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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天理)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면 [天理之所不容泯者]
“천하의 일이란 전일에 폐지되었다가 뒷날에 거행되는 경우도 있으며, 한때는 굴하였으나 만세(萬世)에 펼쳐지는 경우도 있으니, 그 일의 옳으냐 그르냐의 여부만을 살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정(人情)에 편안하지 못한 것이라면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되며, 천리(天理)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면 조종(祖宗)이 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여 어렵게 여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한 사리이며 역대의 공통된 논리입니다. ( 天下之事, 固有廢於前, 而擧於後者, 亦有屈於一時, 而伸於萬世者, 特視其事之是非當否而已。 是故人情之所不能安者, 則不可以事在久遠, 而有所廢沮, 天理之所不容泯者, 則不可以祖宗之所未行, 而有所持難。 此事理之明甚, 歷代之通誼也。)”
위의 글은 1669년(현종10년) 2월5일 죽서 이민적(李敏迪)선생 등의 상차문(上箚文)에 나오는 말씀으로, 천리(天理)에 부합하는 일이라면 비록 사정이 여의치 못해 늦어질지라도 반드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 죽서 이민적 선생 등의 상차문 전문 *************************
현종(顯宗)10년 2월5일 부제학 이민적 등이 신덕 왕후를 태묘에 배향하자고 상차하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기를,
“천하의 일이란 전일에 폐지되었다가 뒷날에 거행되는 경우도 있으며, 한때는 굴하였으나 만세에 펼쳐지는 경우도 있으니, 그 일의 옳으냐 그르냐의 여부만을 살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정에 편안하지 못한 것이라면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되며, 천리(天理)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면 조종(祖宗)이 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여 어렵게 여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한 사리이며 역대의 공통된 논리입니다.
이번 신덕 왕후(神德王后) 능묘에 관한 논의로 대신이 이미 그 단서를 발론하였으므로 성명께서도 그 말에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원릉(園陵)의 제도와 관리의 설치 및 사물의 비치를 여러 능묘에 견주케 하니, 성인의 넓으신 효성을 누구인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삼가 듣건대 경연에서 성상께서 종묘 제사에 관한 절차를 아직도 어렵게 여기는 뜻을 보이셨다 합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신덕황후는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별세한 후 성조(聖祖)께서 건국할 때 천자(天子)의 고명(誥命)을 받고 일국의 국모(國母)가 되어 중곤(中壼)의 위에 있은 지 10여 년이 되었고, 지금 선유 이색(李穡)이 찬한 정릉비(定陵碑)를 상고하면 역시 ‘먼저 모씨에게 장가들고 후에 모씨에게 장가들었다.’ 하였고 원(元)과 차(次)의 분별이 없으며, 권근(權近)이 찬한 흥천사비(興天寺碑)에도 역시 봉함을 받아 곤위에 있었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용비어천가》는 세종조에 만들어진 것인데도 역시 신덕 왕후라고 쓰여져 있으니, 위호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이것이 또한 분명한 증거인데 어찌 다시 증거를 상고한 후에야 안다고 하겠습니까. 승하한 후에 존호와 시호를 올리는 일을 예관(禮官)에서 폐지하지 않았고 제사를 모시던 의식과 축판이 아직도 향실(香室)에 있으며, 태종 대왕이 친히 향축(香祝)을 전하였으니, 그 위호와 축식의 존융함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으며, 원릉 석물(石物)의 설비 역시 극히 높혀 받들었습니다.
살아서는 정비(正妃)가 되었고 죽어서는 존호를 받았으며, 중국으로부터 고명을 받아 성조와 짝하였는데 유독 태묘(太廟)에 배향되지 못한다면 어찌 인정에 거역되고 천리에 괴리되어서 성조의 궐전(闕典)이 되고 천고의 유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선조조 신사 연간에 대신과 삼사가 역시 건의하였으나 욕예(縟禮)를 거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언젠가는 거행해야 할 일이니, 이는 실로 오늘날 성조의 책임인 것입니다.
소릉(昭陵)의 복위 문제는 여러 조정을 지나 중조 때 비로소 거행하였으니, 조종이 거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하여 일찍이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며, 또한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고사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한·당 이래로 송 나라의 가법(家法)이 가장 순정(純正)하다고 하는데 원우 황후(元祐皇后)의 복호는 정자(程子)도 옳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신덕 왕후는 존호를 고치지 않았고 정릉의 의물(儀物)도 아직까지 왕후의 법제로 되어 있으니, 소릉의 개봉(改封)이나 원우의 복위처럼 중대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빠뜨린 전례를 소급하여 거행하고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세하게 정문(情文)을 마련하면 될 뿐입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천리에 합하고 인정에 순응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의 전례에 관계됨이 매우 중한데다 논의가 이미 발단되어 여론을 막기가 어려우니 의리로 헤아려 결단하여 행하소서.”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출처 :【원전】 조선왕조실록 36집 612면
○副提學李敏迪等上箚曰:
天下之事, 固有廢於前, 而擧於後者, 亦有屈於一時, 而伸於萬世者, 特視其事之是非當否而已。 是故人情之所不能安者, 則不可以事在久遠, 而有所廢沮, 天理之所不容泯者, 則不可以祖宗之所未行, 而有所持難。 此事理之明甚, 歷代之通誼也。 今者神德王后陵廟之議, 大臣已發其端, 而聖明亦且有感於其言矣。 園陵之制, 置官備物, 將比諸陵, 聖人廣孝, 孰不欽仰。 但伏聞筵中, 聖上以廟祀一節, 尙有持難之意。 臣等伏念神德王后當神懿王后上賓之後, 値聖祖化家爲國之日, 受天子之誥命, 崇一國之母儀, 正位中壼, 積有年紀, 今以先儒李穡所撰定陵碑考之, 亦曰先娶某氏, 後娶某氏, 非有元次之別, 而權近所撰《興天寺碑》, 亦可見其受封正位之實狀矣。 且《龍飛御天歌》, 成於世宗朝, 而亦書以神德王后, 則位號之未替, 此又明驗, 豈待更有考據, 而後可知哉? 至於昇遐之後, 上號獻諡, 不廢於禮官, 享祀儀祝, 猶存於香室, 太宗大王親傳香祝, 其位號祝式之尊隆, 到今不替, 園陵石物之備設, 亦極崇奉。 生爲正妃, 沒膺尊號, 受命於中朝, 配體於聖祖, 則獨不配食於太廟者, 豈非拂於人情、乖於天理, 而爲聖朝之闕典, 千古之遺恨也。 宣廟朝辛巳年間, 大臣三司, 亦且建請, 而縟禮未擧, 事固有待, 此誠聖朝今日之責也。 昭陵之復, 經歷累朝, 始行於中廟之世, 則未嘗以祖宗之所未行, 而持難也。 又未嘗以事在久遠, 而廢沮也。 雖以故事言之, 漢、唐以來, 宋氏家法, 最稱純正, 而元祐皇后之復號, 程子是之。 況今神德王后尊號未替, 貞陵儀物, 尙存王章, 非如昭陵之改封、元祐之復位, 爲重且難也。 只是追擧闕典, 更進一節, 備極情文而已。 如此然後方可合於天理, 順於人情矣。 國家典禮, 關係至重, 論議已發, 群情難遏, 不可不揆度義理, 斷以行之也。上不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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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적(李敏迪) ***
【생몰년】 1625(인조 3)∼1673(현종 14)
【본 관】 전주(완산) 이(李)
【자·호】 혜중(惠仲), 죽서(竹西)
【저서·작품】 《죽서집(竹西集)》, 〈옥당조진시폐차(玉堂條陳時弊箚)〉
【시 대】 조선 중기【성 격】 문신
1625(인조 3)∼1673(현종 1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혜중(惠仲), 호는 죽서(竹西)이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아들로서 후에 작은아버지 이정여(李正輿)에게 입양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 24년(1646) 진사가 되었고 효종 7년(1656)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언 · 교리 · 암행어사 · 관찰사 · 대사성을 거쳐 현종 12년(1671) 한성부 우윤이 되었고 이어서 도승지 · 이조 참판 · 호조 참판·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윤문거(尹文擧)의 문인으로 사간과 응교로 있을 때 국사논의에 참여함에 언사(言辭)가 쟁쟁하였으며, 현종이 그의 문학적 소질이 탁월함을 알고 측근에서 보필하게 하였다. 그는 특히 정치 · 경제에 관한 많은 소차(疏箚)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옥당조진시폐차(玉堂條陳時弊箚)〉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전라남도 진도(珍島)의 봉암사(鳳巖祠)에 봉안되었으며 저서로는 《죽서집(竹西集)》 4권이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陶谷集, 竹西集
이민적[李敏迪] 자 혜중(惠仲), 호 죽서(竹西)
이민적은 조선 후기 암행어사, 관찰사, 한성부우윤,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간원(諫院)으로서 정치‧경제‧군사 등 국가의 모순된 제도를 지적하였고, 암행어사나 관찰사로 파견되어 지방관들의 폐해와 지방 운영의 폐단을 보고하는 등 국정 전반에 관한 다양한 소차(疏箚)를 남겼다.
