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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전쟁과 국가 폭력에 대하여 2. 베트남 전쟁에서의 국가 폭력 3.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4.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시민사회의 역할 및 활동 |
전쟁과 국가 폭력에 대하여
근대 국민 국가의 성격 중의 하나는 사회의 폭력을 국가가 독점하였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개인적인 살인과 보복 등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런 개인간의 폭력의 배제만이 아니라, 집단간의 그것도 근대 국가는 금지하였다. 즉 근대국가는 폭력 수단의 실질적인 독점을 통해 사회를 지배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전쟁은 대부분 국가간의 전쟁이며, 징집이나 무기 제조 등도 국가권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므로 국가, 전쟁, 국가 폭력은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이를 분리하여 사고하기 어렵다.
전근대사회에서의 전쟁이 군대간의 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면, 근대 국가 형성후의 전쟁은 군대간의 범위를 넘어서 온 ‘국민’이 동원되는 전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전쟁의 기계화와 더불어 근대 국가의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것으로 이제 더 이상 군대는 특권계급이나 직업군인에 의해 충당되기 보다는 지원병제도 혹은 병역의무를 통해 징집된 군인들에 의해 구성되기에 이른다. 즉 근대전쟁에서는 고도로 발전된 기술과 일반 국민이 결합하여 싸우게 된다.1) 이러한 이유로 근대 이후의 전쟁에서는 민간인의 피해가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제1차, 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투군인과 민간인 사망자의 비율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2) 즉 20세기를 어떤 측면에서 정의하자면, ‘대량 학살의 시기’3)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대의 민간인 전쟁 피해는 국가간의 전쟁이 정규군과 상대 국가의 정규군간의 전쟁이 아니라, 총력전(total war)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민간인 전쟁 피해는 그런 점에서, 민간인 사이의 폭력이 아니라, 국가가 행사한 폭력이며 민간인 피해의 규모와 수단, 양상, 피해자의 범위 또한 무차별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 전시 민간인에 대한 국가폭력의 가장 대규모적이고, 야만적인 형태가 민간인 학살이다. 나찌에 의한 유태인 학살,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중에 자행된 이데올로기와 인종주의에 기반을 둔 민간인 학살 사실을 통해 국가폭력이 지닌 잔학성과 무차별성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국가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살펴보겠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국가 폭력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Winter Soldier Investigation’에는, 베트남에서 자행된 미군의 다양한 형태의 폭력4)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폭력 중에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알아보면, 학살이라는 표현 때문에 학살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병사들이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현대전에서 학살은 별로 특별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주 우발적으로 쉽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상층부의 학살에 대한 묵인과 동조 은폐는 학살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반복되게 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이 광범위하게 일어난 주요한 원인으로는, 민간인과 정규군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1)게릴라전의 특성5), 베트남인 더 나아가 아시아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2)극단적인 인종주의, 3)반공이데올로기, 4)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직접 대면보다 죄의식이 약한 대량 원거리 학살이 가능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1)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대표적인 예로 밀라이 학살을 들 수 있다. 밀라이 학살은 구정대공세로 수세에 몰린 미국이 초토화 작전을 수립하여 계획에 따라 실시한 것이다. 이 사건은 베트남인에 대한 인종적 문화적 편견이 가세하여 더욱 잔인한 형태를 띠었다. 1968년 3월 밀라이에서는 미군에 의해 17명의 임산부와 어린아이 173명을 포함하여 504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반면 당시 미군의 피해는 단 한명의 부상자로 이 부상자 역시 스스로 발등에 총을 쏘아 자해한 미군 사병이었다.6) 미군에 의한 학살은 밀라이뿐이 아니다. 미군은 베트남 민간인과 직접 대면하는 근거리 학살과 파괴로부터 최신 병기를 이용한 원거리 학살까지 학살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7)
2)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8)
