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겨난 모든 것들은 소멸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사건, 사고나 병고로 인한 지인들의 죽음을 수시로 접하면서 멸滅은 멀리 있는 게 아닌,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임을 다시 일깨우곤 한다. 개인의 소멸부터 크게는 지구의 멸망까지 언급함에 잠재된 불안을 넘어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멸滅에 대한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멸滅이 수반하는 상태 중의 하나는 상실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실을 경험하거나 경험하게 된다. 상실은 존재성의 일부를 구성함에도 이를 구분하여 인식함은 인간의 '있음'만을 지향하는, 부분 인식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감각의 지속성 때문이다. 상실이 없는 생성, 취득만의 존재성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감각하는 존재는 이에 응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왜, 사람들은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야 하는 걸까. 심지어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잠을 자기도 한다. 존재는 비존재를 포함한다. 존재하지 않음은 존재를 기반하며, 존재는 반드시 비존재의 상태로 전환하거나 전환하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열린 책들. 2017)에서 '중첩하지만, 독립적인 무수히 많은 세계와 프랙털 세계론'과 '하나를 전체로 간주하는 실수'를 언급했다. 감각되는 여기의 세상만이 전부라고 단정 짓는 것은 인식 감각의 오류다. 인간의 감각이 감지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미장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무수히 많은 의미장과 다양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라고 저자는 얘기했다. 멸滅이나 죽음, 상실이라고 부르는 부정적인 것들 자체가 원래부터 없는 것이다. 죽음, 상실 같은 것은 애초부터의 존재성 부여 대신에 '에너지의 변화'로 인식함이 바람직하다. 멸滅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할 필요가 있는 물리적 증거와 증명은 넘쳐난다. 물질 육체의 한계에 고착한 채로 감각하는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다. 멸滅이 넘쳐나는 세상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불안하다. 오로지 있음과 없음의 구분 만이 세계를 단정하는 정확한 방식일까. 교차하는 낮과 밤사이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낮과 밤처럼 멸滅은 인간들의 명명일 뿐이다. 멸망, 소멸 같은 부정적인 상황을 향하는 일체의 것에 대한 진리의 말씀은 이미 세상에 나온 지 오래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언급과 불안, 슬픔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주영헌 시인의 작품인「졸음의 지점」(시집『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에서 "아무리 몸을 구기며 고쳐 앉아도 불편하기만 한 / 난청이 몸을 흐르고 있다"라고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온전하다고 느끼기는 힘이 드는 것은 맞는 말이다. 이를 물질세계의 특성으로 일단은 받아들인다. 시인의 작품「멸종」(시집『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달아실.2026)에서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 // 마지막 사랑의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류는 / 완벽한 멸종을 예약하고야 만 것입니다 // 벼락 맞을 각오로, // 당신이 사랑을 싹 틔우지 않는다면"라고 했다. '싹 틔워야할 사랑'은 불완전한 인식 오류가 넘치는 세상에서 나아가야 할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상실로 인한 아픔이 넘치더라도, 벼락을 맞는 한이 있어도 이를 온전하다고 여김은 온전하지 않다. 나를 비롯한 일체 만물이 소멸이라고 부르는 상태를 맞이하더라도, 사랑을 싹틔워야 한다는 시인의 말이 오래 남는다. 고대로부터 많은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사랑과 자비 같은 인류애를 얘기해왔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57470
첫댓글 멸이 없다면 세상사가 어떻게 될까요?
존재를 위한 멸이 위대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