조선 후기 암행어사, 관찰사, 한성부우윤,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민적(李敏迪)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혜중(惠仲), 호는 죽서(竹西)이다. 이극강(李克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유록(李綏祿), 아버지는 영의정 이경여(李敬輿), 어머니 풍천임씨(豊川任氏)는 별좌(別坐) 임경신(任景莘)의 딸이다. 후에 숙부인 이정여(李正輿)에게 입양되었다. 황일호(黃一皓)의 딸과 혼인하여 이사명(李師命), 이이명(李頤命) 등 4남 2녀를 두었다. 윤문거(尹文擧)의 문인이며, 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하였다.
1656년(효종 7)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예조좌랑(禮曹佐郎) · 지평(持平) · 이조좌랑(吏曹佐郎) · 암행어사 · 관찰사 · 호조참의(戶曹參議)‧대사성을 거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 도승지 · 이조참판 · 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특히, 간원(諫院)으로서 정치 ‧ 경제 ‧ 군사 등 국정 전반에 관한 많은 언사와 소차(疏箚)를 남겼다.
1657년(효종 8) 지평(持平)으로 있으면서 대사헌 채유후(蔡裕後), 장령 오두인(吳斗寅) 등과 함께 노비의 속량(贖良), 기근에 구제책 시행, 형벌의 완화, 간언(簡言) 채용 등에 대해 아뢰었으며, 실덕(失德)을 닦아 재변을 해소하도록 촉구하거나 서원(西苑)의 공사를 중지하는 요청을 하였다. 1660년(현종 1)에는 홍주삼(洪柱三) 등과 함께 관원의 기강 강화, 경연의 시행, 진신(搢紳)에 대한 형벌 완화 등을 건의하였고, 이듬해 송시열이 떠나는 것을 만류하도록 상소하였다.
한편, 호서(湖西) 지방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현감과 군수에게 상벌을 요청하였고, 제궁가(諸宮家) 및 관청에서 점유한 시장(柴場)‧토전(土田)‧위전(位田)‧면세전(免稅田) 등의 폐단을 아뢰었으며, 공사(公私) 간의 어염(魚塩)을 혁파하여 군국(軍國)의 비용을 보충하자는 차자를 올리기도 하였다.
1663년(현종 4) 응교(應敎)로서 국왕의 실정(失政)을 지적하고, 국가의 병폐, 백성의 휴척(休戚), 언로의 개방 등을 논의하였으며, 부제학이 되어 수성(守城)의 도리, 궁금(宮禁)의 엄숙, 군사의 증가, 양전(量田)의 중지 등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1672년(현종 13) 허적(許積)을 비판한 송준길(宋浚吉)과 이상(李翔)을 변호하였다가 현종의 미움을 사서 인동부사(仁同府使)로 좌천되었고, 부임을 지체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받아 폐고(廢錮)되었다가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상소문을 짓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 효종과 송시열(宋時烈)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재주와 명망 등 모든 면에서 인정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특별히 미곡 10곡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죽서집(竹西集)』 4권이 있는데, 장남 이사명이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간행되었다.
<이민적 [李敏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대사헌 죽서 이공 신도비명 병서 〔大司憲竹西李公神道碑銘 幷序〕***
도곡집 제10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 도곡 이의현 선생
효종(孝宗) 병신년(1656, 효종7)에 성상이 조정에서 선비들을 책시(策試)하여 시정(時政)의 득실을 물으니, 죽서(竹西) 이공(李公)이 대책(對策)을 올리기를, “옛날 초자(楚子)가 이르기를, ‘진후(晉侯)가 외국에 있다가 끝내 진나라를 얻었으니 험난함과 어려움을 모두 골고루 겪었다.’ 하였습니다. 이는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이 사람에게 내리려고 하면 반드시 온갖 시련을 주어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분발하고 성질을 참을 수 있게 만들어 능하지 못한 것을 채워 주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도 국외에 계신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친히 군마를 타고 달리면서 천지가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셨으니,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을 수 있게 만든 것이 어찌 다만 진 문공이 어려움을 겪었던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황천(皇天)이 맡겨 준 중한 책임을 유념하시고 선왕의 유교(遺敎)를 따르시어 유정유일(惟精惟一)하시어 끝내 영고(寧考)의 뜻을 이루소서.” 하였다.
이때 성상은 막 뜻을 세우고 분발하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 중에 성상의 뜻에 부합할 만한 자가 없었다. 이때 공의 대책문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크게 탄식하고 대신에게 이르기를, “이는 참으로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맞는 글이니, 말의 뜻이 사람을 감동시키는구나.” 하고는 마침내 장원으로 발탁하였다.
공은 백강공(白江公)의 아들이다. 백강공이 효종 초년에 정승으로 있으면서 일찍이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의 덕을 권면하고 경계하자, 상이 답하기를, “과인은 마음속에 지극한 통한이 있어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는 뜻이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은미하게 그 속뜻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다가 공의 대책문을 보고서 더욱 감탄하였으니, 이는 다만 공의 문장을 아름답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공이 다른 사람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공은 대각(臺閣)과 옥당(玉堂)에 출입하면서 정사를 접할 때마다 반드시 말씀하였고, 말씀하면 반드시 법도에 맞았다. 우리 현종 때에 이르러서는 공이 문학(文學)의 직임을 맡을 만함을 알고는 자못 이끌어 가까이에 두었다.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와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두 현자가 매번 말씀하기를, “전하 곁에 단 하루도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공 또한 감격하고 스스로 분발하여 더욱 정사에 대해 말씀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이로써 성상의 덕을 바로잡고 국가의 기강을 정돈함에 힘을 남김이 없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조정은 엄숙하고 화목해졌으며, 사론(士論)은 기꺼이 공에게 의지하였다. 이때 마침 간신이 국권을 잡음에 따라 원로 학자들이 배척을 받게 되자, 마침내 항거하는 상소를 올려 간곡히 말씀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배척을 당하고 인동부사(仁同府使)로 좌천되었는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별세하였다.
그 이듬해 현종이 승하하자 여러 간흉들이 크게 일어나서 기사년(1689, 숙종15)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고, 임인년(1722, 경종2)에 이르러 더욱 혹독하여 공의 두 아들도 전후로 참혹한 화를 당하여 집안사람들이 거의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담론하는 자들은 ‘공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정성을 다해 위태로운 나라를 부지해서 세상을 깨끗하고 화평하게 만들어 사특한 기운이 범하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니, 기사사화(己巳士禍)는 애초부터 싹트지 않아서 오늘의 어지러운 혼란이 영원히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용과 호랑이가 떠나가면 살쾡이와 드렁허리가 방자하게 구는 것이다. 하늘의 이치를 어찌한단 말인가. 아, 슬프도다.
공은 휘가 민적(敏廸)이고 자가 혜중(惠仲)이며 죽서(竹西)는 호이다. 계통이 세종의 별자(別子)인 밀성군(密城君) 침(琛)에서 나왔으며, 4대를 지나 휘 극강(克綱)이 처음 급제하여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이 되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수록(綏祿)을 낳으니, 일찍부터 영화로운 벼슬길에 올라 명성을 드날렸다. 광해군 때의 암울한 시기를 만나 관직이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그쳤다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백강공(白江公)을 낳았다. 백강공은 휘가 경여(敬輿)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니,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양 조정의 종신(宗臣)이었다. 부인 풍천 임씨(豐川任氏)는 별좌(別坐) 경신(景莘)의 딸로 천계(天啓) 을축년(1625, 인조3)에 공을 낳았다.
문정공에게는 성균관 생원인 아우 휘 정여(正輿)가 있는데, 파평 윤씨(坡平尹氏) 대사간 황(煌)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어서 자식이 없었다. 그러자 문정공이 공을 주어 양자로 삼게 하였다. 공은 양모인 윤씨를 모심에 생모와 차이를 두지 않았으니 온 세상이 부러워하고 감탄하였다. 뒤에 공의 귀함으로 인하여 생원공에게는 이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배위도 이에 따라 봉해졌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국과 도량이 있어 여러 아이들과 감히 비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7, 8세 때에 동년배들이 시끄럽게 다투는 것을 보고서 선성(先聖 공자)의 신위(神位)를 진설하고는 함께 바라보며 절하고, ‘잘못이 있으면 선성에게 고하고 벌을 받자’고 약속하니, 이후에는 동년배들이 몸을 삼갔다. 문정공이 부(部)를 순행할 적에 가마에 돌을 던지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말씀하기를, “저 사람은 반드시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찾아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공의 범상치 않음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여헌(旅軒) 장공(張公 장현광(張顯光))은 공이 마땅히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석호(石湖) 윤공(尹公 윤문거(尹文擧))에게 가서 배울 때는 윤공이 공의 스승이 되는 것을 사양할 정도였다. 그리고 동회(東淮) 신공(申公 신익성(申翊聖))은 공이 성동(成童 15세)의 나이였을 때에 만나보고 말씀하기를, “비록 오늘 당장 정승이 되더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겠구나.” 하였다.
