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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귀감(禪家龜鑑)
『선가귀감』은 어떤 책인가?
『선가귀감』은 조선시대의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대표적인 저술로 45세(1564년) 여름에 금강산에서 서문을 썼으며, 60세(1579년) 봄에 그의 문인들에 의해 간행됐습니다. 이 책은 선(禪)의 사상과 방법을 간추리고 정리해서 일종의 선학(禪學) 개론서로 후배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런 성격은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비록 하찮은 사람이기는 하나 바다 같이 넓고 아득한 대장경의 세계를 헤쳐 나갈 후배들의 수고를 덜어줄까 해, 가장 요긴하고 간절할 것들을 뽑아 추린다. 참으로 말은 간단하나 뜻은 두루 갖춰졌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로써 스승을 삼아 끝까지 연구하고 묘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마디마디에 살아있는 석가여래가 나타나리니 부디 힘쓸지니라.”
그런데 이 책 안에 있는 글이 모두 스님의 창작은 아닙니다. 많은 경전들과 조사의 어록을 보다가 요긴한 것을 추려 모아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원문마다 주해(註解)를 달고 더러는 송(頌)이나 평석(評釋)도 붙여 놓았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마음과 그 깨달음의 효용에 관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선(禪)과 교(敎)의 정의에 관한 것,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이 반드시 알고 지켜야 하는 것, 그리고 선종의 다섯 종파에 관해 설명합니다.
서산대사는 우선 선사상의 진수를 가장 먼저 밝히고 선과 교의 관계에 대해 설명합니다. 선수행의 실제 문제에 대해 폭넓게 언급하고, 수행자의 기본자세와 본분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며, 마지막으로 선종의 종파와 임제종의 종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책의 처음 인용문과 마지막 인용문은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 서산대사가 가장 간곡하게 전달하고 싶었던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처음 인용문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밝고 신령하다’와 마지막 인용문 ‘거룩한 빛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빛나도다’에는 스님의 화두가 밝혀져 있는 셈이다. 즉, 스님은 언어적 이해(知解)와 시간적 한계의 너머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마음의 근원을 사람들이 바로보기를 바랐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사백 년 전 선(禪)과 교(敎)가 대립돼 있던 우리나라 불교의 상황을 얼마쯤은 엿볼 수 있습니다. 스님은 자신의 선교관(禪敎觀)을 이렇게 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 ‘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이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과 아난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음에 이르는 것은 선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다. 또한 마음은 선법(禪法)이고 말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비록 한맛(一味)이지만 뜻은 하늘과 땅만큼 아득히 떨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선과 교가 둘 아님을 밝히면서도 먼저 깨달음을 주장해, 선을 교보다 우위에 두고 있으며, 더 나아가 스님은 선이 주(主)가 되고 교는 종(從)이 돼 깨달음에로 나아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 먼저 모든 법을 가려서 보이고 다음에 공(空)의 이치를 가르친 것인데, 이 공의 이치에 바로 들어가 사무치는 것이 선이며, 특히 조사선(祖師禪)은 그 자취가 뜻의 자리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결국 스님은 이 책을 통해 선을 주(主)로 해 교를 융섭하려는 불교통일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스님의 종지(宗旨)와 종풍(宗風)은 이후 ‘서산종(西山宗)’이라 일컬어도 무방할 만큼 한국불교계에 파급됐으며, 이것이 그대로 한국불교의 성격을 형성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더욱 일본과 중국 등으로 유포돼 불서(佛書) 중의 명저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으로 사명대사가 『선가귀감』을 가지고 가서 당시 쇠퇴했던 일본의 선을 중흥시킴으로써, 그 뒤에 『선가귀감』은 일본 임제종(臨濟宗)의 지침서가 됐습니다. 일본에서 그 판본이 무려 180여 종에 달해 이 글이 한국에서보다도 일본에서 크게 유통됐음은 특기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서산대사가 후배들을 염려하는 노파심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스님은 선가(禪家)에서 흔히 무시해버리거나 멸시하기 일쑤인 정토사상(淨土思想)에도 나름대로의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염불수행을 무시하지 말도록 권고했고, 깨달으면 그만이라는 사이비 선승(禪僧)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수행인으로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일상적인 행동을 간곡히 말하고 있으며, 선 수행 도중에 빠지기 쉬운 함정들을 자세히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선가에서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불가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요소를, 간결한 말 속에 다양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이 책에 담긴 내용 또한 주로 출가 수행인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정신을 지니고 살아가려는 일반인들에게도 지혜롭게 사는 길을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선가귀감』의 주요 내용 해설
1. 나의 불성(佛性)은 우주의 본체[一物]
(1) 한 물건[一物]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밝고 신령해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는다. 이름할 수 없고 모양 지을 수 없다.”
