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란 무엇인가"(이정우)
강의록
1강 구조주의적 사유 양식
- 지난 반세기를 돌아다볼 때 사유의 대상에 있어서나, 양태에 있어서나, 글쓰기에 있어서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구조주의의
등장은 서구적 사유의 양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담론사 전체에서 굵은 획을 그었다. 그 이유를 미리 설명하기보다는 개별적인
사상가들을 다루면서 그 때마다 맥락을 설명할 것이다.
- 구조주의적 사유 양태란 무엇인가를 개념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우선 구체적인 하나의 예를 듦으로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하나의 예: 토테미즘
- 토테미즘의 예: 토테미즘이라는 현상은 옛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에 대해 기존에 제시된 이론들과 구조주의 이론의 차이를
살펴봄으로써 구조주의적 사유 양식이 무엇인가를 직관적으로 이해해 보자.
-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애니미즘(物活論)은 세계 전체가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 신성한 힘에 의해 가득 차
있다는, 선사 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고, 토테미즘이란 특정한 한 씨족/부족이 특정한 어떤 존재(특히 동물)와 자신들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믿는 현상을 말한다.
- 토테미즘은 처음에는 그저 미개인들의 괴상한 면모라고 가볍게 치부되었으나 인류학(anthropologie),
민족학(ethnologie)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그 의미가 다각도로 파헤쳐졌다.
각 씨족들은 자신들의 토템을 먹거나 해치지 않는다. 이것을 '금기(taboo)'라 한다. 그러나 일정한 시점에서는 - 祭儀時 - 오히려
그것을 죽여서 먹는다.
- 기존의 이론들 중 몇 가지를 보자. 우선 토테미즘을 즉물적으로 해석한 경우가 있다. 거북이를 토템으로 하는 씨족은 진짜 거북이와
비슷하고, 늑대를 토템으로 하는 씨족 은 진짜 늑대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컨대 후자의 부족은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한다는 황당한
해석까지 있었다. 이런 해석은 토테미즘을 너무 즉물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거기에는 미개인을 동물과 유사한 존재로 보는 편견이 깃들어
있다.
- 이보다 나은 것으로 이런 즉물적 해석이 아니라 토템을 일종의 '상징'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OB 베어스',
'한화 이글스', '삼성 라이온스' 같은 표현들에도 남아 있다. 그러나 앞의 해석이 즉물적인 해석이라면 이 해석은 반대로 너무 현대적인
해석이다. 미개인들이 상징이나 문장(紋章)을 사용했다는 것은 현대인의 생각을 미개인들에게 투영한 것이다.
-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1925)에서 토템 현상을 그의 정신분석학을 가지고서 설명하려 했다. 그는 토템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지고서 설명했으며, 토템과
씨족 사이의 이중적 관계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愛憎으로 해석했다. 토템은 神=父에 대한 상징이며, 미개인의 토테미즘이란 유아의 신경증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현대인의 정신 상태를 포착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신병리적 개념을 미개인들에게 투사한 전형적인 환원주의적 시각이다.
인간과 사회를 생물학적으로 모두 설명하려는 '사회생물학'이나 지성사까지도 모두 사회적 맥락의 결과로 설명하려는 '사회학적 환원주의'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이, 어떤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이론을 다른 분야로 무반성적으로 투사할 때 이런 무리가 발생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미개인에 대한 실증적 연구와 독립적인 사유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리 형성된 자신의 이론을 다른 영역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그의
미학도 마찬가지이다).