임오년(1642, 인조20)에 역신(逆臣) 이계(李烓)가 문정공의 일을 오랑캐에게 고자질하면서 그 마음이 남조(南朝 명나라)에 있다고 하였다. 공은 조정의 뜻을 받들고 달려가서 오랑캐의 역관인 정명수(鄭命壽)를 만났는데, 말씀하는 기운이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정명수는 평소 성품이 사나웠는데도 놀라 탄복하였다.
나이 22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미년에 세자익위사 세마로 발탁되었다. 급제한 다음 예조 좌랑, 병조와 이조의 좌랑과 정랑, 성균관의 직강과 사성, 사헌부의 지평과 집의, 사간원의 정언ㆍ헌납ㆍ사간, 홍문관의 수찬ㆍ교리ㆍ응교, 의정부의 사인(舍人), 여러 시(寺)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어버이를 위해 고을살이를 청하여 특별히 운봉현감(雲峰縣監)에 보임되었으나 대신(大臣)이 성상에게 아뢰어 서울에 남아 있게 하였다.
암행어사(暗行御史)로서 호서지방을 염찰(廉察)하였고, 병오년(1666, 현종7)에 발탁되어 충청감사에 제수되었다. 3년 만에 돌아와 부제학, 동부승지, 대사성, 대사간, 호조 참의,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승문원 부제조를 겸하였다.
신해년(1671, 현종12)에 특별히 한성부 우윤에 오르고, 예조참판, 병조참판, 도승지, 대사헌을 지냈으며 동지경연사, 동지성균관사, 비변사 제조,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하고 여러 번 삼사(三司)와 국자감(國子監)의 장관이 되었다.
공이 하전(厦氈)과 섬독(剡牘)에서 아뢴 크고 훌륭한 말씀과 의논은 모두 기록할 만하다. 사헌부 지평이 되어서는 체납된 조세를 감면하고 훌륭한 지방관을 칭찬하여 표창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서, 형벌을 늦추는 것과 간언을 받아들이는 등의 일을 조목조목 논하였으며, 끝에서는 다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을 마땅히 우선해야 하는데 그 근본이 학교에 있음을 말씀하였다. 사직 상소를 통해 임금에게 신실한 덕을 힘써 닦고 공명과 이익을 추구하는 설을 통렬히 배척할 것을 청하였다.
옥당에 있을 때에는 여러 번 차자를 올려 낱낱이 논하였는데, 성학(聖學)을 논할 적에는 자신의 병통을 다스리는 것과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한 가지 일로 결합하여 실천하기를, 옛사람들이 말한 ‘안으로는 나라의 정사를 닦고 밖으로는 적의 공격을 물리친다.’라는 것처럼 할 것을 청하였으며, 심지를 굳게 세워 번거로움을 참고 스스로 힘써서 혈기가 막히지 말게 할 것을 청하였다.
전장(田庄)과 산과 바다의 폐해를 논할 적에는 여러 궁가(宮家)와 각 군영(軍營)들이 제멋대로 절수(折受)하여 백성들이 유산(流散)하게 만드니, 마땅히 일체 혁파할 것을 말씀하였다.
양역(良役)을 논할 때에는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건의한 것을 따라서 거행하여 나쁜 법을 일괄적으로 바꿀 것을 청하였으며, 병제(兵制)를 논할 때에는 도성 안의 병력이 많아 적은 세입으로는 이를 다 충당할 수 없으므로 마땅히 차츰 예전의 인원수를 줄여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이 밖에도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는 일, 인재를 구하는 일,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는 일, 근검절약을 숭상하는 일, 언로를 열어 놓는 일, 기강을 세우는 일 따위에 대하여 아뢴 말이 또한 수천 글자에 이르고 이어서 대면할 것을 청하여 끝까지 다 말씀하였다.
옛 관례에 유신(儒臣)이 금직(禁直)에 있으면서 감계(監戒)하는 글을 써 올리면 이것을 고사(故事)라 하였는데, 근래에는 없어져 행하지 않았다. 공은 성상이 오랫동안 경연(經筵)을 열지 않으니, 마땅히 이 방법으로 풍간(諷諫)하고 의논해야 한다고 여기고는 마침내 선현의 격언(格言)을 채집하여 올렸다. 별의 변괴가 일어나자 주자(朱子)의 ‘사사로운 마음을 제거하여야 한다〔祛私意〕’는 설을 들어 경계하는 말을 올렸고, 다시 차자를 올려 시정(時政)을 논하여 우유부단함을 경계하였으며, 또 조정의 대신들이 이익을 탐하는 폐해를 논하였다. 또 입대(入對)하여 형관(刑官)을 가려 뽑아 지체되는 옥사를 다스릴 것과 남쪽 지역과 북쪽 지역의 인물을 두루 거두어 쓸 것을 청하였다.
처음에 효묘(孝廟)가 돌아가셨을 적에 여러 유신(儒臣)들이 대비(大妃)의 복(服)을 의논하면서 ‘차적장자는 기년의 복을 입는다〔次適朞制〕’는 예제(禮制)를 적용했는데, 흉인 윤선도(尹善道)가 종통(宗統)ㆍ적통(嫡統)의 설을 만들어 내어 어진 이들을 해칠 계책으로 쓰려 하였다. 성상이 그 간악함을 통촉하고 변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는데, 이때 수찬(修撰) 홍우원(洪宇遠)이 글을 올려 윤선도를 구원하자, 공이 차자를 올려 논변하고 배척하였다.
또 유생(儒生) 김강(金鋼) 등이 율곡(栗谷 이이(李珥))과 우계(牛溪 성혼(成渾)) 두 선정(先正)을 모함하고 비방한 죄를 논하였으며, 구언(求言)하는 성상의 뜻에 응하여 예전에 아뢴 여러 일들을 하나하나 아뢰면서 거듭 채택하여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사간이 되어서는 양전(量田)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고, 절수(折受)하는 일에 대해 극진히 아뢰었다. 공은 여러 일이 너무 지체됨을 민망히 여겨 대면하여 말씀을 올리고자 동료와 함께 청하였으나 성상은 내치고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책임을 지고 물러나려 하자 성상이 노하여 엄한 분부를 내렸는데, 공의 말씀이 더욱 간절하고 정직하니, 성상은 노여움을 풀고 인견(引見)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공은 임금이 진작하고 분발해야 함을 강력히 청하였다.
성상이 여러 능(陵)을 참배하려 하자 공은 차자를 올려서 선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이어가는 방도를 아뢰고, 이어서 의리를 강론하고 어진 선비를 친근히 하며 귀에 거슬리는 말을 기꺼이 들을 것을 청하였다. 또한 공이 ‘한 대신이 양자를 세운 뒤에 아들을 낳자 자기 소생으로 제사를 받들게 한 일은 윤리와 기강을 해친다.’고 하여 개정할 것을 청하고, ‘겨울 제사에 재계하면서 열병식(閱兵式)을 하는 것은 재계하는 바른 뜻이 아니다.’라고 말씀하니 모두 가납하였다. 성상은 말하는 자들을 손을 저어 배척하고 혹은 질책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은 위징(魏徵)을 전사옹(田舍翁)이라고 했던 당 태종(唐太宗)의 고사를 인용하여 풍간(諷諫)하였다.
호서 지방을 염찰(廉察)할 적에는 편의(便宜)에 따라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기를 요령이 있게 하여 굶어 죽어 길에 버려진 사람이 없었으며, 권귀(權貴)를 위해 백성을 해치는 관리를 탄핵하여 제거하다가 그들에게 크게 해를 당하여도 개의치 않았다. 본도(本道)의 감사가 되었을 때에 마침 연달아 흉년이 들고 또 임금이 온천에 행차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주선하여 자세히 살피고 빠짐없이 계산하여 은혜와 교화가 흡족하게 백성에게 미치니, 백성들이 고무(鼓舞)되었다.
부제학이 되었을 때에는 오랑캐를 경계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을 계기로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적국(敵國)과 외환(外患)이 없으면 국가가 항상 망한다.’ 하였으니, 지금은 마땅히 월왕(越王) 구천(句踐)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였다.
