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세고개의 함성(喊聲), 안성인의 항일투혼
筆花 黃 晋 燮 (수필가/문화관광해설사)
경기도 안성에 만세고개가 있다.
비교적 평야 지역인 이 지방으로서는 꽤 높은 고개 길이라고 할만하다.
지금은 포장도로가 잘 정비되어 자동차가 연락부절로 왕래하지만, 90여 년 전 3.1운동 당시에는 험준한 산길이었을 것이다.
원래 이 고개의 이름은 성은고개, 또는 양성고개라고도 하였다.
3.1운동 때 성은고개를 중심으로 서부안성 지역에 격렬한 만세운동이 일어났었다. 그 이후 인근 사람들이 “만세고개"라고 불러 오다가, 1991년 12월에 정부에서 건설부 고시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지역명칭을 개정하였다.
만세고개를 경계로, 서북쪽이 원곡면이고 동남쪽은 양성면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을 하기 전까지는 두 면과 공도면을 포함하여 양성군 이었고 군청소재지가 양성에 있었다.
그때 원곡면에는 면사무소만 있었고 경찰관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나 학교, 우편소(지금의 우체국) 같은 관청은 없었다. 험한 고개를 넘나들면서 양성의 기관과 시설을 이용하였었다. 원곡 양성 두 면은 큰 고개가 가로 놓여있기는 하였으나 생활권이 겹치고 있었다.
지금은 고개 마루터기에「만세고개」라는 자연석 비석을 세웠고 약 3만3천여 평방미터에 3.1운동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는 산허리에 전통양식으로 광복사(光復祀)가 서 있고 안성지역 순국선열25위와 애국지사 206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그 뒷산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는 기념탑이 그때의 항일 투혼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면서 우뚝 서 있다.
지상 2층으로 세워진 아담한 전시관에는 3.1운동 당시의 기념물을 곁들여 사진과 문헌들, 그리고 시청각 및 체험시설들이 전시되어 있다.
.
기념관 구내에 펄럭이는 100여기의 태극기 사이를 걸어 들어가노라면 자유와 독립을 외치는 선열들의 절규와 만세함성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서울 탑골 공원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약 1년간 계속된 만세항쟁을 통 털어 일컫는 항일 만세시위와 민족운동의 총칭이다.
이곳 만세고개를 중심으로 한 서부 안성지역은 1919년 3월 중순 경부터 학교와 마을 단위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다가 대규모 시위 항쟁으로 전개된 것은 4월1일이었으므로 이 고장의 의거를 안성 4.1만세항쟁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열흘이 지난 3월11일 오전 11시, 양성공립보통학교(현 양성초등학교)운동장에서 한국인 교사들과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당시 보성전문학교 학생이던 남진우(양성초교1회 졸업생/덕봉리 출신)와 선린상업학교 학생 고원근(같은 학교 2회 졸업생/동항리 출신)가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고향 모교에 내려와 후배들에게 항일독립 정신을 일깨우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3.11학교에서의 만세시위가 서부안성 지역 만세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야기라는 일본인 교장이 있었고 교사들 중에 일본인도 있었으나, 나이가 많은 학생들의 당당한 기세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학교에서의 만세운동은 간헐적으로 며칠간 계속되었다.
양성면과 원곡면의 학생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3.11학교 만세 소식은 순식간에 두 면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역 여론은 인근 각처의 시위 정황에 지역 내의 만세소식이 실려 극히 격앙되고 흥분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세 하에 이 지역 각 마을들끼리 긴밀한 정보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문헌이나 연구자들의 발표에도 지역 주민의 정보교류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정보소통이나 계획적인 협의가 없이 장날도 아닌 날 한밤중 같은 시간에 많은 군중이 모일 수 있었을까? 필자는 두 면 각 마을에 분포되어 있는 양성초등학교 동창생들 끼리나 마을 지도자상호간, 나아가 원곡 양성 양면 민간 지도자간에 긴밀한 정보교류와 거사에 대한 모의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정세와 사안의 속성상 은밀성과 기밀을 요하는 사항이었기 때문에 역사의 표면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
양성면에서 4월 1일 저녁, 각 동리별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덕봉리에서는 200여명의 주민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고, 오세경(吳世卿), 오관영(吳寬泳)이 주도하여 면소재지가 있는 동항리로 나아갔다. 산정리에서는 이희봉(李熙鳳)의 제의와 손정봉(孫正鳳)의 지휘로 동리 사람들이 마을 앞 행길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면소재지로 향했다. 저녁 9시경이었다.
