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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존재를 지탱한다(하이데거) 딱 맞는 글귀... 멍 때리다가 웃고... 견디기 위해 뭘 해야 할지 행동하면서 살아내는 게 아닐까... <의미> 부여... 크게는 세상이 난리이고 작게는 우리 가족이 난리지만, 이 난관을 기어이 이겨내고야 말리라... 지금 일어났어... 여름이다... 낮잠 자고 일어남(명옥)" "All right. Fighting(나)" "게슴츠레 눈을 뜨고 일어남... 오늘도 반복되는 하루가 시작... 에구에구 하며 출근하는 남자.. 며칠째 야근하고 들어오는 거 보면 그나마 일거리가 있어 다행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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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원영-신 인영-신 우영" 우리 딸들 이렇게 계명해 볼게 어떠니? 작명소에 가서 한자 풀이해달라고 하려고(명옥)" "오 리스펙트! 강추(나)" "人生 너무 재미없다... 조만간 쏘-맥 합시다(에스더)" "Why? 예영-예원-예왕 골라봐!(나)" "아들 낳음? ㅋ ㅋ ㅋ 다 별로임(에스더)" -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어도 ... 난 여호와로 기뻐하리라... 하박국처럼 여호와가 너의 <의미>가 되던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찾아보시라!... 지난달 집세를 오늘 줬다... 이번 달에는 똔똔치고야 말 것이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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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난 아직도 못 줬는데... 월세 ㅅㅇㅂ...ㅋ ㅋ ㅋ ㅋ(에스더)" "월세 낸 아비가 술 살게 당장 오시라!(나)" "좋겠다... 근데 어쩜 처지가 이리 비슷해? 대책 회의해야겠는데... 난 교회들을 좀 순회할까 해... 목사 딸들 미술 하니까(에스더)" "예주랑 함께 사랑의 교회 등록하는 건 어때?(나)" 우리는 결국 무엇으로 살아남는가? 능력인가, 돈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그래도 살아간다"면 의미가 있어서 사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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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적된 피로감이 정신을 흐릿하게 만드는지 몸도 마음도 무겁고 칙칙해졌습니다. 우리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명명한 철학자가 한국에도 있습니다(한 병철). 뭐, 그만큼 우리는 쉼이 필요하고, 안식이 필요한 존재라는 반증이 가능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름인데, 부인할 수 없는 우리네 현주소입니다. 일이나 권위는 자발성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하늘땅만큼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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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질병이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면역 방어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격이니 부정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질성이 사라진다면 방어도 사라지지요. 즉, 부정성이 사라진 긍정성의 과잉 상태인 현대 사회는 질병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다 네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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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타자의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긍정성의 과잉이 가져온 결과는 자아의 파멸입니다. 타자의 부정성에 대한 반응이 가능해야 주체는 이질적인 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밖으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세계의 긍정 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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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리적 경색으로 이어지는 신경성 폭력은 내재성의 테러입니다. 그것은 결국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긍정성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병철 은 현대 사회는 성과 사회이고 이 사회의 주민은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 주체라고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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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지만 성과사회는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존재하는 사회이라서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지만,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든답니다. 생산성 향상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합니다. 성과사회에서 생산성은 매우 중요합니다.'할 수 있다'는 '해야 한다'보다 생산성을 높여줍니다. 자유의지에 의해 자아가 노동할 때 생산성은 더 높아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자유' 의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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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합니다. 성과사회에서 자신은 불필요하고 성과를 위한 성과적 주체가 필요할 뿐입니다. 이 시대 고유한 질병은 노동 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 명령입니다. 새로운 인간(형)에게 주권은 없습니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합니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입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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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입니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 만 가능한 것이지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우리에게 '할 수 없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직 '할 수 있음'만을 허락합니다. 