민간인 학살은 대대적인 작전보다는 중대나 소대와 같은 소부대 단위의 매복 수색 정찰 때 일어나기가 쉽다. 또 매복 수색 등의 작전을 할 때에는 인적 접촉을 하게 되고, 복수라든가 인종주의가 더 판을 치게 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은 직접 원주민과 대면하게 되는 마을에 대한 수색 작전을 기피하였다. 그러다보니 마을 수색을 주로 맞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몇 가지 특징들을 보면 한국 군인과 베트남 민간인 사이의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9), 참전한 병사들 역시 낯선 환경과 전쟁이라는 긴장, 공포 상황에서 무차별 사살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또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에 온 한국군의 경우 전과를 올리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수행하고 상층부 또한 이를 묵인하다보니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공식 기록으로 공개된 주월미군사령부 감찰부조사보고서(미국구립문서기록보관소 소장 RG 472)가 있다. 이를 보면 한국군에 의한 몇 가지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알 수가 있다. 이 공식문헌은 1968년 2월 12일 쿠앙남성 디엔반현 퐁니마을(피해자 69명), 1968년 10월 22일 쿠앙남성 쑤옌짜현 호앙쩌우 마을(희생자 4명), 1969년 4월 15일 쿠앙남성 디엔반현 푹미마을(희생자 22명)등 3마을의 학살에 대한 보고서로 특히 푹미마을의 경우, 보고서의 작성 주체가 한,미,월 군 합동조사반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69명이 희생된 퐁니마을의 경우는 미국무부 브라운 부차관보가 포터 주한 미대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이 사건에 대한 한국군의 학살의혹과 관련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경고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함으로써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이미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문제가 한국정부 내에서도 논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10)
베트남정치국 전쟁범죄조사보고서에 남부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을 통해본 한국군의 의한 민간인 피해자의 숫자는 5천명으로 적고 있다. 구수정씨는 약9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전사자 약 5,000명인데 반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적군 사살자 47,000명이다. 게릴라전의 특성을 고려하면 정규군의 피해가 높은 것이 보편적인 현상인데,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관련성은 신빙성을 더해준다고 하겠다.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문제가 나오면 제일 먼저 빨간 모자를 쓴 참전군인들이 생각난다. 사회적으로도 참전군인들을 학살의 가해자로 몰고, 그들에게 비난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베트남 참전 군인 전체를 학살자 취급을 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그들을 공포와 혼란과 광기의 현장으로 내몬 사람이 누구인가? 아직 삶의 방향이 잡히지 않은, 베트남이 어디에 있고, 베트남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도 모르는, 가난하고 어린 우리 청년들을 베트남으로 몬 사람이 누구인가? 고엽제로 전쟁후유증으로 참전군인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졌는지?11) 베트남전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베트남에만 있는 것도, 베트남 참전군인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사회의 경우 박정희 군사독재가 강화되어, 사회전체가 병영 사회화 되었으며,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전쟁을 정당화 했으며, 고엽제로 인해 후손에까지 이르는 피해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다.12)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시민사회의 역할 및 활동
이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 연대를 모색해야 할 시기이다. 진정한 학살자이자 가해자는 제국주의 국가와 그 종속국가이다.13) 한국은 민간인 학살이라는 점에서 모순적 위치에 처해있다. 한편으로는 피해자이고 다른 한편은 가해자이기도 하다.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을 다 같이 경험한 우리가 피해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 전쟁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역사청산에 나선다면 이는 세계사의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14)
베트남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화해는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작년에 있었던 이라크 파병 등 아직도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 정부 모두 교역과 외교관계등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진상규명이나 진정한 화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러한 전후 문제를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와우리나, 매해 진료단을 꾸리고 있는 베트남평화의료연대와 같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고, 진정한 평화와 연대를 위해 시민사회는 노력해야 할 것이다.