경연에서 《심경(心經)》을 진강할 적에는 ‘근독(謹獨)’으로 마음을 다잡는 요점으로 삼고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아울러 진강하여 흥망성쇠의 자취를 가지고 거울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상의 옥후(玉候)가 해가 지날수록 나빠지니, 혹 삼가고 조섭(調攝)하지 못하시는가 염려됩니다. 성상의 나이가 한창 젊으시니, 더욱 마땅히 인욕(人欲)을 막고 끊어야 합니다.” 하니, 성상이 의용(儀容)을 고쳤다.
이때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이변이 있자, 공은 차자를 올려서 말씀하기를, “불길한 징조가 여기에 이르렀는데도 높은 사람과 아랫사람들이 편안하게 즐기면서 토목 공사를 한창 일으키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큰 재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여종이 궐내에 가득하여 궁중이 엄격하지 못하고, 환관들은 왕명을 받았다고 칭하면서 공경과 대부들을 힘으로 꺾으려 하고, 또 임금의 비답은 한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하달되니, 작은 일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어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동궁의 나이가 겨우 열 살인데 가례(嘉禮)를 행하려 하자, 공은 송나라 범조우(范祖禹)의 말과 선조와 인조 두 조정의 고사를 들어서 너무 빠름을 경계하였다.
일찍이 입시하여 부세를 감면할 것을 청하자, 정승인 허적(許積)이 말하기를, “신하가 감면을 청하는 것은 아마도 군주에게 칭찬이 돌아가게 하려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막고서 말하기를, “대신이 건의하고 임금이 채택하여 시행하는 것이 무슨 손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사헌이 되었을 때에는 탐관오리로 불법을 저지른 자 몇 사람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사면(赦免)이란 치우쳐 있는 물건과 같아서 한편으로는 소인들이 요행히 빠져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니, 함부로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또 ‘한나라 때의 제후 왕 중에는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가 사형에 이른 자가 있으니, 마땅히 관리들이 형률(刑律)을 지나치게 적용하는 것을 엄하게 단속해야 합니다.’ 하였다.
대침(大侵)이 들어 죽을 쑤어서 나누어 주었는데, 공이 말씀하기를, “죽을 먹은 사람들이 많이 죽으니, 마땅히 말린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고, 또 애통해하는 전교를 내려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인군(人君)에게 잘못이 있을 때마다 백 번이라도 간절하게 아뢰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흉년이 들고 백성이 곤궁할 때에는 더더욱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근심하고 넉넉하게 구휼할 것을 주장하여, 자주 대신들과 논쟁을 벌여서 시행한 바가 많았다.
국자감(國子監)의 장관이 되었을 때에는 고례(古禮)가 시행되지 않고 학교 행정이 오랫동안 폐지된 것을 탄식하여, 여러 생도들과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익혀서 행하였는데, 이때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제주(祭酒)로 참석하니, 온 도성 사람들의 이목이 크게 집중되었다.
허적이 정사를 전횡하였으나 성상은 깨닫지 못하고 더욱 총애하고 신임하니, 동춘이 상소하여 논하면서 허적을 노기(盧杞)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성상이 당색이 다른 자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배척하자, 공은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내가 국가의 은혜를 받은 것이 매우 크고 또 교주(敎胄)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 마땅히 선비들의 기개를 진작시켜 바로 세워야 한다.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소를 올려서 한나라와 당나라의 당금(黨禁)의 일을 하나하나 들어서 반복하여 간절히 간하였으나, 관직을 좌천시키라는 명이 내려졌다. 대신과 여러 신하로부터 성균관의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번갈아 글을 올려 서울에 머물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공의 말씀이 하나하나 들어맞자, 사람들은 이를 곡강(曲江)의 선견지명에 비유하였다. 이 일들은 모두 공이 조정에 있을 때의 언론으로서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있는 것이다.
총괄하여서 논한다. 구이(九二)의 대인(大人)은 서로 만나 보는 것이 이로운데, 문정공이 이것을 사용하였고, 공이 또 조정에서 올린 한 편의 대책문(對策文)으로 일찍부터 군주의 인정을 받아서 군신간과 부자간이 장차 서로 통하고 분발하여 큰 사업을 이룰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다가 문정공이 별세하고 효종이 뒤이어 승하하였다. 공은 돌아가신 분을 장송(葬送)하고 살아있는 분을 섬김에 지혜를 다하고 정성을 다하였으며, 세상의 일이 점점 어그러져서 소래(小來)의 조짐이 있게 되자, 또 깊이 근심하고 멀리 생각하여 간절하고도 지극하게 반복하여 개진하였다. 그래서 공의 몸은 비록 꺾이고 패하였으나 세도(世道)는 실로 힘입음이 있었다.
공이 집안에 있으면서 효도하고 우애한 일, 관직에 임하여 청렴하고 검약한 절조,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방법, 선을 좋아하고 선비를 좋아하는 덕에 있어서와, 문장은 충분히 임금의 계책을 빛낼 수 있으나 자부하지 않고, 지식은 충분히 은미한 것까지 통찰할 수 있으나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며, 귀하면서도 능히 몸을 낮추고 꼿꼿하면서도 능히 소통한 점에 있어서는, 나이 많은 원로들이 높이 받들어 소중하게 여기고 고급(顧及)이 우러러 사모하였을 정도였으니, 같은 시대의 여러 선비들을 차례로 꼽아보더라도 공과 같은 분은 드물 것이다. 세상의 운이 나빠지려 하여 재주 있고 선(善)한 사람이 먼저 죽으니, 의로운 사람들이 한탄하고 분개하여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는다.
공의 아우 서하공(西河公)은 명성과 덕망이 공과 서로 비슷하여 세상에서 쌍벽(雙璧)이라고 칭하였는데, 또한 중년에 세상을 떠났고, 마침내 뒤에는 가문의 화가 더욱 혹독해져 가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천도(天道)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채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지금과 옛날의 일을 돌이켜 봄에 애통한 마음이 끝이 없다.
공이 계축년(1673, 현종14) 11월 22일에 별세하니, 춘추가 49세이다. 지평현(砥平縣) 용문산(龍門山) 남쪽에 장례하여 부인인 창원 황씨(昌原黃氏)와 합묘(合墓)하였다. 황씨의 아버지는 부윤공(府尹公) 일호(一皓)인데 대의(大義)를 장려한 일에 연좌되어 오랑캐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니, 공이 이를 항상 슬퍼하고 민망히 여겨서 사후(死後)의 일을 경영하기를 더욱 각별하게 하였다.
자식은 아들딸이 6명이니, 장남 사명(師命)은 판서이고, 차남 부명(孚命)은 감역(監役)이고, 다음 이명(頤命)은 계부(季父)인 지평공(持平公)의 양자로 출계하였는데, 원임(原任) 좌의정으로 순국하였고, 다음 익명(益命)은 목사이다. 장녀는 사인(士人) 김만견(金萬堅)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군수 김도제(金道濟)에게 출가하였다.
판서의 아들은 희지(喜之)와 참봉 의지(毅之)와 위지(偉之)이고, 의정의 아들은 진사 기지(器之)이고, 목사의 아들은 진사 중지(重之)와 현감 현지(顯之)이다. 의지의 아들은 문상(文祥)이니 희지의 양자가 되었고, 기지의 아들은 참봉 봉상(鳳祥)과 붕상(鵬祥)이고, 현지의 아들은 하상(夏祥)이니 중지의 양자가 되었다. 서출(庶出)과 제방(諸房) 여러 자손의 사위들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판서가 일찍이 보사공신(保社功臣)에 녹훈(錄勳)되었기 때문에 은전을 미루어 공에게 좌찬성이 추증되었는데, 기사년(1689, 숙종15)에 이르러 판서가 화를 당하여 공훈이 삭탈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어 공에게 병조판서로 바꾸어 추증하였다.
