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의 신학(40)
경계에 선 화해자
얼마 전 바다에 다녀왔다.
여름도 겨울도 아닌 가을의 동해는 시원했고,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도 안녕했다.
하지만 수평선은 가시권의 한계일 뿐이고,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은 수평선만이 아님을 우린 안다.
모래사장도 나도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내가 하늘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영성작가 헨리 나웬은 “가장 낮은 바다가 가장 깊은 곳이다.”고 말했다.
인간은 낮은 곳에 자리할 때, 존재의 가장 깊숙한 심원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장 낮은 곳에 설 때 가장 높은 뜻이 통하는 존재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우리가 2천 년이 넘도록 기억하는 그분도 그랬다.
그는 바다 속 깊이 헤엄치는 잠수 능력도 없고 하늘 높이 날아가는 비행 능력도 없지만, 온 바다와 땅과 하늘을 아우르는 영혼을 지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분이 서 있었던 위치가 바로 하늘과 땅의 경계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경계는 이쪽과 저쪽의 차이를 없애고, 위와 아래의 구분을 극복한다.
경계는 애매한 회색지대가 아니라, 이쪽과 저쪽이 만나고 위와 아래가 통할 수 있는 장소이며, “드나드는 문”(요한 10:7)과 같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이쪽의 존재가 저쪽에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예수께서 스스로 “나는 내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라고 한 것은 당신의 양들(인간)이 당신과 만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처음부터 “아기 하느님”(김형영의 시어)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냥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죽고 부활함으로써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
부활 사건 이전 역사적으로 생존했던 예수가 부활 사건 이후 신앙적인 그리스도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그가 실제로 어떤 변화를 한 것이 아니라 그를 보는 사람들의 관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관점이 변화한 것은 단순히 해석의 폭이 넓어진 것이 아니라, 부활사건에 대한 체험이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알던 그분이 그런 분이 아니라, 사실은 이런 분이었구나.”하는 새로운 발견은 그가 평생 서 있었던 자리가 바로 하늘과 땅의 경계였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를 거닐었다.
그 때 그는 땅 위를 걸었지만 하늘도 가로지르고 있었던 셈이다.
호수 위에서 말씀하셨지만 하늘의 기운을 담아 전한 것이다.
그는 아주 철저한 인간으로 말했지만, 온전한 하느님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경계’에서 이탈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경계는 사이의 공간이다.
‘사이의 신학’이 주목하는 장소가 바로 경계인 점도 바로 이런 연유이다.
그분이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고 떠난 이후 이천년, 우리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수많은 경험의 축적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차이와 구분이라는 개념의식을 갖도록 하였고, 그 결과 더 이상 신비한 경계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경계에서 듣는 하느님의 음성, 경계에 서 있는 자신과 우주의 합일, 경계에 우뚝 처 박혀 있는 십자가의 존재와 의미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한다.
세상은 세상이고 하늘은 하늘이라고.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이라고.
너무 쉽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에, 나는 너와 다르고, 나는 이 세상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도 멀어진 것이 아닐까.
예수는 잡혀가서 받은 심문 과정에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징표도 보여주지 않았다.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이 자신을 증거하는 데 다른 증표를 사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가지 기적과 증표가 필요할 것이지만, 예수님은 오해를 불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경계인의 삶은 이렇게 현실적으로는 처참해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어떤가?
교회와 사회 사이의 경계인으로 사는가?
너무 구분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주일엔 교인, 주중엔 사회인?
그렇다면 우리는 경계인이 아니다.
경계인은 양쪽에 굳건히 서서 서로 모순되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세상에 계셨던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지만, 자신의 신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고, 그 결과 하늘과 땅의 경계를 잇는 화해자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인은 경계인이며 화해자이다.
이한오 신부 (프란시스, 춘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