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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제 [山神祭]
정의=산신에게 올리는 제의. 고대사회의 제천의례에 뿌리를 두고 이어져 온 것으로, 오늘날 지역민의 안녕과 평화를 도모하는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내용=우리나라 국토 70%가 산이다. 최고봉인 백두산(2,744m)을 위시하여 수없이 많은 산이 국토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다. 이러한 산악 지형적 여건과 환경은 한국인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 이로 인해 한국 역사와 문화는 자연스럽게 산으로부터 시작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로부터 수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하강한 곳이 산(태백산)이요,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린 단군왕검이 산신이 되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이 이를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집에 집 지킴이가 있듯이 산에도 주인이 있다. 그가 바로 산신령(山神靈)이다. 산신령은 초능력적 영험력을 발휘하여 인간세상을 지배하여 왔다. 이런 이유로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산을 숭배하여 온 것이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에 헌강왕이 오악신(五嶽神)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사실은 한민족이 오래전부터 산을 숭배한 풍습을 잘 알려 주고있는 좋은 대목이다. 신라 때에는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긴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을 숭배하였고, 오악산으로 불린 토함산·계룡산·태백산·부악·지리산에 제사를 지내기도하였다. 고려 때에도 지리산, 삼각산, 송악산, 비백산의 사악신(四嶽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도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지리산, 삼각산을 오악산으로 숭배하였다.이뿐만 아니라 전국의 500여 고을에서도 주산(主山)이나 진산(鎭山)을 설정하고 정기적인 산신제를 봉행하여 산악신앙의 맥을 이었다.
산악신앙의 맥은 오늘날 산신제라고 하는 민간제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산신제는 지역민의 평화와 안녕을 도모하고 국가의 시화연풍(時華年豊)을 염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산신제를 통해 인간 세상의 일들을 하늘세계에 알리면서 신과 소통하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달성하기 위함이다. 즉 인간들이 산을 매개체로 하여 하늘과 연결 통로를 만들어신과 교감대를 형성하면서 기원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러한 산신제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있어 온 대규모적 제천의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신인합일사상(神人合一思想)에근거하고 있다. 산신제의 전통이 오늘날에 와 지역 또는 마을 단위의 소규모 행사로 축소되면서 본래 의미보다는 지역민 보호와 안녕 추구로 목적이 바뀌게 된 것이다.
산신제의 전통을 잇게 하는 산의 주인인 산신령은 산신, 산신할아버지, 산할아버지, 할아버지, 산신령님, 신령님, 산왕, 산왕산신, 산군, 산령, 산귀신 등으로 불린다. 또한 산명을 붙여 태백산 산신령, 지리산 산신령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산신들은 나라를 다스리던 통치자가 사후에 산의 주인으로 신격화된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넓게는 국가, 좁게는 부락을 수호하는 신으로 추대된다.
한편 산신령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산신도이다. 그림에 보면 호랑이의 변화신인 신선이 호랑이 등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선은 인적이 드문 깊은산 속에서 근엄하게 백발노인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간혹 선녀나 동자를 데리고 다닌다. 산 중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는 영험력을 소유한 신격이나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는능력의 소유자로서 변화성, 개혁성, 기술성, 생산성 등을 상징한다. 산신령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는 음양오행의 목성(木性)에 해당된다. 이는 곧 아침 해가 뜨는 동방(東方)을 상징하면서 시작과 솟음을 뜻한다. 서낭당에 소나무가 신목(神木)으로 모셔지고, 신 내림굿의 일월(日月)대를 동쪽으로 뻗어 자란 소나무 가지로 삼는 데서도 그 뜻을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나무는 음(陰)의 나무로서 맑고 깨끗한 깊은 산중에서 사시사철 푸른 색채를 지니며 자란다. 여기서의 푸른색은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산신령 두상 후광의 빛은 곧 산신령이 늘 신비스러움과 영험스러움을 나타내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산신령이 들고 다니는 죽순은 남성 성기를 상징한다. 이는 자손 점지를 암시하는 동시에 권력을 뜻한다. 산신령은 영초(靈草)인 산삼과 조롱박 안의 불사약(不死藥)인 영약(靈藥)을 소지함으로써 죽음에 다다른 사람도 회생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산신령 옆에 있는 동자의 오른손과 왼손에도 산삼과 영지가 들려 있기도 한다. 애기씨(선녀) 오른손에는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영적인 꽃이 들려 있다.또한 왼손에는 인간 세상을 내려다볼 때 사용되거나 바람을 일으켜 인간사회를 오갈 수 있도록 돕는 부채가 들려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산신령 그림에 나타나는 영지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곧 아기를 생산함을 상징한다.