공이 별세한 뒤로 이미 한 갑자(甲子)가 지났는데도 아직 신도비의 비문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목사공(牧使公)이 불초에게 명하기를, “그대의 한마디 말을 얻어 돌아가 선형(先兄)에게 고하기를 원한다.” 하니, 선형은 의정공(議政公 이이명)을 가리킨 것이다. 나는 의리상 차마 사양할 수가 없어서 삼가 서술하고 명문(銘文)을 붙인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영릉(寧陵 효종)의 초년에 / 寧陵初載
문정공이라는 정승이 있었네 / 相惟文貞
중임을 맡겨서 / 謂可托重
임금의 뜻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오 / 睿志以成
정승에게는 훌륭한 아들이 있었으니 / 相亦有子
진실로 영재였네 / 允矣髦英
조정에서 대책한 한 말씀으로 / 庭對一語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켰다오 / 感動宸情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고 / 家庭灌沃
조정에서 나랏일을 논평하였네 / 朝署評衡
마음 깨끗하여 / 寸心皦如
우리 천명과 합하였네 / 契我天明
성스러운 세자가 왕위를 이음에 / 聖嗣丕承
더욱 충성을 다하였네 / 彌殫忠赤
사헌부의 기강을 진작시켜 엄숙히 하였고 / 振肅憲綱
유악에서 부지런히 힘쓰셨네 / 密勿帷幄
산과 용과 마름과 흰 쌀로 / 山龍藻粉
네가 하고 네가 보익하라 하시니 / 汝爲汝翼
근본을 캐서 / 原原本本
간곡히 아뢰기를 반복하였네 / 懇叩反復
나라의 계책과 백성에 대한 근심과 / 國計民憂
언로와 궁중에 관한 말씀이었으니 / 言路宮掖
정성이 깊고 사려가 간절하여 / 誠深慮切
옛일을 상고한 것이었네 / 言稽古昔
시운의 성쇠가 바뀌는 때에는 / 消長之會
더욱 박상을 경계해야 하니 / 尤戒剝床
아침에 간하는 글을 올렸다가 / 朝封諫牘
저녁에 장독(瘴毒)이 있는 시골로 좌천당하였네 / 夕已瘴鄕
비록 꺾였으나 / 雖則挫揠
평소의 지절은 더욱 빛났네 / 素節愈彰
그 선견지명을 말한다면 / 廼其先識
당나라의 장구령(張九齡)과 같구나 / 若唐之張
외로운 봉황이 길이 떠나가니 / 孤鳳永徂
온갖 괴이한 것이 일제히 나와서 / 百怪齊逞
어지럽게 일을 어그러뜨려 / 紛紜轇輵
지금까지 화를 끼치네 / 至今爲梗
공이 조정에 있을 때는 / 當公在廷
미리 그 조짐을 헤아려 / 盖已察影
화가 싹트기 전에 사라지게 하였으니 / 消患未萌
이것이 공의 마음에 늘 생각하던 바였네 / 是所耿耿
혼란이 진정될 때가 없으니 / 亂靡有定
누가 하늘의 뜻을 알겠는가 / 孰究天意
집안의 화(禍)를 어찌 차마 말하랴 / 家何忍說
국가도 이 때문에 병들게 되었네 / 國以殄瘁
내 공의 묘에 명문을 지음에 / 我銘公墓
자세히 기재하여 모두 구비하였으니 / 詮載悉備
뒤에 보는 자들은 / 庶後觀者
역사를 고찰할 필요 없으리라 / 不待考史
<도곡집 제10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 도곡 이의현 선생>
[주-1] 죽서(竹西) …… 올리기를 : 죽서 이공은 이민적(李敏迪, 1625~1673)으로 죽서는 그의 호이다. 이때 이민적이 올린 대책문은 《죽서집(竹西集)》 권4 〈정문(程文) 병신전대(丙申殿對)〉에 보인다.
[주-2] 옛날 …… 하였습니다 : 초자(楚子)는 초나라 성왕(成王)이고 진후(晉侯)는 진나라 문공(文公)이다. 춘추시대 노(魯)나라 희공(僖公) 28년에 초(楚)나라가 송(宋)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가 동맹국인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진과 초 사이에 전운이 감돌았는데, 이때 초나라 성왕이 자옥(子玉)에게 송나라를 떠나게 하며 말하기를 “진군을 추격하지 말라. 진후가 망명하여 국외에 19년 동안 있었으나 끝내 진나라를 얻었으니, 세상의 험하고 어려운 일을 빠짐없이 경험하였고 백성들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알고 있다. 하늘이 그에게 수명을 주었고 또 그의 해악(害惡)을 제거하였으니, 하늘이 세운 사람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폐할 수 있겠는가.〔無從晉師. 晉侯在外, 十九年矣, 而果得晉國, 險阻艱難, 備嘗之矣, 民之情僞, 盡知之矣. 天假之年, 而除其害, 天之所置, 其可廢乎?〕”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28年》
[주-3] 하늘이 …… 것 : 이 내용은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의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이 사람에게 내리려 하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게 하며 그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 체부(體膚)를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공핍(空乏)하게 하여 행함에 그 하는 바를 불란(拂亂)시키니, 이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바를 증익(增益)하게 하려는 것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라고 한 말을 축약하여 쓴 것이다.
[주-4] 전하께서도 …… 되었습니다 : 효종(孝宗)은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있을 적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등 항청론자(抗淸論者)들과 함께 1637년(인조15)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심양(瀋陽)에서 1645년까지 8년 동안 머물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5] 유정유일(惟精惟一) : 정밀하게 이치를 살피고 전일(專一)하게 일을 행한다는 뜻으로 임금이 가져야 할 심법(心法)의 요체이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는 바, 이 구절은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려 하면서 경계한 말로 도통(道統)을 전수하는 요결(要訣)로 일컬어진다.
[주-6] 영고(寧考) : 영왕(寧王)이란 말과 같다. 영왕은 원래 《서경(書經)》 〈주서(周書) 대고(大誥)〉에서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부왕(父王)인 무왕(武王)을 가리킨 말로, 무왕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천하를 편안히 하였다 하여 지칭한 것인데, 후세에는 선대의 왕을 높이는 칭호로 사용하였다. 여기서는 선대의 인조(仁祖)를 이른다.
[주-7] 백강공(白江公) : 이경여(李敬輿, 1585~1657)로 자는 직부(直夫), 백강(白江)은 호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09년(광해군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인조반정 이후 중용되어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배청친명파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다가 밀고 되어 심양(瀋陽)에 억류된 적이 있다.
[주-8] 해는 …… 멀다 :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전국 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오자서(伍子胥)가 한 말이다. 오자서는 평왕(平王)이 무고하게 아버지와 형을 죽이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로 망명하여 재상이 되어 초나라를 정벌하고 아버지의 원수 평왕의 묘를 파헤치고 시체에 3백 대의 곤장을 가하였다.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을 보내 이를 비난하자, 오자서는 “나를 위하여 신포서에게 사죄의 말을 전하라.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내가 어쩔 수 없이 일을 거꾸로 행하며 하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였다.〔為我謝申包胥, 曰: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라고 하였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주-9] 간신이 …… 되자 : 간신은 허적(許積)을 이르고 원로학자는 송준길(宋浚吉)과 이상(李翔)을 이른다. 이때 허적이 영의정이 되어 송준길, 이상 등과 갈등을 빚자, 당시 대사성이었던 이민적이 이들을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주-10] 기사년에 …… 달하였고 : 기사환국(己巳換局)을 가리킨다. 1689년(숙종15) 숙종(肅宗)이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려고 하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이를 반대하였는데, 숙종이 일대 환국을 일으켜 서인들을 축출하고 남인에게 정권을 맡긴 사건이다.
[주-11] 임인년에 …… 혹독하여 : 경종(景宗) 즉위 초인 1721년(경종1)과 1722년에 세제(世弟) 책봉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둘러싸고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를 가리킨다. 경종이 병이 잦고 후사가 없자, 노론(老論)이 훗날 영조(英祖)가 된 연잉군(延礽君)을 세제로 책봉하고 정무를 대리하게 하였는데, 소론(少論)이 반대하며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사대신(四大臣)을 극형에 처하고 노론 인사 100여 명을 사사(賜死)하거나 멀리 유배 보낸 사건이다.
[주-12] 공의 두 아들 : 이사명(李師命, 1647~1689)과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을 가리킨다. 이사명은 자가 백길(伯吉), 호가 포암(蒲菴)이다. 1680년(숙종6)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병조 판서에 이르렀다. 1688년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 종실(宗室) 이항(李杭)과 좌의정 조사석(趙師錫)을 몰래 규찰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삭주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기사환국 때 사사되었다. 이이명은 자가 지인(智仁), 호가 소재(疎齋)이다. 1680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노론 사대신의 한 명으로 신임사화 때 사사되었다.
[주-13] 용과 …… 것이다 : 이민적이 서거한 뒤로 소인들이 득세 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본래 소식(蘇軾)의 〈제구양문충공문(祭歐陽文忠公文)〉에 보이는데, “깊은 산과 큰 못에 용이 사라지고 범이 떠나가면, 온갖 변괴가 나와서 미꾸라지와 드렁허리가 춤을 추고 여우와 살쾡이가 울부짖는 것과 같습니다.〔深山大澤, 龍亡而虎逝, 則變怪百出, 舞鰌鱔而號狐狸.〕”라고 하였다.
[주-14] 배위도 …… 봉해졌다 : 이조 참판이 종2품 가정대부(嘉靖大夫)에 해당하는 관직이므로 배위 파평 윤씨도 이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으로 봉해졌음을 의미한다.
