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문학 제4호용 평론>
새로운 장르, ‘가계수필’에 관한 소론
이 유 식
1. 들어가며
소재에서 장르가 나왔건 아니면 장르가 생기고 소재 개발이 되었건 그것은 크게 따질 일이 아니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일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재와 장르는 불가분의 관계로서 상호보완적임은 자명하다. 새로운 장르를 염두에 두고 거기 걸맞는 소재를 찾건 또 아니면 새로운 소재를 찾다 보면 자연 새로운 장르도 나오기 마련이다. 비유해서 말해 보면 이는 태어나기 전의 아기에게 미리 이름을 지어놓을 수도 있고, 또 아니면 태어난 후 이름을 지어 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수필계의 발전을 기대한다면 소재가 먼저였건 장르가 먼저였건 요는 늘 고정된 장르의 범주 내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르의 창출이나 새로운 소재의 개발은 곧 장르의 확장이 되고 소재의 확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기서 ‘가계(家系)수필’이란 새로운 장르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가계수필’이란 용어와 그 발상의 배경
‘가계수필’이란 한마디로 ‘나’의 가계사에 나타난 여러 일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말한다. 한집안의 직계는 물론 방계도 그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주변에서는 ‘나’를 소재로 한 사(私)수필이나 자전수필 그리고 가족 소재의 가족수필 등속은 쉽게 만났고 또 만날 수도 있다. 그리고 소설쪽만 보아도 ‘나’를 소재로한 사소설은 물론이거니와 가족소설이나 가족사 소설이 있고 또 더 나아가면 가계소설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수필쪽은 소설쪽과는 좀 다르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아직껏 ‘가계수필’이란 용어는 물론 그런 류의 작품들을 거의 듣도 보지도 못했다.
적어도 지금 내가 생각해 보고 있는 이런 유형의 수필은 가족수필이 살아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로서 동시대의 수평적 라인의 이야기라면, 이는 한 집안의 가계 즉 세계(世系)를 따라 위아래를 살펴보는 수직적 접근이요 그 소재 발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내가 스스로 이 장르를 생각케 된 데에는 그 계기와 배경이 있다.
나는 우리 집안의 7대 종손이다. 그나마 젊은 시절이었던 4, 50대에는 종손으로서의 체면치례로 일단 집안의 뿌리쯤은 좀 알아두어야 하겠기에 그저 주마간산 아니면 건성으로만 알아두었다. 그러다가 근년에 시간이 있고 해서 마치 보학자(譜學者)가 된냥 족보를 비롯하여 관련 자료들을 제법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 자신이 직접 수필도 쓰고 또 수필 비평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문득 ‘가계수필’이란 장르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난날 자전수필을 쓰는 과정에서 집안의 내력 이야기를 한편 썼었던 기억도 떠올라 그것이 바로 ‘가계수필’의 일종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모 문학지에서 수필 한편 청탁이 들어왔다. 평소 이런 생각들을 한 바 있기에 바로 이때다 싶어 ‘가계수필’이란 분명한 장르의식을 갖고 시도적으로 글 한편을 써 보았다. 그 내용을 참고적으로 소개해본다.
나는 서부 경남 산청군 신안면에 있는 ‘청현’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물론 성장은 다른 곳에서 했지만 그곳은 나의 출생지요 또 우리 집안의 세거지(世居地)이기도 하다. 나의 13대조인 중시조 할아버지가 이 마을에 들어온 이후 12대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요, 한때는 일가 친척의 집성촌이기도 했다. 이 할아버지는 남명 조식 선생의 고족(高足) 제자 중의 한 분인데 바로 위 직계 3대는 제법 이름 있는 벼슬을 했지만 이 할아버지만은 일체 벼슬을 마다하고 오로지 선비로서 제자들만 가르치며 평생을 보내신 분이다.
그래서 그 글에서는 이 마을이 세거지가 된 사연에다 이 중시조 할아버지에 관한 행장을 좀 소개하면서 한편 흥미로운 수필적 발상의 접근도 있어야 하겠기에 이 할아버지와 나와의 비슷한 면을 우연의 일치 아니면 아전인수식 해석일지는 모르지만 일부러 소개도 해 보았다.
바로 이 글을 써 나가는 과정에서 문득 후손으로서 나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구나도 싶었고, 또 독자들에게 내 집안과 나에 관한 정보 제공도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가계수필’이란 것은 이런 식으로 쓰면 되겠구나 하는 확신도 갖게 되어 감히 그 제언을 해 보는 것이다.
3. ‘가계수필’의 자료와 그 소재
자료라면 먼저 족보가 있을 것이다. 다음, 조상이 죽은 후에 그의 일생의 행적을 적은 행장(行狀)이나 또 집안 조상들의 행적에 관한 기록인 가장(家狀)이 있을 것이다. 또 묘 앞에 세워둔 작은 비석의 글인 묘갈명(墓碣銘)도 있다. 또 있다. 구전되어 내려오는 가전(家傳)의 이야기도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면 선대들의 문집은 물론 다른 분의 문집에서 참고자료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편 권문세가의 집안이라면 조상 무덤 근처의 길에 세워둔 신도비(神道碑)의 비문 내용도 있다.
그러니 집안이 있고 조상의 뿌리가 있는 이상 그 어떤 수필가일지라도 이런 자료들은 관심만 있으면 쉽게 구하고 또 쉽게 찾아보거나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자료만 있으면 알맞은 자료들을 찾아내 요리만 하면 일은 끝난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는 이런 자료에서 어떤 것이 과연 ‘가계수필’의 소재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멀리나 가까이의 집안 내력이 소재다.