별첨)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통계자료
1. 빈딘성
1) 따이선 현
| 장소 | 기간 | 내용 | 출처 |
빈안 | 따이빈(구 빈안)사, 안빈촌, 고자이 마을 | 1966.2.26 | 단 1시간만에 모두 380명의 주민이 한국 군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으며 단 한명의 생존자도 없었음. | 빈딘박물관(전 한월문화 회관) 소장 자료집 (추적 60분 취재팀과 함께 고자이 양민학살 현장에 서 있는 위령탑 확인. 증언자들의 육성 직접 채록 시민단체 나 와우리 현장답사) |
따이빈사 안푹 둔덕 | 1966.2.7 | 안푹 둔덕에서 학살된 총 희생자 수는 46명이며 이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이 13 명 나머지 33명은 이름이 확인되지 않 음. | 빈딘박물관(전 한월문화 회관)소장 자료집 | |
따이빈사 년투언촌, 쏭칸 마을 | 1966.2.12 | 쏭깐 마을에서는 모두 33명의 양민이 학 살되었으며 2명의 생존자가 있음 희생자 중 10명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음. | ||
따이빈사 안빈촌 안록둔덕 | 1966.2.23 | 안록둔덕에서는 모두 90명의 양민이 학 살 되었으며 그 중 40명은 신원이 확인 되지 않음. | ||
따인빈사 안빈촌 안칸 마을 | 1966.2.15 (음력 1.23) | 안칸마을에서는 모두 65명의 양민이 학 살되었으며 그 중 28명은 신원이 확인되 지 않음. 생존자 응웬떤런(Nguyen Tan Lan-당시 15세, 현 따이빈사 당서기장) 은 포성이 들려와 땅굴에 숨었있다가 한 국군에 의해 레칸씨의 논으로 끌려갔으 며 한국군들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증언 | 빈딘박물관(전 한월문화 회관)소장 자료집 (추적 60분 취재팀과 함께 생존자 증언 채 록, 안칸 양민학살 위령 비 확인, 나와우리 현장 답사) | |
따이빈사 미투언촌, 로소이 마을 | 1966.2.12 | 로소이 마을에서는 모두 40명이 학살되 었으며 그중 17명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 음. | 빈딘박물관(전 한월문화 회관)소장 자료집 |
빈안 양민학살 | 따이빈사 넌투언촌 | 1966.2.7 | 넌투언촌의 후인빈흥씨 집에서 9명이 학살당함 넌투언촌의 응웬하탄씨 집에서 6명이 학살당함 | 빈딘박물 관(전 한 월문화회 관) 소장 자료집 |
따이빈사 안빈촌 | 1966.2.2 | 안빈촌 후인티본씨 땅굴에서 모두 17명이 학살당 했으며 그중 5명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음. | ||
1966.3.12 | 안빈촌 판반푹씨 집에서 10명이 학살당함. | |||
따이빈사 빈득촌 | 1966.2.12 | 빈득촌 레푹씨의 정원에서 6명이 학살당함. 빈득촌 썬응오씨 땅굴에서 9명이 학살당함 빈득촌 묘비 앞에서 6명이 학살당함. 빈득촌 묘지 에서 5명이 학살당함. | ||
따이빈사 미득촌 | 1966.2.7 | 미득촌 응웬반지엔씨 정원에서 6명이 학살당함. | ||
빈안사 이곳 저곳 에서 흩어져 죽은 사람들 | 1966.1.23-2.26 (음력) | 빈안사 이곳 저곳에서 흩어져 죽은 사람은 약 3백여명에 달하며 그중 182명은 신원이 확인되어 명부에 올라 있음. |
* 빈안 양민학살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최대 양민학살로 1966.1.23-2.26(음력)까지 맹호부대 3개 중대에 의해 따이빈사(구 빈안사) 15개 지점에서 총 1028명의 양민이 학살되었으며 그중 신원이 확인되어 명부에 올라있는 공식 사망자수만 728명이다. 또한 전체 가옥의 95%인 총 1535채의 가옥이 불태워지고, 소 385마리 돼지 204마리 쌀 83만5천3백6십kg이 불태워지거나 강탈되었다.
2) 뚜이픅현
떤장 양민학살 | 픅호아사 떤장촌 | 1965.1.22 | 고보이 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군들이 떤장촌 에 수색을 내려오다 매복하고 있던 유격대와 현 부대의 공격을 받아 1명 사망 1명 부상을 당함. 이에 대한 보복으로 3시간 동안 45명의 떤장촌 주민을 학살함. 현재 마을에는 집집마다 마당에 무덤과 작은 묘비가 세워져 있음. | 빈딘박물관(전한월 문화회관) 소장 자 료집(필자가 현장을 답사하여 생존자들 의 증언을 직접 채 록하고, 학살현장과 무덤, 묘비 등을 확 인함. 시민단체 나 와우리 현장답사) |
뇨럼 양민학살 | 푹흥사 뇨럼촌 | 1966.3.23 | 한국군들이 각종 수송기를 타고 고보이 늑만 년한 사 등에 착륙 푹흥사 뇨렴촌으로 수색작전을 들어 옴. 오전부터 각마을에서 수색작전을 펼치던 한국 군들은 주민들을 토끼몰이를 하듯 암싹루옌으로 몰아넣음. 오후 2,3시경 남자와 여자들을 2패로 가르고 먼저 여성들을 향해 세정의 다연발총을 거 치 쏘아죽인 뒤 남성들을 각 땅굴속으로 밀어 놓 고는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아 죽임. 그밖의 여 성을 강간하고 아이의 몸을 찢거나 머리를 부러뜨 려 우물에 던져 넣기도 함. 이 뇨럼 양민학살로 136명이 희생되었고 시신은 한국군에 의해 불태 워짐 |
