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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十一回 美人計吳宮寵西施 言語科子貢說列國
제81회 : 미인계로 오왕이 서시를 총애하고, 말로 자공이 열국을 유세하다.
話說,越王句踐欲訪求境內美女,獻於吳王,文種獻計曰:「願得王之近豎百人,雜以善相人者,使挾其術,遍遊國中,得有色者,而記其人地,於中選擇,何患無人?」句踐從其計。半年之中,開報美女,何止二十餘人。句踐更使人覆視,得尤美者二人,因圖其形以進。那二人是誰?西施,鄭旦。那西施乃苧蘿山下採薪者之女。其山有東西二村,多施姓者,女在西村,故以西施別之。鄭旦亦在西村,與施女毗鄰,臨江而居,每日相與浣紗於江,紅顏花貌,交相映發,不啻如並蒂之芙蓉也。
한편, 월왕 구천이 나라 안에서 미녀를 구해 오왕에게 바치려고 하니, 문종이 계책을 바쳐 말하기를, “원컨대 왕의 측근 내시 백여 명을 골라 관상을 잘 보는 사람들과 섞여서 미인을 식별하는 방법으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미녀들을 발견하면 그 사람과 땅을 기록했다가 데려와 그중에서 선택하십시오. 어찌 나라에 미인이 없다고 걱정하십니까?” 하니, 구천이 그 계책을 따랐다. 반년이 지나자 미녀를 알려온 것이 어찌 20여 명만 되었겠는가? 구천이 다시 사람을 시켜 다시 뽑으라고 하자 그중 뛰어나게 아름다운두 사람을 얻었다.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렸다. 그 두 사람이 누구인가?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이었다. 서시는 곧 저라산(苧羅山) 아래 밑에 사는 나무꾼의 딸이었다. 그 산의 동쪽과 서쪽에 두 마을이 있는데. 시(施)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서쪽 마을에 살아서 서시(西施)라고 구별했다. 정단도 역시 서쪽 마을에 살았는데 서시와 이웃이었다. 강가에 살고 있으면서 매일 함께 강가에 나와 옷을 빨았다. 두 사람의 꽃 같은 모습이 서로 번갈아 강물에 비치는데 마치 한 쌍의 부용꽃과 같았다.
句踐命范蠡各以百金聘之。服以綺羅之衣,乘以重帷之車,國人慕美人之名,爭欲識認,都出郊外迎候,道路為之壅塞。范蠡乃停西施鄭旦於別館,傳諭:「欲見美人者,先輸金錢一文。」設櫃收錢,頃刻而滿。美人登朱樓,凭欄而立,自下望之,飄飄乎天仙之步虛矣。美人留郊外三日,所得金錢無算,悉輦於府庫,以充國用。句踐親送美人別居土城,使老樂師教之歌舞,學習容步,俟其藝成,然後敢進吳邦。(時周敬王三十一年,句踐在位之七年也。)
구천이 범려에게 많은 돈을 주고 데려오라고 명했다. 비단옷을 입히고 겹 휘장을 친 수레에 태워 데려오니, 백성들이 미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서로 다투어 구경하고자 모두 성 밖으로 나와 기다려서, 그로 인해 길이 막혔다. 범려가 서시와 정단을 별관에 머물게 하고, 전하기를, “미인을 보려는 자는 먼저 금전 일 문씩을 바치시오.” 하고, 궤를 놓고 돈을 받으니 금방 궤가 가득 찼다. 두 미인이 붉은 누각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섰다. 사람들이 아래에서 바라보니 바람에 날리는 듯 하늘에서 선녀가 허공을 걷는 것 같았다. 미인들이 성밖에서 사흘을 머무르면서 거두어들인 금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모두 수레에 실어 부고에 넣고 나라의 용도에 충당했다. 구천이 친히 미인을 토성(土城) 땅에 보내어 따로 살게 했다. 이어서 늙은 악사들을 시켜 두 미녀에게 가무와 걸음걸이를 가르치게 했다. 두 미인이 가무와 예절을 다 배우기를 기다린 다음 오나라에 바치려고 한 것이다. (그때가 주경왕(周敬王) 31년(기원전 489년)으로 구천이 월왕이 된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先一年,齊景公杵臼薨,幼子荼嗣立。是年楚昭王軫薨,世子章嗣立。其時楚方多故,而晉政復衰,齊自晏嬰之死,魯因孔子之去,國俱不振,獨吳國之強,甲於天下。夫差恃其兵力,有荐食山東之志,諸侯無不畏之。就中單說齊景公,夫人燕姬,有子而夭,諸公子庶出者,凡六人,陽生最長,荼最幼。荼之母鬻姒賤而有寵,景公因母及子,愛荼特甚,號為安孺子。景公在位五十七年,年已七十餘歲,不肯立世子,欲待安孺子長成,而後立之。何期一病不起,乃屬世臣國夏高張,使輔荼為君。大夫陳乞,素與公子陽生相結,恐陽生見誅,勸使出避。
