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무아(2017.2.1.)
불교의 교리(불교 근본교리/김현준)에는
삼법인, 중도, 십이인연, 사성제, 팔정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삼법인에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 있다고 한다.
제행무상이란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진다. 즉 실체가 없다.
실재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독자적인 알맹이가 있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저 혼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연소기, 인과 연이 맞아서 생겨난 것이다. 인과 연이 화합하여 만들어지고 생겨난 것이기에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 고유한 실체가 없어 인생무상이라 한다.
그러므로 제법무아도 만들어 진 모든 것은 사라지므로 아(나)가 없는 무아, 즉 공이다. 정녕 불변의 실체요,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그 무엇이요, 만들어지기 이전의 그 무엇일 뿐이다. 바로 ‘이 무엇(하느님임)’을 깨치면 지금 우리가 고집하고 있는 나 이전의 진아를 체득하게 되어 열반적정 해탈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제행무상을 알고 제법무아를 체득하면, 그 자리가 열반적정이라 한다.
이 알맹이가 없는 ‘무아’를 수련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진아’로 바뀌어 감이 그리스도교와 비슷하나, 불교의 비움과 그리스도교의 비움은 좀 다르다. 그러므로 불교는 깨달음(철학)의 종교요, 그리스도교는 계시의 종교라 한다.
우리가 인생무상한 현실 속에 파묻혀 괴롭게 살아가는 까닭은 나에 대한 집착 때문이며, 나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는 ‘무아’의 이치를 확연히 알게 되면 어떠한 괴로움도 능히 벗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집착은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모든 것이 변함에도 불구하고, 나만은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무언가에 결사적으로 집착을 하고,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기를 꺼려한다. 집착을 해야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온다. 이 집착으로 인한 고를 없애 해탈하려면 팔정도가 필요하다고 한다(바로 보고, 바로생각하며,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생활하고, 바르게 정진하라. 바른 신념을 가지고, 바른 선정을 이루어라).
지난해 93세로 별세하신 제찬규시메온신부님은 원효대사가 당나라의 중 천명에게 화엄경을 가르쳐 모두 성인이 되게 했다는 양산의 천성산 기슭 호계 달밭골(박해시대 교우촌, 범실공소 근처)에 오래 전 당시 거금 700만원으로 넓은 땅을 자비로 구입하여 빨마수녀회의 ‘무아의 집(양로원)’이 들어서게 했다.
또한 최근엔 달밭골 성당을 지으면서 재정상 어려움으로 인테리어를 못 하고 많은 시간을 끌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교구 도움으로 준공하게 되어, 노 신부님은 힘이 솟아 자기만의 특수한 제대를 꾸미기 위해 의욕에 넘쳐 열정을 다하시는 모습에 머리가 숙여졌다. 아쉽게도 소원이었던 마지막 새 성당 봉헌 미사를 눈앞에 두고 별세 하셨다.
돌이켜 보면 신부님은 시카고 한인 성당을 지어시면서 내게 “땅이 있어야 선교를 할 수 있다”, 그 철학으로 오래전 오륜대 대부분의 가톨릭 땅을 마련하셨으며, 소화보육원을 이전시키고 오늘날 주교좌남천성당이 있게 하셨고, 복자이정식요한과 양재현마르티노 외 6위의 뼈를 동래갈멜수녀원산에서 찾아 한국순교자박물관에 묘를 조성하셨으며, 한국천주교사를 위해 수많은 일을 하셨다. 또한 신부님만큼 성당을 많이 지어 봉헌하신 분도 드물다. 그때마다 있었던 기적적인 에피소드도 많이 들었다.
이 마지막 달밭골 성당을 짓는 과정을 안타깝게 오랜 시간 지켜보고 왔던 나도 그 봉헌미사를 간절히 기대하였다. 40년 전 신부님으로부터 성가를 제대로 배웠기에 목이 터져라 노래하고 싶었다. 미사 중에 잘 못 노래하면 주특기이신 “성가 그만! 다시!” 하시더라도 못 들은 척 마음껏 부르리라, 이제는 신부님의 “성가 그만!” 소리가 그립고 목이 메일뿐이다.
해마다 명절뿐만 아니라 틈틈이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양산 ‘무아의 집’에 가면 신부님이 밤도 주어주시고, 참 자상하게 해 주셨다. 30여년 이상 우리 아이들은 여기서 다 자란 느낌이며, 오랜 세월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신앙감각(sensus fidei)이 생긴 것 같다.
신부님,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아멘.
신부님! ‘무아의 집’의 ‘무아’란 무슨 뜻입니까? 라고 여쭈니 신부님 왈
“‘무아’란 자기 상실의 성체의 삶을 말한다. 필립비(2,7)서는 이를 다음과 같은 요지를 전해 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면서 종으로 ‘비하(self-emptying, κενωσι?)’하고 무죄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순종의 길을 걸으셨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려 할수록 하느님은 오히려 그 어른을 높이 올리셨다. 이것이 ‘무아’의 역설적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르침이라 하겠다(달밭골/제찬규신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예수님께서 온전히 무화하시어 거룩한 몸(성체)이 되셨듯이, 우리 자신이 없어지고 온전히 그 분과 하나 된 상태를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비움과 불교의 비움은 이런 의미에서 다르다.
결국 비움은 단순이 집착과 탐욕을 끊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진정한 비움의 의미는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비운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내 것이 비워지는 것이다. 그냥 비워서는 곧바로 다른 것이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된다. 하느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일을 할 때 비움이 시작된다(사제의 일생/제찬규신부).”
그러므로 불교의 '무아'는 만들어진 모든 것은 사라지므로 내가 없는 ‘무아’를 알고, 만들어 내는 ‘그 무엇’을 깨달아 ‘진아’를 체득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의 ‘무아’는 바오로사도처럼 자아(ego)를 비워 내가 없는 ‘무아’로 만들어 ‘참자아(self,그리스도 자아)’로 채우는 것이다.
바로 이 기도가 헤시키아로부터 2천년 내려오는 ‘마음의 기도(예수기도)’이다.
매일 이 기도수련을 통해 나의 수덕목표인 자기비하(self-emptying, κενωσι?)를 향해 끊임없이 가고 있다.
광양에서 강병관안드레아김대건
첫댓글 선배님
글 읽을 수 있어서 좋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