수라고 했다.
하여, 상사병(相思病)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相 : 서로 상.> <思 : 생각 사.> <病 : 병들 병>
남녀 사이에 서로 몹시 그리워하다 생기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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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장승포 상사암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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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포를 감싼 옥녀봉이 능포 앞 바다에서 우뚝 서 멈춘 곳.
부산 가는 뱃길따라 장승포를 벗어나면 배처럼 생긴 상사암
그곳에 부딪쳐 철썩거리는 파도소리와 물보라 속에 핀 무지개.
지금부터 400 년전 이조 중기에 이곳으로 유배된 이상서.
무남독녀 국화와 머슴 삼돌이 셋이서 능포 어구에 살았다.
국화는 일곱 살에 천자문을 떼고 열 다섯에 사서를 배웠다.
국화는 보름달처럼 아름다워 삼돌이는 마음만 애태웠다.
국화의 마음속엔 어릴 때 정혼을 약속한 김판서의 아들 뿐.
마음을 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이 파고드는 연민의 정
삼돌이는 식음을 전폐하고 상사병으로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할 바에는 죽어서라도 이루고 싶은 사랑.
삼돌이가 가여워 국화는 죽 한그릇을 끓여 삼돌이에게 먹인다.
국화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 죽을 받아 먹다가 숨진 삼돌이.
사흘째 되는 날 밤, 국화가 잠에서 깨어보니 몸을 감고 있는 실뱀
국화와 아버지 이상서가 뱀을 떼어놓으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삼돌이의 혼이 상사뱀이 되었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했다.
굿 하고 온갖 비방을 써도 국화의 몸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뱀.
깊은 밤이면 삼돌이로 변해 국화를 안고 멀리멀리 날아가는 뱀.
'무지개를 밟고 하늘을 나르 듯, 땅이 꺼져 내리 듯.'
국화는 삼돌이를 끌어 안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마침내 힘이 지쳐 아득한 천길 낭떨어지로 날아가는 꿈.
국화는 비몽사몽을 헤매다가 절벽 아래로 발을 헛딛는다.
그순간 국화는 무지개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갔다.
그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 절벽을 상사암이라 불렀다.
혼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부부 사이가 좋지 못할 때
이 곳에서 고사를 지내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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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상사암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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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금오산(남산) 정상 서쪽 아래로 깎아지른 듯한 벼랑.
그 상사암(相思巖) 왼쪽에 한눈에 들어오는 상선암 마애불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상사암은 금오산에 있다.
그 크기가 1백여 아름이고 가파르게 솟아 오르기가 어렵다.
상사병에 효험 있고 산아당은 마치 아기를 낳는 모습과 같다.
신라 때 자식 얻으려 복을 빌던 곳으로 가위질한 흔적이 있다.”
상선암 쪽으로 길따라 돌면, 정말 가위질 하는 듯한 바위.
오른쪽 바위 안에 산신당(産神堂)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뒤엉킨 남근과·여근석이 몸을 뒤틀어 경주시내를 내려다본다.
여기에는 옛날부터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국사곡 어귀에 홀로 외롭게 사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보면 손자를 보는 듯 귀여워 했다.
그 중 이웃집 소녀를 귀여워 했고 소녀도 할아버지를 따랐다.
할아버지가 80세를 넘었을 때 피리도 어느덧 꽃다운 처녀.
항상 할아버지를 잘 보살펴드리던 피리는 어느날 이사갔다.
그후 할아버지는 자신이 피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닳았다.
'자식처럼 여겼던 피리의 환상에 잠못이루는 밤.'
낙엽처럼 질 몸이 꽃봉우리같은 피리를 사랑하다니 안될 일.
할아버지는 국사봉 정상에 올라 나무에 목을 메어 자살했다.
그후 할아버지는 피리가 사는 마을을 바라다보는 바위로 환생.
'생전에 먼발치에서 피리를 향한 그리움만 달래던 곳.'
할아버지가 죽은 후 피리는 밤마다 뱀에게 시달리는 꿈.
죽은 할아버지 혼이 상사뱀이 되었다고 동네에서 쑥떡댄다.