이때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싸움일 것입니다. 타자와의 경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더 열심히, 노동의 양과 질, 그 결과인 성과가 좋을 때 잘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기최면을 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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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고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깁니다. 심심함의 반대 개념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재미? 즐거움? 바쁨?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졌습니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 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입니다.'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두기에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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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공동체에서 심심한 상태는 생산성이 없는 상태이니까요. 생산성 없는 활동은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지 못한다지만 깊은 심심함은 창조적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입니다. 창조는 사색에서 출발합니다. 사색 없는 삶에서 창조는 절대 발생하지 못합니다. 활동적인 자아는 사색을 하는가? 자신과의 싸움에 바쁜 자아는 타자에게 관심을 둘 수 없습니다. 성과주체는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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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싸울 것인가? 듣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활동의 멈춤입니다. 활동하는 능력과 듣는 능력은 동시에 할 수 없으니까요. 인간은 사색하는 상태에서만 자기 자신의 밖으로 나와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침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멈춤에서 집중이 나타납니다. 활동적 삶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으니 속지 마시라.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납니다. 삶과 생명.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생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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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기 위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 삶은 어떤 삶인가? 왜 건강이 현대사회에서 절대화되고 있을까?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 의료과학의 발달은 우리에게 긴 수명과 건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생존이지,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저항일 뿐이지요. 정신의 부재 상태,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고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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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자극적이 아니면 시선을 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익숙해진 자극에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습니다. 더 강한 자극을 원합니다. 자극에 대한 저항은 활동적인 삶에 방해가 됩니다. 자극에 저항한다는 것은 사색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극에 나를 맡기지 않고 사색을 통해 자극에 저항합니다. 사색적 삶은 주체적 행위를 발생시킵니다. 활동 과잉보다 더 활동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 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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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시작은 의문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중단을 시작하게 하며 멈춰 서게 합니다.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의 부정성 에너지는 전체를 부정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부정적 힘이 없다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부정적 힘이 없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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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힘만 남아 있는 사람은 치명적인 활동 과잉 상태에 빠진답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긍정성을 넘어섭니다. 긍정성 과잉의 성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생산성', '할 수 있음' 등은 우리를 피로하게 하지만 이것은 긍정적 힘의 피로입니다. 혼자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이 피로는 고독한 피로이기에 이것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갑니다. 탈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로 무의의 피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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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의의 날이 아니라 무의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입니다. 그날은 피로의 날입니다. 성과사회 다음으로 우리에게 찾아와야 할 미래사회는 '피로사회'입니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합니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습니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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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 피로’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냅니다. 