3) 푸깟현
쯩탄 양민학살 | 깟띠엔사 쯩탄촌 | 1966.9.23(음력 8.10) | 한국군들은 당시 깟짠사의 바산에 주둔하고 있던 베트콩 세력을 소탕하고 바 산 인근마 을의 주민들을 소개시켜 베트콩에 대한 지 원을 차단하고자 수차례의 수색소탕작전을 수행. 그러나 깟띠엔사 쯩탄촌 남 마을의 주 민들이 이를 거부하고 마을에 머무르게 해 달라고 데모를 벌이자 모두 88명의 주민을 학살함 | 빈딘박물관(전한월 문화회관) 소장 자 료집(필자가 현장 을 답사하여 생존 자들의 증언을 직 접 채록하고, 학살 현장과 무덤 등을 확인함. 시민단체 나와우리 현장답사 |
호이록 양민학살 | 깟탕사, 호이록촌 | 1966년초 | 한국군들이 비행기로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 나라는 전단을 뿌린 후 약 70명의 주민들이 길바닥에서 살해됨 | 미국 민간인 보고 서 -다이엔&마이 클 존스의 한국군 이라 불린 동맹군 |
깟한 양민학살 | 깟한사, 떤수언촌, 쿠언픅촌 | 1965.12.30 | 2명의 한국군이 저격수의 총에 피살된 후 32명의 주민이 학살됨 |
4) 안년 현
낌따이 양민학살 | 년퐁사 | 1966.?.? | 약 30명의 사람들이 학교 건물로 끌려갔고 건물이 불태워짐. 노인 1명과 소년 1명이 살아 남음 | 미국 민간인 보고서 -다이엔&마이클 존 스의 한국군이라 불 린 동맹군 년퐁사 신문 |
안년 양민학살 | 안년현 | 1966.1.9 | 한국군들이 안년현에서 소탕작전을 펼쳐 이 지역주민 150명을 학살함. | 베트남 문화통신부 자료-남부베트남에 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 |
1970.12.9 | 한국군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소녀 한명을 총을 쏘아 죽임. 그 다음날 이를 항거 중고생 대학생들이 시위를 일으키자 청년을 총으로 쏘아 죽임. | AP 통신 1970.12.10 |
* 빈딩성은 맹호부대 주둔지로 현재까지 8건의 양민학살 사건이 공식 확인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총 1581명의 양민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2. 꾸앙응아이성
1) 빈선현
| 장소 | 기간 | 내용 | 출처 |
빈호아 양민학살 | 빈호아사 안픅촌, 썸꺼우촌 | 1966.12.6 | 오전 6시경 한국군들이 쭈레 언덕에서 내려와 오전 10시경 안픅촌 욕릉지역과 동쪼이 즈아 지역 썸꺼우촌의 우물가 등 세지점에 주민들을 모음. 오후 4시경 세지점에서 동시에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171명의 주민을 학살함. | 베트남 문화통신부 자 료 - 1966 빈호아 양 민학살 미국 민간인 보고서 다이엔&마이클존스의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 군 필자가 현장답사를 통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직접 채록하고 위령비 확인 |
빈호아사, 까이자촌, 둥쭝마을 | 1966.12.6 | 한국군들이 동쭝마을에서 134명의 주민을 학살함. | ||
빈호아사 찌호아촌 | 1966.12.3 (음력 10.22) | 빈호아사 롱빈 마을의 찌우레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 1개 대대가 찌호아 마을에 내려와 소탕작전을 전개. 한국군들은 논에 숨어있던 주민 15명을 발견,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죽 임. 응옥흥 마을에서는 80세 노인 후인의 목을 잘라 논에 걸어 놓음. | ||
빈호아사 찌호아촌, 롱빈촌 | 1966.12.5 | 한국군들이 찌호아촌과 롱빈촌에서 36명의 주 민을 체포, 쭈웅딘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 을 난사해 죽임. 현재 이 폭탄구덩이 자리에 증 오비가 서 있음. | ||
비고: 빈호아 양민학살은 1966.12.3-6일까지 3일동안 빈호아사 9개촌에서 모두 430명의 양민이 학살된 사건이다. 그중 여성이 268명 노인이 109명 어린이가 182명이었으며 7명의 임산부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2명이 산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며 1명이 목이 잘렸고 1명이 칼로 배가 갈리어졌고 2가구가 1명도 남김 없이 몰살당했다. 현재 빈호아사 인민위원회 관사 옆 언덕에는 증오비가 서있고 그옆에는 영국에서 세워준 위령비가 자리잡고 있다. |
