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작가님께서주신글]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1895 – 1971)
양복 양과자는 들어봤어도 양행이라니, 회사이름이 뭐! 이래!
죽어도 그 여자와 살겠다는 아들
죽어도 그 애는 안 된다는 아버지
부자 갈등이 심해지자 아들은, 좋아서 죽는 미쓰 한을 꿰차고 미국으로 도망을 갔다.
미국에서 벌린 사업마다 대박이 났다. 그래서 한국으로 들어와 미스 한과 함께 제약회사를 차렸다.
회사 이름은 미스터 유와 미쓰 한이 미국으로 야반도주했다 해서, 유한양행(柳韓洋行)이라고 지었다. 양행은 영어로 go abroad
서재필 박사로부터 버들처럼 능굴능신(能屈能伸)하라고 '버드나무 목각화'를 선물 받았다. 그래서 버드나무는 유한양행의 상표가 되었다.
미국생활
1904년 봄, 한 소년이 제물포에서 대한제국 순회공사의 손을 잡고 멕시코행 여객선에 올랐다.
여객선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젊은이들과 하와이로 이민을 가는 노동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9세 유일한은 미국의 어느 가정에 위탁되었다.
집에서는 그를 '리틀 유'라고 불렀다. 그러나 앉으나 서나 조국 생각에 스스로 '한(韓)'자가 들어간 일한(日韓)으로 개명을 했다.
소년은 식당서빙, 신문배달, 구두닦이 같은 허드렛일을 하면서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다. 미식축구 선수로도 활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북간도로 이주한 부모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소년에게는 거금인 100달러를 송금했다.
이 융자금과 자신의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멀리 떨어진 수력발전소에서 일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서 법학과 회계학을 공부했다.
동양인 최초로 General Electric Company에 취직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총책임자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사업 수완이 남달라, 고향이 그리워 향수병을 앓던 중국인들에게 고향 물건인 도자기, 부채, 손수건 등을 팔았다.
하루는 트럭이 쇼윈도를 받아, 숙주나물이 쏟아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숙주나물이라는 생소한 식품에, 미국인들이 관심을 가지게 하려는 작전이었다.
작전은 성공해서 식품 회사를 설립했다. 그런데 숙주나물은 빨리 시들어, 오래두고 먹을 수 없어 통조림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숙주나물이 콩나물과 같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라 별 느낌이 없으나, 덜 익힌 소고기를 질컹질컹 먹은 미국인들은 사철 먹을 수 있는 신비한 체소로 귀하게 생각할 것이다.
숙주나물의 재료인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마중 나온 부친이,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미국 보낸 줄 아느냐?
동생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우회적으로 지원하였다.
유일한을 평가한 미국 정보기관 OSS 자료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였다. 회사 간부들도 모두 애국심이 투철했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 요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조국의 독립에 사용하는 데 동의했다.
청년은 낯선 땅에서 '신산(辛酸)한 유랑세월'을 극복하고 성공 신화를 썼다.
세브란스대학교 애비슨 총장의 귀국 권유가 있었다.
유일한에게는 연희전문학교 상과(현 연대 경영대) 교수로, 중국계인 부인 호미리 여사에게는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 받아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세브란스병원에 주식 12,000주를 기부했다. 의학에만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1965년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일한 박사는 1971년 눈을 감았다. 유품은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이 전부였다.
소유 주식과 함께 남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손녀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딸에게는 학교 안에 있는 묘지와 주변 땅 5천 평을 준다.
그 땅을 동산으로 만들고 울타리는 치지 마라. 학생들이 마음껏 드나들게 하여, 티 없이 맑은 젊은이들을 지하에서나마 보아야겠다.
딸은 어머니의 노후를 잘 돌보아 주기 바란다.
아들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하다.
1969년 외아들을 부사장직에서 해고하고 전문 경영인으로 회사를 투명하게 운영토록 했다.
일제 강점기에 "국민들의 건강만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며 제약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첮 번째로 소염제인 안티플라민을 내놓았다.
눈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귀로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사람
머리로 남의 행복을 축복해 줄 줄 아는 사람
이 분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할 사람이다.
유일한 박사 어록
허주의 아침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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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딸은 어머니의 노후를 잘 돌보아 주기 바란다.
아들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하다.
1969년 외아들을 부사장직에서 해고하고 전문 경영인으로 회사를 투명하게 운영토록 했다.
일제 강점기에 "국민들의 건강만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며 제약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첮 번째로 소염제인 안티플라민을 내놓았다.
눈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귀로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사람
머리로 남의 행복을 축복해 줄 줄 아는 사람
이 분들은 마땅히 존경받아야할 사람이다.
유일한 박사 어록
허주의 아침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