그보다 1년 전에 제경공 저구(杵臼)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 도(荼)가 그 뒤를 이었다. 그 해에 초소왕 진(軫)이 죽고 세자 장(章)이 뒤를 이었다. 그때 초나라는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았고, 진(晉)나라는 정사가 다시 쇠퇴했다. 제나라는 안영이 죽은 후에, 노나라는 공자가 다른 나라로 떠난 후에 나라가 모두 부진했다. 홀로 오나라만이 강해져서 천하에 군림했다. 부차가 그 병력을 믿고 산동의 땅을 잠식할 뜻이 있었기 때문에 제후들은 모두 부차를 두려워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제경공을 말하면, 그는 부인 연희(燕姬) 사이에 요(夭)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어려서 죽고, 여러 공자는 서출로 모두 여섯 명이었다. 양생(陽生)이 가장 나이가 많고, 도(荼)가 가장 어렸다. 도의 모친 육사(鬻姒)는 신분이 천했지만 제경공의 총애를 받았다. 재경공은 어미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자식인 도도 극진히 사랑하여 안유자(安孺子)라고 불렀다. 제경공이 군위에 있은 지 57년에 나이 70이 넘었건만 세자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안유자가 장성하기를 기다려 그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병으로 일어나지 못할 줄 생각했겠는가마는 병이 든 제경공은 세신(世臣) 국하(國夏)와 고장(高張)을 불러 공자 도(荼)를 보좌하여 군주로 삼으라고 부탁했다. 대부 진걸(陳乞)은 평소에 공자 양생과 친교을 맺고 있었다. 그는 양생이 죽임을 당할까 걱정하여 나라 밖으로 몸을 피하라고 권했다.
陽生遂與其子壬及家臣闞止,同奔魯國。景公果使國高二氏逐群公子,遷於萊邑。景公薨,安孺子荼既立,國夏高張左右秉政。陳乞陽為承順,中實忌之。遂於諸大夫面前,詭言:「高國有謀,欲去舊時諸臣,改用安孺子之黨。」諸大夫信之,皆就陳乞求計。陳乞因與鮑牧倡首,率諸大夫家眾,共攻高國,殺高張,國夏出奔莒國。於是鮑牧為右相,陳乞為左相,立國書高無平以繼二氏之祀。安孺子年纔數歲,言動隨人,不能自立。陳乞有心要援立公子陽生,陰使人召之於魯。陽生夜至齊郊,留闞止與其子壬於郊外,自己單身入城,藏於陳乞家中。
양생은 즉시 그의 아들 임(壬)과 가신 감지(闞止)를 데리고 노나라로 달아났다. 제경공이 과연 국씨와 고씨를 시켜 여러 공자를 래읍(萊邑)으로 쫓아내 옮겨 살게 했다. 제경공이 죽자 국하와 고장이 안유자 도(荼)를 군주로 세우고 좌우에서 나라의 정사를 맡았다. 진걸은 겉으로는 그들에게 순종하는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사실 그들을 꺼렸다. 마침내 진걸은 여러 대부의 면전에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고장과 국하가 음모를 꾸며 옛날의 여러 신하를 몰아내고 안유자를 따르는 무리를 쓰려고 합니다.” 하니, 여러 대부가 그 말을 믿고 모두 진걸에게 달려가 대책을 물었다. 진걸이 포목(鮑牧)과 함께 주창하여 여러 대부의 가병을 이끌고 고씨와 국씨의 집을 공격했다. 고장은 살해되고 국하는 거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포목은 우상(右相)이 되고 진걸은 좌상(左相)이 되었다. 다시 국서(國書)와 고무평(高無平)을 세워 국씨와 고씨의 제사를 잇게 했다. 안유자는 나이가 아직 어려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쫓을 뿐이었고 자립하지 못했다. 진걸이 마음속으로 공자 양생을 도와 제나라 군주로 세우고자 하는 생각이 있어, 몰래 사람을 노나라에 보내 양생을 불렀다. 양생은 밤에 제나라 교외에 도착하여 그 아들 임(壬)과 감지를 교외에 머무르게 하고 자신은 단신으로 성안에 들어가 진걸의 집에 숨었다.