푸니에우 양민학살 | 빈안사 푸니에우촌 | 1967.3월 혹은 그 이후 | 논에 숨어있던 35명의 주민들이 발각되어 총살 당함. | 미국 민간인 보고 서 다이엔&마이클 존스의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 |
1967년 초 | 장정들이 달아난 마을을 지키려고 남아있던 30 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학살당함. | |||
푸꾸이 | 빈득사 푸꾸이촌 | 1967.3.26 | 약 100명의 주민들이 자신의 집에서 학살당함. | |
쩌우투언 | 빈득사 쩌우투언촌 | 1966.10.9 | 커다란 벙커속으로 끌려간 51명의 주민들이 폭 발물과 포격으로 학살당함. | |
탁안 | 빈꾸옌사 탁안촌 | 1967년 초 | 30명 이상의 사람들이 등 뒤로 손이 묶인채 언덕 꼭대기로 끌려가 총살당함. | |
빈호앙 | 빈호앙사 | 1967년 초 | 두 마을에서 30명 이상의 주민들이 논으로 끌 려가 총살당함 |
2) 선띤현
지엔니엔 양민학살 | 띤선사 지엔 니엔촌 | 1966.11.13 (음력 10.2) | 쯘산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여단 3대대 소속1 개 중대가 지엔니엔촌으로 내려와 수색소탕작 전을 펼침. 한국군들은 마을마다 돌아다니면 서 주민 112명을 지엔니엔 사당으로 끌고가 학살함. 현재 지엔니엔 사당은 초등학교 변해 있고 학교 앞마당에 위령비가 세워져 있음. | 꾸앙응아이성 문화통신부와 박물관 소장 자료 추적 60분 시사매거진 2580 취재팀과 함께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위령비 무 덤 등 확인 |
픅빈 양민학살 | 띤선사 픅빈촌 | 1966.10.9(음력 9.27) | 오전 8시경 릉동막사 에 있던 청룡 3대대 소 속 1개 소대가 푹빈촌으로 밀고 들어와 집집 마다 땅굴을 뒤져 주민들을 체포 픅빈 학교 운동장으로 끌고감. 약 10시경 주민들을 땅에 엎드리게 한 뒤 수류탄과 기관총을 쏘아 모두 8명의 양민을 학살함. | 꾸앙응아이성 문화통신부와 박물관 소장 자료 추적 60분 시사매거진 2580 취재팀과 함께 생존자들의 증언을 체록하고 위령비 무 덤 등 확인 |
하따이 양민학살 | 띤하사 하따이 읍 | 1966.11.26 오전 | 한국군들이 총을 쏘며 마을에 들어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마을에 있던 60세 이상 노인과 1,2세 아기들까지 모두 20명의 주민들을 사당 정원에 잡아다가 고문을 한 뒤 총을 쏘고 칼로 찔러 죽임 | 꾸앙응아이성 문화통신부와 박물관 소장 자료 필자가 현장을 직접답사하여 이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 썬 티따이의 증언을 채록하고 위령비를 확인 |
칸럼 양민학살 | 떤티엔사 칸럼촌 | 1966.8.14 | 새벽 무렵 한국군 1개 중대가 헬기를 타고와서 칸럼촌 북쪽 험산에 내림. 한국군들은 땅굴 집 골목 정원등에 몸을 숨기고 있건 노인 여성 어린아이들을 총으로 위협 해 응웬븡씨의 논으로 집결시킴 9시경 한국군들이 이 논에 모여있던 82명의 양민을 총을 쏘아 학살함. | 꾸앙응아이성 문화 통신부와 박물관 소장 자료 |
빈록 | 선쩌우사 빈록촌 | 1966.11.13 | 논에서 일하고 있던 40명의 주민들이 마을밖 5Km까지 끌려가 총살당함. | 미국 민간인 보고 서 다이엔&마이클 존스의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 |
선쩌우 | 선쩌우사 와 선록사 | 1966.12 | 마을 주민 2백명이 픅빈촌 근처에 한 장소로 끌려가 총 살당함. | |
킁록 | 킁록촌 | 1969.9.30 | 40명의 주민이 폭탄구덩이로 끌려가 총살당함 시신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짐. | |
안띤&칸반 | 선호아사 안띤촌과 칸반촌 | 1967.8-9 | 포병이 일제 포격 후 벙커안에 숨어있던 30명의 사람들 을 총을 쏘아 죽임. | |
안빈&동년 | 선동사 안빈촌과 동년촌 | 1966년 말 | 한국군들이 마을의 집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까오다이 사원에 있던 사람들을 포함 주민 46명이 학살당함. | |
민쯩 | 선남사 민쯩촌 | 1966년 말 | 3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함. | |
빈박 | 선짜사 빈박촌 | 1966.10월 -11월 | 약2-3백 명의 주민들이 자신의집에서 학살당함. | |
선낌 | 선낌사 | ? | 약 1백 명의 주민들이 논으로 끌려가 총살당함. |
* 꾸앙응아이성은 현재까지 모두 18건의 양민학살 사건이 공식확인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700여명의 양민이 희생괸 것으로 밝혀졌다.
