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은 조선개국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들을 말한다.‘두문동’은 이들 때문에 훗날 붙여진 지명이다. 오늘날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해당된다. ‘두문(杜門)’은‘문을 닫다’또는‘문을 막다’는 의미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은 여기서 생겨났다.
‘두문동 72인’의‘72인’은 공자의 제자를 지칭한다. 사기에‘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육례(六藝)에 통달한 제자는 72인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72’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사람의 수를 말하기보다는‘다수의 현인(賢人)’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쓰인다.
‘두문동 72현’은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일찍이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조 이전까지는 공식적인 문헌인 실록(實錄) 등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 말이다. 이들 언급을 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태종 12년(1412,임진년)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조에서 사헌부 장령을 지낸 서견(徐甄)이 금주(衿州)에 은거할 때 고려를 사모하는 시를 썼다.‘천년의 새서울이 한강 너머 있는데(千載新都隔漢江), 충성하는 신하들 가지런히 밝은 임금을 돕네(忠良濟濟佐明王), 삼한을 통일한 공 어디에 있느뇨?(統三爲一功安在), 문득 전조 왕업이 길지 못함 한하노라.(却恨前朝業不長)’
이 시의 처음 두 구절에서‘천년의 신도(新都)와 충성스런 신하들이 가지런히 밝은 임금을 돕네’라고 한 것은 조선의 개국을 찬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 두 구절의‘삼한(三韓)을 통일한 공’이라고 한 말과 ‘전조의 왕업 즉 고려의 왕업이 길지 못함을 한하노라’라고 한 것은 은연중 조선의 개국을 반대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사실은 즉각 태종에게 보고되었다. 이에 태종은“서견 이 조선의 조정에서 벼슬을 아니 하고 전조(前朝)의 신하로서 추모하는 시를 지었으니 또한 착하지 아니한가.”라며 더 이상 죄를 묻지 말라고 했다.
두문동 72현에 대한 언급은 영조실록에 처음 나타난다. 영조는 즉위 16년(1740.경신년)째 되는 해에 송도에 있는 재릉(齊陵)과 후릉(厚陵)을 참배하러 갈 때“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신하들이“부조현은 개성의 대족(大族) 50여 가문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답했다. 여기에서‘부조현(不朝峴)’과‘두문동(杜門洞)’이란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부조현’이란 고려의 유신들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신왕조인 조선의 왕에게‘조회를 하지 아니하고(부조.不朝) 넘어간 고개(현.峴)’라는 말로‘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영조는‘부조현’앞에서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한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후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는 것과 같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칠언시(七言詩) 한 구를 쓰게 했다. ‘승국충신면계세(勝國忠臣勉繼世-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라고 한 것이다.
그는‘부조현(不朝峴)’세 글자를 써서 그 유허지(遺墟地)에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영조 27년(1751,신미년)에는 두문동 72인들의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또 어필(御筆)로서“승국충신금언재 특수기동표기절(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 -고려의 충신이여 지금 어디에 있는가. 특별히 그 동리에 비석을 세워 그 절의를 표하노라.)”라는 14자를 써서 내리고 비석을 세울 것을 명한다. 제문(祭文)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뜻을 취함은 같으니 오직 조(曺)와 임(林)과 맹성(孟姓) 세 사람만이 이름이 전하고 나머지는 기록이 되지 못하였도다. 내가 옛날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유지(遺址)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지난날을 생각하니 감회를 그칠 수가 없구나.
사적이 점점 오래되고 문헌이 없어져 후세에 권장을 하려해도 표석이 없으므로 특별히 큰 글자 14자를 비석에 새겨 나의 뜻을 나타내었노라. 남긴 충렬을 생각하여 후손을 찾아내어, 방위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깨끗하게 제수를 장만하여 제사를 드리노라.’그 뒤 정조는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配享)하였다. 두문동 72현은 다음과 같다. 한편 기록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명단은 아닐 것이다
두문동 72현의 명단
호와 이름, 간략한 인물 소개를 함께 적었다. 이들은 이성계의 협박으로 출가한 황희를 빼고는 1397년 이성계가 불을 질르자 안나오고 모두 타죽거나 그 이전에 참살당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