마음과 생명의 근원은 생각으로 이해될 수 없고 말로 표현될 수도 없기 때문에 불필요한 연상작용을 막기 위해 억지로 한 물건이라고 표현하지만, 이 한 물건은 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언어로 이 한 물건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 회양선사에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라고 물었을 때, 회양선사가 8년 만에 깨치고 나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해 6조의 적자(嫡子)가 됐습니다.
(2) 부처와 조사의 출세(出世)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이, 바람이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것이다.”
석가모니와 가섭존자가 세상에 나오신 것은 대자대비를 바탕으로 중생을 건지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물건’으로 본다면 사람마다 본래 면목이 저절로 원만히 이뤄졌기에 다른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하는 것은 도리어 평지풍파를 일으킬 우려가 있습니다. 본분(本分)을 바로 들어 보일 때에는 부처님과 조사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3) 진리의 체득
“그러나 법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들은 기질과 수준 차이가 다양하니 여러 가지 방편을 벌리지 않을 수 없다.”
법(法,dharma)이란 변하지 않는 원리의 면과 인연을 따르는 이치의 면이 있고 사람은 단번에 깨닫는 근기와 점차 차례로 이해하는 근기가 있으니, 문자와 말로 가르치는 방편이 없을 수 없습니다.
(4) 억지로 지은 이름
“억지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했으나, 이름에 얽매여 분별을 내서는 안 된다. 다 그래도 옳은 것이다. 그러나 한 생각이라도 일으키게 되면 곧 어그러진다.”
한 물건에 세 가지 이름을 붙인 것은 부처님 말씀의 부득이함이요, 이름을 따라 분별을 내지 말라는 것은 선법(禪法)의 부득이한 일입니다. 부처님과 조사의 방편은 각기 다릅니다.
2. 선(禪)과 교(敎)는 일원(一元)이다
(1) 세 곳에서 전함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요, 한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니라.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세 곳이란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설법 이외의 방법으로 뜻을 전한 장소이며, 부처님이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아난존자에 의해 기록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과 교의 근원은 부처님이고 선과 교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입니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입니다. 또한 마음은 선법(禪法)이고 말은 교법(敎法)입니다.
(2) 마음을 얻으면 교(敎)와 선(禪)은 하나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방긋 웃는 것이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밖에 따로 전한 선지가 될 것이다.”
법은 이름이 없는 것이므로 말로써 미치지 못하고 법은 모양이 없는 것이므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본바탕 마음을 잃게 되면 부처님이 꽃을 들고 가섭이 웃었던 일도 부질없는 글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며, 마음에서 얻으면 장사꾼들의 잡담도 다 훌륭한 설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선과 교의 깊고 옅음을 밝힌 것입니다.
(3) 생각과 경계를 잊어야
“내가 한마디 말을 할까 한다. 생각을 끊고 인연도 잊어 일없이 망연히 앉아 있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절로 푸르구나.”
생각을 끊고 인연을 잊는다 함은 마음자리[心地]를 얻은 것을 가리키니, 배움을 끊어 망상을 없앨 것도 없고 참(眞)을 구하지도 않는 소위 ‘한가로운 도인(閑道人)’입니다.
(4) 교(敎)는 일심(一心), 선(禪)은 견성(見性)
“교문(敎門)은 오직 한마음 법(一心法)만을 전하고, 선문(禪門)은 오직 견성(見性)하는 법만을 전하였다.”