지역사례=충남 부여군 부여읍 저석3리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매년 공동으로 산신제를 지내는데 이를 ‘산 치성’ 또는 ‘산제’라고 한다. 제의 비용은 마을 공동 소유의 논에서 나온 수익과 마을 주민들이 추렴한 금액으로 충당한다. 산신당에는 산신할아버지와 호랑이가 그려진 가로 143㎝, 세로 99㎝ 크기의 산신도와 함께‘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쓰인 위패가 모셔져 있다. 제의는 음력 정월대보름날 0시에 시작하여 새벽 3~4시까지 진행된다. 제일(祭日)을 정월대보름날로 정한 이유는 이 때가 만물이 가득 차는 시기로 풍성함을상징하기 때문이다. 또 이 때 산신제를 지내면 한 해의 농사가 풍족하게 된다고 믿는다.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먼저 제관을 선출한다. 마을 회의를 통해 부정 없는 가정을 선택하여 당주를 정하고 화주와 풍물패 등을 선정한다. 그리고 마을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서 부정한 사람이나 짐승의 접근을 막는다. 산신당을 청결하게 하고 당주가 머무르는 공간에 농기(農旗)를 세운다. 제물준비를 위해 먼저 조라술을 담근다. 그리고 배, 사과, 밤, 대추, 명태, 산자, 약과, 곶감, 줄미역, 산적, 조기, 명태어탕, 쇠고기육탕, 두부탕, 돼지고기, 소주 등을 마련한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지낸다. 제관들이 ‘강신제-참신제-독축-분향-초헌례-분향-아헌례-분향-종헌례’ 순으로 진행한다. 산신당 안에서 산신제를 지낸 뒤 밖으로 나와 산신할아버지와 산신할머니가 데려온 하인들을 위한 허공산신제를 지낸다. 순서는 산신당 안에서 지낸 것과 비슷하다. 허공산신제가 끝나면 음복하고 소지를 올린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서는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먼저 제물을 준비할 도가를 뽑는다. 도가로 뽑힌 사람은 사흘 전부터 목욕재계하는 등 몸을 정결하게 한다. 그리고산신당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금줄을 친다. 제물은 돼지머리, 고기산적, 떡, 부침개, 삼색실과, 메, 술 등을 준비한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지내는데, 초헌관이 분향재배하고 술잔을 올리고 나면 축관이 제문을 읽는다. 그런 뒤 아헌관과 종헌관이 술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초헌관이 소지를 올리는데 이때 재가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 산신이 흠향한 것으로 본다. 제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음복하면 산신제가 마무리된다. 마을 사람들은 산신제를 정성껏 모시면 마을이 편하고 풍년이 들것이라고 믿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벌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용부원리의 산신제
는 마을 사람들의 지연적 유대를 강화하고 자부심과 긍지 및 향토애를 갖게 하는 기능이 있다.
정의=신을 주신으로 모시면서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제의. 산신제·산제·산제사 등으로 불리며,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 산신제는 고대사회에서부터 명산으로 알려진 산과 산악지대 또는 산악과 인근한 마을들에서 행해졌다. 산신제는 산악숭배의 표현이며, 산악숭배 사상은 천신신앙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산신숭배 사상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편 고조선조에서 “단군은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山神)이 되었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민족에게 매우 오래된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고대사회에서의 산천제가 시조제(始祖祭)·농신제(農神祭)와 더불어 중요한 국가행사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신라의 삼산오악숭배나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 산악숭배 등의 산신에 대한 의례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면서 한반도 전역에 걸쳐 공동체신앙이나 개인신앙에서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다. 태백산 산신제나 치악산 산신제와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지면서 오늘날까지 관(官)주도의 산신제가 전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에 비해 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서 행하는 산신제당은 마을 주변의 산 중턱이나 정상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산제당이나 제당·산신당·산신각 등으로 불리면서 단수 또는 복수제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산신제를 행하는 마을에서의 제당은 상당과 하당 등으로 복수제당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제당 형태는 오래된 큰 나무 또는 그 나무 밑에 돌무지가 함께 있기도 하다. 집의 형태인 산신각의 경우에도 큰 나무와 병존하는 것이 보통이다. 제당의 형태가 높은 신목으로 표현되는 것은 신목이 하늘과 교통할 수 있는 ‘우주의 기둥’을 상징하기 때문이며, 이것이 곧 산신신앙이 천신숭배와 닿아 있음을 나타낸다. 산신제의 대상신인 산신은 호랑이로 이해되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호랑이는 산신의 매개자일 뿐이다.
산신제의 진행 과정은 제관 선정, 금기와 재계의 기간, 제당 제의, 음복과 주민회의 등 동제의 일반적 절차와 유사하지만, 희생과 야외용 밥솥인 새옹에 밥짓기 등과 같은 특별한 과정이 포함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백산맥 주변에 위치한 경북 문경시 동로면 수평리 산제의 경우, 진산(鎭山)인 미역끝산[藿端峰] 정상 바로 아랫부분에 위치한 산제당에서 행한다. 제당은 상·중·하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당은 오래되고 큰 소나무와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산제당이며, 상당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중당도 오래되고 큰 소나무이지만 솔잎흑파리의 피해로 뿌리째 뽑혀서 넘어져 있고, 하당은 중당보다 훨씬 아랫부분에 위치하며 희생을 처리할 수 있는 넓은 평지와 샘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공동체에서 행하는 산신제는 마을마다 일정하지 않지만, 정월 초사흗날부터 보름날에 이르는 시기에 가장 많이 행한다. 산신제는 동제 형식을 취하며, 의례의 경비는 마을 공동재산이나 주민들의 공동부담이 일반적이다.
