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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질문자: 주시자가 무엇입니까? 마음입니까, 아니면 마음을 넘어선 것입니까?
마하라지: 그것은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질문자: 만약 제가 '내가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마음입니까?
마하라지: 존재성이 마음을 통해서 '내가 있다'는 말로써 (자신을) 표현합니다.
질문자: 프리드먼씨가 번역한 <I am that>책에서는 운명과 정의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그것은 業과 같은 것입니까?
마하라지: 정의는 결정된 심판입니다. 운명은 거기서 이 모든 현상계가 흘러나오는 창고입니다. 그것은 그대가 거기서 나온 원리입니다. 그것은 필름의 원판과 비슷합니다. 의식은 그대가 나온 그 근원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래서 그 필름이 영사되는 것입니다. 영사되어야 할 것은 이미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 존재성, 그대를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이 그대의 운명입니다. 저 존재성이 취하는 행위 하나, 혹은 걸음 하나도 그 필름 안에 이미 기록 되어 있습니다.
질문자: 일부 점성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별들이 그 원판을 보여줍니까?
마하라지: 그것은 직접적인 위증입니다. 그대가 태어나기 아혿 달 전에 운명은 창조되었습니다.
질문자: 누구에 의해서 말입니까?
마하라지: 누구에 의해서도 아니고 그냥 일어납니다.
질문자: 그 원판은 운명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군요. 원판은 어디서 인쇄됩니까?
마하라지: 그것이 근본 마야의 솜씨입니다.
질문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뿌린 대로 거두기 때문에, 그전 어디쯤에선가 원판의 씨앗을 뿌렸다고 믿습니다.
마하라지: 그것은 들은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질문자: 아뇨.
마하라지: 마야는 幻의 1차적 근원입니다. 그 지점에서 자기에 대한 사랑이 시작됩니다. 즉, '내가 있다', 존재애입니다. 그것의 표현이 이 모든 현상계입니다.
질문자: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 거짓된 자아를 더 사랑합니까?
마하라지: 누가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한다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사랑의 상태가 존재하고, 그대는 그것을 향유하거나 그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조차 우리는 자신의 존재성을 사랑합니다.
질문자: 우리가 주시하기를 수련할 때, 그것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마하라지: 주시하기를 연습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대가 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성을 강화하려는 것이군요. 주시하기는 자동적으로 일어나겠지만, 진아가 열려야 합니다. 주시하기 이전에 그대가 있습니다.
질문자: 마하라지께서는 고요해지라고 말씀하셨지만, 저의 생활 방식은 고요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제 직업에는 많은 압박과 활동이 있습니다. 마하라지께서는 다른 직업을 얻으라고 권하시겠습니까?
마하라지: 저는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습니다.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저 그대는 그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만 아십시오. 그것은 그냥 일어납니다. 잉태의 첫날 생겨난 운명이 스스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대가 행위자라고 주장할 것이라곤 없습니다. 그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그 운명이 그대를 속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자: 죽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몸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하라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누구도 죽지 않습니다. 경전에서는 해소되지 않은 개념들을 가지고 죽은 이들은 다시 태어날 거라고 하지요.
질문자: 그들이 다시 태어날 때는 여러 몸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까? 예컨대 A씨 집안이냐 B씨 집안이냐처럼 말입니다.
마하라지: 왜 그런 외적인 문제들에 신경을 씁니까? 그대는 그 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는 데 집중하십시오. 그 몸은 다섯 가지 원소로 만들어졌고 실로 음식 몸입니다. 그대는 거기에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대는 이 음식 몸과 상관이 없습니다. 힘, 호흡, 존재성은 음식과 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음식과 물이 없으면 '내가 있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질문자: 그러면 '내가 있음'이 나중에 다시 돌아옵니까?
마하라지: 그대는 그런 어떤 것도 아닙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일은 없습니다.
질문자: 마치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 대기 중에 떠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몸을 만들 수 있는데, 만약 우리가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음식 몸 안에 들어가고 맙니다. 실은 제가 볼 때 (당신의) 가르침 속에는, 음식이라든가 음식 몸과 같은 것이 정말로 존재하지는 않으며, 하나의 개념만 있는 것 같습니다.
마하라지: 그대는 지금 어떤 수준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몸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이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질문자: 마하라지께서 책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압니다.
마하라지: 그것을 깨달았습니까?
질문자: 제가 깨달았으면 진인이게요.
마하라지: 맞습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모든 몸이 태어나듯이 그 몸도 태어납니다.