마음은 거울의 바탕[鏡之體]와 같고 성품(性)은 거울의 빛과 같은 것입니다. 성품은 스스로 청정한 것이므로 밝게 깨달을 때 본마음을 얻습니다. 이것은 깨친 한 생각을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마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본래의 근본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무명(無明)의 형상만 취하려는 마음입니다. 성품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근본진리(本法性)요, 다른 하나는 성품과 모양이 상대되는 성품[性相相對性]입니다. 그러나 선을 닦는 이나 교를 배우는 이들이 다 같이 어두워 이름에만 집착하고 관념적 이해만 해 얕은 것도 깊다하고 혹은 깊은 것도 얕다 해 공부하는데 큰 병통이 되므로 여기서 가려 말한 것입니다.
(5) 선교(禪敎)의 다름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은 먼저 모든 법을 가려 보이시고, 나중에 공(空)한 이치를 말씀하셨지만, 조사가 나타내는 구절은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서 드러났다.”
부처님은 만대(萬代)의 스승이 되시므로 어디까지나 자세히 가르치셨고, 조사들은 상대자가 그 자리에서 곧 해탈하게 하므로 뜻이 그윽하게 통하도록 한다.
(6) 활등과 활줄의 차이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께서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란 한 맛(一味)에 돌아가는 것인데, 이 한 맛의 자취마저 떨어버려야 조사의 한마음(一心)이 드러난다.”
활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굽다는 뜻이요, 활줄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곧다는 뜻입니다.
(7) 먼저 참다운 가르침의 뜻부터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먼저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써 ‘변하지 않는’ 그리고 ‘인연을 따르는’ 두 가지 뜻이 내 마음의 성품과 형상이며, 단박 깨치고 점차 닦는 두 가지 문은 공부의 시작과 끝임을 자세히 가려 알아야 한다. 그 뒤에, 교의 뜻을 놓아 버리고 오로지 그 마음이 뚜렷이 드러난 한 생각으로써 참선한다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3. 조사선(祖師禪)과 깨친 뒤의 보림(保任) 수행
(1) 활구(活句)를 참구(參究)하라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할 것이요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라.”
활구에서 깨달으면 부처나 조사처럼 스승이 되고, 사구에서 깨달음은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2) 고양이가 쥐 잡을 때처럼
“무릇 참구하는 공안(公案)에 대해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가되 마치 닭이 알을 품듯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하고, 배고픈 사람이 밥을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을 때가 있으리라.”
억지 노력으로는 즉,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함 없이 깨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3) 참선의 세 가지 요건
“참선하는 데는 큰 신심(信心)과 큰 분발심과 큰 의심, 이 세 요건을 갖춰야 하며, 그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가 부러진 솥처럼 소용없는 물건이 되고 만다.”
부처님은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하셨고, 영가스님은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하셨고, 몽산스님은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입니다,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말했습니다.
(4) 개에게 불성(佛性)이 없다는 화두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도 오직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하는 화두를 항상 생각하고 생각해 이치의 길이 끊어지고 의미의 길이 끊어지고 재미도 없으므로 마음이 답답할 때가 온다. 바로 그때가 그 사람의 몸과 목숨을 내던질 곳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근본이다.”
개에게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 묻는 질문에, 조주스님이 ”없다“고 대답한 한마디는 온갖 못된 관념적 이해를 꺾어버리는 연장이며, 부처님의 면목이며 조사들의 골수입니다. 이 관문을 뚫어야 부처나 조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5) 화두를 참구할 때의 병
”화두는 그 자리에서 알아맞히려 하지 말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말며,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라. 더 생각할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가 생각하면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 마치, 큰 쥐가 쇠뿔 속에 들어가다가 잡히듯 할 것이다. 또 평소 이런가 저런가 따지고 맞혀 보는 것이 식정(識情)이며 생사(生死)를 따라 옮겨 다니는 것이 식정이며, 무서워하고 방황하는 것이 또한 식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병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 빠졌다 솟았다 할 뿐이다.“
분별로 헤아리거나 조급한 마음으로 억지로 답을 구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무슨 뜻일까’하고 의심할 일입니다.