[주-D015] 이계(李烓) : 1603~1642. 자는 희원(熙遠), 호는 명고(鳴皐),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621년(광해군13) 유학으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사간 등 주로 간관으로 있었는데 주화파로서 척화파 김상헌(金尙憲) 등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1641년 선천부사로 있을 때에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게 되자, 구명책으로 최명길(崔鳴吉)ㆍ이경여(李敬輿)ㆍ신익성(申翊聖)ㆍ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는 사실과 또 우리나라의 은밀한 일 12항을 고자질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는 이계를 국가의 반역자로 판단하고 우리나라에서 처단하도록 연락하니 조정에서는 의금부 도사 정석문(鄭錫文)을 보내 참수하였다.
[주-16] 정명수(鄭命壽) : ?~1653. 인조 때의 반역자이다. 평안도 은산(殷山)의 천한 노비 출신으로 성품이 교활하였다. 1618년(광해군10) 명나라를 구원하러 간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출정하였다가 청나라의 포로가 되자, 청나라에 살면서 말을 배우고 우리나라 사정을 자세히 밀고하여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으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의 통역으로 입국하여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이후 조정에 머물면서 영중추부사의 벼슬을 받고 갖은 행패를 부리다가 청나라로 건너가 살았는데, 그곳에서도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歲幣)를 노략질하는 등 패역 행위를 하다가 1653년(효종4) 심양(瀋陽)에서 시강원 서리(侍講院書吏) 강효원(姜孝元) 등에게 모살(謀殺)되었다.
[주-17] 하전(厦氈)과 섬독(剡牘) : ‘하(厦)’는 큰 집이고 ‘전(氈)’은 털방석으로, 원래는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일컫는데, 전(轉)하여 흔히 경연(經筵)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섬독은 공독(公牘)으로, 장계나 상소 등의 공문서를 이른다.
[주-18] 선정신(先正臣) …… 것 : 1574년(선조7) 당시 우부승지였던 이이가 〈시폐와 재변에 관한 만언소〉를 통해 “유방(留防)하고 있는 곳은 각색(各色)의 양역(良役)을 모두 폐지하고 오직 유방의 군역만 있게 하여 먼 곳에 부역하는 수고로움이 없도록 하는 한편, 번(番)을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쉬도록 하여야 합니다.”라고 주장한 내용을 말한다. 《宣祖修訂實錄 7年 1月 1日》
[주-19] 처음에 …… 적용했는데 :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에 발생한 1차 예송(禮訟)을 두고 말한 것이다.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기간을 기년(朞年)으로 할 것인가 3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논란에서 송시열(宋時烈) 등이 주장한 기년복이 채택되었다. 효종이 인조의 차적장자(次適長子)이므로 ‘차적정자는 기년의 복을 입는다〔次適朞制〕’는 예제를 적용한 것이다.
[주-20] 종통(宗統)ㆍ적통(嫡統)의 설 : 1차 예송이 서인의 기년복으로 마무리된 뒤에 남인인 윤선도가 상소하여 송시열 등이 기년복을 주장하면서 임금의 종통과 적통을 나누어 임금을 낮추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다고 비판했던 말을 가리킨다.
[주-21] 위징(魏徵)을 …… 고사 : 위징은 당 태종(唐太宗) 때의 명신으로, 당나라 건국 이후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의 요직을 역임하며 강직한 성품으로 태종의 잘못을 간쟁하여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태평 시대를 여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전사옹(田舍翁)은 고루한 시골 늙은이라는 뜻이다. 한번은 태종이 일찍이 조회를 파하고 나와 혼자 노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이 전사옹을 죽이고 말겠다.”고 하였는데, 이때 장손황후(長孫皇后)가 이 말을 듣고 전사옹이 누구냐고 물으니, 태종이 “위징이 늘 조정에서 나에게 모욕을 준다.”고 한탄하였다. 황후가 물러가서 조복(朝服)을 차려 입고 나와 태종에게 예를 올렸는데 태종이 놀라서 그 까닭을 묻자, 황후가 말하기를 “첩이 듣건대,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정직하다고 하니, 지금 위징이 정직한 것은 바로 폐하께서 밝으신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니 첩이 감히 하례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그제야 기뻐하였다. 《舊唐書 卷71 魏徵列傳》
[주-22] 적국과 …… 망한다 : 이는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보이는 말로, “들어가면 법도 있는 대신의 집안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나오면 적국과 외환이 없는 경우는 나라가 항상 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하였다.
[주-23] 월왕(越王) …… 마음 :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마음을 말한다. 구천(句踐)은 춘추시대 월나라의 임금으로, 숙적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하다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목숨을 부지한 뒤에, 복수를 위해 와신상담하여 범려(范蠡)ㆍ문종(文種)과 함께 부국강병을 이루어, 마침내 오나라를 대파하여 부차를 자살하게 함으로써 복수에 성공하였다.
[주-24] 송나라 범조우(范祖禹)의 말 : 범조우(1041~1098)는 북송(北宋) 철종(哲宗)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자는 순부(淳夫)이다. 강설을 잘하였으며 특히 역사학에 뛰어나 《당감(唐鑑)》을 지어 당나라 3백 년 동안의 치란(治亂)을 자세히 밝혔으므로 당감공(唐鑑公)이라 불렸고, 사마광(司馬光)과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수하기도 하였다. 철종이 14세 때에 여색(女色)을 가까이한다는 소문이 돌자, 유안세(劉安世)가 ‘황제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덕을 닦고 몸을 아껴야 한다.’고 간언하였는데, 당시 섭정하던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이는 외간(外間)에 떠도는 헛소문이라고 물리쳤다. 그러자 범조우가 “외간의 의논이 비록 헛소문에 의한 것일지라도 사전의 경계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모든 일을 미연(未然)에 말하는 것이 진실로 지나친 것이지만, 이연(已然)에 이르면 미칠 수 없으니, 차라리 미연의 말을 받아들여 미칠 수 없는 후회가 없게 하소서.”라고 간언하였다. 《宋史 卷337 范祖禹列傳》
[주-25] 대침(大侵) : 다섯 가지 곡식이 익지 않은 큰 흉년을 이른다. 한 가지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을 겸(歉)이라 하고, 두 가지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을 기(饑)라 하고, 세 가지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을 근(饉)이라 하고, 네 가지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을 황(荒)이라 한다. 《春秋穀梁傳 襄公 24年》
[주-26] 향음주례(鄕飮酒禮) : 어진 이를 존경하고 어른을 봉양하는 미풍양속을 목적으로 베푸는 연회이다. 《주례(周禮)》 〈향대부(鄕大夫)〉에 “향학에서 3년 동안 학업을 닦은 사람 중에 우수한 사람을 천거할 때 그를 송별하기 위해 향로(鄕老) 및 향대부(鄕大夫)가 전별연을 베풀었다.” 하였는데, 이것이 향음주례의 시초이다. 뒤에는 온 고을 사람이 모여 법도에 맞게 술을 마시며 경로(敬老)의 풍속을 마련하는 자리가 되었다.
[주-027] 노기(盧杞) : 당나라 덕종(德宗) 때의 간신(奸臣)으로, 자(字)는 자량(子良)이다. 뛰어난 말재주로 덕종의 신임을 받아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발탁되었는데,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시기하여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사지(死地)로 내몰아 양염(楊炎)ㆍ두우(杜佑)ㆍ안진경(顔眞卿) 등을 모해하였다.
[주-28] 교주(敎胄)의 직책 : 성균관의 장(長)인 대사성의 직책을 이른다. 교주(敎胄)는 맏아들을 교육한다는 의미로, 옛날에 태학(太學)에서 경대부와 사서인의 맏아들을 교육했던 데에서 태학, 곧 성균관을 뜻하게 되었다.
[주-29] 곡강(曲江)의 선견지명 : 곡강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 명재상인 장구령(張九齡)의 고향으로, 곧 장구령을 가리킨다. 장구령은 자가 자수(子壽)로 현종 개원(開元) 연간에 재상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장구령은 평소 안녹산(安祿山)이 반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견제하였는데, 안녹산이 마침 거란을 토벌하다가 패하자, 이를 기회로 안녹산을 주벌하여 후일의 후환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현종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뒤에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현종은 그의 선견지명을 생각해 치제(致祭)하였다. 《舊唐書 卷99 張九齡列傳》
[주-30] 구이(九二)의 …… 이로운데 :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이(九二)〉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 봄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 하였고, 〈구오(九五)〉에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 봄이 이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 하였다. 〈구이〉의 대인은 현신(賢臣)을 이르고 〈구오〉의 대인은 성군(星君)을 이르는바, 〈구이〉의 현신은 위에 있는 〈구오〉의 성군을 만남이 이롭고 〈구오〉의 성군은 아래에 있는 〈구이〉의 현신을 만남이 이로우므로 ‘서로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라고 한 것이다.
