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편지에 대한 예의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현대문학, 2012.
류인혜
한글을 깨우치고부터 할머니의 성경을 더듬거리며 읽기 시작하여 무엇이든 읽었다. 신문이든 책이든 눈에 뜨이는 대로, 글자만 적여 있으면 손에 잡히는 대로 빠져들었다. 읽는 일에 완전히 몰두하여 자연스럽게 독서의 훈련이 되었다. 중학생 때는 친구네 서점에 자주 들려 새로운 책이 나와 있으면 무조건 빼들었다. 덕분에 당시 유행처럼 발간되던 일본 소설을 여러 권 읽었다.
우리보다 앞서 가는 선진문화를 지녔다던 이웃나라 소설 속에 담긴 삶의 모습은 가볍고 흥미로웠다. 가볍다는 것은 유교사상에 무게를 둔 우리보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우리보다’라는 말을 써놓고 보니 우리는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배달의 민족! 동방예의지국의 자손들! 잦은 외세의 침략을 받은 힘없는 민족. 더 힘센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의 속국이 되었던 불쌍한 우리……. 괜한 양심의 가책으로 그들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한일합병 이전부터 일본은 날마다 돋아나는 가시였다.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압적으로 체결,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 1906년에는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여 초대통감에 이토 히로부미를 보냈다. 그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 사건의 내용은 비장하였으나 한편 통쾌했다. 1910년 8월 22일 한국의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한일합병 조약이 조인되었다. 그 이후 암흑의 시기를 일제강점기라고 말한다.
이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둔 채, 일본은 무조건 싫었다. 그런데, 버티고 버티다가 차디찬 이성은 거부하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호기심의 충동을 못 이겨 기어이 등 떠밀리듯 읽은 책, 1963년 아사히신문 창간 85주년 1천만 엔 현상 소설 입선작 인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빙점》은 정말 재미있었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을 거쳐서 긴 세월이 흐른 후에 남녀 두 사람의 작가가 같은 제목으로 써내려간 두 권의 책, 《냉정과 열정사이》도 흥미롭게 읽었다. 또 일본의 문인이 외국서적의 번역 같다고 평을 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 몇 권 읽었다.
한류를 통해 세계가 동질의 문화로 통합되어가는 이때, 우리가 일본의 문화를 뒤쫓아 간다는 피해의식 혹은 경쟁의식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밀어내고 다른 마음으로는 끌어당기며, 오묘한 갈등을 지니게 되는 것이 가까운 일본의 것들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는 당당하고 또 덤덤해야 된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2012년 12월 국내에서 출간된 이래 연속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며 ‘21세기 가장 경이로운 베스트셀러’라고 불리는 소설이다. 저자의 대표작으로 지난 10년(2008∼2017년)간 가장 많이 판매되어, 국내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돌파했다.
책의 배경은 모르면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책 제목을 대하자 읽어보고 싶은 책이 되었다. 잡화점에서, 소소한 물건을 팔고 사는 곳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가, 궁금했다. 오랫동안 생각만 하다가 2017년에야 손에 들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찜찜해졌다. 다시 도서관에서 두어 번 더 빌려와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었다. 읽어가며 가장 많은 발췌를 한 책이다.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기적을 믿는다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기적이 어느 한 작가의 손끝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추리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다. 추리소설은 인간이 지닌 내면의 악이 이루는, 거짓과 계략, 속임수, 간악한 처세 등으로 뭉친 범죄를 고도의 추리로 풀어나가는 상황을 추적한다. 그는 추리소설이 갖는 일반적인 형식을 따라 데뷔 초기에는 본격 추리소설에 몰두했지만 차츰 인간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추리소설이 주는 긴장감에 완전히 빠지기보다 보통의 삶에 집중했다. 사람에게는 다른 아름다운 일이 많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추리소설 본연의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성이 짙은 소설에 눈을 돌렸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그 일환이라고 보면 된다.
목차는 다섯 개의 장으로 간단하다. ‘제1장 답장은 우유 상자에 /제2장 한밤중에 하모니카를 /제3장 시빅 자동차에서 아침까지 /제4장 묵도는 비틀스로 /제5장 하늘 위에서 기도를’등으로 나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두 축은 나미야 잡화점과 환광원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 두 곳과 연결되어 있다. 서로 긴밀하게 이어지는 인연의 고리에 상담편지가 있고 답장이 있다. 그들은 살면서 겪는 절박한 고비에서 편지를 보내게 되고, 친절한 답을 들으며 인생의 새로운 과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사는 듯한 데도 결국에는 어느 시점에서 만난다. 그 만나는 곳에 인간에 대한 예의,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인간사이의 선의를 쉽게 사랑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 감정만은 아니다. 사랑보다는 더 깊고 신실한 인간에 대한 존경이다. 남의 인생을 인정해 주는 포용이고 시선의 넓음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주인은 장난삼아 보낸 백지 편지에 대해서도 마음을 다해 답장을 보낸다.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지도가 백지라면 난감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447쪽에서
저자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던 인물들이 진정한 소통을 통해 서로의 인생에 힘이 되어주는 모습을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내었다. 보이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고리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 준다. 시대를 넘나드는 편지를 매개로 단편적으로 이어지던 사건들이 결국에는 하나로 연결되는 절묘한 솜씨가 돋보인다.