(6) 조사의 관문(祖師關)을 뚫으라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아서,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버리고 한번 뚫으면 몸뚱이째 들어가리라.“
위에 말한 뜻을 거듭 다져 활구를 참구하는 이로 하여금 뒷걸음쳐 물러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옛 어른이 이르기를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는 것이고, 오묘한 깨달음은 생각의 길을 다 끊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7) 거문고 줄 고르듯 하라
“공부는 거문고 줄을 고르는 법과 같아서 팽팽하고 느슨한 정도가 알맞아야 한다. 너무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無明)에 떨어지게 된다. 오직 또렷이 깨어 역력하고 은밀하게 끊임없이 해야 한다.”
(8) 도가 높아질수록 악마가 성행한다
“공부가 걸어가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모르게 되면, 이때 팔만사천 마군(魔軍)의 무리가 여섯 감각기관 앞에 지키고 있다가 마음을 따라 온갖 생각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 있으랴.”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입니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악마가 대들게 됩니다. 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악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魔)의 일이란 망상 속의 일입니다.
(9) 온갖 생각을 한 덩어리 화두로
“공부가 만일 한 조각을 이룬다면 비록 이번 인생에서 깨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감을 적에 악업(惡業)에 끌리지는 않을 것이다.”
업(業)은 무명(無明), 선은 지혜입니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서로 맞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10) 참선하는 이들이 점검해야 할 도리
“대저 참선하는 이는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두터운 것을 알고 있는가? 자기 육체가 순간순간 죽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일찍이 부처나 조사와 같은 이를 만나고도 그대로 지나쳐 버리지 않았는가? 쓸데없는 잡담이나 시비를 하는 경우가 있지는 않은가? 화두가 하루 온종일 똑똑히 들리고 있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가? 앉고 눕고 편한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런 것들이 참선하는 이가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해야 할 도리다.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이 몸 이때 못 건지면 다시 어느 세상에서 건질 것인가!’ 하셨다.”
사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란 마치 바다에 떨어진 바늘을 찾기보다도 어렵기에 불쌍히 여겨 일깨운 것입니다.
위의 법문은 총명이 업의 힘을 막을 수 없고 마른 지혜(乾慧)가 윤회를 면할 수 없음을 가리키니, 각자 살피고 생각해 스스로 속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배우는 사람들은 말할 때에는 깨친 듯 하다가도 현실문제와 업력(業力)에 대해 무력하니 이것이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11) 어두운 칠통을 깨뜨려야 한다
“만약 생사(生死)를 막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한 생각을 탁 깨뜨려야만 비로소 ‘생사(生死)’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탁 깨뜨리는 것은 새까만 칠통을 깨뜨리는 소리입니다. 칠통을 깨야 생사가 아주 끊어질 것입니다.
(12) 깨친 뒤에 잘못하면 독약이 된다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후에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서 눈이 바른가를 점검해야 한다.”
도(道)는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 깊어지니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해서 작은 것으로 만족하면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될 것입니다.
(13) 먼저 깨닫고 수행해야
“옛 어른이 말씀하기를 “다만 자네의 눈 바른 것만 귀하게 여길 따름이지 자네의 행실을 보려고 하지 않네.”라고 하셨다.“
참된 수행을 하려면 먼저 대번에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14) 굽히지도 높이지도 말라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깊이 믿어 스스로 굽히지도 말고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이 마음이 평등해 본래 성인과 보통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이치는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어두운 이와 깨친 이가 있고 성인과 보통 사람이 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문득 참 내가 부처와 조금도 다름없음을 깨치는 것이 이른바 ‘단박 깨침’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굽히지 말라 한 것입니다. 깨친 뒤에 습기를 끊음으로써 보통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은 ‘점점 닦아가는’ 것이니, 그래서 스스로 높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15) 미혹한 마음으로는 참된 수행이 어렵다
”미혹한 마음으로 도를 닦는다는 것은 오직 무명(無明)만을 도와줄 뿐이다.“
깨친 것과 닦는 것은 마치 기름과 불이 서로 따르고,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것과 같습니다.
(16) 번뇌가 없어지면 곧 성인
”수행의 알맹이는 인간적인 정(凡情)을 없애는 것일뿐 따로 성인의 이해(聖解)가 있을 수 없다.“
병이 없어져 약을 쓰지 않는다면 바로 건강한 본래의 몸입니다.