[주-31] 소래(小來) : 소인이 득세하게 된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비괘(否卦)〉의 “비(否)는 인도(人道)가 아니니, 군자의 정(貞)에 이롭지 않으니, 대(大)가 가고 소(小)가 온다.〔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라고 하였는데, 이는 음(陰)에 해당하는 소인의 도가 득세하고 양(陽)에 해당하는 군자의 도가 비색해짐을 말한 것이다.
[주-32] 고급(顧及) : 후한 말기에 명사(名士)들을 분류한 명칭인 ‘팔고(八顧)’와 ‘팔급(八及)’의 줄임말로, 곧 명사의 뜻으로 쓰인다. ‘팔고’는 여덟 명의 ‘덕행으로써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는 자〔以徳行引人者〕’로, 곧 곽임종(郭林宗)ㆍ종자(宗慈)ㆍ파숙(巴肅)ㆍ하복(夏馥)ㆍ범방(范滂)ㆍ윤훈(尹勳)ㆍ채연(蔡衍)ㆍ양척(羊陟)을 이르고, ‘팔급’은 여덟 명의 ‘추숭하는 자들을 인도할 수 있는 자〔其能導人追宗者〕’로, 곧 장검(張儉)ㆍ잠질(岑晊)ㆍ유표(劉表)ㆍ진상(陳翔)ㆍ공욱(孔昱)ㆍ원강(苑康)ㆍ단부(檀敷)ㆍ적초(翟超)을 이른다. 특별히 여덟 명을 든 것은 옛날 순(舜)임금 때의 팔원(八元)과 팔개(八凱)에 견준 것이다. 《後漢書 黨錮傳序》
[주-33] 서하공(西河公) : 이민서(李敏敍, 1633~1688)로 자는 이중(彛仲), 서하(西河)는 호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이며, 뒤에 도정 이후여(李厚輿)에게 입양되었다. 서울에 살았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사사(師事)하였다.
[주-34] 황씨의 …… 하였다 : 이민적의 장인인 황일호(黃一晧, 1588~1641)는 자가 익취(翼就), 호가 지소(芝所)이다. 1635년(인조1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 어사(督戰御史)로 있으면서 반청척화(反淸斥和)를 주장하였으며,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부임했을 적에 명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공격할 것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1641년 청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다. 이이명이 지은 이민적의 행장에 “황공(黃公)이 죽은 뒤에 그의 노친(老親)이 살아계시고 친족도 많지 않았는데, 공이 정성껏 보호하여 모두 무사할 수 있었고 상장(喪葬)도 유감없이 치렀다.”는 내용이 보인다. 《疎齋集 卷16 先考竹西府君行狀》
[주-35] 보사공신(保社功臣) : 1680년(숙종6)에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던 허견(許堅)을 주벌한 공으로 내린 공신 칭호이다. 이민적의 아들 이사명은 보사공신 2등으로 책록되고 완녕군(完寧君)에 봉해졌다.
[주-36] 산과 …… 보익하라 : 국왕을 보필하여 고굉(股肱)과 이목(耳目)의 역할을 함을 이른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益稷)〉에, “신하는 짐의 고굉과 이목이 되어야 하니, 내가 백성들을 도우려고 하거든 네가 도와주며, 내가 사방에 힘을 펴려 하거든 네가 해 주며, 내가 옛사람의 상(象)을 관찰하여 일(日)ㆍ월(月)ㆍ성신(星辰)ㆍ산(山)ㆍ용(龍)ㆍ화충(華蟲)을 그림으로 그리고, 종이(宗彝)ㆍ조(藻)ㆍ화(火)ㆍ분미(粉米)ㆍ보(黼)ㆍ불(黻)을 수놓아 다섯 가지 채색으로 오색(五色)의 비단에 드러내 옷을 만들려고 하거든 네가 밝혀 주어라.〔臣作朕股肱耳目, 予欲左右有民, 汝翼; 予欲宣力四方, 汝爲, 予欲觀古人之象, 日月星辰山龍華蟲作會, 宗彛藻火粉米黼黻絺繡, 以五采彰施于五色作服, 汝明.〕”라는 순(舜) 임금의 말이 보인다.
[주-37] 박상(剝床) : 눈앞에 닥쳐온 재앙을 말한다. 《주역(周易)》 〈박괘(剝卦) 육사(六四)〉에 “상(牀)을 깎아 살갗에 미침이니, 흉하다.〔剝牀以膚, 凶.〕” 하였는데, 〈상전(象傳)〉에 ‘박상이부(剝牀以膚)’는 재앙에 매우 가까운 것이다.〔剝牀以膚, 切近災也.〕”라고 하였다. 정이는 《역전(易傳)》에서 “깎음이 살갗에 미치어 몸이 거의 망함에 이르렀으니, 이는 재화(災禍)에 매우 가까운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출처 : 도곡집 신도비명(神道碑銘) ~ 도곡 이의현 선생,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공역) | 2014
大司憲竹西李公神道碑銘 幷序
孝宗丙申。上策士大庭。問時政得失。竹西李公上對曰。昔楚子言晉侯在外。果得晉國。險阻艱難。備嘗之矣。豈非天將降任。必使動心忍性。增益其所不能也。殿下在外亦十年矣。親隨戎馬之驅馳。眼看天地之崩裂。動心忍性。豈但晉侯之艱難而止哉。伏願念皇天付畀。追先王遺敎。惟精惟一。以終成寧考之志。時上方奮發睿志。顧羣臣無可當聖意者。覽公對。喟然大息。謂大臣曰。此眞經濟文也。辭語令人感動。遂擢爲壯元。公白江公子也。白江公相孝廟初年。嘗上箚勉戒君德。上報曰。寡人至痛在心。有日暮途遠之意。盖以徵示旨意。及得公對。尤爲之嗟歎。不特美其文辭。以公異他人也。自是出入臺閣玉堂。遇事必言。言必中窾。至我顯廟。知公文學可任。頗引以自近。尤齋,同春兩賢每言君側一日不可無此人。公亦感激自奮。益言事不已。所以匡主德整國綱。靡有餘遺。由是朝著爲之肅穆。士論翕然歸嚮。會値奸臣秉國。儒老受擯。乃抗疏極言忤旨。斥補仁同府。居無何疾卒。其明年顯廟上陟。羣兇遂大逞。至己巳而極。壬寅而尤酷。公之兩子前後罹慘而族盡赤矣。談者以爲公而在者。必能竭誠持危。使大界淸平。陰翳罔干。己巳之禍。初不得萌。而永無今日之棼棼矣。龍虎逝而狸鱔肆。奈何乎天。嗚呼唏矣。公諱敏廸。字惠仲。竹西其號也。系出世宗別子密城君琛。四世而諱克綱。始登第爲奉常僉正。贈左贊成。生諱綏祿。早敭華塗有名。遭昏時。止驪州牧使。贈領議政。是生白江公。諱敬輿。領議政。諡文貞。爲仁孝兩朝宗臣。夫人豐川任氏。別坐景莘女。生公於天啓乙丑。文貞公有弟成均生員諱正輿。娶坡平尹氏。大司諫煌女。早歿無嗣。文貞公與公爲後。公事尹氏亡間。一世艷歎。後以公貴。贈生員公吏曹參判。配從封。公幼有器度。羣兒莫敢倫。七八歲。見同輩閙競。設先聖位。與共瞻拜。約有過。告而罰之。自後同輩爲飭。文貞公按部。有投石於轎者。公曰。此必病狂人。索之果然。其不凡。多類此。旅軒張公許以當作名世人。就石湖尹公學。尹公讓其爲師。東淮申公見公舞象時曰。雖今日作相。足以優爲。壬午。逆臣李烓訐告文貞公於虜。以爲心在南朝。公承朝旨疾馳。見虜譯命壽。辭氣不挫。命壽素悍。亦驚服。年二十二。中司馬試。乙未。選爲世子翊衛司洗馬。旣第。歷拜禮曹佐郞,兵吏曹佐郞,正郞,成均館直講,司成,司憲府持平,執義,司諫院正言,獻納,司諫,弘文館修撰,校理,應敎,議政府舍人,諸寺正。嘗爲親乞縣。特補雲峰。大臣啓留之。以暗行御史。廉察湖西。丙午。擢拜忠淸監司。三年而還。拜副提學,同副承旨,大司成,大司諫,戶禮曹參議。兼承文副提調。辛亥。特陞漢城右尹。歷禮兵曹參判,都承旨,大司憲。兼經筵成均籌司捴管。而屢爲三司國子之長。其昌言谹論之發於廈氊剡牘者。皆可書也。