피리는 뒤늦게 할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아 죽어 버렸는데
죽어서도 다시 또 피리를 괴롭히는 나를 용서해다오.
살았을 땐 죽을 길도 있더니 이제는 죽을 길도 없구나."
간밤 꿈속의 할아버지가 측은해 피리는 목이 메었다.
먼발치에서 자기만 바라보다가 외롭게 자살한 할아버지.
피리만 생각하다가 죽고나서도 미안해하는 할아버지 마음.
'가슴 터질 듯 목 메이게 불러도 대답이 없는 할아버지.'
피리는 할아버지를 뒤따라 그 바위에 올라 떨어져 죽고 만다.
피리의 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옆에 나란히 선다.
그곳 큰 바위에 붉게 박혀있는 반점은 피리가 죽을 때의 피자국.
'생전에 못다한 사랑을 나누듯 뜨겁게 뒤엉킨 바위.'
하여, 두 사람은 죽은 후 돌이 되어 사랑을 이루게 된다.
이곳 상사바위에 소원을 빌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전해온다.
지금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덧 말.
상사병, 상사암 어원은 송나라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양자강 하류 산동반도 백제 왜는 옛 부여.
오늘날 나라 이름은 각각 달라도 민족 뿌리는 하나.
하여, 옛부터 같은 민족끼리 해상무역이 성행.
특히, 고려 시대에 송나라와 해상무역이 활발
그당시 한반도에도 상사병 상사암 전설이 성행.
하여, 상사암 전설들은 고려 때 전설인듯.
이조시대 들어와서부터는 대중화된 상사병.
상사병 시대적 배경 중국 송나라로 가보자.
송나라.
花開不同賞 화개부동상
花落不同悲 화락부동비
借問想思處 차문상사처
花開花落時 화개화락시
꽃이 피어도 같이 바라볼 수 없고
꽃이 져도 같이 슬퍼할 수 없나니
그리운 그대에게 물어보려 하노니
꽃피고 꽃질 때 누굴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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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여류시인이자 기생의 시.
상사병이란 송나라에서 유래된 말.
송나라는 고려와 중요한 교역 국가.
1.북송(北宋, 960 ~ 1127)
중앙집권체제 강화로 분열을 막아보려던 송나라
960년에 건립되었고, 1279년 원나라에 의해 멸망.
이 기간 중 금나라로 두 황제가 포로로 잡혀간다.
1127년을 기점으로 전후 두 시기로 나뉜다.
1127년 이전이 북송, 그 후부터는 남송 시대.
송나라는 오대십국의 분열을 종식시킨 통일왕국.
북송시대는 황제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
이 시기 북송의 사회와 경제는 발전을 이룩한다.
'또한 북송문화 역시 전성기를 맞이.'
학술상 이학(理學)은 유학을 철학으로 발전시켰으며,
사(詞)는 독특한 품격을 구비, 일절(一絶)이라 칭했다.
고문(古文) 통속문학, 희극, 설창, 예술도 급속히 발전.
인쇄술, 화약, 나침반 등의 중국 3대 발명품
북송 시대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상징.
공명정대한 판관 포청천(999~1062)이 활약한 시기.
북송은, 중앙집권 강화조치 역효과로 국력은 쇠퇴
이에 북송 시대 후기에는 왕안석(王安石)이 법 개정
국력 강화를 시도하였으나,
결실을 보기는 커녕 도리어
당파싸움이라는 화근을 초래.
또한 이로서 통치계급 내부 모순은
이미 타협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른다.
그리하여, 서기 1127년, 내우외환에 직면한 북송
결국 황제들이 금나라로 끌려간 '정강의 치욕’을 초래
2. 남송(南宋, 1127 ~1279)]
평화를 돈으로 사려다가 멸망한 남송
북송 멸망 후 1개월 뒤 조구가 황제에 즉위
송나라를 중건하니, 이로써 남송 시대가 시작.
남송은 건립 초기부터 금나라와 대치했으나,
남송 통치자는 안정과 평화만 추구하는 정책.