그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박자가 일어나 하나의 화음을, 친근함을, 어떤 가족적 유대나 기능적 결속과도 무관한 이웃관계를 빚어낼 것입니다. 고독하지 않은 피로. 할 수 있음에 저항할 수 있는 부정성이 존재하는 사회. 멈춰서 서 사색할 수 있는 삶. 서사가 있는 삶. 피로사회는 고독하지 않은 삶입니다. 활동 과잉이 아닌 활동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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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의 대안이 안식(쉼)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에너지 ‘새 창조‘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희한한 일입니다. 돈도 못 벌고 소비도 못하는데 불안이 잠잠해졌습니다. 뇌를 쉬게 해서 그럴까? 타자를 추방해서 그럴까? 가만, article 하나가 이런 힘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한 병철 이란 인간이 저보다 4살 형님인데 내공이 기똥찹니다. 역시 영미보다 독일 쪽이 학문의 깊이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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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이 철학뿐 아니라 예술 대 조형과 교수라는데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일 것입니다. 필자가 이해한 ‘피로사회’의 대안은 그냥 ‘쉼’이 아닌 안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안식의 의미는 공간보다 시간을 기념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나의 거리 22회>입니다. 아침부터 계팔이 창만의 방 문 앞에서 설레발을 치는 통에 다세대 사람들이 무슨 일 났나 싶어 하나 둘 소리 나는 2층으로 모여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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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촌 유나와 부킹 이모가 보이네요. 이쯤 되면 창만이 벌서 나왔을 텐데 미동도 없습니다. ‘방에 있다. 없다’ 마음속 내기를 하고 부킹 이모는 갔고 가까운 사이 유나가 이상해서 다시 확인사살을 했어요. 어제 누가 초인종을 눌렀는데 쌩 깠어요. 내 성질에 이런 일은 잘 없어요. 어젠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만사가 귀찮더라고. 중간 소음 때문에 왔거나 담배 피우지 말라고 왔을까요? 우리 유나가 들어가 보니, 창만이 상판대기가 니주구리가 되어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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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 전치 4주는 나올 것 같습니다. 교통사고나 싸움박질 후유증은 다음 날 더 심합니다. 구들장에 몸을 지지면서 푹 잘 필요가 있습니다. 창만이 이 정도면 민 규 녀석은 모르긴 해도 거의 죽음 직전일 것입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유나가 약을 발라주네요. 이 그림은 뭐죠? 왜 달달해 보일까요? 요로결석을 아시나요? 10년 전쯤에 요로결석이 와서 119에 실려간 적이 있습니다. 요놈의 병이 얼마나 아픈지 죽는 줄 알았어요. 그때 유나처럼 내게 입원-병수발을 해준 그녀가 생각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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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 전 얘기입니다. <<생애 처음 요로 결석으로 119 구급 대에 실려 간 이후로 의사가 처방해 준 대로 하루 물 3리터를 먹느라 스스로 욕도 봤고 마라톤 20일 했으니 본부도 당당히 병원에 갔습니다. 먼저 주차를 안전 빵으로 합니다. 번호표를 뽑고- 원무과에 접수를 한 다음-비뇨기과에서 순서를 기다립니다. -간호사가 호명하면 주치의 앞에 열중 쉬어 합니다. 의사가 C. T 촬영하고 오라고 오더를 줍니다. 어리바리 헤매지 않으려면 간호사에게 위치를 불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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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항은 간호사에게 절대 아가씨라고 하거나 다방 레지 부르듯이 부르면 무식하다고 핀잔받는 것 이상의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TV에서나 보았던 컴퓨터단층촬영실 C. T(Computed Tomography) 실에 오늘은 내가 드러누워야 합니다. 우-씨, 의사 가운이랑 똑같이 입은 촬영기사에게 닥터는 아니지만 선생님이라고 해줘야 띡띡 거리지 않습니다. 드러누웠더니 필립스 로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사가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라고 해서 하마터면 팬티까지 내릴 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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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T는 회전하는 X선관과 검출기를 이용해 인체 내부를 단면으로 잘라내어 영상화하는 장치입니다. 이 영상은 일반 평면 사진에서 볼 수 없었던 연부 조직(혈액, 뇌 척 수액, 회질, 백질, 종양 등)의 작은 차이도 기록할 수 있으며, 얻어진 데이터를 재구성하여 3차원 영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아~싸 제가 제약회사만 10년 근무했습니다. 한번 찍었다 하면 50만 원을 호가하는 M R I의 조영 제 ‘울트라 비스트’(주 쉐링)처럼 C T도 조영 제를 투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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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조영 제 소모량이 세계 1위가 우리나라라면 믿겠습니까? 2006년 쉐링(주)이 바이엘(주)에 M&A 되기 전에 조영 제가 공급되지 못해서 병원에 난리가 난 적이 있는데 아마 지금도 조영 제 시장은 바이엘& 쉐링이 꽉 잡고 있을 것입니다. 별 특이사항 없이 C T를 찍어서 확인한 결과 제 오줌 지나는 노즐에 막힌 찌꺼기가 없어졌다 네 요. 땡 큐 벨 마치. 비뇨기과 과장이 재발률이 50% 된다며 사후 관리를 일러줍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물을 한 바가지 흘렸으니 물을 마셔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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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보하는 아주머니들이 운동장에 쫙 깔렸습니다. 이왕이면 아가씨가 좋을 텐데 말입니다. 한 아주머니는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뛰어가는 저랑 자주 만납니다. 그때마다 자존심이 상해서 보폭을 넓혔더니 도가니가 살짝 무리가 왔습니다. 