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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달리니 요가 | 단학 | |
기운 기의 운행로 기의 밀집처 |
프라나 나디 챠크라 |
기 경락 경혈 |
그러나 나디와 경락의 노선이 구체적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고, 나다와 경락을 따라 기가 운행한다고 생각되는 운동 방식과 방향이 서로 다르다. 쿤달리니 요가에서는 기가 물라다라 챠크라에서 시작하여 위로 직선적으로 상향하는ㄷ데 반해, 단학에서는 기가 단전에서부터 시작하여 독맥을 따라 몸 뒤쪽으로 올라가고 다시 임맥을 따라 앞쪽으로 원을 그리며 돈다. 또 챠크라와 경혈의 의미도 서로 다른데, 챠크라는 스슘나 위에 이다 나디와 핑갈라 나디가 만나는 부분에 있는 것이고, 경혈은 일방향의 맥락중에 있는 것이다. 챠크라와 경혈중에는 그 위치가 서로 같거나 비슷한 것들도 있지만 전체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1. 사하스라라 챠크라(정수리) --- 백회혈(정수리)
2. 아지나 챠크라(미간) --- 인당혈(상단전 :미간)
3. 비슈다 챠크라(경추)
4. 아나하타 챠크라(심장근처) ---진중혈(중단전 :가슴)
5. 마니퓨라 챠크라(배꼽 근처)
6. 스바디스하나 챠크라(단전아래) ---기행열(하단전:배꼽 세치 아래)
7, 물라다라 챠크라(회음) --- 회음혈(회음)
또한 쿤달리니 요가는 물라다라 챠크라에 쿤달리니라는 근원적 에너지가 있다고 보며 그것을 각성시켜 사하스라라 챠크라까지 끌고 올라가 둘을 합일시켜 삼매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단학에 있어서는 기를 모아 형성하는 단전이외에 쿤달리니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단학은 기를 돌림으로써 궁극적으로 양신을 형성한다거나 출신하여 신선이 된다거나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데 반해, 쿤달리니 요가에는 그것이 없다.
이와 같은 차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프라나나 기 또는 나디나 경락등이 모두 착각이며 허구라는 말인가? 개인적 착각이 아닌 집단 주관적 착각인가? 아니면 인도인과 중국인 또는 한국인의 신체 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말인가? 요가와 단학이 인간 신체안의 생명 에너지로서의 기의 흐름을 설로 다르게 파악하면서도 그 각각이 완성된 수행체계로서 실수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기와 그 기의 흐름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 신체안에 생명 에너지로서의 기가 있으며, 우리가 내적으로 그것에 정신을 집중할 경우 그것을 직접 감지할 수 있고 또 그것의 운행을 따라가거나 조절할수 있는 것을 말해 줄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운행로에 관한 한 어느것이 정확한것인가?
요가를 수행한 사람은 요가의 말대로 기의 행로를 느낄 것이며, 단학을 수행한 사람은 단학의 말대로 기의 행로를 느낄 것이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가? 여기서 둘 중 어느 하나가 맞고 다른 하나는 착각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가능할 것이다. 즉 기의 대체적 운행은 정수리부터 회음까지이며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기 운행의 세세한 부분이 어느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몸 안에서 기가 흐를수 있는 수많은 노선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어느 노선이 중요 노선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어떤 길을 주된 길로 선택하여 그 기리로 기 운행을 많이 행했는가에 따른다. 이는 마치 숲속에 길이 생겨날 수 있는 방향은 무수히 많은데, 그 중 어느 것이 실체적으로 길이 되는가 하는 것은 사람이 많이 걸어가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것과 같다. 길이 있어서 걷는 수도 있지만, 많이 걸음으로써 그것이 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신체 상에 기가 통행할수 있는 무수히 많은 경락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어느 경락에 집중적으로 기를 많이 통과시키는가에 따라 기의 노선이 그렇게 형성될수 있다는 말이다. 요가나 단학 수행은 기의 운행이라는 수행을 통해 기의 주된 통로를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 될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기를 자신의 정신적 통제하에 두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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