산신제는 제관(祭官)을 선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제관은 제당 제의에 참가하는 사람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인데, 제관과 축관, 화주(또는 공양주) 등이다. 제관은 부정(不淨)이 없는 이로서 생기복덕(生氣福德)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부정의 범주에는 집안의 상사(喪事)가 있거나 환자 또는 임산부 등이 있는 사람, 살생을 한 경우, 부인의 달거리 등이 해당되며, 생기복덕은 하늘의 운(運)에 거스르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이 두 기준은 산신제의 대상신인 신성한 산신(천신)과 교융(交隆)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정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이다. 수평리에서는 상당 제관·공양주·하당 제관 등 각 1인, 희생처리 과정을 도울 사람 2명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제관은 일정한 기간 동안 금기와 목욕재계를 통하여 신성화 과정을 거친다. 금기는 제당과 그 주변, 제관의 집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기간 동안에 제관은 마을 밖으로의 출입이 금지되고, 주민들이 제관 집으로 출입할 수 없다. 또한 부부관계가 금지되고 식사 양을 줄이면서 일정 기간 동안에 목욕재계하고 스스로 신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요즘은 냇물에서 행하는 목욕을 세수나 집에서 목욕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등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
제당 제의에는 희생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대상은 소[牛]가 많이 사용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도축법이 시행되면서 소가 돼지로 바뀐 곳이 많다. 제당 제의에서는 소나 돼지를 제당에서 잡아 희생의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경제적 사정 등으로 약간의 쇠고기, 곧 머리 부분과 발[足] 부분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희생물의 부분을 통하여 전체를 표현하려는 일반적인 희생 대상의 변이과정과 일치한다. 희생은 산신을 모시는 상당보다도 하당에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소백산 산신제에서와 같이 제관이 소를 산제당에 모셔 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하게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희생의례는 크게 질러대는 비명소리나 제당 주변에 흩뿌려지는 선혈들이 제당을 정화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희생이 행해진 후에 제수로 장만하는 과정을 거친다. 즉, 희생물의 고기를 삶아서 제상에 올릴 준비도 해야 한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에서는 희생을 행한 후에 희생물을 해체하는 순서대로 상당인 산신당에 진설한다. 머리 부분과 발 부분은 불에 구워서 진설하였다. 이것은 번제(燔祭)의 한 유형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수평리의 제당 제의는 상당과 중당이 서로 다르게 행해진다. 상당 제의는 상당 제관이 제당에 도착한 후부터 야외용 밥솥인 새옹에 밥을 지어서 올린다. 새옹에 밥을 지어 올리는 행위는 산신제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읍내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새옹의 밥을 지을 때는 솥뚜껑을 열어 보아서도 안되고 밥물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밥물이 넘치면 정성이 부족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수평리의 중심되는 제당 제의는 중당에서 유교식으로 행한다. 하당 제관이 제수로 장만한 희생물을 중당으로 가져오면 진설한 후에 상당 제관이 헌작과 독축을 한다. 그리고 공양주와 하당 제관이 절을 하고 소지 올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하당 제의는 중당의 제수를 지게에 지고 옮긴 뒤 마을을 향해서 재배하는 것으로 끝난다. 제관들은 마을로 내려오기 전에 그들끼리 음복을 한다. 이때는 제수로 사용하고 남은 허드렛고기와 제주(祭酒)를 먹는 것이 전부이지만 비의(秘儀)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참여해서 먹는 음복과는 구별된다.
수평리와 읍내리의 주민들은 제관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들을 맞이한 후에 잠을 잔다. 음복은 정월 대보름날 이른 아침부터 주민들이 제관의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음복은 신이 드신 음식을 집단 성원들이 함께 먹으면서 그 축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양은 집에 가져가서라도 모두 먹어야 하며, 남은 음식을 개나 짐승에게 줄 수 없다. 그 음식을 먹은 짐승을 해를 입기 때문이다. 음복을 진행하는 동안, 제관들은 경비를 계산하고 모든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공지한다.
음복은 신의 축복을 받는 신성한 시공간에서 주민들이 대동단결하면서 한 해를 논의하기 위해 행해진다. 일년 동안 마을에서 공동으로 추진할 행사나 품삯, 마을의 여러 가지 일들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지금은 행하지 않지만, 음복을 행하는 정월 대보름날에는 줄다리기도 대규모로 행하면서 자신의 마을뿐 아니라 주변 지역의 주민들과도 대동단결하면서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기회로 삼았다.