陳乞假稱祀先,請諸大夫至家,共享祭餘。諸大夫皆至。鮑牧別飲於他所,最後方到。陳乞候眾人坐定,乃告曰:「吾新得精甲,請共觀之。」眾皆曰:「願觀。」於是力士負巨囊自內門出,至於堂前。陳乞手自啟囊,只見一個人,從囊中伸頭出來,視之,乃公子陽生也。眾人大驚。陳乞扶陽生出,南向立,謂諸大夫曰:「『立子以長』,古今通典。安孺子年幼,不堪為君,今奉鮑相國之命,請改事長公子。」鮑牧睜目言曰:「吾本無此謀,何得相誣?欺我醉耶?」陽生向鮑牧揖曰:「廢興之事,何國無之?惟義所在。大夫度義可否,何問謀之有無?」
진걸이 거짓으로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핑계를 대고 여러 대부를 자기 집으로 청하여 제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려고 했다. 여러 대부가 모두 이르렀지만, 포목이 다른 곳에서 술을 마셨으므로 가장 늦게 도착했다. 진걸은 대부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서 곧 말하기를, “제가 이번에 좋은 갑옷을 얻었는데 함께 보기를 청합니다.” 하니, 여러 대부가 모두 말하기를, “한번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이에 힘센 장사가 커다란 자루를 등에 지고 안쪽 문에서 걸어 나와 대청마루 위에 내려놓았다. 진걸이 친히 자루를 여니 한 사람이 자루 안에서 머리를 내밀며 나왔다. 사람들이 보니 바로 공자 양생이었다. 여러 대부가 놀랐는데, 진걸이 양생을 부축하여 나오게 하여 남쪽을 향해 서게 하고, 여러 대부에게 말하기를, “‘태자는 장자를 세운다.’라는 것이 고금을 통한 법도입니다. 안유자는 나이도 어리고 군주의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 포상국의 명을 받들어 장공자를 군주로 받들기를 청합니다.” 하니, 포목이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나는 본디 이 모의와는 무관한데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무고하는가? 내가 취했다고 속이려고 하는가?” 했다. 양생이 포목을 향해 읍을 하며 말하기를, “군주를 폐하고 세우는 일은 어느 나라엔들 없겠습니까? 다만 대의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께서는 대의명분의 가부를 생각해 보셔야지 어찌 모의의 유무를 물으십니까?” 했다.
陳乞不待言終,強拉鮑牧下拜。諸大夫不得已,皆北面稽首。陳乞同諸大夫歃血定盟。車乘已具,齊奉陽生升車入朝,御殿即往,是為悼公。即日遷安孺子於宮外,殺之。悼公疑鮑牧不欲立己,訪於陳乞。乞亦忌牧位在己上,遂陰譖牧與群公子有交,不誅牧,國終不靖。於是悼公復誅鮑牧,立鮑息,以存鮑叔牙之祀。陳乞獨相齊國。國人見悼公誅殺無辜,頗有怨言。再說悼公有妹,嫁與邾子益為夫人。益傲慢無禮,與魯不睦。魯上卿季孫斯言於哀公,引兵伐邾,破其國,執邾子益,囚於負瑕。
진걸은 양생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포목을 강제로 잡아 절을 올리게 했다. 여러 대부도 할 수 없이 모두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진걸은 여러 대부와 함께 삽혈하고 (양생을 군주로 세울 것을) 맹세했다. 수레를 준비하여 일제히 양생을 받들어 태우고 조정으로 들어가 궁전에서 즉위했다. 이가 제도공(齊悼公)이다. 그날로 안유자를 궁 밖으로 옮겨서 죽였다. 제도공은 포목이 자기를 군주로 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의심하여 진걸을 찾아가 상의했다. 진걸도 역시 포목의 자리가 자기보다 높은 것을 시기하여, 마침내 포목과 여러 공자가 왕래한다고 은밀히 참소하여 포목을 죽이지 않으면 나라를 끝내 안정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제도공은 다시 포목을 죽이고 포식(鮑息)을 세워 포숙아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진걸은 홀로 제나라 재상이 되었다. 나라 사람들은 제도공이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자못 원망하는 말을 했다. 한편, 제도공에게는 누이가 있었는데, 주(邾)나라 군주 익(益)에게 시집가서 부인이 되었다. 주(邾)나라 군주 익은 오만하고 무례해서 노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노나라의 상경 계손사가 노애공(魯哀公)에게 말하여 군사를 이끌고 주나라를 정벌했다. 주나라를 깨뜨리고 주나라 군주 익을 붙잡아 부하(負瑕)의 땅에 가두었다.