- 인류학에서 독보적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는 레비-브륄(Claude L vy-Bruhl) -- 베르그송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
은 미개인을 동물과 인간의 중간에 위치하는 존재로 보았다. 다만 그는 미개인도 나름의 독특한 논리, 즉 '전논리(pr logique)'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말과 사물을 동일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의 모형을 만들어놓고서 그것을 송곳으로 찌르면 그 사람의 그 부위가
아프다고 믿는 것이다. 또 만일 누군가가 어떤 악어를 죽였다면, 그 동족 악어들이 그 사람에게 복수하려 한 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레비-브륄은
이런 식의 전논리를 '신비적 융합설'이라 불렀다. 구분해야 할 것을 기묘하게 융합해서 본다는 뜻이다. 미개인과 어린아이를 유비시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물론 19세기적인 진화론적 생각이 깔려 있다. 꽁트의 지식 삼단계설(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과학적 단계)를 확장시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진화론적 구도, 역사에 대한 선형적 발전 구도를 깔고 있으며, 역시 미개 인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현대인 특히
서구인 -- 특히 근대적 서구인 -- 의 관점을 짙게 풍기고 있다 하겠다. 구조주의 사유는 바로 이 '진화론'이라는 사유 모델을 논박한다. 이
점에서 시간적 사유, 역사적 사유, 진화론적 사유가 19세기 이래의 전형적인 사유 패러다임이었다면, 구조주의는 바로 이런 패러다임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벗어나는, 그것과 대립하는 패러다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구조 주의의 중요한 담론사적 맥락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레비-브륄의 설명 자체는 흥미로운데가 있다. 레비-브륄의 패러다임이 진화론적, 더 나아가서는 제국주의적 색깔을 짙게 풍기고 있다
해도, 레비-브륄이 지적한 현상 자체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구조주의의 윤리적 동기에 공감한다 해도, 윤리가 사실마저도 부정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미개인들에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미개인이냐 현대인이냐에 관계 없이 그런 사유 양태는 늘 나타난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많은 후궁들이 별실에 중전의 초상을 걸어놓고서 활시위를 당겼다. 첨단의 과학기술 시대 라고 하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컴퓨터 점'을 보고 부적을 산다. TV 드라마 "왕건" 에 나오는 최지몽이 전투 결과를 예측하면 어김없이 맞는다(작가가 그렇게 각본을 쓴
다). 더 흥미로운 것은 시인들은 자주 미개인처럼 시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 논리가 사라지고 논리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늘
논리와 전논리가 함께 있 는 것이 아닐까. 다만 개개인에 따라,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담론의 종류에 따라, ... 전논리와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미개인이 진화에서 현대인이 되었다고 하지 만, 우리 시대는 오히려 전논리가 논리를 압도하는 시대는 아닐까.
이런 점에서 레비-브륄의 설명은 그 자체로서는 한계를 드러냈지만, 그가 말한 전논 리 개넘은 다른 맥락에서 볼 때 여전히 흥미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인 간 오성의 범주를 극히 합리주의적으로 그려냈지만, 과학이라는 좁은 맥락을 떠나 인 간 자체를 볼 때 전논리는
논리 옆에 늘 같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이런 관점을 가지고서 문명사 전체를 새롭게 조망하는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토테미즘에 대한, 나아가 미개 사회 일반에 대한 설명들 중 구조주의와 더불어 쌍벽 을 이루는, 구조주의가 논박했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매우 중요 한 입장이 '기능주의'의 입장이다.
위의 입장들은 대개 원주민들에 대한 현장작업/현지조사(field work)가 결여된 채 어 떤 편견을 투영한 면이 강하다. 그러나
기능주의는 인류학/민족학이 본격화되고 자료 가 싸이면서 등장한 이론으로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기능주의는 말 그대로 토템이 그 씨족에 어떤 실질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씨족의 삶에 도움을 주고 그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소박하기 때문에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도 대체적으로 세 가지 형태가
있다.
1) 생리학적 기능주의: 어떤 씨족이 특정 동식물을 토템으로 하는 것은 그것이 그 씨족의 중요한 먹거리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
토템을 숭배하고 먹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그 토템의 그들의 생존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좀 묘한 데가 있다. 평소 먹지 않다가
일년에 한두번 제의때만 그것을 잡아먹는다면, 그것이 실질적인 먹거리로서 기능을 하는 것일까? 마치 너무 비싸서 1년에 한두번만 입는 옷을
연상시킨다. 그런 '사치품'이 먹거리로서 기능을 할 수 있을까?