마을공동체 제의는 지역문화사적 배경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읍내리의 경우 본래 지역민의 산신제당을 관(官)에서 수용하여 성황사로 개칭하였다가, 해방 이후 지역민이 제의의 주도권을 이양받으면서 현재의 명칭은 성황제지만 단종복위운동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산신제에 투영하여 행제(行祭)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한라산신제 [漢拏山神祭]
정의=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산천단에서 한라산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
역사=탐라국에서 비롯된 한라산신제는 탐라국이 해체되는 고려 숙종 10년(1105)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라산신제 장소는 제사를 지내는 데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라산 정상 북벽이었다. 고려 고종 40년(1253) 10월 무신(戊申)에 국내 명산과 탐라의 신(神)에게 각각 제민(濟民)의 호를 내리고 춘추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라산신제는 일 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18년(1418) 4월 11일 신묘(辛卯)에 예조에서 제주의 문선왕 석전제 의식과 함께 한라산제를 지냈다. 한라산제는 전라도 나주 금성산의 예에 따라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성종 원년(1470)에는 이약동(李約東, 1416~1493) 제주목사(濟州牧使)가 한라산신제 장소를 한라산 정상에서 산천단(山川壇)으로 옮겨와서 거행하였다. 봄과 가을로 한라산 정상에서 제사를 거행할 때마다 제사를 올리러 간 제주도민들 가운데 얼어 죽는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선조 34년(1601)에는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선조의 명을 받아 한라산신제를 거행하였다. 1601년에 제주도 지역에서 소덕유․길운절의 역모사건으로 인심이 매우 동요하고 있었다. 당시 역모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도에 온 김상헌은 제주도 민심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정성으로 한라산신제를 지냈다.
숙종 29년(1703)에는 이형상(李衡祥, 1653~1733) 제주목사의 치계를 바탕으로 한라산신제를 의논하였는데, 치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례의를 살펴보니 주현(州縣)에서는 사직 문선왕 포제(酺祭), 여제(厲祭), 영제(禜祭)만 제사한다 했습니다. 주현에서 풍운뇌우의 제사를 하지 않는 것은 장계에 얘기한 대로입니다”
성종 5년(1474)에는 오례의(五禮儀)를 찬성(纂成)하며 한라산신제가 사전에 기록도 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며, 더욱이 명산대천에 제사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니 지금이라도 사전에 등록하고 치악산․계룡산의 제례와 축문식에 따라 정월․이월․칠월에 제사토록 하였다. 그러나 한라산신제는 사전에 등록되지 않았지만 계속 거행되고 있었다.
정조 17년(1793) 11월 24일 계축(癸丑)에는 제주어사 심낙수(沈樂洙, 1739~?)에게 향과 축문을 주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주현 명산대천의(州縣 名山大川儀)’에 의거하여 한라산신제를 거행하게 하였다. 순조 원년(1801) 8월 1일 을사(乙巳)에는 한라산신제와 풍운뇌우제의 향과 축문을 실은 배가 풍랑으로 난파해 향과 축문 모두 바다에서 유실되었으므로 다시 급히 내려주도록 건의하고 있다. 이들 사료를 통해 한라산신제가 지속적으로 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헌종 7년(1841) 7월 초나흗날에 한라산신제를 거행했다. 제주목사는 향과 축문이 중앙에서 내려오자 좌수․유생들과 함께 치제하였으며, 돌담을 두른 묘(廟)가 있어 그곳에 신패(神牌)를 봉안하고 옆에는 소나무 30~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08년 한라산신제는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광복 이후 산천단 마을 주민에 의해 부활돼 유지돼 오다 2009년부터 아라동 차원에서 한라산신제를 계승해 봉행하고 있다.
내용=제주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한라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지내 왔다. 그러나 그 시기가 2월이어서 기상이 악화되면 도민들의 고통이 매우 컸으며, 심할 때는 얼어 죽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다. 1470년(성종 1) 당시 제주목사 이약동은 도민들의 노고를 덜기 위하여 이곳 산천단에 제단을 마련하여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 이때부터 매해 2월 첫정일[上丁日]에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되었다.
제주시 아라동 375-1번지 외 5필지 안에는 1964년 1월 31일에 ‘천연기념물 제160호’로 지정된 곰솔[黑松]나무와 함께 그 부근의 지명이 되어 불리는 산천단이 있다. 이곳에는 한라산신제의 제단이 있다. 산천단은 한라산신제 외에도 산천제, 포신제(酺神祭), 기우제 등 오랜 시대에 걸친 제사 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소림천(小林泉), 소림과원(小林果園), 소림사(小林寺) 고송(古松)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명소였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곰솔만 일부 남아 있다.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墠碑), 이약동 목사 한라산신단 기적비(紀蹟碑) 등이 서 있다.
원래 이곳에는 이약동 목사가 세운 묘단(廟壇)과 함께 한라산신선비(漢拏山神墠碑)가 있었으나 당시의 비들은 모두 소멸되고 없다. 지금 묘단 옆에 세워진 한라산신고선비와 동강난 기적비들은 조선 말기 이후 지역 유지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지만 이 비들도 중간에 없어진 것을 다시 찾아 세운 것이다. 그 뒤 1989년에는 지역의 유지들과 이약동 목사의 후손들인 벽진 이씨(碧珍 李氏) 문중회가 공동으로 제휘하여 추진한 목사 이약동 선생 한라산신단 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漢拏山神壇紀蹟碑)와 묘단이 새로 건립되었다.
