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의 낮은 음자리표 (1)
- 귀거래사 흉내내기
「귀거래사(歸去來辭)」는 도연명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쓴 시다. 도연명은 전원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그 감회를 시로 표현했다. 특히 서리를 무릅쓰고 피어있는 국화와 푸른 잎이 지지 않는 소나무를 좋아했다고 한다. 도연명은 유가와 도가의 영향을 받았으며, 생사를 자연의 운행에 따르는 한 과정으로 보고, 삶에 연연하거나 죽음에 초조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나이가 들면 어머니같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있게 마련이다. 피천득 선생님이 번역한 「귀거래사」의 마지막 연이 특히 내 마음에 와 닿아 나도 실천해 볼 심산으로 작은 농장을 마련하고 3년째 공을 들이고 있다.
청명한 날 혼자서 산책을 하고
등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끌며
동산에 올라 오랫동안 휘파람을 불고
맑은 냇가에서 시를 짓고
이렇게 나는 마지막 귀향할 때까지
하늘의 명을 달게 받으며
타고난 복을 누리리라
거기에 무슨 의문이 있겠는가
- 도연명, 「귀거래사」 중에서
「귀거래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도연명은 전원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아가겠다고 한다. 자연의 본질을 체득하고 순응하는 것이 도가 사상의 핵심이다.
사실 농장을 가꾸자면 크고 작은 일이 날마다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돌보지 않으면 귀찮을 수도 있다. 어떤 친구는 정년퇴임을 하고 서울 근교에 농장을 마련하고 몇 년 살다가 정리하고 다시 도심으로 돌아왔다. 어떤 문사(文士)는 서울 생활을 아얘 정리하고 호기차게 산골로 들어갔지만,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오도가도 못하고 고독이라는 병의 노예가 되어 그가 쓴 글을 읽어보면 측은할 정도다.
나는 나이가 들어 승용차를 운전하기 어려울 때 기차를 이용하여 두시간 이내로 갈 수 있는 곳에 작은 농장을 마련하였다. 아무래도 다니던 병원이나 예술관련 모임 등으로 서울에 가야 할 일이 많아서, 30년 넘게 살아온 목동아파트를 근거지로 하지만, 가능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부담없는 거리인 익산에 농장을 꾸렸다.
농장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도 농가라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농가에 대한 사전의 설명은 ‘농사를 본업으로 하는 사람의 집’이라고 되어 있다. 전원주택이라 하면 그럴듯한 외양이 떠오른다. 나는 수십 년 전에 붉은 벽돌로 튼튼하게 지어졌던 집을, 사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조금 손을 보아 살고 있다. 전원주택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고, 작은 농장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집에 딸린 제법 넓은 텃밭에 각종 꽃과 나무와 채소를 심었다.
농장 이름을 나의 아호를 따서 ‘심재원(心齋園)’이라 지었다. 심재(心齋)는 『장자』를 읽다가 발견한 단어다. 정신을 청정(淸靜)하게 가다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장자에 있어서 도를 깨닫는 하나의 방법이다. 『장자』의 인간세(人間世) 편에 나오며, 공자와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顏回의 대화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성경에도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한다(마태복음 5장 8절).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면 오욕칠정에 휘둘리기 마련이고,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 싶다.
정년퇴임 하자마자 문학박사 과정을 수학하면서, 장자를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는데 그중에 심재(心齋)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닿아 아호를 ‘심재’라 했다. 물론 허세욱교수님이 지어 주신 녹산(鹿山)이라는 아호도 좋아한다.
사람들이 호를 짓고, 서재 등에 어떤 명칭을 붙일 때는,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방향을 설정하고 싶은 의도가 반영된다. 내가 ‘심재’라 함은 이미 마음을 비웠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욕심(貪)과 분노(瞋)와 어리석음(癡)으로 가득하니 이를 청소해야겠다는 각오를 담은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겠다는 노력 그 자체가 또 다른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작은 농장 심재원에는 각종 꽃과 나무를 종류별로 두어 그루씩 심어, 계절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익어가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봄에는 복수초를 필두로 매화와 수선화가 계절의 문을 열고 백목련과 모란이 뒤를 잇는다. 여름에는 작은 장미원에 각색 장미꽃이 흐드러진다. 가을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국화가 주인 노릇을 하고, 겨울에는 감나무에 달린 까치밥이 겨울 내내 꽃을 대신한다.
열매는 초여름 앵두와 보리수를 시작으로, 살구와 자두 그리고 포도가 뒤를 이어 풍성하다. 가을에는 키위가 앞장서면서 사과와 배 그리고 감이 정원을 맛있는 아름다움으로 장식해 준다. 과수는 원예종묘사에서 독특한 품종을 구입해 3년전부터 심기 시작하여 작년부터 조금씩 열렸다. 금년엔 꽃이 만개한 것을 보니 탐스러운 열매가 제법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요즘에는 꽃과 나무의 전설을 찾아보고, 이를 대상으로 글을 쓰고, 문인화를 즐겨 그린다. 심재원에는 가장 오래된 매화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숨어 있는 하얀 향기가
우리의 얼룩진 마음을 다독이며
꿈길을 내고 있다
선비의 학문과 기개가
나무가지마다 배어
수 백 사계(四季)를 유유자적
너저분한 백년을 채우겠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과객들에게 내미는
하늘 정기 가득한 처방전이
다섯 개의 꽃잎에 가득
- 졸시, <남명매(南冥梅) -꽃 1>
남명매는, 지리산 아래 산청군에 있는 산천재(山天齋)의 뜰에,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이 61세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南冥梅)다. 아버님께서 산천재에 들렸을 때, 같은 종류의 매화나무를 사다 심었다고 들었다. 내가 3년전부터 이 농장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홍매도 사다 심었는데 역시 남명매만 못하다. 문인화의 단골손님인 매화는 짧은 봄날 꽃을 보기 위해 심는다. 나도 매화를 6개월간 그렸으나 아직도 필치가 둔하다. 두 번째 문인화 개인전을 열겠다고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붓질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나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해가 뜨기를 기다리다가, 여명이 밝아오면 장미원(Rose Garden)에 심은 이십여 그루의 장미를 돌보고, 두 평 남짓한 연못에 있는 수련과 창포 사이를 유유히 오가는 금붕어와 잽싸게 숨기 일쑤인 십여 마리의 토종 붕어를 바라보고, 건강에 좋다는 야채를 심은 채전밭과 크고 작은 화단을 둘러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아직은 서울과 시골, 양다리 걸치기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덕에 서울 집에서 머무는 시간보다 농장에서, 나이 듦과 화해하며, 마음을 시와 화폭에 담으려고 애쓰는 시간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분주하게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것이 말년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