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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3)
행 2:37-47
37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3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말로 증언하고, 비뚤어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그들에게 권하였다. 41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16)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성만찬' 또는 '친교 식사'를 가리킴 43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지난 7월 6일 미국 뉴욕타임즈는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는 한국인, 치료를 거부한다,’는 제목으로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글을 실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결론은 한국사회 전체가 신경쇠약에 걸린 것 갔다는 것입니다. 듣기에 기분 나쁜 말입니다. 하지만 그 글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 한국사회의 객관적 현실입니다. 필자인 마크 맥도날드는 그 대표적 근거로 세계에서 제일 높은 자살률을 듭니다. 하루에 30 여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이렇게 자살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 이유를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경제성장과 함께 전통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물질주의적 경쟁에 말려들어 끊임없이 비교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울증 치료를 위해 전문적인 정신과 상담치료를 찾지 않고 손쉬운 약물치료 혹은 무당이나 룸살롱에 의존하려는 경향성에 대하여 넌지시 우려를 표명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저명한 도덕철학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덕의 상실』이란 책에서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공동체와 공동선 그리고 덕을 중시하는 고대도덕철학과 전통이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만 강조하는 근대자유주의 사회로 진입하게 되면 두 가지 직종이 가장 왕성해진다고 진단했습니다. 법률전문가와 전문 정신과치료사입니다. 저는 오늘 그 중에서도 전문 정신과치료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현실에 대하여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우울증에 걸리면 반드시 전문적 정신과치료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좀 더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치료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성의 회복입니다. 개인을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고 균형 잡힌 온전한 공동체는 회복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건 개인을 억압하고 말살하는 권위주의적 중세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공동체 즉 개인과 공동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그런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해내야할 책임이 저는 바로 교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온전한 공동체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모습을 지난주에 이어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열심히 모였습니다(46a)
여기서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그들은 날마다 모일 정도로 함께 모이는 일에 열심을 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도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본 받아서 날마다 모여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신앙공동체는 열심히 모여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당위임에 틀림없습니다. 히브리서 10:25를 볼까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저자는 모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 버린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조금 있으면 그 날 즉 주님이 오시는 날이 올 텐데 지금 열심히 모일 필요가 뭐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는데 힘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갖고 설교하는데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한국교회는 모임 때문에 망했다는 생각 때문에 뒤가 켕기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 청년시절 함께 모이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았습니다. 물론 그런 열정 때문에 덕을 보기도 했습니다. 대학1학년생이었던 저를 여름수양회에 참석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저를 따라 붙었던 선배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인격적으로 믿게 되는 계기가 생겼으니까요. 하지만 그 폐해도 적지 않게 경험했습니다. 무슨 모임이든지 100%참석을 목표로 하다 보니 강제와 억압이 작동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상처받는 사람이 적지 않게 생기곤 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하기 보다는 단체의 힘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역력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끼리의 모임에만 열심이다 보니 가정이나 이웃 그리고 사회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폐해들을 막기 위해 아예 모이지 않아 버린다면 그 역시 극단적인 선택일 겁니다. 그건 마치 아기를 목욕시킨 후, 더러워진 물만 버리는 게 아니라 아기까지 같이 버리는 행동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더럽혔던 것은 과감히 청산하되, 모임을 사모하는 마음 자체는 지켜내야 합니다. 강제와 억압을 제거하고 모임참여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100%참석 자체에 목숨을 걸기 보다는 모임 자체가 은혜롭고 의미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모임을 통해 자기 단체나 모임의 힘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고 진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모임을 자기들만의 편의를 도모하는 주차장으로 여기지 말고, 힘을 얻어 다시 흩어지기 위한 주유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모임을 사모하는 열정을 늘 간직하고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권면이 필요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정말로 만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동료 성도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이 아닐까?