산천단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에서 한라산제를 지냈다는 사실은 제주읍지(濟州邑誌),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탐라록(耽羅錄), 제주대정정의읍지(濟州大靜旌義邑誌), 탐라기년(耽羅紀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사묘조(祠廟條)에 “산천단은 남문 밖 15리쯤 아라리(我羅里) 지경에 있으니 담당관원은 4인이다. 한라산 산신제(山神祭)를 봉행하는 장소이다. 1470년 목사 이약동(李約東)이 재임 시 이곳에 창건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다(山川壇 我羅里境 直四人 漢拏山神祭 舊時 山頂致祭 人多凍死 成宗元年 牧師 李約東 創建 今廢)”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라산신제의 제관(祭官)은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집례(執禮), 대축(大祝), 찬자(贊者), 알자(謁者), 봉향(奉香), 봉로(奉爐), 사준(司樽), 봉작(奉爵), 전작(奠爵), 전사관(典司官)으로 구성된다.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제례(祭禮) 절차는 다음과 같다. 초헌관이 신위전에 폐백을 올리고(전폐례), 첫 잔을 올리고 축문을 받아드린 후 꿇어앉는다(초헌례). 대축이 초헌관을 대신해 축을 고한다(독축). 이때 제관 모두 굴복한다. 아헌례와 종헌례가 끝나면 초헌관이 신위전에 꿇어앉아 집사가 내려주는 술과 안주를 받아 마신다(음복례). 대축에 들어가 변과두를 거둔다(철변두). 다음에는 헌관을 비롯한 참여자 전원이 사배한다. 대축은 폐백과 축 등을 거두어 망료위에 나가 불사른다(망료). 이때 초헌관도 함께 배석한다.
한라산신제 봉행 과정에 대해서는 이원조의 탐라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축년(1841) 7월 초 4일에 한라산신제를 봉행하였다. 축책(祝冊)이 서울에서 내려왔으므로 먼저 좌수와 유생들로 하여금 모셔서 따라가게 하고 나는 나중에 길을 떠났다. 신단은 주(州)에서 20리 되는 거리에 있었다. 돌담으로 두른 묘(廟)가 있고 여기에 신패(神牌)를 봉안하였다. 곁에는 포신사(酺神祠)가 있고 좌우에는 오래된 소나무 30~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우거져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갑자기 개어 날씨는 맑고 상쾌했다. 제사를 지내고 관아로 돌아오는데 멀리서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포신묘(酺神廟)에 대해서는 이원진의 탐라지 「제주」 사묘조(四廟條)에 “포신묘는 소림 과원 안에 있다(酺神廟 在小林果園中)”고 하였고, 조선 정조대에 발행된 제주읍지에는 “포신단은 산천단 아래에 있다(酺神段 在山川壇下)”고 하였으며, 19세기 중반에 나온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에 “포신묘는 옛날 소림 과원 안에 있었으나 이제는 한라산신묘 옆으로 옮겨 세웠다(酺神廟 舊在小林果園中 今移建于漢拏山神廟傍)”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포신묘는 사람과 사물에게 닥친 재해(災害)를 신에게 빌어 액을 막고 복을 빌던 제단으로, 오늘날의 포제단과 같음을 알 수 있다.
한라산은 남쪽 끝에 있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이며, 진산(鎭山)이요, 신령한 산이다. 운공(雲空)에 맞닿아 백령(百靈)이 머무는 곳으로 모든 산악의 으뜸이다. 그러므로 한라산에 제사하는 산천제(山川祭)는 산의 백령을 위하는 산신제이자 하늘을 여는 천신제의 의미를 지닌다. 한라산신은 천신의 권능을 빌려 탐라 백성들을 지켜 주는 산신이자 천기(天氣)를 관장하고 하늘의 기운과 풍운뇌우를 조절하는 천신(天神), 탐라 백성을 지켜 주는 한라산신으로서는 전염병의 재앙을 막아주는 신, 탐라 백성의 건강을 지켜주는 신, 곡식의 풍요와 가축의 번성을 지켜 주는 이사지신(里社之神)이자 포신(酺神)이다.
즉 한라산신은 탐라국과 탐라 백성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시켜 주고, 전염병에서 건강을 지켜 주는 치병의 신이며, 3재인 풍재(風災)․수재(水災)․한재(旱災)를 막아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지켜 주는 신이다. 한라산신은 풍우를 조절하여 태풍과 장마를 막아 주며, 축산 번성과 농사의 풍요를 가져오는 산천신․풍운뇌우신․포신의 기능을 하는 신(神)이다.
계룡산산신제 [鷄龍山山神祭]
정의=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의 산신(山神)에게 올리는 제사. 통일신라시대부터 국제(國祭)의 대상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행제(國行祭) 중 소사(小祀)로 거행되었다. 지금은 매년 4월에 유교식, 불교식, 무속식이 혼합된 형태로 산신제를 올린다.
역사=계룡산은 호서(湖西)지방의 명산으로, 백제시대 때부터 국가를 수호하는 명산으로 지목받았다. 이곳에서 산신제를 언제부터 지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백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간주되었기에 연원은 오래되었다.