齊悼公大怒曰:「魯執邾君,是欺齊也。」遂遣使乞師於吳,約同伐魯。夫差喜曰:「吾欲試兵山東,今有名矣!」遂許齊出師。魯哀公大懼,即釋放邾子益復歸其國,使人謝齊。齊悼公使大夫公孟綽辭於吳王,言:「魯已服罪,不敢勞大王之軍旅。」夫差怒曰:「吳師行止,一憑齊命,吳豈齊之屬國耶?寡人當視至齊國,請問前後二命之故。」叱公孟綽使退。魯聞吳王怒齊,遂使人送款與吳,反約吳王同伐齊國。夫差欣然即日起師,同魯伐齊,圍其南鄙。齊舉國驚惶,皆以悼公無端召寇,怨言益甚。
제도공이 대로하여 말하기를, “노나라가 주나라 군주를 잡아 가둔 것은 제나라를 얕보는 것이다.” 하고, 즉시 사자를 오나라에 보내 군사를 청해 함께 노나라를 치기로 약속했다. 부차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산동에 군사를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명분을 얻었구나!” 하고, 즉시 제나라의 요청을 허락하고 군사를 출동시켰다. 노애공이 크게 두려워하여 즉시 주나라 군주 익을 석방하여 그 나라로 돌려보내고 사자를 제나라에 보내 사죄했다. 제도공이 대부 공맹작(公孟綽)을 오나라 왕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기를, “노나라가 이미 죄를 인정했으니 감히 대왕의 군사들에게 노고를 끼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했다. 부차가 노하여 말하기를, “오나라의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고 오직 제나라의 명령에 의지한다면, 오나라가 어찌 제나라의 속국이란 말인가? 과인이 친히 제나라에 가서 보고, 앞뒤로 두 가지 명을 내린 까닭을 물어보아야 되겠다.” 하고 공맹작을 꾸짖어 물러가게 했다. 노나라는 오왕 부차가 제나라에 대해 노여움을 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사자를 보내 오나라와 친선을 맺고 도리어 오왕과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자고 약속했다. 부차가 흔연히 그날로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쳐서 제나라의 남쪽 변방을 포위했다. 제나라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서 모두 제도공이 공연히 외적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여 원망하는 말이 더욱 심해졌다.
時陳乞已卒,子陳恒秉政,乘國人不順,謂鮑息曰:「子盍行大事,外解吳怨,而內以報家門之仇?」息辭以不能。恒曰:「吾為子行之。」乃因悼公閱師,進鴆酒,毒殺悼公,以疾訃於吳軍曰:「上國膺受天命,寡君得罪,遂遘暴疾,上天代大王行誅,幸賜矜恤,勿隕社稷,願世世服事上國。」夫差乃班師而退,魯師亦歸。國人皆知悼公死於非命,因畏愛陳氏,無敢言者。陳恒立悼公之子壬,是為簡公。簡公欲分陳氏之權,乃以陳恒為右相,闞止為左相。昔人論齊禍皆啟於景公。詩曰「從來溺愛智逾昏,繼統如何亂弟昆?莫怨強臣與強寇,分明自己鑿凶門。」
그때 진걸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진항(陳恒)이 제나라의 정사를 맡았다. 진항은 나라 사람들이 제도공의 명에 따르지 않는 틈을 타서 포식(鮑息)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대사를 도모하여 밖으로는 오나라에 대한 원망을 해결하고, 안으로는 가문의 원수를 갚지 않습니까?” 하니, 포식이 자기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사양했다. 진항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해 대사를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했다. 이에 진항은 제도공이 군사를 사열할 때 짐독이 든 술을 권하여 독살하고, 오나라 진영에 제나라 군주가 병으로 죽었다고 부고를 보내면서 말하기를, “상국이 천명을 받아 우리 군주의 죄를 물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주님은 갑자기 폭질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대왕을 대신하여 우리 군주를 죽였다고 하겠습니다. 부디 제나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사직이나마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면 대대손손이 상국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했다. 부차가 즉시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자 노나라 군사들도 역시 물러갔다. 제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제도공이 비명에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진씨를 존경하여 사랑했기 때문에 감히 그 일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진항이 제도공의 아들 임(任)을 세우니, 이가 제간공(齊簡公)이다. 제간공은 진씨의 권세를 나누기 위해 진항을 우상으로 삼고, 감지(闞止)를 좌상으로 삼았다. 옛사람이 논하기를 제나라의 환란은 모두 경공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하면서 시를 지어 이르기를, “원래 사랑에 빠지면 지혜가 흐려지는데, 어찌하여 형제의 순서를 바꿔 계통을 전했던가? 강한 신하와 강한 외적을 원망하지 말아라. 분명히 자기가 파놓은 재앙이니.” 했다.