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정말로 만났다고 해서 금방 완벽한 성인으로 돌변하는 것도 아니고 유혹과 시련으로 가득 찬 세상을 떠나 완벽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임에서 한두 번 상처를 받거나 지루함을 경험하면 우리들 마음엔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다음엔 참석하지 말아야겠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함정에 빠져선 안 됩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모임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 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습관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많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나쁜 습관은 우리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동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치기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간의 모임을 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사람에겐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고독가운데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은 신앙성장과 성도의 건강한 만남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위기의식을 느낄 때마다 사람들을 피해 산이나 한적한 곳을 찾으셔서 홀로 계시곤 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기며 소명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홀로 있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시간이 있어야 이웃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임이 자기충족의 수단이나 자기과시의 장으로 전락되지 않고 진정한 교제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모임을 통해 서로의 삶을 진실하게 나누면서 서로 사랑하고 배우고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사귐 안에서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도 성립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여 본회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귐 안에 서 있을 때에만 우리는 홀로 있을 수 있다.’ 그 이유인즉슨 사귐 없이 홀로 있으면 처음엔 편안한 면도 있을 테고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기분이 좋아 질 때도 있겠지만 결국 깊은 외로움에 시달리다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져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명작이긴 합니다만 『빠삐용』이란 영화도 보면 주인공이 감옥에서 잘못하다 걸리면 독방으로 보내집니다. 혼자 오래 있다보면 거의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가 됩니다. 미국 대통령선거 후보였던 존 멕케인은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로 잡혀 독방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 땐 홀로 있기 보다는 차라리 가장 악한 벗과 함께 있고 싶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시 모임 속에서 성도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소 홀로 있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성도들과 때론 행복하게 때론 부대끼며 살아갈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하게 구하게 됩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용서받고 용서함으로써 건강한 자아를 형성해갈 수 있습니다. 고독한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모임 속에 있을 때, 하나님, 인간 그리고 자연을 짓밟고 있는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좀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모임에 힘써야 합니다.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디서 어떤 식으로 모여야 하는가, 의 문제는 해당 신앙공동체가 스스로 주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그 답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나친 율법주의에 빠져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해이해져도 안 되겠죠. 그 균형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주변 형편이나 자기 기분에 좌우되기 보다는 성령의 인도함을 세밀하게 받는 영적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둘째, 그들은 성전에서 날마다 모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예배에 참여했거나 그 성전 뜰에서 자신들의 모임을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잘 알다시피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삶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겐 쉽게 가기 어려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이라고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요 장사치의 집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며 청결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결국 제사장으로부터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판결 받고 로마총독 빌라도의 법정에 넘겨져 십자가에 처형됩니다. 좀 나중에 일어나는 사건이긴 합니다만 스데반 역시 하나님과 성전을 모독한 자로 몰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성전은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결코 마음 편한 장소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은 자기들 끼리만의 안전한 공간 소위 게토로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감하게 성전에서 날마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공동체 밖, 영적인 의미에서 세상이라 할 수 있는 곳을 향해 항상 열려있었고 끊임없이 그들과의 만남과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초대교회만의 모습이 아니라 초기 300년 동안 이방나라에 흩어져 있던 교회들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작자미상의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정지역에 분리해서 게토화하여 살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면서도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가 보편적인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몇 마디만 인용해보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국적이나 언어나 그리고 지키는 습관을 통해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으며, 기상천외한 생활태도를 가진 것도 아니다. 본국인들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으며 우리들에게 훌륭하면서도 솔직한 삶의 방법을 전해준다.…그들은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는 하늘의 시민이다.
이것이 그들이 산상수훈적 삶과 철저한 제자도를 따랐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당신의 제자들의 정체성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새맘공동과정에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소금이란 어떤 대상물에 스며들어야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교신 선생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의 설탕’이라고 부르지 않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신 것에 대하여 주목합니다. 설탕은 독자적으로도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피곤할 때, 설탕물을 마시면 그 자체로도 달고 칼로리도 보강되어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염분이 부족하다고 소금물을 마시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겁니다. 대신 소금성분이 들어있는 음식을 취하겠지요. 이처럼 신앙공동체는 세상 한 가운데로 스며들어야 제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의 호감을 사기는커녕 냉소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세상과는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행복하고 화려한 천국을 만들어가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을 향해 이런 저런 활동들을 안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목적이 세상으로 깊이 스며들어가는 데 있기보다는 그들을 세상에서 뽑아내 교회 속으로 끌어들이려하는데 있습니다. 기실은 자신들만의 왕국을 더 크게 확장하려는 욕망이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대 정작 교회는 그 점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몇몇 신앙공동체들은 아주 바람직한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수유리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은 자신들이 가깝게 모여살고 있는 수유리 지역 주민들 속으로 스며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마을밥집, 마을카페, 마을학교, 마을잡지 등을 만들어 공동체 식구들과 지역주민들이 스스럼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갑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어느덧 지역주민들은 그 신앙공동체가 손길을 뻗치는 곳마다 사람들이 살만한 곳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며 기뻐한다고 합니다. 물론 세상에 스며드는 구체적 방식이 모든 교회마다 천편일률적이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각 교회는 자신의 교회에 맞는 방식을 찾아야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새맘교회 여름수양회제목은 매우 흥미롭고 기대가 됩니다. 『새맘, 공동체에 미치다』입니다. 새맘교회는 어떤 모습의 신앙공동체를 꾸며갈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 속으로 스며들 것인지 재미있게 토론하고 창의력을 갖고 상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집집이 돌아가며 떡을 떼며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46b)