3. 꾸앙남 성
1) 디엔반현
| 장소 | 기간 | 내용 | 출처 |
투이보 양민학살 | 디엔터사 투이보촌 | 1967.12.21 | 오전 10시경 2대의 헬기가 투이보촌으로 들어서는 길목인 고소이 지역에 청룡부대 1개 소대를 내려 놓 음. 한국군들은 마을로 밀고 들어오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고, 주민들은 총앙을 피할 수 있는 땅굴 을 찾아 몸을 숨김. 한국군들은 마을 곳곳의 땅굴을 수색 모두 땅굴 밖으로 나오라고 지시함. 그리고 땅 굴밖으로 기어나오는 사람들을 차례대로 쏨 이과정에 서 모두 145명의 양민들이 학살됨 투이보촌으로 들 어가는 들머리에 위령비가 서 있음. | 꾸앙남성 디엔반 박물관 소장 자료 -디엔반현 양민학 살 사건들. 디엔반 현 전쟁 후과 조사 필자가 현장답사를 통해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위령비를 확인 나와우리 현장답사 |
하미 양민학살 | 디엔증사 하미촌
| 1968.2.25 (음력 1.26) | 새벽에 청룡여단 2개 중대가 각 군사기지에서 내려 와 하미촌의 따이 마을과 쯩 마을을 포위 아침 7시 경 모두 3지점으로 모아 138명의 양민을 학살함. | 꾸앙남성 디엔반 박물관 소장 자료 -디엔반현 양민학 살 사건들 디엔반 현 전쟁 후과 조사 추적 60분 시사 매거진 2580 취재 팀과 함께 현장을 방문 생존자들의 증언 채록 |
디엔반 양민학살 | 디엔안사 퐁넛촌과 퐁니촌 | 1968.1.14 | 호이안 주둔 청룡부대 소속 약1개 중대 병력이 1번 국도의 지압바 다리 부근에서 퐁니촌 럽남 마을을 향 해 소탕작전을 전개 그 뒤 봇도랑을 건너 퐁넛마을로 들어가 소탕작전을 수행 이 과정에서 모두 61명의 양민이 학살됨 | 꾸앙남성 디엔반 박물관 소장 자료 -디엔반현 양민학 살 사건들 디엔반 현 전쟁 후과 조사 필자가 현장 답사 를 통해 생존자들 의 증언 채록 |
디엔홍 | 디엔홍사 | 1968.12월 | 4백명의 마을 주민 거의 모두가 학살됨 | 미국 민간인 보고 서 다이엔&마이클 존스의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 |
탄퐁 | 탄퐁사 | 1968.2.12 | 한국군들이 도로 청소 작업 중 지뢰를 터트려 130명 의 양민을 학살함. 희생자들 중엔 미군부대 소속 군 인들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음. |
2) 주이쑤엔현
쑤엔따이 양민학살 | 쑤엔쩌우사 쑤옌따이촌 | 1968.2.29 | 포병의 지원사격이 끝난 후 벙커에 숨어있던 62명 의 주민을 학살함 마을은 한국의 관측소 인근에 있 었고 안전 등급을 받았음. | 미국 민간인 보 고서 다이엔&마 이클존스의 한국 군이라 불린 동 맹군 |
끼에우선 양민학살 | 쑤옌히엡사 끼에우선촌 | 1968.10.20 | 베트콩의 한국 관측소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22명 의 주민들을 각자의 집에서 학살함. | |
동엔&찝 선 | 쑤옌쯩사 동옌촌과 찜선촌 | 1968.6.8 | 36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서 학살됨. 2년에 걸 쳐 이지역에서 한국군인들에 의해 3백여명 이상의 양민들이 학살됨. | |
찌에우쩌 우 양민학살 | 쑤옌타이사 찌에우쩌우 촌 | 1968.?.? | 20여 명의 사람들이 공동묘지로 끌려가 학살됨. | |
1968.1.30 | 안전한 곳을 찾아 마을을 떠난 22명의 주민들이 길에서 학살됨. | |||
반꾸엇 양민학살 | 쑤옌딴사 반꾸엇촌 | 1968.1.19 | 거의 대부분이 여자와 어린이들인 48명의 주민이 연못가에서 학살됨. | |
쑤옌픅 양민학살 | 쑤옌픅사 5촌 | 1968년 말 | 몇몇 임산부가 포함되어 있느느 51명의 노약자들이 마을의 어느 한집에 모여있다가 한국군에 의해 집 단 학살됨. 나머지 주민들은 모두 달아남. | |