질문자: 지금 우리의 형편상 우리가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개념을 받아들여야지, 몸이 없다는 다른 개념을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마하라지: 그 근원으로 나아가십시오. 몸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압니까? 몸이 생겨나기 이전에 뭔가가 있습니다.
질문자: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이 '내가 있다'는 느낌을 소멸하는 데 있어서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아니면 그 노력도 필름의 일부입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기울인다고 생각하는 노력이 아무 효과가 없고, 그냥 전부가 필름 안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까?
마하라지: 의식 이면의 빛인 그 근원 안에 있으십시오. 그대는 의식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이해하십시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저 근본 마야 안에 있습니다. 녹음기가 제가 하는 말을 녹음하고 있지만, 카세트 안에 기록되는 어떤 말도 제가 아닙니다. 원래의 음성은 카세트 안에 담겨 있지 않듯이, 그대도 그 화물化物, 몸, '내가 있음' 곧 의식과 별개입니다.
질문자: 깨달음도 그 필름 안에 있습니까?
마하라지: 그것은 필름 안에 있을 수 없지요. 왜냐하면 그대가 그 필름을 아는 자니까요. 이제 그대가 들은 모든 이야기를 잘 생각해보고 5시에 다시 오십시오. 저 마음은 현상계 안에 있는 생각들이 축적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대의 모든 활동은 마음에 의존해 있고, 마음은 그대의 모든 기억과 그대가 이 세상에서 들은 모든 이야기에 의존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흡수하고 또한 그것을 우리 나름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개념들을 거기에 부가합니다. 그리고 이 몸 - 마음 의식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흡수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내가 있다' 의식이 전생, 탄생, 業 등의 원인이라고 계속 생각합니다. 그대는 어떤 것을 좋다, 훌륭하다고 받아들이고 다른 것을 나쁘다, 죄악이다 하고 배척하지만, 그런 것은 그대가 세상에서 얻은 개념일 뿐, 그런 분별의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질문자: 어제 마하라지께서는 차크라와 브라마 - 란드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우리가 명상 중에 그런 것들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마하라지: 차크라는 잊어버리십시오. '내가 있다'는 앎을 붙잡고 그것과 하나가 되십시오. 그것이 명상입니다.
질문자: '내가 있다'를 붙잡는 것은 누구입니까?
마하라지: 누가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까?
질문자: 우리가 생각을 넘어설 수 있습니까? 아니면 절대자 안에서 생각들은 그 필름의 일부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그냥 견뎌내야 합니까?
마하라지: 누가 생각을 넘어서고 싶어 합니까? 그 사람이 누굽니까? 의식이 생시의 상태에
나타나기 전, 그것이 절대자입니다. 의식이 나타나자마자 생각들이 나옵니다.
생각들은 견뎌내야 할 필요도 없고 그것을 버려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생각인 줄
알기만 하십시오.
질문자: 이른바 원물原物(필름 원판)을 결정하는 다른 모든 것들 말입니다.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까?
마하라지: 그러나 그것은 그대가 그 원래적 상태에 도달했을 때의 문제인데, 그때는 그대가
진인입니다.
질문자: 우리가 이미 그것입니다.
마하라지: 그대가 그것을 안다면 아무 질문이 없겠지요. 그대가 여기 있지도 않을 것이고.
질문자: 마하라지께서 말씀하신 필름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을 때
그 답은 그 필름 안에서 진행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와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는 그 필름 안에서 한데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마하라지: 존재성이 그대에게 나타난 이후로 그 앎을 통해서 이루어진 모든 일은 전적으로 다섯 가지
원소들이 그대를 통해서 ㅡ 또한 그대가 그 원소들로부터 받아 온 '내가 있다'의 모든 앎을
통해서 ㅡ 작용하는 결과입니다. '내가 있다'는 '내가 있다'는 앎보다 먼저이지만, 바로
지금 그 앎을 통해서 작용하는 것 ㅡ 그대 자신이라고 여겨 온 그 인격 ㅡ 은 다섯 가지
원소에서 나오는 음식 기운의 결과입니다. 그대가 절대적으로 고요하고 '내가 있다는 앎'
안에 그대 자신을 안정시키지 않는 한, 이 세간적 활동의 결과는 '내가 있다'로부터
분리될 것입니다. 먼저 그곳에서 안정되어야 합니다.
질문자: 주시자는 그 필름의 일부를 주시하는 그 필름의 일부입니까?
마하라지: 그대가 (잠에서) 깨어날 때 '내가 있다'가 그대에게 나타나자마자 그것이 주시자이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모든 현상계가 그 '내가 있다'의 시야에 들어오고 그는 전 현상계를
주시합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뒤 의식이 '내가 있다'인 그대에게 비추자마자 그것이 주시자입니다.