爲持平。啓請蠲免逋租。褒勸良吏。又上箚條論緩刑納諫等事。末復言保民當先。其本在學。因辭疏請務修實德。痛斥功利之說。在玉堂。數上箚論列。論聖學則請以治病講學合爲一事。如古所謂內修外攘。又請堅立心志。耐煩自强。勿使血氣底壅。論田庄山海之弊。則言諸宮家各軍營恣意折受。以致民戶流散。宜一切革罷。論良役則請倣先正臣李珥論建。擧而行之。一變弊法。論兵制則言轂下兵多。區區稅入。何以接應。宜稍减舊額。至它敬天怒求人才。嚴宮禁崇節儉。開言路立紀綱等說。又累千餘言。仍請對索言之。舊例儒臣在禁直。書進監戒語。名爲故事。近廢不行。公以爲上久不開筵。宜用此效諷議。遂採先賢格言以上。因星變。擧朱子祛私意說進規。復箚論時政。以優游不斷爲戒。且論朝紳征利之害。入對。請擇刑官理滯獄。收用南北人。初孝廟喪。諸儒臣議大妃服。用次適朞制。兇人尹善道刱宗統嫡統說。欲售戕賢計。上燭其奸。命竄邊。至是修撰洪宇遠投章伸救。上箚辨斥。又論儒生金鋼等詆誣栗牛二先正之罪。應旨歷叙前所陳諸事。申請採施。爲司諫。請行量田。又極陳折受事。悶庶事多弛。欲面對獻言。與同僚偕請。却不許。遂引避。上怒下嚴敎。公語益切直。上意解命引見。乃力請振作奮厲。上將謁諸陵。箚陳繼述之道。仍請講劘義理。親近賢士。樂聞逆耳言。言一大臣立後後生子。以己出奉祀傷倫紀。請改正。言方戒冬烝而閱武。非齋祓之義。並納。上多麾斥言者。或加呵叱。引魏徵田舍翁事以諷。其廉察湖西也。以便宜發倉。賑施有方。路無捐瘠。劾去爲權貴厲民之吏。被其大啣而不顧。及按本道。適當連歲灾荒。又有溫泉行幸。周旋審度。筭無遺策惠化融洽。民皆鼓舞。其爲副學也。因虜中有警白。古語云無敵國外患。國恒亡。今當以越句踐爲心。侍講心經。請以謹獨爲操心之要。兼講綱目。以監興衰跡。陳玉候經年違豫。或慮不能愼攝。聖筭方茂。尤宜遏絶人欲。上動容。時有雌雞化雄之異。箚言咎徵至此。而上下恬嬉。土木方興。此眞爲大異。且言女僕塡滿闕內。宮禁不嚴。閹竪稱以啣命。力折公卿大臣。批旨經月始下。由微至著。豈不可憂。東宮年甫十歲。將行嘉禮。引宋范祖禹言及宣仁兩朝故事。戒其太早。嘗入侍請蠲賦。相積言臣欲請蠲。恐非歸美君上。公折之曰。輔相陳建。君上採施。顧何有損。其爲大憲也。論貪汚不法者數人。言赦是偏枯物。不當輕擧。漢時諸侯王。以賊殺不辜抵死。宜嚴官吏淫刑律。以大侵設粥。公言食粥者多死。宜給粮。且請下哀痛敎。以慰人心。公君違。不忘剴切百奏。而當歲歉民困。尤以根本爲憂。每主優恤之論。數與大臣爭言。多所施行。其長國子也。歎古禮不行。學政久廢。與諸生講行鄕飮酒禮。同春以祭酒參席。傾都聳觀。積專。上不悟。愈加寵任。同春疏論。比之盧杞。上斥以伐異。公慨然曰。吾受國恩甚厚。職又敎胄。當扶植士氣。其可不言。乃上疏。歷擧漢唐黨禁事。反復切諫。而謫官之命下矣。大臣諸臣。以至太學章甫。交章請留。不能得。後公言一一符合。人以比曲江先見。此皆公立朝言議之在人耳目者也。盖嘗論之。九二大人。互爲利見。文貞公以之。而公又以昕庭一策。早結主知。君臣父子之間。若將相感發而成大業也。無何。文貞公下世。而孝廟繼薨。公送往事居。竭智殫誠。及至時事漸乖。小來有兆。則又憂深慮遠。懇至諄複。身雖摧敗。世道寔有賴焉。若其居家孝友之政。莅官淸約之操。固國安民之術。樂善好士之德。文足以煥猷而不自有。識足以洞微而不自喜。貴而能下。介而能通。耆宿之所引重。顧及之所慕望。歷選同時諸彦。盖鮮有如公者矣。世運將否。才淑先萎。義類嗟惋。至今未已。公弟西河公。與公名德相比。世稱聯璧。而亦閼於中身。乃後門禍益烈。家族奔逬。皓天未復。式至于玆。俯仰今昔。有餘慟焉。公以癸丑十一月二十二日卒。春秋四十有九。葬于砥平縣龍門山南。與夫人昌原黃氏合墓。黃氏父府尹公一皓。坐奬義。見害於虜。公常哀愍。經紀後事有加。子男女六人。男長師命判書。次孚命監役。次頤命出爲季父持平公後。以原任左議政殉國。次益命牧使。女長適士人金萬堅。次適郡守金道濟。判書子喜之,毅之參奉,偉之。議政子器之進士。牧使子重之進士,顯之縣監。毅之子文祥爲喜之後。器之子鳳祥參奉,鵬祥。顯之子夏祥爲重之後。庶出與諸房女壻繁不能錄。判書嘗錄保社勳。推恩贈公左贊成。至己巳判書遘禍。削勳。及伸復。改贈公兵曹判書。公卒後甲子已一周。而繫牲之石。尙無文。牧使公以命不佞宜顯曰。願得子一言藉手。歸告先兄。指議政公也。宜顯誼不忍辭。謹叙而銘之。其銘曰。
寧陵初載。相惟文貞。謂可托重。睿志以成。相亦有子。允矣髦英。庭對一語。感動宸情。家庭灌沃。朝署評衡。寸心皦如。契我天明。聖嗣丕承。彌殫忠赤。振肅憲綱。密勿帷幄。山龍藻粉。汝爲汝翼。原原本本。懇叩反復。國計民憂。言路宮掖。誠深慮切。言稽古昔。消長之會。尤戒剝床。朝封諫牘。夕已瘴鄕。雖則挫揠。素節愈彰。廼其先識。若唐之張。孤鳳永徂。百怪齊逞。紛紜轇輵。至今爲梗。當公在廷。盖已察影。消患未萌。是所耿耿。亂靡有定。孰究天意。家何忍說。國以殄瘁。我銘公墓。詮載悉備。庶後觀者。不待考史。
<출처 : 도곡집 제10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 도곡 이의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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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서 이민적 선생 졸기 (현종개수실록 27권, 현종14년 11월22일 1673년) ***
전 참판 이민적의 졸기
전 참판 이민적(李敏迪)이 죽었다. 민적이 상소하여 이상(李翔)을 구하려 한 일에 걸려 특명으로 외직에 보임되었는데, 부임하는 것을 지체하였다는 이유로 또 죄를 받아 해가 지나도록 폐고(廢固)되었다가 죽은 것이다. 상이 그의 부음을 듣고 경연에서 애석해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일찍이 그를 끝내 버리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적은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아들로서 병신년 과거에 장원으로 발탁되었는데 효종(孝宗)이 그의 대책문(對策文)을 보고는 훌륭하다고 칭찬했었다. 장주(章奏)를 짓는 솜씨가 뛰어났으며 삼사에 있으면서 논열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사리가 밝고 표현이 간절하여 전배(前輩)의 풍도가 있었다. 진솔하게 행동하면서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정직 성실하고 온화하였으며 비속한 태도는 조금도 볼 수 없었다. 평소 자신의 생활을 담박하게 하였으며 거처와 의복이나 음식 때문에 마음에 누를 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동료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면서 모두 자신들이 미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죽을 때의 나이가 겨우 49세였다.
<출처 :【원전】 조선왕조실록 38 집 166 면>
○前參判李敏迪卒。 敏迪坐上疏救李翔等, 特命補外, 又以赴任稽滯, 罪廢經年而卒。 上聞其死, 嗟惜於筵中, 蓋未嘗終棄也。 敏迪相臣敬輿之子, 擢丙申科壯元。 孝宗覽所對策而稱善, 爲文長於章奏。 在三司論列甚多, 明暢剴切, 有前輩風性。 任眞不喜修飾, 而直諒溫雅, 無一毫鄙俗態。 平居自奉淡泊, 居處衣服飮食, 一無所累其心, 一時儕流, 愛而敬之, 皆自以爲不及。 死時年纔四十九。
<출처 :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43장 B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