때로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즉 그것이 먹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먹으면 안 되는 것, 먹으면 죽는 것이기 때문에 금기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어느 정도 더 설득력이 있으나, 그럴 경우 굳이 그것을 숭배하기까지 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고 또 때로는 먹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
생리학적 환원주의는 토템을 모든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먹고 사는 것'에 관련시킨다는 점에서 얼핏 가장 기본적인 설명
같지만, 토템의 경우 간단하지가 않다.
2) 심리학적 기능주의: 생리학적 기능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해결책을 찾을 때 등장하는 하나의 생각이 심리학적 기능주의이다. 즉
토템이란 실질적인 생리적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심리적 도움을 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토템은 원초적 형태의 神이라고 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의 토템이고, '알라 하나님'은 이슬람 민족의 토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설명은 상당히
그럴 듯한데가 있다. 또 미국 대통령의 관저에 콘돌이, 독일의 경우 독수리가, 한국의 경우 봉황이 그려져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이
경우 심리적 도움이란 어떤 개인의 심리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보다는 그 씨족 전체의 심리에 도움을 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런 설명은
심리학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회학적이다.
3) 사회학적 기능주의: 그래서 기능주의의 가장 세련된 형태인 사회학적 기능주의가 등장했다. 이 입장은 토템을 자연적-생리적, 심리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일단 사회적인 것으로 본다.
이 입장에서 볼 때 토템이란 한 사회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것이 위에서 말한 단순한 紋章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제 그 씨족의
조상을 뜻하며, 때문에 그것에 예배드리고 또 의미있는 날이 되면 (동족의 연속성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 잡아먹음으로써 피를 나누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토템은 씨족의 신체적 생존이 아니라 집단적 정체성을 위해서 기능하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베버와 더불어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에 의해 제기되었다.(『종교생활의 기본 형태』, 1912)
그러나 이럴 경우 왜 파리나 모기처럼 열등하고 또 인간을 괴롭히는 동물들까지 토템이 되는가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물론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든 가치론적 배경이 있을 수 있다).
기능주의는 가장 상식적이고 당연한 가정 -- 토템이 그 씨족에게 뭔가 역할을 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라는 가정 -- 에 입각해
있으며, 매우 자명해 보이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기능주의에 도전해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토템을 해석한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이다.
- 끌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 vi-Strauss, 1908 - )는 20세기 초에 태어나 20세기 중엽에 활동했으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라캉, 바슐라르 등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전후 프랑스 사상계를 풍미했던 실존주의는 레비-스트로스의 등장으로 구조주의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민족학자로서 브라질을 비롯한 여러 오지를 다니면서 현장 탐사를 했으며, 그 결과를 구조주의라는 새로운
방법론에 입각해 체계적으로 이론화했다. 레비-스트로스를 통해서 인류학은 처음으로 '과학' -- 수학적인 법칙의 발견이라는 뜻에서 -- 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원래 철학 박사인) 레비-스트로스는 과학을 넘어 자신의 인류학에 매우 의미심장한 사상사적 의미를 부여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학이라는 담론이 매우 중요한 역사적-철학적 함의를 가지게 만들었다. 오늘날 그의 이론이 여러 면에서 비판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레비-스트로스야말로 좁은 의미에서의 현대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구조주의는 기능주의가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데 비해 '구조'라는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 기능주의는 사물 자체의 실질적
행위, 기능, 목적, 실천 등의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면, 구조주의는 사물 하나가 아니라 그 사물이 속해 있는 장 -- 관계들의 장 -- 을 보며
그 장 안에서 그 사물의 위치를 본다.