백제에서는 나라의 동쪽 경계를 수호하는 산으로서 계람산(鷄藍山)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에는 전 국토를 수호하는 명산대천의 제사 중 중사(中祀)인 오악(五嶽)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서악(西嶽)이라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중사로 치제되었으며, 명칭만 남악(南嶽)으로 바뀌었다. 조선에 이르러 오악이 삼산(三山)으로 축소되면서 묘향산·계룡산·지리산이 국토를 수호하는 산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계룡산은 일찍부터 국가를 수호하는 명산으로 인식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되었다. 이 산은 지역을 수호하는 명산이라기보다 국토를 수호하는 국행제의 성소(聖所)로 간주되었다.
계룡산산신제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는 조선시대의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계룡산은 조선시대의 국가 사전(祀典) 중 소사(小祀)의 대상이었다. 계룡산은 국가를 수호하는 삼악(三嶽)신앙 중 한 곳으로, 나라의 중앙을 지키는 곳이라 하여 이곳에 중악단(中嶽壇)을 건립했다. 현재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에 소재한다. 신원사(新元寺) 경내에 있는 중악단은 사찰 경내에 있지만 사찰과는 별도인 국행제의 처소이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가 향축(香祝)을 받들고 내려와 계룡산 산신에게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국가 사전이 폐지되면서 방치되었다가 1998년에 공주시가 복원하여 지금까지 해마다 4월에 ‘계룡산산신제’를 거행하고 있다. 현행 제사는 유교식, 불교식, 무속식이 혼합되어있다
이 밖에 계룡산 주변 마을에서도 마을의 주신(主神)으로 계룡산 산신을 모신다. 계룡산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계룡산은 명산으로서 자신의 마을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내용=
계룡산은 대전광역시와 충남의 논산시, 계룡시, 공주시에 걸쳐 있는 명산이다. 이에 대한 믿음은 국가 차원과 민간 차원으로 구분된다. 국가에서는 백제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대한 치제의 일환으로 산신제를 거행했다. 특히 조선의 국가 사전에서는 소사로 규정되어 국행 산신제를 베풀었다. 산신제는 계룡산의 서북쪽에 위치한 신원사의 경내에 남아 있는 중악단에서 치러졌다.
중악단은 신원사 대웅전의 동쪽 뒤편에 있는 구릉지에 위치한다. 대문간채·중문간채·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둘레에는 네모난 담장을 둘렀다. 중앙에 위치한 중악단은 현재 전면 세 칸과 측면 두 칸의 단칸으로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것이지만 왕실 주도로 건축되어 조선 후기의 궁전 건축 양식 및 수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단묘 건축물로서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소규모임에도 화려하고 위엄 있게 조성된 당시의 빼어난 건축물로 꼽힌다. 이것은 1999년 3월 2일 ‘보물 제1293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중앙에는 단을 설치하여 감실을 두고 ‘계룡산산신(鷄龍山山神)’이라 쓴 위패와 산신도(山神圖)를 봉안했다.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된 것은 1394년(태조3)부터이다. 북쪽 묘향산의 상악, 남쪽 지리산의 하악과 함께 예부터 영산(靈山)으로 꼽히는 삼악(三嶽)의 하나인 계룡산의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鷄龍壇)이라는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1651년(효종 2)에는 이 단이 폐지되었다가 1879년(고종 16) 명성황후의 명으로 재건하고 중악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계룡산 인근 지역에서 전승되는 산신제에 대한 연원은 조선 태조와 관계가 깊다. 태조가 조선을 일으키기 전에 계룡산을 비롯한 전국의 오악을 돌면서 기도를 했으며, 나중에 계룡산의 도움을 받았다 하여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는 설화가 있다. 무학대사의 현몽으로 태조가 이곳에 단(壇)을 베풀고 산제를 모셨다는 설화도 전한다. 또 계룡산 사연봉(四連峰)에 살고 있는 신모(神母)가 해몽으로 태조의 건국을 예언했다 하여 신모를 위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또한 태조에게 계룡산은 정씨(鄭氏) 터이고 이씨(李氏) 터가 아니라고 가르쳐 주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떡장수 할머니 이야기가 전해진다. 나중에 이 떡장수 할머니가 계룡산신임을 알고 계룡산신사를 짓고 그녀를 위해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지역 주민들은 계룡산산신제가 조선 건국 전후의 태조 이성계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 2년 기록에는 계룡산을 호국백(護國伯)으로 봉(封)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계룡산과 태조를 강하게 결부시키는 설화의 관념에는 계룡산산신도 조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산신에 대한 믿음이 국가 차원과 민간 차원에서 별개로 존재했기에 계룡산의 형상도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중악단에 모셔진 계룡산산신은 호랑이를 옆에 끼고 앉은 할아버지 형상이다. 붉은색의 도포를 입고, 머리는 위로 틀어올린 형상의 그림이다. 조선의 국가 이념인 유교의 가부장(家父長)에 대한 관념이 강조되면서 산신을 남성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앞의 설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신모나 할머니 형상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계룡산 남쪽에 위치한 동학사의 산신각에 여산신령 조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산신각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절이 724년에 창건된 사실에 미루어 산신에 대한 관심도 일찍부터 시작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계룡산의 산신은 여성이라는 관념이 지역 사회에서는 지배적이다.