줄거리를 길게 소개하지 않는 것은 소설을 읽다가 이게 뭔가, 어리둥절해지면서도 독자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등장인물 가운데 주목해야 할 사람은 세 사람의 도둑이다. 쇼타는 인원 감축으로 잘리는 바람에 환광원에서 가까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몸을 숨기기 딱 좋다며 두 사람을 나미야 잡화점으로 데려온 장본인이다. 아쓰야는 두 달 전까지 근처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 그만두어 집세가 밀린 상황이다. 다른 두 사람보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을 한다. 고헤이는 다니던 자동차 수리공장이 문을 닫아 실업자가 되었다. 빠른 도주를 위해 차를 훔쳤는데 그 차가 고장나버린다. 셋이 나이도 똑 같고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폭력은 쓰지 않았다.
이들은 도둑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인생을 멋지고 편하게 살아가기에는 많이 서투른 실패자다. 자신들이 자라난 환광원을 어려움에서 건져내기 위해 모의를 하게 되었다. 이 의리로 뭉친 좀도둑 세 명이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창구가 부활된 그 날, 잡화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부탁할 일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공고문’을 내달라는 것이다. 내 서른세 번째 제삿날이 다가오면 어떤 방법으로든 상관없으니 세상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기 바란다. 어떤 공고문인가하면 아래와 같은 것이다.
○월 ○일(여기에는 제사 날짜를 기입하도록 해라) 오전 0시부터 새벽까지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 창구가 부활합니다. 예전에 나미야 잡화점에서 상담 편지를 받으셨던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을까요. 기탄없는 의견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때처럼 가게의 셔터 우편함에 편지를 넣어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너로서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부탁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무척 중대한 문제다. 괴이한 일로 생각되겠지만 부디 내 소원을 들어주기 바란다. 아비 씀
-187~188쪽에서
나미야 잡화점의 주인의 유언을 받은 아들은 그 내용을 손자에게 전했고, 손자는 망설임 끝에 할아버지의 괴이한 부탁을 들어준다. 기적같이 상담창구가 부활한 그 하루의 중심에 세 사람이 머물게 되었다. 이해하게 어려운, 시공을 초월한 상황에서 서로 머리를 짜내어 가며, 달토끼, 생선가게 뮤지션, 길 잃은 강아지의 고민에 답장을 해 준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가난한 소외자인 그들에게 삶의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하는 이 책의 마무리는 놀람과 감동을 준다. 영화를 보다가 저절로 박수를 치는 그런 벅찬 기운이 들게 되는 것이다.
수필가 정명숙 선생께서 2017년 수필집 세 권을 한꺼번에 발간하신 후 감사하게도 책을 직접 주셨다. 내가 모르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했기에 무슨 이야기기가 더 있을까, 빨리 지나가려고 엄벙덤벙 읽었다. 그 속에는 일본문학에 관한 내용도 많기에 얼마 전에 다시 손에 잡았다.
수필집 속에서 일본의 소국민문고와 암파(岩波 이오나미)문고를 소개했다. 그들은 이미 1920년대에 외국문학을 어린이용으로 해설을 넣어 번역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충격적인 일은 어릴 적 흥미롭게 읽었던 세계명작과 위인전이 그 책들을 중역하여 발간한 것이라고 했다.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고 내미는 오리발보다 어떤 변명의 말을 해야 될지……
하루키의 소설을 ‘외국소설 일역투’라고 했다던 오이겐 자브로(大江健三郞)의 노벨문학상수상 연설이 전문으로 실려 있다. 또 이름만 들었던 여러 일본 소설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해 놓았다. 문득 선생께 오래 전 친구네 서점에서 읽었던 일본의 대중소설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지, 여쭈어보고 싶어졌다. 작가도 책 제목도 잊어버린 탓이다.
앞으로 이웃나라의 책을 조금씩 읽게 될 예감이다. 무조건 거부하는 것보다 자세히 알아본 후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몇 권을 읽어 볼 계획을 세운다.
류인혜(柳仁惠)
《한국수필》 1984년 봄호 수필 <우물>로 추천완료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수필집: 《순환》 외 2권. 수필선집: 《마당을 기억하며》
인문서: 《아름다운 책–류인혜의 책읽기》. 시집: 《은총》
나무수필집: 《나무이야기》, 《나무에게 묻는 말》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PEN문학상, 제11회 한국문협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