- 앞의 기능주의적 설명에서 세번째 사회학적 기능주의는 이미 이런 사고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토템을 '상징'으로 본다는 것은 그
토템이라는 존재/사물 자체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토템의 의미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을 뜻한다. 나폴레옹을 기능적 관점에서 보면 왜소하고 볼품없는
사내이다. 그러나 그를 의미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을 뒤흔든 '황제'이다. 나폴레옹은 사물적으로 보면 왜소한 사내이지만, 기호적으로 보면 엄청난
권력을 지닌 '황제'라는 기호인 것이다. 기능주의가 사물의 자연적, 물질적 존재에 초점을 맞춘다면, 구조주의는 사물을 기호로, 의미로,
무엇인가를 뜻하는 것으로, 어떤 관계망의 요소로 보는 것이다.(구조주의가 늘 언어학/기호학과 함께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토템을 상징으로 볼
때 이미 이런 사유의 맹아가 들어 있다.
- 그러나 이런 사유의 본격적인 형태는 구조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가능했다.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 테제들에 속하는 변별성과 자의성을
보자. 하나의 기호의 '의미'는 그것에 내재해 있지 않다. 즉 자의적이다. 야옹이를 '개'라고, 멍멍이를 '고양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개'라는 기호가 꼭 멍멍 짖는 동물을 가리켜야 할 이유가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즉 기호와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arbitraire)'이다.
그래서 기호의 의미는 변별성을 통해서 결정된다. 만일 개와 고양이라는 기호에 어떤 필연성도 없다면, 중요한 것은 '개'가 반드시
무엇을, '고양이'가 반드시 무엇을 지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우리는 이미 그런 지시 관계가 확립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개와
고양이가 구분된다는 사실 자체이다. '중위'라는 기호에는 내재적 의미가 없다. 그것은 소위와 대위 사이에 존재하는 기호인 것이며, 이 기호들과의
'변별적인(diff rentiel)' 즉 차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중위인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학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라고 말한다. 의미는 현상학이 말하듯이 인간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도 아니요, 해석학이 말하듯이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요, 실증주의가
말하듯이 말과 사물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통해서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의미는 '차이들의 놀이'를 통해서 성립한다.
- 토템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토템은 하나의 기호이다. 그것은 기능적 의미가 아니라 구조적 의미를 가진다. 즉 자의적이고 변별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토템과 씨족 사이에는 어떤 자연적 인과, 실질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 관계가 있다는 것이며, 또
각 토템의 의미는 홀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토템들과의 구조적 관계를 통해서 성립한다는 것을 말한다. 북미 오대호 지방의 세 인디언
씨족들은 각각 독수리, 곰, 거북이를 토템으로 가진다.
더 선명한 예는 백곰 토템과 흑곰 토템이다. 이렇게 나뉜다고 해서 한 씨족은 검고 한 씨족은 희지 않다. 사실 백/흑으로 하든,
청/황으로 하든, 물/불로 하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변별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별은 이 두 씨족이 본래의 씨족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함축한다.
- 기능주의가 비교적 눈에 보이는 기능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구조주의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측면, 어떤 장의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인
구조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점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결혼 제도
- 레비-스트로스는 마르셀 모스의 영향을 받아 미개 사회를 '교환( change)'의 관점에서 본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레비-스트로스가
미개 사회를 '평형(equilibrium)'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을 말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문명 사회를 '뜨거운 사회'로 보고 미개 사회를
'차가운 사회'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이런 관점은 오늘날 여러 면에서 극복되었다. 클라스트르의 인류학이 보여주었듯이, 미개인들의 교환은 그 안에 욕망과 권력의 측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레비-스트로스가 미개 사회의 결혼 제도를 연구한 성과는 나름대로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 미개인들의 교환을 '포트라취'라 부른다. 그리고 교환의 가장 핵심적인 대상들은 여자, 재물, 언어이다. 이 세 항목을 교환함으로써
미개 사회는 평형을 유지한다. 즉 정체되지도 않고 또 와해되지도 않는다.