時越王教習美女三年,技態盡善,飾以珠幌,坐以寶車,所過街衢,香風聞於遠近,又以美婢旋波、移光等六人為侍女,使相國范蠡進之吳國。夫差自齊回吳,范蠡入見,再拜稽首曰:「東海賤臣句踐,感大王之恩,不能親率妻妾,伏侍左右,遍搜境內,得善歌舞者二人,使陪臣納之王宮,以供灑掃之役。」夫差望見,以為神仙之下降也,魂魄俱醉。子胥諫曰:「臣聞『夏亡以妹喜,殷亡以妲己,周亡以褎姒。』夫美女者,亡國之物,王不可受!」夫差曰:「好色,人之同心。句踐得此美女不自用,而進於寡人,此乃盡忠於吳之證也。相國勿疑。」遂受之。
그때 월왕 구천은 두 미녀를 3년 동안 가르쳐서, 기예와 자태가 모두 빼어나자, 주렴으로 꾸미고 칠보로 장식한 수레에 두 미녀를 태워 거리를 지나가게 하니, 향기로운 바람이 원근에 퍼졌다. 다시 선파(旋波), 이광(移光) 등 아름다운 시녀 여섯 사람을 뽑아 두 미녀의 시중을 들게 했다. 구천이 상국 범려를 시켜 두 미녀를 오나라에 바쳤다. 부차가 제나라를 정벌하고 오나라에 돌아오자, 범려가 들어와 뵙고, 두 번 절한 뒤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전하기를, “동해의 천한 신하 구천이 대왕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으나, 친히 처첩을 거느리고 대왕의 좌우에서 모시지 못하여, 월나라 경내를 두루 찾아서 노래와 춤에 능한 미녀 두 명을 구했습니다. 신의 신하 범려를 시켜 왕궁에 보내오니 물뿌리고 청소하는 일이나 시키기 바랍니다.” 했다. 부차가 바라보니 신선이 하강한 듯하여 혼백이 모두 취했다. 오자서가 간하기를, “신이 듣기에 ‘하나라는 말희(妺姬)로 인해 망했고, 은나라는 달기(妲己)로 인해서 망했으며, 서주도 포사(襃姒)로 인하여 망했다.’고 했습니다. 무릇 아름다운 여인이란 나라를 망치는 요물이라 대왕께서는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함은 사람의 다같은 마음이라. 구천이 이런 아름다운 여인을 얻고도 스스로 취하지 않고 나에게 바치니, 이는 참으로 오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요. 상국은 의심하지 마시오.” 하고 마침내 두 미녀를 받아들였다.