3월 22일 (연도 불확 실 아마도 1969년) | 대부분이 여자 어린이인 86명의 주민들이 벙커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학살됨. | |||
쑤옌픅사 4촌 | 2월 8일 (연도 불확 실 아마도 1969년) | 노인과 여자 어린이를 포함한 86명의 주민이 학살 됨. | ||
6월 20일 (연도 불확 실 아마도 1969년) | 47명의 주민들이 큰 벙커안에서 폭사 당함. | |||
쑤엔터 양민학살 | 쑤엔터사 레선촌과 선빈촌 | 1969.2.21 | 한국군 때문에 마을에서 도망갔던 34명의 주민들이 설차례를 지내려 집에 돌아왔다가 학살당함 | |
쑤엔터사 레선촌과 투언안촌 | 1969.4.6 | 74명의 주민들이 모래둔덕으로 끌려가 총살당했고 시체는 포탄구덩이에 던져짐 |
3. 꾸예선 현
빈꾸앙 | 빈꾸앙사 | 1969.11.11-12 | 134명의 양민을 학살 | 베트남 문화통신부 자료 -남부베트남 에서의 남조선 군 대의 죄악 |
빈찌에우 | 빈찌에우사 | 1969.11.11-12 | 125명의 양민을 학살 | |
빈호아 양민학살 | 빈호아사 | 1969.11.11-12 | 86명의 양민을 학살 빈호아사의 푸호 아촌에서는 70세의 포 노인을 잔인하 게 고문한 뒤 목을 조르고 뒤로 꺾어 죽임. 푸선 촌에서는 스씨의 14세 이 하 아이 7명이 포함된 10명의 가족 전원이 학살됨. 히엔릉에서는 80세의 노인 또티찐이 장갑차로 짓이겨져 죽.음 | |
빈다오 | 빈다오사 | 1969.11.11-12 | 바다에서 돌아오는 7명을 빈띤군대 초 소로 잡아들여 일렬로 세워 모두 쏘아 죽임. | |
빈자 양민학살 | 빈장사 빈뚜이촌 | 1969.11.11-12 | 한국군들이 25세의 여성 호아를 때려 서 숨지게 한 뒤 총을 쏘아 시신을 산 산조각냄. 또한 58세의 여성 도티민을 땅굴 입구에서 살해 17세의 응웬딘럼 과 응웬떤에게 야만적인 고문을 가한 후 각각 세발의 자동연발소총을 쏘아 숨지게 함. | |
비고 : 아직까지 불충분한 통계이지만 1969.11.11일과 12일 이틀동안 꾸에선현 빈증사 빈장사 빈찌에우사 빈호아사 빈다오사 등 5개 사에서 모두 7백명 이상의 양민이 학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
4) 탕빈 현
탕빈& 땀끼& 꾸에선 | 탕빈현 땀끼현 꾸에선현 | 1968.11.7-11.17 | 탕빈현 땀끼현 꾸에선현에 속하는 몇 개사에서 476명의 양민이 포격 으로 사망. | 베트남 문화통신부 자료 -남부베트남 에서의 남조선 군 대의 죄악 |
탕빈 양민학살 | 탕빈현 | 1969.3.11-4월 | 111명의 양민이 학살됨. | |
1969.4.24-5.23 | 탕빈현 동부지역에서 모두 300명의 양민이 학살됨. | |||
빈푸& 빈증 | 탕빈현 빈푸사 와 빈증사 | 1969.4.25-5.13 | 빈푸사와 빈증사 2개 사에서 모두 145명의 양민이 학살됨. | |
빈증 양민학살 | 빈증사 찌록낀 촌,버우빈틍촌 버우빈하촌, 주이안촌 하따이촌 | 1969.11.11 | 하루 동안 쩌록껀촌에서 75명의 양 민을 다이너마이트와 크레모아를 사 용하여 학살하였고 버우빈틍촌과 버 우빈하촌에서는 터씨의 땅굴에서 39 명 풍씨의 땅굴에서 15명을 학살하 는 등 빈증사 5개촌에서 모두 349 명 학살. |
5. 호아방현
호아방 양민학살 | 호아방현 쩌우선촌과 껌레촌 | 1965.6월 | 쩌우선과 껌레 2개촌에서 모두 130명의 양민이 학살됨. | 베트남 문화통신부 자 료 -남부베트남에서 의 남조선 군대의 죄 악 |
6. 다이록현
다이록 양민학살 | 다이록현 록픅촌과 록호아촌 | 1969.5.9- 5.12 | 록픅과 록호아 2개 사에서 모두 3백명 의 양민이 학살됨. | 베트남 문화통신부 자료 -남부베트남에 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 |