- 기본 개념들: 족외혼과 족내혼
제한적 교환과 일반적 교환
- 결혼 제도에서 레비-스트로스가 핵심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근친혼의 금지'이다. 즉 근친상간(近親相姦)의 금지이다.
근친혼의 금지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넘어가는 '돌쩌귀'에 놓여 있다. 왜인가? 레비-스트로스는 자연은 연속적이고 일반적이지만
문화는 불연속적이고 특수하다고 본다. 근친혼 금지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사회의 한 규칙인 한에서 문화적 현상이다.
이 점에서 근친혼 금지는 정확히 인간이 자연에서 문화로 넘어가는 문턱에 위치해 있는 현상이라 하겠다.
- 기존의 설명들은 다소 모호하고 단순하다. 우생학적 설명, 본래적 성향에 입각한 설명. 뒤르켐은 족외혼의 파생물이라 보았다. 그러나
족내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
레비-스트로스는 '관여적 변별(opposition pertinente)'이라는 구조주의적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관여적 변별(동북아의
음양 사상도 그 한 형태이다)이 문화의 기본 구조이고, 이 구조에 따라 대칭과 평형이 가능해진다.
교호사촌의 예: 평행 사촌과 교호 사촌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평행 사촌끼리의 결혼은 금지되나 교호사촌의 경우는 허용된다. 왜인가?
'남-남', '여-여'의 경우 관여적 변별이 허용되지 않으나 '남-여', '여-남'의 경우는 허용되기 때문이다.
'외삼촌'의 중요성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외삼촌과 아버지는 서로 관여적 변별을 형성하는 것이다.
신화
- 신화는 레비-스트로스가 전 생애에 걸쳐 몰두한 주제이다. 기존의 신화 이해는 1) 한 사회의 근본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2)
자연 현상에 대한 전(前)논리적 해석 방식으로 3) 사회 관계의 반영으로 4) 억압된 감정의 유출로(정신분석학) 제시되었으나, 레비-스트로스는
이 문제 역시 구조적으로 접근한다.
- 신화란 일종의 '메타언어'이다. 즉 각 민족의 사유 구조가 투영된 것이다. 따라서 신화의 '내용' 자체에 어떤 심각한 의미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각 민족이 세계를 바라보는 사유 구조의 형상화인 것이다. 이 점에서 전세계 곳곳의 신화들이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신화들이 특수한 경험이나 내용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인류의 어떤 보편적인 사유 구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란 "보편적이고 무인격적이고 무시간적인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본다.(그림 1, 2 참조)
- 신화 연구를 통해서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휴머니즘(인간중심주의) 비판을 공고히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의 인간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세련된 인간주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그 인간주의는 인생보다 세계를, 인간보다 생명을, 자존심〔자기
사랑〕보다 타자에 대한 존중을 먼저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입장은 현대 사상의 기본 흐름인 '바깥의 사유', '타자의 사유'를 잘
나타내고 있다.
현대 사상의 기본 입장은 반(反)주체주의이다. 그것은 곧 궁극적 의미가 주체나 '나'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작업이 띠고 있는 목적은 "자아를 '인류의 우리' 속에서 해체하는 것"이고 또 "인류를 자연 속에 통합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 레비-스트로스의 세계는 자연과 문화를 이원적 일원의 구도로, 즉 '대위법적 방법'에 따라 사유된 세계이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을 거대한 대위법적 구조로 파악했으며, 이 점에서 그 자신의 표현대로 '초합리주의(superrationalisme)'의 사유를
건설했다. 자연과학자들이 우주를 거대한 수학적 하모니로 보듯이, 레비-스트로스는 문화조차도 그 근저에서는 거대한 수학적 구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특권적 자기 이해를 비판함으로써 인간이란 그 거대한 음악의 한 음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결국 2차 세계대전이라는 극단적인 야만이 표출된 현대 사회, 그리고 타자를 억압함으로써 팽창을 거듭해 온 제국주의
사회가 인간 주체에 대한 지극히 피상적인 이해에 입각해 있음을 폭로하려 한 작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