이는 초대교회가 소위 가정교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한편으론 성전에서 전체 모임을 갖고 다른 한 편으로는 몇 가정씩 모여 소그룹으로 친밀한 교제를 하였습니다. 바람직한 균형입니다. 앞서 언급한 수유리의 아름다운 마을도 그런 식으로 모임을 운영합니다. 평소엔 몇 가정이 기초공동체를 구성하여 같이 생활하고 교제하고 예배를 드리다 한 달에 한 번은 장소를 빌려 전체 모임을 갖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고 성령충만을 받아 교회가 시작되면 몇 가정이 모인 소그룹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소그룹이 나눔과 사역의 중심이 되는 것은 시대를 관통하여 실현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역할 당시 이방 땅에 있던 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예루살렘초대교회와는 처한 형편이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들도 대부분의 경우 가정집에서 모였습니다(고전 16:19; 롬 16:3, 5; 몬 2; 골 4:15).
[고전 16:19]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모이는 교회가 다 함께, 주님 안에서 진심으로 문안합니다.
[롬 16:3. 5]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5 그리고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문안하여 주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3)열매입니다.
[골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눔바와 그 부인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문안해 주십시오.
[몬 1:2] 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전우인 아킵보와 그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교회들의 활동 내역에 있어서도 큰 틀에서 볼 때 이들 교회들과 예루살렘 초대교회 사이에 공통점들이 많습니다. 다만 세세한 측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경우 가정집에 모여 성찬식과 공동식사를 겸하여 나누었습니다(고전 11:17-29). 하지만 더 큰 전체적인 모임을 날마다 가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와 마게도냐교회는 경제적 고통을 당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해 열심히 연보(捐補)해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로 보냅니다(고후 8-9장; 롬 15:25-26). 나눔의 삶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예루살렘 초대교회와 같았지만 그 구체적 형태는 좀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경우에도 가정에 소그룹이 모여 성찬식과 공동식사를 함께 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찬식을 의미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은 공동식사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찬식이 가정소그룹에서 행해지는 진정한 교제에서 교회전체의 의식으로 전환되면서, 공동식사와 분리된 것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고 제도화되면서부터 생긴 일입니다. 이런 변화는 꼭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원래 최초의 성찬식은 예수님이 다락방에서 12제자들과 함께 모인 조촐한 유월절 공동식사자리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찬식과 공동식사를 다시 결합시키는 것은 바람직하다 할 수 있습니다.
성찬식은 회개와 믿음을 새롭게 하는 가운데 떡을 먹고 잔을 마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죄 사함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맛보며 누리는 예식입니다. 물론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작은 떡을 먹고 작은 잔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왕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먹고 마심을 통해 기억하기로 한 바에는 풍성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 훨씬 더 실감나고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찬예식의 취지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식사처럼 즐겁고 행복한 교제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 회식문화가 뿌리 깊이 박혀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일 겁니다. 물론 도가 지나친 부분들은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함께 먹고 마시면서 우애를 다져나가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저런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정에 부담이 될 수도 있겠고 너무 힘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서로 가져 온 음식을 비교하다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우월감, 열등감 그리고 비판의식이라는 덫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두려워 공동식사를 포기한다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이나 시험을 우리의 신앙과 인품을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로 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왜 그들이라고 이런 저런 불편함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오히려 신앙성장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여 그들은 기쁨과 순수한 마음으로 공동식사를 했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며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공동식사를 준비하고 나누면서 순수한 마음을 유지했습니다. 음식솜씨나 자신의 경제적 여유를 자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하는 욕구도 없었습니다. 남 보다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먹어야겠다는 식탐에도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순수하게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기쁨과 순수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공동식사를 자발적으로 실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들의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신앙공동체는 이와 같이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적 삶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공동체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끼리 먹고 마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적 사랑과 교제 그리고 하나 됨이 세상 가운데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간절히 부탁하셨습니다(요 13:34).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요 20:21). 온전한 신앙공동체는 서로 진실하게 사랑하고 거기서 축적된 힘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새맘이 그런 신앙공동체로 자라갈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3. 기도에 힘썼습니다(42).