이강, 종택(宗澤), 한세충(韓世忠),악비(岳飛) 등
일부 장수들이 용맹하게 금나라와 싸워 승리했어도,
남송은 1141년에 금나라와 ‘소흥화의(紹興和議) 조인.
매년 엄청난 액수의 조공을 금나라에 받친 남송.
이후 송나라와 금나라 양국은
동쪽으로는 회수(淮水)를 경계,
서쪽으로 대산관(大散關)을 경계
상대적으로 안정된 대치국면을 형성.
하지만 결국 남송 말기에 이르러
간신들이 계속 정권을 잡으면서
조정에는 칠흙같은 암흑이 드리웠고,
이때 징기스칸이 건립한 몽골제국 철기군
빠르게 강대해져 서하와 금을 멸망시켰다.
1271년, 쿠빌라이는 국호를 몽골에서 대원(大元)
남송과 대규모 전쟁을 벌려와 1279년 남송은 패망.
더 이상 달아날 길이 없게 된 남송 정권
결국 육수부(陸秀夫)가 어린 황제를 안고
바다에 투신자살 함으로써 멸망을 고했다.
남송이 강남으로 물러나자
정치 사회 등 모든 방면에서
북송의 수많은 특징들을 계승.
정치제도에서 완벽한 중앙집권제를 수립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 남부지역의 경제는 전에 없이 번성
방직업 조선업이 매우 발달한다.
도자기 제조, 제지업, 인쇄업 등
북송시대 수준을 뛰어넘었을 정도.
송림사.
지리산 뱀사골 입구에 있는 반선 전적 기념관.
옛 송림사 터로 송림사는 뱀사골 전설의 고향.
지금은 사라진 옛 사찰로 전설만 전해 내려온다.
송림사(松林寺)는 통일신라시대 말기 사찰.
현재, 경북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송림사.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세워진 사찰인듯.
대한불교 조계종 제9 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
통일신라 진흥왕 때 진나라 사신이 명관대사와 함께
갖고온 불경 2,700권과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사찰.
'이때 호국안민(護國安民)을 위해 세운 기원보탑.'
1092년(선종 9)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수하고,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 당시 전탑만 남고 폐허화.
그뒤 중창했으나 1597년(선조 30)에 왜병들의 방화
1858년(철종 9) 영추(永樞)가 중창하여 현재 모습.
대웅전 앞의 5층전탑은 보물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1959년 탑을 해체·수리할 때 많은 유물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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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 5층 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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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전탑. 보물 제189호. 높이 16.13m,
토축(土築) 단층 기단폭 7.3m 위에 세운 전탑
통일신라시대 탑 가운데 유일하게 금동상륜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의 수법과 같다.
현재 상륜부는 1959년 해체보수 공사 때 원형 모조품
1층 옥신 남면에 감실이 개설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가운데 높이 7.㎝, 입지름 8.7㎝ 녹색 유리잔을 안치,
그 안에 높이 6.3㎝, 입지름 3.1㎝ 녹색 사리병을 안치.
녹색 유리 사리잔 표면에는 12개 둥근 고리 모양의 장식
3층 옥개부 뚜껑없는 석궤에서 목개(木蓋)와 종이 조각
5층 옥개석 위 복발에서 청자상감원형합과 금동원륜 2개
이 원형합은 고려시대 윗부분이 수리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외 구슬 281개, 은환(銀環) 15개,
향목(香木) 7편, 열매 1개가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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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사는 고려 시대에도 융성했던 사찰인 듯.
이조 시대에도 융성했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
뱀사골 전설의 고향인 곳이라 복원되어야 할듯.
'전설의 고향'이 사라진 전설의 가치.
과연, 무형문화제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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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선 전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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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선 매표소를 지나 각종 상가건물을 지나 다리 건너 우측
<전적기념관>은 뱀사골과 심원계곡이 만나는 옛 송림사 터.
이곳이 '뱀사골 전설' 배경 무대이자 산실인 사찰 송림사터.
뱀사골 '전설의 고향'인 곳에 전적기념관을 세운 점이 아쉽다.
'송림사 터'만 보존했어도 무형문화제의 가치로 충분한 곳이다.