도곡리에서는 김영대(金永大)가 앞장서 동리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동항리 주재소로 나아갔다.
추곡리, 석화리, 구장리, 명목리에서도 각 동리별로 마을에서 만세를 부르고 연합시위의 장인 소재지로 향했다. 역시 저녁 9시경이었다.
한밤중에 만세함성과 함께 횃불과 태극기의 물결이 파상적으로 면 소재지를 향하여 집결되는 장관을 상상하면 지금도 피가 끓는 흥분을 금할 수 없다. 이들은 동리별로 주재소와 면사무소 그리고 보통학교를 돌면서 만세 시위를 하고 시간이 늦어 마을로 돌아가려고 할 지음, 원곡면민 시위대 행렬 천여 명이 횃불을 밝혀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성은고개를 넘어 양성에 당도하였다.
원곡면에서는 3월 초순부터 보다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거사준비가 진행되어왔다. 내가천리에 살고 있던 이덕순(李德順)은 평택 태생으로 8살에 고아가 되었고 성장하여 원곡면 역말(내가천리)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평택에 많은 재산이 있어 평소에 어려운 친지를 돕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3.1운동 당시 41세이던 그는 장남 덕만(德萬)의 혼수 감 장만 차 2월에 상경하였다가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 독살설을 듣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비분을 느끼고 돌아왔다.
그 후 1차로 최은식을 포함한 4명을, 2차로 6명을, 3차로 8명의 친지를 대동하여 서울에 가, 고종황제의 인산과 3.1운동의 시위현장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시위를 모의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회갑이나 혼인 잔칫집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기회에 은밀히 만세시위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투쟁력을 단련시켜 나갔다.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각기 3월 3일에 있은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여하고, 서울에서 벌이진 시위를 보고 왔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월 25일부터 마을 단위로 소규모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3월 28일부터는 가까운 동리와 칠곡리까지 연락하여 외가천리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하였고, 시위 규모가 점점 커졌다. 만세시위는 29일, 30일, 31일까지 이어졌으며 3월 31일 시위가 끝날 때 이유석과 홍창섭이 “내일도 모인다.”고 예고하였다.
4월 1일 저녁, 원곡 면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다.
이덕순(李德順), 최은식(崔殷植), 이근수(李根洙)가 내가천리를, 이덕순이 외가천리를, 원성삼(元性三), 안문보(安文甫)가 지문리를, 이유석, 홍창섭이 칠곡리를, 이양섭(李陽燮) 이덕순이 죽백리 사람들을 권유, 주도하여 집결한 것이다.
약 1.000명에 가까운 남녀노소 군중이 한 손에 횃불을 또 한손에 태극기를 들고 모여 들었다. 시위 지도자들은 친일 하수인 남길우(南吉祐)면장과 면서기 정종두(鄭鐘斗)를 끌어내어 태극기를 들려 만세를 부르게 하고 대열의 앞장에 세웠다. 대열은 사전에 계획된 대로 양성면을 향했다.
행진이 진행될수록 각 동리에서 호응하는 군중이 늘어나 성은고개에 이르렀을 때는 천명을 넘어섰다.
고갯마루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서당 훈장 이유석 지도자가 앞장에 나서서 연설을 하였다.
“오늘 이렇게 불의에 많은 군중이 모인 것은 천운이요. 우리 양성으로 갑시다. 주재소로 가서 일본 순사들에게 태극기를 들려 만세를 부르게 합시다. 만일 불응하면 나에게도 할 바가 있소.”
잇따라 홍창섭(洪昌燮), 이덕순(李德順), 이근수(李根洙), 최은식(崔殷植), 이희룡(李熙龍)이 차례로 군중 앞에 나서 열화와 같은 연설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곧 독립이 될 것이므로 일본 식민지 정책의 앞잡이인 관청은 불필요합니다. 오늘 밤, 양성면과 원곡면에 있는 주재소나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모조리 두드려 부수고, 양성에 사는 일본인을 모두 내 쫓읍시다. 양성에 가면 일본 순사가 총을 들고 나올 것이니 우리도 무장을 해야 합니다.”
