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정몽헌회장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놀라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과연 그는 왜, 무엇 때문에 죽음의 길을 택했는지 무수한 추측만을 만들어 낼뿐이다.
그의 자살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동안 나는 몬테리팍 지역사무소의 동료로부터 슬픈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10여년전 같은 사무소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엘러노어라는 여직원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소녀시절부터 심한 당뇨에 시달렸으며 합병증으로 한쪽 발목을 절단하기까지 했다. 신장부전 때문에 신장이식까지 받았던 그녀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매번 수술회복 후에는 직장에 복귀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수년전에는 장애와 병마를 극복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그녀에게 회사에서 표창을 주기도 했었다. 그런 그녀가 끝내는 나이 40도 넘기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다.
세상의 온갖 부와 명예를 쥐고 살아온 재벌 2세가 닫힌 창문을 열고 몸을 던져 스스로의 목숨을 끊은 순간, 태평양 건너의 작은 아파트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살고자 하는 노력을 저버리지 않았던 한 여인이 죽어갔다.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을 대할 때, 흔히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무책임하며 겁많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회장의 가족은 물론 평소 그와 가까이 지내던 이들은 앞으로 가끔 한번씩,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라는 질문을 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자고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태어났다는 것, 그 자체가 살아야 한다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담아 사는 세상은 (자연은) 모두 한가지로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 들판의 이름없는 풀 한포기도 자신에게 주어진 명대로 세상을 살다간다.
습기어린 땅에서 싹을 피우는 순간부터가 살아가는 일의 시작이다.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며 변변치 않은 모양새의 꽃이라도 피워 바람에 씨앗을 날려보낸 후에야 비로소 시들어 간다. 척박한 땅에는 사는 일이 고달프다고 그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잡초는 없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 또한 없다. ‘우수마발’이 모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우주에 널려 있는 별들에게도 마지막은 찾아온다고 하지 않던가.
봄에는 들판에 가득 피어오는 온갖 꽃나무의 아름다움에 젖어 지내고, 여름에는 알차게 익어 가는 곡식과 달콤하게 영그는 과일 향에 취하여 살며, 가을이면 추수하는 즐거움과 낙엽의 외로움을 함께 만끽하고, 겨울에는 함박눈을 맞으며 다음 봄을 기약하는 것이 세상사가 아닌가 싶다.
여기에 분에 넘치는 욕심을 더하다보면 사는 일이 힘들어 진다.
사람 사는 모습은 누구나 거의 비슷하지 싶다. 나도 부자도 돈걱정을 하며 산다. 경제규모가 작은 나는 1천∼2천달러만 모자라도 돈걱정을 한다. 부자도 걱정은 하게 마련이다. 그규모에 따라 1만∼2만달러나 1백만∼2백만달러짜리 걱정을 하게 된다. 내가 하는 걱정이야 어디 가서 쉽게 빌릴 수도 있는 액수지만 부자들은 쉽게 마련할 수도 없다.
요즘 고국에서는 자살이 무슨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 한인사회에서도 심심지 않게 자살 소식은 들려 온다.
세상에 죽기로 마음먹으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 용기로 난관을 극복하고 살아야 한다. 죽는 일은 그다지 서두를 일이 아니다. 우리가 싫다고 해도 언젠가는 가게 되어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