그 순간 이전에는 그대가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주시자도 없었고 '내가 있다'는 앎도
없었습니다.
그대가 있다는 증거는 의식이 그대에게 나타나자마자 있었지만, 그 증거를 받아들이자마자
그 의식이 몸을 장악했습니다. 그 '내가 있다'가 몸을 장악하자마자 그는 이 현상계 내에서
어떤 생각이 나타나든 그것을 통해서 행동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향, 혹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질문자: '내가 있다'는 1차적 개념은 실제로 주시하기는 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그것은 비인격적
주시하기처럼 한 측면을 주시하는 것입니까?
마하라지: 의식은 저에게나 그대에게나 하나의 개체입니다. 저는 제가 의식한다고 말하고, 그대는
그대가 의식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식과 별개로 그 의식을 자각하는 어떤 원리가
있습니다.
질문자: 그러니까 그것은 의식의 주시자인 원래의 상태이고, 개인적인 것은 아니군요. 그 원래의
상태에서 마하라지께서는 주시하기가 아무 애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자동적으로 일어난다고 말입니다.
마하라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밑천의 전부입니다. 이 의식에서
일체가 청정해지고 나면 우리가 자동적으로 그 원래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면, 이 모든 앎이 (그 상태에서) 존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의
원래 상태가 무엇이었는지 알려면 (그대의 실체를) 이해해야 하고, 몸과의 그 자기
동일시를 포기하고 자신은 아무 형상도 이름도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몸 -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그대는 조건 지워집니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앎
안에서 무조건적으로 안정되고 나면 그대는 현현된 '내가 있음'이고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니까요.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모두 그대의 의식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도 그것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알겠지만, (그대가) 무엇을 한다거나 된다는 것이 없습니다.
빗물로부터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나쁜 것들이 자란다고 해서 빗물
탓이라고 할 수 없고, 좋은 것들이 자란다고 해서 빗물 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빗물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어디 있으며, 빗물에 죄나 공덕이 어디 있습니까?
질문자: 말이 없는 그 '나'와 '내가 있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나'가 아닙니까?
마하라지: 그것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대는 그대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 단계에서는 일체가
그대의 진아입니다. 흙과 해와 달, 모두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진아입니다.
모두 그대의 나툼이지만, 그러면서도 그대는 그것은 넘어서 있습니다.
이제 한 단계 높여 봅시다. 의식은 이 세계, 이 현상계를 뜻하고, '내가 있음'은 존재성을
뜻합니다. 이 의식은 없는 색깔이 없고, 광대하고, 풍부하고, 무한합니다. 절대자인 나는
흙, 불, 물, 공기가 아니고 허공도 아닙니다. 나는 오염되지 않았고, 그 어떤 것에도
접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를 '내가 있음' ㅡ 존재성 ㅡ 으로 간주하면
이 모든 현상계가 나 자신이 되는데, 이 현현된 '내가 있음' 안에서도 나는 어떤 죄나 공덕에
의해서도 영향 받지 않습니다.
질문자: 저는 왜 잉태 때가 다른 순간보다도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더 중요한지 알고 싶습니다.
마하라지: 잉태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그 순간의 세계의 상황은 물론이고 부모의
사진이 찍히는 때입니다.
질문자: 티베트 불교에서는 (잉태된 지) 석 달이나 넉 달이 지나야 영혼이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마하라지: 자궁이 무엇입니까?
질문자: 그것은 제 생각이 아니고, 저는 단지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마하라지: 이 모든 현현된 세계는 다섯 가지 원소들이 결합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섯 가지 원소 안에
있고, 다섯 가지 원소의 일부입니다. 모든 유희는 다섯 가지 원소 안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질문자: 다섯 가지 원소는 언제 태어났습니까?
마하라지: 시간이 없는 순간에 태어났습니다.
질문자: 도저히 당신을 이길 수 없군요!
마하라지: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질문자: 시간 속에서든 밖에서든, 누가 다섯 가지 원소를 잉태했습니까?
마하라지: 저 1차적 개념, 근본 마야, 幻의 근본이지요. 그 모든 집과 건물들은 누가 잉태했습니까? 마음의 개념이지요.
[깨달음을 찾는 나그네들의 쉼터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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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저 그대는 그 행위자가 아니라는 것만 아십시오. 그것은 그냥 일어납니다.
그대가 행위자라고 주장할 것이라곤 없습니다. 그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그 운명이 그대를 속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앎을 붙잡고 그것과 하나가 되십시오. 그것이 명상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