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의병장 장산 신돌석장군
寧陵義兵將 壯山 申乭石將軍
☆寧陵義兵將 壯山 申乭石將軍은 1878.11.3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복디미)에서 부친 신석주와 모친 분성김씨 사이에 2남 2여중 셋째로 태어났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터 항일의식이 남달랐고 인근 마을에 있는 육이당(六怡堂)에 가서 틈틈이 學文도 연마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 1906년 영해에서 의병300명을 일으켜 진군을 개시하였다. 울진군 평해면으로 가서 다시 3,000여명의 의병을 재편하고 여러차례 일본군과 접전, 경상도 강원도 일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기습적으로 많은 적을 사살하는 등 가는곳 마다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만큼 명성도 높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병력도 증원되어 부득이 일월산. 백암산 등지로 퇴각하면서도 일본군의 요소마다 큰 타격을 입혔다. 1907년 12월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13도의 의병이 연합하기로 하고 13도 창의군 교남창의대장으로 천거되어 양주에 모여들었을 때 신돌석은 평민출신이란 이유로 제외되자, 의병을 이끌고 영해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일본군은 그를 체포 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현상금을 탐낸 주민이 일본군에 매수되어 그를 집으로 유인하여 독주를 먹여 취하게 한 다음에 무참히 살해 하였다. 이때 일기 30세이다. 그후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였다. 장군의 유적지 전경
將軍의 胸像으로 좌측은 記念館에 우측은 忠義祠에 奉安되어 있다
좌측 記念碑는 慶尙北道獨立有功者先烈遺族會 義兵大將申乭石將軍記念事業會에서 1965년 7월에 영덕읍 우곡리(호호대 솔동산)앞에 건립한 것을 1999.11.18 遺蹟地에 移建하였으며 우측 遺墟碑는 將軍의 동생 신태범이 각처에서 募金하여 1948년에 축산면 도곡리 528번지 (복두산기슭)에 建立한 것을 1999.11.18 遺蹟地에 移建하였다. 將軍의 묘소로 1973년에 國立墓地 愛國者墓域(131호)에 移葬됐다 . ☞ 국립현충원/ 서울 동작구 동산동 산 44-7번지
遺蹟地 記念館
이 곳은 장군의 생가로 부친인 신석주(申錫柱)께서 1850년경에 초가로 지어 살든 곳으로 1940년에 일본관헌들이 립의지를 꺾기 위해 정략적으로 소실하였다. 그 후 1942년에 목조와가로 신축하였다가 1995년에 당시의 건물 형태로 복원하였다. (지방기념물 제87호) ☞ 위치 :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번지
충의공원
遺蹟地의 案內板 遺蹟地의 管理所
艸堂 李武鎬先生의 懸板글씨
將軍께서 學文을 연마하든 육이당(六怡堂)으로 이중립(李中立)의 사랑채로현수유자는 이중립의 3대손인 이광식(李光植)이다 이중립 (李中立, 본관 眞城,1860~1892)신돌석장군을 가르친 스승이다. 이가옥은 1891년에 영덕군 축산면 상원리 193-5 대지546㎡에 목조가옥 / 口자형(정면 4칸, 측면 4칸반)으로 면적은 83.6㎡이다.
每年 4월6일에는 追慕委員會主管으로 追慕祭享行事가 열린다
● 將軍의 漢詩 登樓遊子却忘行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은 채 등루유자각망행 可歎檀墟落木橫 단군의 엣터가 쇠퇴함을 한탄 하네! 가탄단허락목횡 男兒二七成何事 남아 스물일곱 이룬 것이 무엇인가? 남아이칠성하사 暫倚秋風感慨生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잠의추풍감개생 (1905년 울진 평해 월송정(越松亭)에 올라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애국충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읊은 詩로 申乭石將軍은 文武를 겸한 將軍이다. )
● 揮毫(휘호)
☞忠義凜然?溢宇宙(충의늠연광일우주) “충의가 위엄 있고 당당하여 우주를 채우고 넘친다”는 뜻으로 해공(海公) 신익희 (申翼熙)先生의 휘호(1949년)
● 신장군의 힘과 관련된 대표적인 이야기들 1. 모습이 장대하고 여력이 뛰어나 수십 길의 언덕을 뛰어 넘었다「신장군실기」 2. 1903년 여름에 청도를 지나다가 전신주를 뽑아 일본공병 5~명을 무질렀다「의병대장신공유사」 3. 1903년 부산항에서 배를 수리하는 일본인에게 일부러 ‘일본군선의 배 수리는 어떻게 하는가?’ 라고 물었더니, 일본인이 성을 내며 발포하려고 하였을 때 일본배를 전복시키고 바위위로 끌고가 떨어뜨리니 물이 붉은 빛으로 용솟음 졌다.「의병대장신공유사」 4. 1904년 무렵 울산 송정 박상진의 집에 가서 있을때, “송정마을의 앞마을인 지당 (池唐)의 참물덩게에 돌다리를 놓을때 장정 몇 명이 달라붙어 돌을 올려 놓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마침 신장군이 자나다가 이를 보고 혼자 번쩍 들어 올려 다리를 놓았다.「신돌석장군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학술조사 보고서」현지 촌로의 구술 5. 박상진의 종숙 박시봉 집에서 디딜방아를 놓을 때 혼자 힘으로 방앗돌을 옮겨 놓았다.「신돌석장군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학술조사 보고서」현지 촌로의 구술 6. 1906년 음력 6월에는 원주(原州) 병정 40~50명을 돌연히 만났는데 일행이 총검을 무더기로 세우고 술을 나누고 있을 때, 장군은 앉아서 한 손으로 그 묶어 놓은 총검을터럭 다루듯 가볍게 하며 지락을 쓰니 원주병정이 모두 두려워서 굴복하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신장군실기」
● 장군의 양력
◈ 본관 평산(平山) 자는 순경(舜卿), 본명은 태호(泰浩)이명은 돌석(乭石) ◈ 1878.11. 3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복디미)에서 출생 ◈ 1896 김하락(의성출신)의병부대와 영해부 공격가담(18세) ◈ 1896.7~ 9 남천쑤전투(영덕대교 아래)참가 ◈ 1902 한재여(청주한씨) 여사와 결혼 ◈ 1906. 4. 6 영릉의진을 결성하여 영릉의병장으로 추대 ◈ 1906 ~1908 영양관아공격 등 2년8개월 동안 일본군과 접전하여 큰 타격을 가함 (일본군들이 ‘백두산호랑이’로 칭호) ◈ 1907.12 13도창의군교남창의대장으로 천거 ◈1908. 2 일본군의 장군생포작전을 따돌림 ◈ 1908. 9 만주 망명계획수립 ◈ 1908.12.12 장군의 순국 ◈ 1962. 3. 1 건국공로훈장추서 ◈ 1973.10.31 국립묘지 애국자 묘역에 이장 ※ 寧陵은 寧海와 江陵을 말함 |
출처: 왕돌잠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