군중들은 각기 돌을 주어 들었고 산에 나무를 잘라 몽둥이를 만들어 들었다. 진용을 정비하여 다시 양성을 향해 거대한 힘의 대열이 움직여 나갔다.
원곡면의 시위대열이 양성에 닿았을 때, 두 면 시위자들은 의식적으로 또는 부지불식간에 합류하여 양성 1.000명 원곡 1.000명이 합쳐진 2.000여명의 연합시위대를 이루게 되었다.
밤 10시경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경찰관 주재소로 몰려갔다. 일본인 타카노(高野兵臧) 순사부장(지서장 격)이 총을 들고 나와 위압적인 자세로 해산을 종용하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몽둥이들 휘두르며 기세를 꺾고도리어 같이 만세 부르기를 촉구하였다.
순사부장과 주재소 안에 있던 2사람의 한국인 순사 보들은 혼비백산하여 뒷산으로 도망쳤다. 성난 군중들은 주재소에 돌을 던지면서 불을 질렀다.
간악한 압제의 최 선단에서 수탈과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경찰관서가 한 밤중에 불타고 있었다.
일단의 군중들은 가까이 있는 우편소(지금의 우체국)로 몰려가 일장기를 태웠으며 전봇대 3개를 도끼질 해 넘어뜨리고, 전신 전화 등 시설을 파괴하여 통신을 두절시켰다.
군중들은 다시 면사무소로 가 집기를 파괴하고 서류를 소각하였다.
양성에는 잡화점을 경영하는 일본인과 고리대금업을 하는 악질 사체업자도 있었는데 그날 밤, 잡화상 외리여수(外里輿手)와 대금업자 융수지(隆秀知)의 집을 습격하여 침구와 가재를 소각하고 모조리 추방하였다.
군중이 한밤중에 흥분상태로 열띤 항쟁을 하면서도,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수탈하던 일제 기관을 공격하고 일인들을 내쫓기는 하였으나, 대열의 앞장에 세운 친일 면장이나 면서기, 고압적인 일본 경찰관이나 일본인을 살상한 사례가 전혀 없었다. 이는 이날 밤의 항쟁이 일제의 탄압을 물리치고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정당성을 지녔을지언정 감정에 흐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시적인 흥분에 치우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밤새도록 만세시위를 하였는데, 새벽 2시에 시위군중은 성은고개를 넘어 원곡으로 돌아가 새벽4시에 원곡면사무소까지 불 질렀다.
일단의 열혈시위자들은 평택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식민지 통치를 위한 일본군대의 군수물자와 병력이 수송되고 있던 경부선 철도를 절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중에 일본군 수비대가 들어온다는 정보가 들어와, 전부 해산하여 피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게 철저히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실력항쟁을 벌린 곳은 전국에 오직 이곳뿐이었다.
헌병경찰 체제로 무단통치를 자행하던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이 만세고개의 항쟁에 일본 관헌의 잔인무도한 보복이 뒤따랐다.
질풍노도와 같은 만세시위가 지나가고 4월 2일, 일제는 조선 주차군 제 20사단 보병 제 40여단 제79연대 소속 장교이하 25명의 병력과 경찰을 투입하여 시위 참가자를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야음(夜陰)에 양성면과 원곡면의 시위 참여 동리를 중심으로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하였다. 동리마다 주도자들의 집을 찾아 방화를 하였는데, 그 와중에 사망 1명, 부상 20여명, 지도급 인사의 가옥 9채를 불태웠다. 시위 참여자 대부분이 피신하여 검거실적이 부진하자, 원곡면장을 시켜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회유하였다. 나와서경찰서장의 연설을 듣기만 하면 사면하여 농사를 짓도록 해 주겠다는 거짓말을 하여 가족과 친척들을 통해 피신자 들에게 전달케 하였다. 4월 19일, 피신했던 사람들을 비롯하여 16세 이상 남자들을 내가천리 뒷산(현 원곡초교 뒷산) 참나무 밭에 모이게 하였다.