7. 픅선군
픅선 양민학살 | 픅선군 띠세 지역 | 1969.1.15 -1.27 | 띠세 지역에서 200명의 양민이 학살됨. | 베트남 문화통신부 자료 -남부베트남에 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 |
* 꾸앙남성에서는 현재까지 약 30건에 달하는 양민 학살이 공식 확인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모두 4천여 명의 양민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2) 1차 대전에서 군인사망자 약 750만 명, 민간인 사망자 약 700만 명인 반면에, 2차 대전 중에는 군인사망자 1500만 명, 민간인 사망자 3100만 명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약 2배에 이른다.
3) 김동춘, 앞의 글, 5쪽.
4) 1)마을 불 지르고 파괴하기, 2)사망자 귀베기 및 목베기 3)포로 고문, 4)부상자 죽이기, 5)네이팜탄으로 마을 폭격하기, 6)강간 및 윤간 7)저항능력이 없는 여자와 아이들 집단학살 8)화학탄을 사람들에 사용하기, 9)가축 살육, 10)항복전단인 Chieu Hoi 패스(포로가 아닌 특별대우를 약속한 전단) 소지한 투항자에 대한 살해 11)헬기 밖으로 베트남인 떨어뜨려 죽이기, 12)재미로 최루탄 터트리기, 13)민간차량 전복하기, 14)농경지 파괴, 15)묘지 뭉개기, 16)민간인 무차별 학살, 17)불질러 정찰하기, 18)미친 시간(Mad Minutes)에 무조건 총질하기, 19) C-ration 던져 어린이 죽이기, 20)고엽제 피해 등 끊없는 폭력이 일어났다. 강정구(2000), 「베트남 전쟁과 미국의 전쟁범죄」,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관한 심포지움 발표문, 60쪽.
5) 외모상으로 베트콩과 민간인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사용되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군과 민간인은 구별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논리로 치부한다면 노근리에 분노하는 정서와는 이율배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강정구 한겨레21 296호
6) 방현석(1996),「베트남 밀라이 학살현장」월간 말 3월호
7) 강정구(2000), 70쪽.
8)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통계 자료는 별첨함. 작성자는 구수정으로 추정
9) 대부분 한국부대에는 통역관이 없었다고 한다.
10) 강정구,「 베트콩과 민간인을 구별할 수 없었다는 상황논리」, 한겨레21 296호
11) 한홍구(2003),「 대한민국사」, 한겨레신문사 50쪽
12) 한홍구(2003), 57쪽
13) 다만 학살 명령, 기획자와 그 실행자라는 최소한의 구분은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14) 강정구(2000), 「 한국군 베트남전쟁 참전과 베트남 민간인의 참상」, 군사평론가협회 베트남전진실위원회공동토론회 발표문, 57쪽
출처: http://cafe.daum.net/korvietart/6TMX/17docid=2245150160&q=%B9%E8%C6%AE%B3%B2%C0%FC%C0%EF%BF%A1%BC%AD%C0%C7%C0%DC%C7%D0%BC%BA&re=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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