둘째, 집안운에 관한 것이다. 재운, 벼슬운, 수명운, 자손운 등등이다.
셋째, 집안의 생활사이다. 생활형편, 혼척관계, 이사 다님, 대물림의 직업, 가문의 행과 불행, 개인적 행운이나 불운 또는 악운 등등이 있을 것이다.
넷째, 도덕과 윤리적 덕목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우애나 혈연의식, 선행(善行), 충절(忠節), 정절(貞節), 효행(孝行) 등등이다.
다섯째, 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대물림의 어떤 특징이나 특질도 이에 속할 것이다. 가령 손재주나 솜씨, 머리재주, 성격(성질)이나 성품, 취미나 취향, 유전병 등도 그 소재다.
4. 몇 가지 생각나는 작법 요령
첫째, 지나친 가문 자랑이나 집안 인물 자랑은 피하면 피할수록 좋을 것이다. 최대한 주어진 문맥속에서 겸손의 미덕을 살려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해야 되리라 본다.
둘째, 자료 중에서 가능하면 어떤 특징적 공통분모가 될만한 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좋을 것이다. 가령 선대(先代)에서 단명(短命)이나 요사(夭死)가 많다면 그것이 바로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불칼 같은 집안 내림의 성질이 있다면 그것 역시 소재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글에서라만 단명과 요사의 원인을 또 성질 문제라면 그로 말미암아 불이익과 손해 기타의 해프닝을 오늘의 ‘나’의 시작에서 반성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으리라 본다.
셋째, 역사소설가들이 어떤 사건이나 사안에 대해 그 구체적 형상화를 위해 개연성의 상상력을 최대로 발휘하듯, ‘가계수필’에 있어서도 응분의 수필적 상상력의 발휘도 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한 예로서 그때 그 시절에 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후에 과연 어떻게 되었고 또 어떤 결과를 나왔을까 하는 가정법적인 상상력의 발휘 같은 것도 있고 볼 일이다. 크게 보면 거의 화석화 되어 있는 자료들에 문학적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뜻이다.
넷째, 과거의 이야기를 노상 과거의 시각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때론 오늘의 시각에서 비교해 보거나 재음미해 볼 필요도 있다.
다섯째, 가문의 여러 전통속에서 온고이지신처럼 그 어떤 장점이나 가치도 찾아낼 필요도 있다. 더 나아간다면 설사 온고이지신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의미부여나 현대적 새로운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5. 나가며
수필가들에겐 모든 것이 자료요 소재다. 위대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 그리고 잘난 사람들의 행적은 전기를 읽으면 족하다. 그러나 사대부 집안 후손의 수필가들이 극히 한정적임을 감안하고 대신 선대(先代)가 대부분 평민층인 점을 상상해 보면, 그런 선대들의 이야기는 족보나 기타 자료에서 잠만 자고 있지 않는가. 후손으로서 수필가 각자는 그런 자료들을 찾아내 수필로서 문학적으로 재처리, 재가공, 재생산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의무는 아니지만 후손으로서의 책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수필의 필요성에는 몇 가지 효용성도 분명 있다.
맨 먼저 필자인 ‘나’의 입장에서라면 집안의 뿌리 이야기란 거울을 통해 오늘의 ‘나’를 투영해 볼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이다. 때론 힘과 용기 그리고 자긍심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또 자체 반성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에겐 칭찬 받을만한 모범적인 이야기라면 본보기도 될 것이고 반대로 좋지 못한 이야기라면 타산지석의 교훈도 될 것이다. 또 있다. 만부득이한 슬픈 이야기라면 동정심도 유발시켜 긍휼의식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런가 하면 타인의 집안에 대한 조각 지식이나 조각 정보를 얻을수도 있어 호기심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 보면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지난 과거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활, 관습이나 풍속 등등의 어느 일면을 엿보게 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따라서 ‘가계수필’의 개척은 반드시 필요하다. 수필 소재의 새로운 영토도 그만큼 확장시킬 수 있는 장점과 유리점은 분명 있다고 본다.
이유식-새로운_장르, 가계수필에 관한 소론.hwp
이유식
진주고, 부산대 영문과, 한양대 국문과 대학원 졸, 세종대 박사과정 수료, 평론가,
1961년 『현대문학』등단, 배화여대 교수 정년퇴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현) 한국문인혀보히 고문,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상임고문, 청다문학회 이사장,
현대문학상, 예총예술문화대상, 한국문학상 외 다수 수상, 평론집 『반세기 한국
문학의 조망』외 8권, 수필집 『세월에 인생을 도박하고』외 8권, 평전 2권, 편저
4권, 공저 1권.
첫댓글 저도 이 <소론>을 읽고 언젠가 후손의 책무를 다해볼까 생각합니다.
키가 9척에 용력 담력이 과인하시어 함경도병마절도사 전라좌수사 지내신
김해김씨 4군파 내력을 담아...
청다님의 작품 정말 고맙습니다 이런글이 올라와야 남강문학 4호가 빛이 나지요
수술하시고 몸이 아직 부대낄텐데 ..글 준비해 올리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봉화에게 시달리기전에 6월 말까지 깔끔하게 처리하신 멋진 사나이 ...부라보 ! 안병남
김거사,참 좋은 일입니다.비평가란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여 창작의 동기부여를 제공하는 것이 책무중의 하나라서 써보았답니다.
봉화님,원고 구두약속은 지켰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