계룡산산신제는 1998년에 복원되면서 해마다 4월에 공주시와 신원사가 공동으로 주관해 거행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 국행제는 봄과 가을에 거행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대에는 “매년 춘추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사는 소재관이 담당하며, 향과 축은 중앙에서 내려보냈다. 간혹 중앙에서 내시(또는 내시별감), 정랑(육조의 정5품 관직) 등이 제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성종 대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제수(祭需)를 귀후소(歸厚書, 관곽을 제조하고 장례를 담당했던 관청)에 넘겨 관곽(棺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목을 구입하도록 했다. 계룡산 제사에 들어간 제수의 규모도 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제사 내용은 조선 후기에 공주의 한 유학자가 쓴 『계룡당기(鷄龍堂記)』에서 약간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제사는 매년 춘(春) 2월과 추(秋) 8월에 택일하여 지냈고, 정초에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제사는 제관 두 명, 집사를 맡은 유생 여섯 명이 중심이 되어 행하였다. 제관은 경사(京師)에서 보냈다. 이 글에서는 ‘통훈대부 모(通訓大夫 某)’라고 되어 있다. ‘통훈대부’는 문관의 정3품 당하관이다. 유생은 읍내 향교에서 선임하였다. 계룡산 제사를 위하여 행정적으로는 경사의 예조, 공주감영, 공주목, 향교 등의 협조가 있었다.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제관과 유생은 먼저 신원사에 모였다. 이때 신원사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유학자의 글에서 분명하지 않다. 폐백과 제물도 신원사에서 담당한 것 같지가 않다. 수승(首僧)을 비롯한 승려들은 제관을 모시고 제사 과정에서 연락 등 수발을 든 것으로 보인다. 폐백과 제물이 도착하면 제관과 집사들은 계룡당으로 장소를 옮겨 제사를 모셨다. 동민들도 신원사에 와서 횃불을 드는 등 제사를 주변에서 도왔다. 절에서 모시는 산신이므로 명태 같은 육식이나 술은 올리지 않는다.
역사 문헌에는 개인적인 치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밖에 개인적으로 영험한 명산인 계룡산에 제사를 올리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 수 없지만, 계룡산은 고대 사회 이래로 기도의 장(場)으로서 줄곧 활용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흉서(凶書) 죄인 곽처웅(郭處雄)이란 사람이 개인적으로 역모의 성공을 계룡산 산신에게 기도한 사건이 있다.
계룡산 인근 마을 중에는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와 하신리에 각기 산신당이 있다. 산신당에는 산신을 무신도 형태로 봉안해 두었다. 계룡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구룡사라는 사찰이 있던 상신리 마을 어귀에는 솟대가 세워져 있다. 이 솟대의 머리가 계룡산을 향하도록 한다. 명산인 계룡산을 바라봄으로써 그 정기(精氣)를 받아 마을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한다. 이처럼 계룡산과 계룡산 산신에 대한 믿음은 그 주변 마을들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중악단에서의 산신제는 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중단되었다. 그러나 1998년에 공주시가 주도하여 산신제를 지방축제로 복원하였다. 해마다 4월 말일부터 5월 초 이틀에 걸쳐 축제를 연다. 이때 산신제는 유교식, 무속식, 불교식을 모두 포함하는 형태이다. 여러 종교 단체의 산신제가 종합되면서 본래 목적과는 달리 지방축제가 된 것이다.
제사는 먼저 공주향교에서 유가식(儒家式)으로 산천 제의를 올린 뒤 불가식(佛家式) 산신대제를 봉행하고, 공주무속연합의 법사들이 산신제와는 별도로 굿마당을 펼친다. 이어서 외국 산악신앙의 기원제를 올리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의 지역 산신제를 진행한다. 부대 행사로 부적 그리기, 사주 보기, 타로점 등을 비롯하여 민화·무속화 전시, 풍장놀이, 기(氣) 수련, 전통무예 시범공연 등이 열린다.
계룡산산신제는 부대행사와 더불어 봄꽃놀이 관광객과 다양한 신앙인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죽령산신제 [竹嶺山神祭]
정의=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전승되고 있는 마을제사. 조선시대에는 국행제(國行祭)로 봉행되었다.
역사=조선 태조 연간에 전국 산천의 사전화(祀典化)와 유교화(儒敎化)가 진행되면서 1414년(태종 14)에 악(嶽), 해(海), 독(瀆) 및 명산대천의 사전분류체계가 확정되었다. 조선 초기에 사전체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죽령산(竹嶺山)은 국행의례의 소사(小祀)로 등재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축을 내려 제사지냈는데, 소사(小祀)로 한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호서읍지(湖西邑誌) 등에도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유교적 제사로 정비되기 이전의 죽령산신당은 무격(巫覡)에 의한 별기은(別祈恩)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 별기은의 대상이 되는 신은 감악(紺嶽), 송악(松嶽), 덕적(德積) 등과 같은 명산의 신령이었고, 이를 위해 사설 신사를 두루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세종실록 세종 19년 3월 계묘조에 “단양군의 죽령산은 소사이고, 묘의 위판은 죽령산지신이라 쓰고 제사지내는 곳은 죽령산 기슭으로 옮길 것”이라고 기록한 내용은 죽령산신당이 본래 별기은의 제사공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내용=죽령산신당이 자리한 공간인 죽령산의 죽령(해발 689m)은 ‘죽령재’ 또는 ‘대재’라고 불리기도 하며,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이 고개는 삼국시대부터 전장의 요충지이자 영남과 호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서 중요한 지정학적 의미를 지닌다.