느닷없이 일본군 79연대 소속 병력 30여명이 포위하여 무조건 몽둥이로 폭행하며 시위 참여자를 색출하려 하였다.
도주하려던 사람 3명이 현장에서 참살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무자비한 폭행 끝에 361명을 상투로 줄줄이 엮어 삼십 리 길 안성 경찰서로 걸어서 끌고 갔다.
보복과 탄압은 4월부터 6월에 이르기까지 3차에 걸쳐 이어졌다.
만세고개를 중심으로 한 서부안성지역의 희생은 우심하였다. 앞서 본바와 같이 현장 참살 3명, 안성 경찰서에서 고문으로 5명, 서대문 형무소 재판과정 또는 복역 중 옥사로 9명, 고문에 의한 부상 후유증으로 7명, 이렇게 스물 네 분이 순국하였다. 127명이 기소되어 옥고를 치루었는데, 12년 징역형이 2명, 7년 이상이 20명, 경미한 경우 1년3개월 등으로 가혹한 형벌이 언도되었다. 42명이 90대 내지 60대의 비인도적이고 원시적인 태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시위 과정에 일어난 기물 파손이나 일인 재산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거금 1만1천 엔을 부과하기도 하였으며, 시위 참여자 자녀들에게 취학거부를 하여 그 후손들에게 까지 보복을 감행하였다.
만세고개를 중심으로 한 원곡 양성 4.1만세항쟁에 한국독립운동사상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천국 3대 실력 항쟁지 중의 한곳이다.
일제는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그리고 경기도 안성의 원곡 양성지역을, 3.1운동 기간 중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시위 소요지로 규정하였고 그 가운데 안성을 으뜸 되는 지역으로 평가하였다. 이것은 국사편찬위원회도 확인한 바 있다.
평안북도와 황해도는 북한 땅이므로 지금 갈 수가 없다. 만세고개를 중심으로 한 원곡 양성 지역은 우리 국민이 현장에 접할 수 있는 유일한 3대 실력항쟁지다. 얼마나 역사성이 깊은 곳인가? 극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할 것이다.
둘째 2일간의 해방을 쟁취하였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농촌지역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3대 기관을 앞장 세웠다.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 그리고 우편소(지금의 우체국)다. 우편소는 우편(郵便)뿐 아니라 전화 전보를 취급하는 정보의 집산처이므로 매우 중요한 기관이다. 4월 1일 밤, 이 지역의 통치기관들을 전부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원곡, 양성과 공도면, 대덕면 등 4개면에 짧지만 2일간의 치외법권적 무정부 상태 즉 해방지역을 쟁취한 것이다. 이곳 보다 더 많은 군중이 더 격렬하게 시위를 한 곳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곳을 실력항쟁지에 포함 시키지 않는 것은 통치기관을 제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수탈과 탄압을 자행하던 일제의 행정, 치안, 통신기관을 제압하고 2일간의 해방을 이루었기 때문에 3대 실력항쟁지로 된 것이다.
셋째, 순수한 농민들이 주축이 된 항쟁이다.
평안북도 의주군에서는 기독교가 주축이 되었다.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분인 유여대목사가 서울 독립선언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직접 현장에서 시위를 영도하였다. 황해도 수안군에서는 천도교가 주도하였다. 역시 민족대표 중의 한분인 천도교 보성사 이종일 사장으로부터 독립선언서도 지원 받고 시위 지시를 받아 일으킨 만세항쟁이었다.
그러나 양성, 원곡지역에서는 주도세력이 따로 없었다.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 까지 토지조사사업을 한다는 명분으로 동양척식회사를 앞장세워 불쌍한 농민들의 땅을 야금야금 빼앗았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화전민, 소작인 또는 머슴살이나 하층 노동계층으로 몰락하였다. 그래도 살길이 없는 사람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정처 없는 유랑객이 되어 고국을 떠나갔다. 이 지역 사람들은 고향 땅을 지키면서 농사짓고 살기 위해서는 우선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발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순수한 농민항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넷째,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옥고를 치룬 분 만으로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본다. 이 지역의 기소자가 127명이었다. 1920년 7월 23일자 동아일보는 의주군 옥상면과 수안군 수안면을 합한 기소자가 126명이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희생자 363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서울을 제외하면 지방으로서는 원곡 양성 지역이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기소자가 발생하였고 기소된 127명 모두가 옥고를 치루었다. 그만큼 격렬한 만세 현장이었다.
