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한국의 작은 소도시인 이리의 기차역에서 사상초유의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그후 이리는 익산으로 지명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고 폭발사고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지 오래다. 이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진서(윤진서)는 당시 엄마 백속에서 폭발사고의 미진을 받고 태어난 불운의 여인.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여린 영혼을 가진 그녀는 여전히 그 도시에 남아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런 진서를 지켜보며 보살피던 오빠 태웅(엄태웅) 역시 점점 그녀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마침내 태웅은 진서를 데리고 바다로 향하는데...
따로 또 같이 한 편의 영화로 출발해 <이리>와 <중경> 두 편의 영화가 되기까지
<이리>와 <중경>은 애초 한 편의 영화로 기획되었던 작품이다. 이리역 폭발사고를 모티브로 하여 시작된 <이리>는 처음에 절반은 중국의 “중경”에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익산”에서 촬영할 예정이었다. 영화에는 그 배경이 되는 나라와 그곳의 삶이 온전히 묻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장률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한국의 삶이 묻어나는 영화를 찍기 위해 자신이 익숙한 중국에서 시작해 한국에서 끝맺는 전개 방식을 선택했다. 완성된 시나리오가 아닌 이야기의 얼개에서 시작해 현장에서 그곳의 공기와 그곳의 삶이 주는 느낌을 더해 영화를 완성시키는 작업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장률 감독. 이 한 편이자 두 편인 영화는 2007년 여름, 중경에서 크랭크인 했다.
장률 감독은 “한국에서 산 적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 제대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중경>을 찍고 난 다음 이건 정말 자신이 있었지만, 한국 분량은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영화를 시작할 때 두 개의 원칙이 있었는데 하나는 무조건 중경에서 절반, 이리에서 절반을 찍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중경에서는 여름에 찍고 이리는 겨울에 찍겠다는 원칙이었다. 중경을 선택하게 된 것은 절대적으로 이리를 선택하고 난 다음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느낌이 다른 두 도시를 ‘대구’처럼 촬영하려는 의도를 밝힌 바 있다. 영화도 유기체처럼 운명이 있다고 믿는 장률 감독은 <중경>을 촬영하며 점차 분량이 늘어나기 시작해 결국 95분이 넘게 되자 <중경> 분량과 <이리> 분량을 한 편으로 완성해 4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상영할 것인지, 두 개의 영화로 나누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고 결국 제작진과 감독은 두 편의 영화로 개봉을 결정하게 되었다.
시리즈물이 아님에도 이렇게 한 편으로 시작되었다 두 편으로 나뉘어 개봉하게 된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게 된 <이리>와 <중경>은 각 영화의 호흡을 살리기 위해 결국 폭발 전의 도시 <중경>과 폭발 후의 도시 <이리> 두 편의 영화로 관객들을 만나게 되었다.
잃어버린 30년의 기억,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농담처럼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빨리”라고 한다. 한국전쟁 후, 성장과 개발이 국가 제일의 가치로 여겨졌을 만큼 성장에 대한 열망으로 모두가 내달리고 있던 1970년대는 성장이라는 유령을 좇기 위해 수많은 희생이 정당화되거나 목표를 벗어난 가치들이 소리소문 없이 묻혀지던 시기였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를 시작으로 1971년 대연각 화재사건, 1971년 실미도 사건, 1972년 유신 선포,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1974년 육영수 피살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피살사건,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1979년 박정희 피살사건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는 첨예한 냉전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성장 제일주의가 부른 인재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사고의 회오리바람이 대한민국을 정신 없이 강타하던 정점의 시기였다.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이리역 구내에 40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화차가 폭발했다. 화약을 가득 싣고 광주로 가기 위해 하행선에 대기 중이던 화물열차가 폭발하면서 반경 1km 이내의 건물과 가옥이 초토화 되었고 사고지점 10km 근방의 주택 창문은 모두 깨졌다. 이 사고로 모두 59명이 죽고 1,316명의 부상자가 생겼으며 1만 6천명의 이재민과 1만여 동의 가옥손실로 당시 전무후무한 인재(人災)로 회자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이리역 폭발사고’이다. 당시 시민들의 대부분은 한국 대 이란의 월드컵 예선전을 보고 있어 더욱 피해가 컸다. 그 폭발사고 뒤 ‘이리’는 ‘익산’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영화 <이리>가 제작되던 2007년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가운데 이리역 폭발사고 30주년을 맞는 해였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를 모티브로 한 <이리>는 그 사건이 얼마나 참혹하고 큰 사고였는지를 돌이켜보고자 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 사고를 통해 상징적으로 대변될 수 있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참혹한 사고 이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잊혀진 가운데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 이리, 그곳에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