'빈 터'로만 보존하면, 언젠가 후세에 복원할 희망이 남기 때문.
1979년 11월 23일 건설부와 국방부가 2억원의 예산으로 건립.
제 1 전시실에는 토벌군과 빨치산의 장비 물품 사진 자료 전시.
제 2 전시실에는 6.25에 관한 전적자료 전시 및 반공교육의 장소.
과거에 뱀사골과 반야봉, 심원계곡 일원은 빨치산 근거지
'여순사건 주모자' 김지회, 홍순석을 1949. 4. 9일 사살한 곳.
안타까운 점은 토벌군과 남부군 측의 유물로만 가득 채운 점.
이젠 객관적인 민족 역사관으로 새롭게 정리되어야만 할 시기.
비운에 숨져간 토벌군, 남부군은 물론 양민들의 억울한 죽음들.
이제는 서로 진혼할 수 있는 화합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할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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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분단의 역사를 다룬 소설 태백산맥
우리나라는 해방과 분단을 동시에 맞아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
4.3항쟁과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 10월 및 1950년 6.25 전쟁
휴전이 조인되어 분단이 고착화된 1953년 10월까지사 시대적 배경.
6.25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해 이념의 금기까지 파고든 소설.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민족 분단의 아픔을 문학으로서 승화
민족 분단의 비극에 대해 윤리적 판단이 깊이 깔려 있는 소설.
<전적 기념관>에 대한 설명을 소설 태백산맥 줄거리로 대신한다.
..............소설 태백산맥 줄거리.............................
1948년 10월, 여순 반란사건과 함께
좌익에 의해 점령된 벌교를 다시 진압
벌교가 군경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좌익 군당 위원장 염상진은
하대치, 안창민 등과 산 속으로 퇴각.
비밀당원으로 상부의 밀명을 받고
벌교로 잠입하게 되는 정하섭은
마을 외딴 곳에 사는 무당딸
소화를 이용하다가 사랑.
한편, 염상진 동생 염상구가
감찰부장으로 있는 청년단은
좌익세력을 처단하는 데 앞장,
형 염상진과는 반대의 사상을 지닌 염상구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을 겁탈한다.
무고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는 것을
보다못한 벌교의 유지 김범우는
수습위원회 대표 최익승에게
희생을 줄이도록 호소하지만
오히려 빨갱이로 몰린다.
이승만 정권이 농지개혁을 하지 못하자
농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지고,
이 과정에서 소작인 강동기는
지주를 삽으로 내리찍고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반면, 지주 서민영은 자기 논을 소작인들과 공유,
국군 벌교지구 사령관 심재모 로 하여금
모든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한다.
1950년 6·25의 발발과 함께
벌교는 염상진에게 장악되고,
좌익 세력들은 인민의 해방을
감격스럽게 맞이하지만
또다시 살육의 참상.
이 과정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김범우와 손승호
빨치산의 길을 택하게 되지만, 김범우는 미군에게 붙들려
강제로 통역관이 되어 미군들의 부도덕한 행태를 목격한다.
6·25전쟁은 유엔군의 참전과
중국의 개입으로 교착 상태이고,
전선은 38선에서 대치 상태가 지속.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세력이
지리산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 투쟁
군경 진압에 따라 이들의 투쟁은 점차 무력
염상진은 퇴로가 막히자
부하들과 수류탄으로 자폭.
그리고 그의 목이 벌교 읍내에 내걸린다.
염상진이 염원했던 ‘인민해방’은 실패,
염상진을 추종했던 하대치 등이 살아남아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새로운 투쟁을 결의
그리고나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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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전시된 낡은 마대자루는 남부군이 사용한 침낭.
6.25 동란을 전후해 구호품 밀가루를 담았던 마포자루,
그안에 조릿대 잎을 담아 한겨울에 침낭으로 쓴 남부군.
'겨울에 마대자루 침낭 안은 얼마나 추웠을까?'
토벌군에게 발자국 남기지 않으려 맨발로 개울 걷기.
반란군의 신출귀몰함 뒤에 뒤따랐던 엄동설환의 고통.
그들은 사상적인 이념보다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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