다섯째, 민족대표 33인의 재판에서도 인용되었다.
특히 의암 손병희 선생, 최린, 이종일 등 천도교 출신 인사들의 재판에서 일본 판사는 의주군 및 수안군과 원곡 양성의 만세항쟁을 대규모 폭동으로 간주하였다. 형량 선고에 있어서는 민족대표33인보다 원곡 양성 지역 시위 지도자들을 훨씬 무겁게 선고하였다.
민족대표들 중에 가장 무거운 형벌이 3년 징역형인데 비하여 원곡 양성 지역의 주도적인 열사는 내란죄를 적용하여 12년 징역형을 언도한 것이다. 이 지역 사건을 그만큼 엄중하게 다룬 것이다.
2015년 봄, 안성의 3.1운동 즉 4.1만세항쟁을 생각하면서 호국안성의 역사를 회고해 본다.
멀리 13세기 초엽, 제3차 몽골군의 침입을 박서, 송문주장군의 지휘로 죽주산성에서 격퇴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14세기 초엽, 포악한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에는 인근 모든 지역이 대항하지 못하고 항복하였는데 안성에서는 전 군민이 합심하여 섬멸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임진 왜난 때는 의병장 홍계남, 이덕남 장군이 일어나 일본군을 격퇴한 빛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안성의 의병활동은 가히 전국적으로 손꼽힐 만큼 활발하여 그 세력범위는 경기 남부 권을 넘어서 충청남북도 지역까지 뻗치고 있었다.
안성 사람들의 용맹성과 충절은 맥맥히 이어내려 1919년 4.1항쟁으로 만세고개에 응축되어 있다.
안성3.1운동 기념관은, 안성인의 항일투혼이 살아 숨 쉬는 만세 현장의 중심이다. 96년 전 항쟁의 발자취가 생생하게 살아 오늘에 전해 내려와, 그 역동성이 맥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만세소리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갔지만 피 끓는 애국 혼은 오늘에 살아 이 고장 곳곳에 그 숨결이 아직도 뜨겁다.
안성인의 숭고한 항일투혼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기리기 위하여 만세고개를 성역화 하였으며, 3.1운동 기념관을 세워, 길이 후인들에게 호국의 교육장이 되고 있다.
안성3.1운동 기념관이 오늘의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나라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국권이 유린당했던 지난 세기의 역사를 깨우쳐 주는 역사학습장이 되어야 한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반드시 그 역사를 다시 살도록 심판 받을 것이다”라고 경고한 철학자이며 시인인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 )의 경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을 뿐 아니라, 세대 간의 격절감도 계층 간의 단층의식도 지역 간의 갈등도 없이 거족적으로 봉기하였던 3.1정신을 전 국민에게 깨우쳐 주는 도장(道場)이 되어야 한다.
전국3대 실력항쟁지로서의 안성3.1운동 기념관의 시대적인 사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의 도정에 기약 되어야 할 통일의 날을 앞당기는 것도 남북한 7.500만 동포가 3.1정신에 충일할 때 가능하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3.1정신은 우리 민족정기의 영원한 활화산이며 대한민국 건국의지의 정수(精髓)이다.
1910년 은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의 해였다
19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1945년은 압제의 질곡에서 해방된 광복의 해였다.
금년, 2015년 봄은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조국과 내일의 민족 진운을 더불어 생각하는 새봄이 되기를 바라마지않는다.
떠오르는 시 한 구절을 붙여둔다.
祖 國
조국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파란 불꽃 타 오르는 영혼의 터전
뜨거운 숨결이 호흡하는 산하
피안으로 가면서 살과 뼈를 묻을 곳
그곳이 나의 터전 우리의 조국이다.
조국이 있음으로 우리의 꿈이 있고
꿈 위에 희망의 꽃 피어 올라
우리 삶의 환희 또한 조국에 있지 않는가?
나의 생애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
조국에 대한 피땀으로 충만 하리라 (2015.1.10)
첫댓글 가슴이 뜨거워지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