용부원리 마을의 산 중턱에 자리한 산신당에는 ‘죽령산신지위(竹嶺山神之位)’라 적은 위패를 모셔 두고 있다. 죽령산신당은 국사당이라고도 불리며, 해발 400m 정도의 당산 산마루 정상에 목조기와 건물 형식을 갖추고 있다. 1895년 3월에 전면 세 칸, 측면 한 칸, 뒷면 통칸, 앞면 전퇴(前退)로 개방한 팔작지붕으로 중수가 이루어졌다. 1976년에 ‘충청북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령산신제의 제사 대상은 죽령산신이며 그 구체적인 신격(神格)은 다자구할머니이다. 이로 인해 죽령산신당을 ‘다자구할머니당’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자구할머니를 죽령산신으로 모시게 된 것과 관련해 이 일대를 괴롭히던 산적들을 다자구야 할머니의 지혜로 물리치게 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국행제 소사의 경우 제사일은 중춘(仲春)과 중추(中秋)의 상순 기간에 택일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죽령산신제의 제일은 음력 삼월과 구월 중순의 정일(丁日, ‘丁’자가 들어간 날)에 잡는다. 이러한 제일의 전통은 조선시대 국행제 전통의 계승으로 볼 수 있다. 제일이 정해지고 나서 마을에 부정한 일이 발생하는 경우 한 달 정도 뒤에 새로운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다.
한편 죽령산치성문(竹嶺山致誠文)에 따르면 “매년 원월(정월)에 국가로부터 향축을 받아서 일 년에 세 차례 제사를 지낸다(每歲元月自國家蠲 以吉辰一年三次致祀焉)”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로 보아 중춘과 중추의 제일 이외에도 정월에 고유제(告由祭)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국행제이던 죽령산신제는 현재 관의 지원을 받아 제를 지내는 마을 단위의 제사로 전승되고 있다. 제일이 정해지면 제사 사흘 전에 마을 어귀와 죽령사, 도가집에 금줄을 치고 부정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근신한다. 또한 부정한 일이 없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마을에서 죽령사에 이르는 길을 포함해 제당 주변을 정비한다.
제물의 구입과 손질은 도가에서 맡아서 한다. 의례 하루 전에 목욕재계한 후 단양시장에서 제물을 구입한다. 죽령산신제에 올리는 제물은 봄과 가을의 절기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으나 대개 쌀 서 홉 정도를 새옹에 담아 큰 솥에 넣어 찐 메, 쌀 석 되 분량에 간을 하지 않고 장만한 백설기, 삼색실과, 나물, 포, 교미 경험이 없는 검은 돼지인 희생물 등이다.
도가에서 제물 준비를 마치면 마을 이장과 집사 등이 도가집 대문에서 제물을 인도받는다. 이때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지 않는다. 인도받은 제물은 죽령산신당에 진설된다. 이때 죽령산신의 위패에 반으로 접은 4절지 크기의 창호지를 올려놓는다. 이는 죽령산신을 새옷으로 치장한다는 상징적 의미이다.
죽령산신제의 의례는 「죽령산별제홀기(竹嶺山別祭笏記)에 의거해 봉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약식으로 이루어지는 편이다. 산신제를 지내는 제관 가운데 헌관은 마을 이장을 포함해 제사 당일 참여한 각 기관 및 단체장의 직급순으로 선출한다. 그 밖의 제관은 산신제에 참여한 마을 사람들 중에서 뽑는다.
먼저 집례(集禮)가 개사배(皆四拜)를 행하라 하면 모든 헌관이 이에 따라 예를 올린다. 이어 초헌관에게 초헌관예관세위(初獻官詣盥洗位)를 행하라 하면 초헌관은 오른쪽에 준비해 둔 대야에서 손을 씻고 사당 안에 들어가 신위 앞에 꿇어앉아 삼상향(향을 세 번 올림), 집작(술잔을 받음), 헌작(술잔에 술을 받음), 준작(헌관이 술잔을 준작에게 주면 준작은 술잔을 받아 신위 앞에 올림), 배례(예를 두 번 올림), 퇴잔(잔을 내려놓음), 음복 순으로 의례를 행한다. 아헌관과 종헌관도 이와 동일한 순서로 의례를 행한다. 한편 제관이 아닌 경우에도 의례에 참여하여 종헌 이후 배례를 올리기도 한다.
현재 죽령산신제의 제사 비용은 단양군의 지원과 참여한 사람들의 찬조금으로 운영된다. 본래 죽령산신제 봉행에 들어가는 비용은 할머니땅으로 불리던 밭을 마을 공동으로 경작하여 마련한 기금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이 땅이 국가에 환수되면서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제비를 충당해 오다가 관의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