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들을 만나다 보면 드는 느낌이 있어서 페북에 아래의 글을 썼다.
모든 생물체는 감각이 있다. 특별히 인간의 감각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부분은 특별히 발달된 부분들이 있다. 감각 중에는 선천적으로 발달된 부분도 있고 후천적으로 발달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신학교 때 가장 가까웠던 동기생과 수 십년만에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될 수 있는대로 쟁점은 피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접근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의 이야기를 100% 이해는 할 수 있었으나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왜 그럴까? 감각 때문이다. 즉 느낌이 다른 것이다. 현실 기독교의 현상에 근거하여 이야기 하는 것과 현실을 부정하고 대안을 찾는 나와는 접촉점이 없었다. 그는 참으로 진지하게 일생 동안 여러 가지 일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경험했다고 했다. 그러나 무당도 그럴 수 있다.
나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고 웬만하면 사적인 일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생존을 위하여 몸무림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바쁘신 하나님을 그런 일로까지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역사와 세상의 일에서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에 흥미 있는 댓글이 달렸다.
조그만 일에서부터 하나님을 찾고 그의 결정에 순종해야 하나님이 좋아하셔요. 하나님은 무한대이시므로 한계가 없으신 분이므로 한 순간에 온 세상사람을 조종하고 계세요. 그러면 또 왜 억울하게 죽게 나두냐고 하지만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서 다시 이런 글을 썼다.
귀하고 순수한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한 개인으로서 이와 같은 신앙은 훌륭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를 직업으로 하는 종교인 혹은 지도자가 그런 수준에 머믈러 있을 때는 증세가 심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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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사람의 심리란 개인적 일에만 관심을 집중하다보면 자기 이익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사들이 자기 교회에 관한 일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까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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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의 자아는 자신과 자신에게 보살핌을 주는 사람이 전부이다. 아이의 세계는 '나와 부모' 혹은 넓어보았자 '나와 가족' 으로 형성 된다. 아이는 부모의 존재를 알고 그 중요성을 느껴도 부모가 얼마나 힘든지 혹은 아픈지 별로 알지 못한다. 대개는 그저 내 욕구만 챙길 뿐이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어도 더 큰 세상을 보지 못한다면 아직도 아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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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뜻을 넒고 깊게 찾으려고 하지 않는 영적인 어린 아이가 되는 것이다. 특히 목사들이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과 촌수가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 같은 목사들을 만나면 갑자기 내가 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