(17)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라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자성(自性)을 더럽히지 말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일이다.“
버리는 것과 구하는 것이 다 더럽히는 것입니다.
(18) 번뇌가 생기지 않아야 열반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二乘)이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 열반이다.“
번뇌를 끊는 것은 ‘하는 주체(能)’와 ‘되는바(所)’가 벌어지는데,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 구분이 없습니다.
(18) 성품을 떠난 연기(緣起)는 없다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비춰봐 한 생각이 인연따라 일어나지만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성품(性)이 일어나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19) 본체(性)와 현상(相)은 둘이 아니다
”죽이고 도둑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다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 일어나는 곳이 비어 고요한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여기에서는 성품과 형상을 함께 밝힌 것입니다. 경전에 이르길 ‘무명(無明)을 아주 끊는다는 것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 했고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달으라’고 했습니다.
(20) 환상인 줄 아는 것이 돈오(頓悟)
”환상인 줄 알면 곧 사라지게 되나니 방편을 더 지을 것도 없고, 환상이 사라지면 곧 깨친 것이라 또한 닦아갈 것도 없다.“
마음은 환상을 만드는 요술쟁입니다. 몸은 환상의 성(城)이고, 세계는 환상의 옷이며, 이름과 형상은 환상의 밥입니다.
(21) 생사와 열반이 본래 없는 것
”중생이 아무 것도 생기는 것 없는 가운데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은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성품에는 본래 나는 것이 없으므로(無生) 생사와 열반이 없습니다. 『사익경(思益經)』에 말하길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은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견해를 건지기 위해서다."라 하셨습니다.
(22) 제도하지만 제도한 중생도 제도한 바도 없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해 열반에 들게 하지만 실로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는 것이다.“
생각이 이미 비어버리고 그 마음이 고요하다면 사실 건질 중생이 따로 없습니다.
(23) 닦아 증득(證得)함은 대번에 되지 않는다
”이치는 단박 깨칠 수 있다 하더라도 버릇은 한꺼번에 가시지 않는다.“
(24) 죽일 마음, 훔치는 마음, 음란한 마음으로 닦는 선(禪)은 지혜를 이루더라도 마도(魔道)가 된다.
(25) 계(戒)는 불사(不死)의 감로(甘露)다
”덕이 없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삼업(三業)을 지키지 않으며 함부로 놀아 게을리 지내며 남을 업신여긴다.“
한 번 마음의 계율을 깨뜨리면 온갖 허물이 함께 일어납니다.
(26) 음욕(淫慾)을 끊어야 생사를 벗어난다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의 불꽃을 꺼버려야 한다.“
애정은 윤회의 기본이 되고 정욕은 몸을 받는 인연이 됩니다.
(27) 걸림없는 청정한 지혜란 다 선정에서 나온다.
(28) 선정이 깊어지면 차별법도 통한다.
“마음이 정(定)에 들면 세상에서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든 일들을 다 밝게 알 수 있다.”
(29) 한 생각도 내지 않는 것이 해탈이다
“어떤 현실을 당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나지 않음(不生)이라 하고 나지 않는 것을 생각 없음(無念)이라 하며, 생각이 없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30) 도를 얻은 것이 있으면 참이 아니다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다면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마음이 본래 고요한 것임을 알아야 이것이 참 열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본래부터 늘 그대로 열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책의 끝부분에서 서산대사는 선종(禪宗)의 법을 배우는 학도로서 꼭 알아두어야 할 ‘종학(宗學)’ 곧 선종의 학풍(學風)이 어떻다는 것과, 각 종파(宗派)의 가풍(家風)이 어떻다는 데에 대하여 약술하고, 끝으로 임제종지(臨濟宗旨)를 강조하여 소개했습니다. 이 부분은 소수의 전문가들을 제외한 일반인에게는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요약에서 제외했습니다.
서산대사는 임제종지(宗旨)를 소개한 후에 마지막 인용문으로서 “거룩한 빛(神光)이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여라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知解) 두지 말라.”를 들고 붓을 놓으셨습니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밝고 신령하다.’로 시작하여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빛나도다.’로 끝맺었던 것입니다.
[참고 문헌]
선가귀감, 원저 서산대사(휴정), 송담스님 역, 용화선원 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