요로 결석도 고치고 오래 살려면 뛰는 것도 경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은 교회 사람들 온다니 청소도 하고 과일도 좀 사놔야겠지요? 2014.8.22.fri. 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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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규는 응급실에 실어놓고 왔다네요. 맘보 전화입니다. “출근 안 해?(맘보)” “몸이 안 좋아서 월차 쓰려고 합니다(창만)“ ”당일 휴가 내는 놈이 어디 있어?(맘)“ 개념 없는 미선이 왜 왔을까요? “네가 뭔데, 누가 너한테 복수를 해 달랬어? 네가 깡패야?” 욕을 옴팍 지게 퍼붓고 갑니다. 창만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홍 여사는 감기몸살이 아닌 쌈박질 상처로 맘보에게 보고합니다. 운전하던 계팔이 매형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줍니다. 계팔이 미선을 좋아하는 거 다들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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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유나와 창만이 함께 있는 방입니다. 민규 후배 놈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합의를 위한 고름 같습니다. “사람을 개 패듯 패 놓고도 목소리가 아주 좋으십니다(후배)” “지금 죽겠으니 오후에 봅시다(창만). “ “어쩌려고 남의 일에 저 죽을 줄 모르고 난리를 쳤어(유나)” “이게 어떻게 남의 일이야. 미선 씨 일이 네 일이고, 네 일은 내일이야(창만)“ 미선이 한걸음에 민규 병실로 달려왔습니다. 유나가 발광하는 미선을 데리고 나간 사이 이번엔 다 영이 들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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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영아, 잘 왔다... 양말 좀 신겨줘(창)“ ”저는 오빠가 제발 쓸데없는 일에 젊음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공무원 시험 준비나 열심히 하세요(다영).“ 다영이 꼭 마누라 같네요. 맘보는 창만의 일을 해결해 주기 위해 호스트바 사장 후-다를 땁니다. 각본상이겠지만 도끼 형님이 데리고 있던 건달입니다. 밴댕이 갈비 집입니다. 혼밥을 먹고 있는 정 사장 아들을 앵글에 잡히고 맘보가 딸내미를 일부러 소개하는 이유를 아시나요? 에스더 20대에 봤던 용호라는 녀석 얼굴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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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요? 병원입니다. “누나가 시켰지?(민규)”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미선)“ ”누나, 여긴 공기도 안 좋고 불편해... 특실로 옮겨줘(민) “ 민규 이 녀석도 호스트바 선수 연기 잘합니다. 진짜 호스트바 출신처럼 말입니다 그 사이 창만, 유나가 왔고 민규 미선이 112신고를 하려 하자 유나가 전화기를 가로채 도망갔습니다. “감방 가는 한이 있어도 사과는 못해. 넌 반성해야 해 개아들아. 내일 또 올 게(창)” 창만이 가고, 병실 안에 민규/미선 커플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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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신고했어?(민)” “아니, 창만은 별거 아닌데 창만 뒤에는 무서운 사람들이 아주 많아" 유나가 미선의 전화기를 빼앗아 나왔는데 계속 톡이 오네요. 미선 언니 영업이 완전 성업 중입니다. 창만이 유나에게 갑자기 왜 엄마 얘기는 한 번도 안 하냐고 묻습니다. 시크한 유나가 과거사를 애기합니다. 결혼한 지 사흘 만에 시작된 아버지의 감옥살이는 밥 먹듯이 계속되었고 엄마는 자기 3살 때 가출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감옥 가고 할머니 손에 자랐고, 지명수배가 떨어지면 형사들이 유나를 미행하고 감시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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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형사 중 한 명이 봉 반장이고 붕어빵 한 봉지를 자주 사주었다는군요. 기소중지 검거를 전국 1위 한 경찰 후배가 내 밑에 있은 적이 있는데, 그놈 얘기 들어보면 택배로 기소 뜬 자들을 꽤 많이 잡는다고 합디다. 경찰들이 유나를 미행하는 것은 부성을 이용하는 검거 수법입니다. “엄마는 혼자만 지옥에서 빠져나간 거야. 난 거기 그대로 남겨놓고 같이 굶어 죽더라도 날 데리고 나갔어야지. 나만 업고 나갔어도 내가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야. 돌아가신 아버지는 용서할 수 있는데 엄마는 용서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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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빠의 기술을 열심히 배운 것도 엄마한테 복수하기 위해서였어(유나)“ “유나를 쳐다보는 창만의 마음이 짠해지나 봅니다. ”유나 씨, 엄마가 유나 씨를 버렸더라도 유나 씨는 엄마를 버려서는 안 돼(창)“ 맘보는 호스트바 사장을 집에 불러 술자리를 같습니다. 유나의 거리에 나오는 출연진들이 다들 건달 연기를 잘 합니다. 근데 요새는 건달들이 호스트바를 하나 봐요? 건달은 물장사를 안 하는데 말입니다. 계팔, 부킹, 칠복의 마트 시퀀스는 패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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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미선이네 방입니다. “난 창만 씨가 그런 깡팬지 몰랐어. 사람이 어떻게 그리도 무식해(미)“ ”민 규는 신사라서 갈비뼈를 살짝 키스만 나게 하는데 창만 씨는 무,식하게 갈비뼈를 두 개나 부러뜨리고 말이야(유나)“ “비꼬지 마 이년아!(미)” “미선에게 전화해서 밑밥을 깔고 양다리를 걸치는 민규 녀석 선수는 선수네요. 이제 민규는 뒈졌습니다. 창만이 유나에게 전화를 합니다. 스피커폰을 켜고 통화하는 것이 유나랑 짠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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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 형님이 민 규를 혼내 주러 병원으로 출발했다는 말을 들은 미선이 버선 차림으로 달려 나갑니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도끼 형님과 창만은 무릎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길입니다. 작전대로 민 규에게 빨리 병실에서 피하라고 SOS를 치는 미선이 우리 편입니다. “너 조폭 망치 알아? 망치가 거기 잘렸다는 소문이 있어(미)“ 창만보다 먼저 병원에 도착한 미선은 민 규의 병실로 향하는 도끼 할아버지와 창만이 병실에 가는 것을 목격하고 가슴을 쓸어안는데 창만 빼고 도끼 형님도 모르는 007특수 작전입니다. 휴 십년감수했습니다. 민규와 미선 커플이 도끼 형님을 피해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입니까? 가위입니다. 허걱.