지금 까지 살펴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생각할 때 너무 이상적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숨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예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그런 부담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에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라고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십시오. 그들은 재물을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는 다 바치는 척 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행 5:1-11). 헬라어를 사용하는 성도들 중 과부들이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겨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성도를 원망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아직 미완성작품인 제자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노릇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점을 잘 인식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유지해나가는 데는 지속적인 합심기도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오순절에 한 번 화끈하게 성령충만을 받은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비행기로 말하면 이륙하는 것, 자동차로 말하면 시동을 거는 순간과 유사합니다. 가장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이륙했다거나 자동차가 시동이 걸렸다고 더 이상 연료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충만으로 본격적인 시동인 걸린 신앙공동체일지라도 지속적인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힘을 지속적으로 공급을 받아야합니다. 이 점을 잊어버리는 순간 공동체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우리는 종종 새맘 식구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점 때문에 흐뭇하고 즐겁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아름다운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그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만하는 순간 공동체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고 서로 실망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신앙공동체를 아름답게 유지해나가는 중요한 비밀은 겸손한 합심기도에 있습니다.
지속적인 합심기도를 통해 늘 새롭게 성령의 충만을 받아 사랑의 역량을 키워가야 합니다. 바울은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현재형으로 권면하였습니다(엡 5:18). 헬라어로 현재형은 현재진행형을 의미합니다. 성령충만은 항상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길 기도하며 그의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에게 성령은 늘 충만하게 임합니다(행 2:38; 1:12-14; 4:23-31; 5:32). 이를 위해 늘 합심기도에 힘쓰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점에서 7월부터 매주 수요일 기도회를 갖기로 한 것은 아주 의미 있고 중요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기쁨과 능력을 맛보는 새맘 신앙공동체가 되길 축원합니다.
4.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47).
여기에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뜻밖에 놀라운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들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경제적 수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벽을 뛰어 넘어 한 마음으로 교제하게 된 것은 모두 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항상 기억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사적으로 관리하면서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 스며들어 있는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한 것이죠. 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수많은 공동체들이 처음에 아름답게 시작했다가 나중에 무너지곤 했습니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공동체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핵심적인 리더의 권위가 너무 강해진 나머지 우상화되고 그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면 공동체는 부패하고 자기 확장이라는 유혹에 넘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우월감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그런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맙니다.
인간에겐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기는 아주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이런 습성을 하루아침에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법을 훈련해나가야 합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찬양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노력을 안 해도 찬양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때로 찬양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기 마련이고, 목소리만 날 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찬양을 접어선 안 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살펴보며 돌이켜야 합니다. 그 과정이 항상 쉽지만은 않지요.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찬양을 부르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영적 씨름의 과정에 주님께서 개입해주셔서 도와주실 겁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탕자가 피곤한 몸을 질질 끌며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가 멀리서 보고 그에게 달려 왔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씨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영적 씨름을 결심한 순간 얼마 안 있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 곁으로 달려오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을 때도 찬양하십시오. 조만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찬양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겁니다.
맺음말
공동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가면 하나님이 놀랍게 축복하십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에 감동 받고 칭찬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여 주십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충만히 임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교회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새맘 신앙공동체가 바로 그렇게 자라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할 수 있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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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과 적용을 위한 질문]
1. 그 동안 성도들의 모임에 대해 가졌던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나눠보십시오. 혹시라도 모이지 않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면, 왜 극복해야하며 어떻게 모이는 일에 다시 열심을 낼 수 있을지 나눠 보십시오.
2. 새맘교회가 어떤 모양으로 세상 속으로 스며들었으면 좋을지 상상력을 동원하여 생각해보고 서로 나눠 보십시오.
3. 그 동안 성찬식과 공동식사를 해 오면서 느낀 점을 함께 나눠 보십시오.
4. 신앙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워 가는데 있어서 기도와 찬양이 갖는 중요성에 대하여 깨달은 점을 나눠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