2.
피로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는가, 아니면 단지 버티고 있는가? 성과와 긍정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왜 점점 더 무기력해지는가, 그리고 그 해답은 ‘쉼’이 아니라 ‘안식’일 수 있는가? 이 글은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단순히 요약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의 삶과 감각으로 재해석한 체험적 철학 에세이입니다. 특히 “피로”를 단순한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적 징후로 읽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깊이가 있습니다. 글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현대인은 더 이상 외부의 억압에 의해 고통받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주체>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자유가 “해야 한다”는 강제보다 더 잔혹한 명령이 되는 시대, 이 문장은 단순한 사회비판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정확히 해부하는 진단입니다.
1) 긍정성의 과잉이 낳은 자기 착취
글은 현대 사회를 “긍정성 과잉”으로 규정합니다. 과거처럼 금지와 억압이 지배하던 시대가 아니라, 지금은 무한한 가능성과 자기계발의 명령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할 수 있다” “더 잘할 수 있다” "멈추지 마라” 이 긍정의 언어는 겉으로는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이는 내면의 폭력이 됩니다. 결국 인간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존재>로 전락합니다. 이 지점에서 글쓴이는 중요한 통찰을 던집니다. “우울증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즉, 우울은 실패가 아니라 <성과사회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라는 것입니다.
2) 활동 과잉과 사색의 붕괴
이 글에서 특히 빛나는 부분은 “심심함”과 “사색”에 대한 재해석입니다. 현대 사회는 멈춤을 허락하지 않고, 비생산성을 죄악시하며, 끊임없는 활동을 요구합니다. 그 결과 깊이 듣는 능력은 사라지고 타자에 대한 관심은 붕괴되며,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하는 존재가 됩니다. 여기서 글쓴이는 중요한 전환을 제시합니다. “깊은 심심함은 창조의 출발점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낭만이 아닙니다. 사색 없는 삶은 창조 없는 삶이라는 선언입니다.
3) ‘부정성’의 철학: 멈출 수 있는 힘
이 글의 철학적 중심축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현대인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글쓴이는 말합니다. 부정적 힘이 없는 인간은 위험하다/긍정만 남은 인간은 탈진한다. 이 부정성은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존재를 지키는 <저항의 힘>입니다.
4) ‘쉼’이 아닌 ‘안식’으로
이 글의 가장 인상적인 결론은 “쉼”과 “안식”을 구분하는 부분입니다. a. 쉼 → 단순한 회복, 기능적 휴식 b. 안식 → 시간의 의미를 회복하는 존재적 사건 여기서 글은 신학적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안식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기념하는 행위다.” 이 말은 곧, 인간은 생산을 멈출 때 비로소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5) 드라마 『유나의 거리』와의 접속
후반부에 등장하는 『유나의 거리』 서사는 단순한 삽입이 아니라 철학적 장치입니다. 폭력, 상처, 관계, 돌봄이 얽힌 이 서사는 성과사회가 만들어낸 인간의 균열을 보여줍니다. 특히 유나의 고백은 이 글의 핵심을 관통합니다. 버려짐/분노/복수/관계의 결핍...이 모든 것은 결국 <타자와의 단절된 세계>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틈에서 돌봄과 연민이 희미하게 빛납니다. 1.철학 (피로사회) 2.신학 (안식, 창조) 3.현실 (노동, 우울, 경쟁) 4.서사 (유나의 거리) 이 네 축이 하나로 엮이며 <현대인의 존재론>을 서술하는 글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가, 아니면 소진되고 있는가? 더 노력하라는 것이 아니라, 더 성과를 내라는 것이 아니라, 멈추라는 /사색하라는 것/안식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2026.4.17.fri.앙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