二女皆絕色,夫差並寵愛之,而妖豔善媚,更推西施為首。於是西施獨奪歌舞之魁,居姑蘇之臺,擅專房之寵,出入儀制,擬於妃后。鄭旦居吳宮,妒西施之寵,鬱鬱不得志,經年而死。夫差哀之,葬於黃茅山,立祠祀之。此是後話。且說,夫差寵幸西施,令王孫雄特建館娃宮於靈巖之上,銅溝玉檻,飾以珠玉,為美人遊息之所。建「響屧廊」,(何為響屧?屧乃鞋名,鑿空廊下之地,將大甕鋪平,覆以厚板,令西施與宮人步屧繞之,錚錚有聲,故名響屧。)今靈巖寺圓照塔前小斜廊,即其址也。高啟《館娃宮》詩云:「館娃宮中館娃閣,畫棟侵雲峰頂開﹔猶恨當時高未極,不能望見越兵來!」王禹偁有《響屧廊》詩云:「廊壞空留響屧名,為因西子繞廊行﹔可憐伍相終屍諫,誰記當時曳履聲!」
두 여인은 모두 천하절색이라 부차는 아울러 그들을 사랑했지만, 요염하고 아양을 잘 떠는 데는 서시가 으뜸이었다. 이에 서시가 노래와 춤의 일인자가 되어 고소대에 살면서 부차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녀가 출입할 때는 의례는 왕비와 비슷했다. 정단은 오나라 궁궐에 살면서 서시의 총애를 질투하다가, 뜻을 얻지 못함을 답답해하여 해가 지나 죽었다. 부차가 그를 슬퍼하여 황모산(黃茅山)에 묻어 주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후일의 이야기다. 한편, 부차가 서시를 사랑하여, 왕손웅에게 명하여 영암산(靈岩山)에 관왜궁(館娃宮)이란 궁전을 특별히 짓게 했다. 관왜궁에는 구리 도랑에 옥 난간을 만들고 주옥으로 치장하여 미인이 놀며 휴식하는 곳으로 했다. 그 안에 향섭랑(響屧廊)이란 복도를 만들었다. (향섭이 무엇인가? 섭(나막신)은 신발의 이름이다. 복도 밑의 땅을 파고 큰 항아리를 늘어 묻고 그 위를 평평하게 만들고 두꺼운 판자로 덮었는데, 서시가 궁인들과 나막신을 신고 걸어 다니면 또각또각 소리가 나게 했기 때문에 이름을 ‘나막신을 울리다.’라고 한 것이다.) 지금도 영암사(靈岩寺) 원조탑(圓照塔) 앞에 약간 경사가 진 복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향섭랑의 옛터이다. 원나라 때 고계(高啓)가 ‘관왜궁(館娃宮)’이라는 시를 지어 이르기를, “관왜궁 안에 치솟은 관왜각이 있었으니, 그림 기둥이 구름을 뚫고 솟았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그때 좀 더 누각이 높지 못해서, 쳐들어오는 월나라 병사들을 보지 못했네.” 했다. 또 송나라 왕우칭(王禹稱)도 ‘향섭랑’이라는 시에서 이르기를, “복도는 부서지고 헛되이 향섭이란 이름만 남아있어, 서시가 복도를 돌아다녀서 그런 이름이 생겼는데, 가련한 오자서는 직간하다가 죽었고, 누가 당시의 나막신 끄는 소리를 기억하겠는가?” 했다.
上有翫花池,翫月池。又有井,名吳王井,井泉清碧,西施或照泉而妝,夫差立於旁,親為理髮。又有洞名西施洞,夫差與西施同坐於此。洞外石有小陷,今俗名西施跡。又嘗與西施鳴琴於山巔,今有琴臺。又令人種香於香山,使西施與美人泛舟採香。今靈巖山南望,一水直如矢,俗名箭涇,即採香涇故處。又有採蓮涇,在郡城東南,吳王與西施採蓮處。又於城中開鑿大濠,自南直北,作錦帆以遊,號錦帆涇。高啟詩云:「吳王在日百花開,畫船載樂洲邊來﹔吳王去後百花落,歌吹無聞洲寂寞。花開花落年年春,前後看花應幾人?但見枝枝映流水,不知片片墮行塵。年年風雨荒臺畔,日暮黃鸝腸欲斷﹔豈惟世少看花人,從來此地無花看。」
영암산 위에는 완화지(玩花池)와 완월지(玩月池)라는 연못이 있고, 또 우물이 있는데 이름이 오왕정(吳王井)이고 우물물이 맑고 푸르렀다. 서시가 간혹 우물에 비추어 화장했는데, 부차가 곁에서 서시의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또‘서시동(西施洞)이라는 동굴이 있고, 부차와 서시가 함께 그곳에 앉았었다. 동굴 밖에 약간 파인 바위가 있는데, 지금 민간에서 서시의 자취라고 부른다. 또한 일찍이 부차가 서시와 산꼭대기에서 거문고를 타던 곳에 지금 금대(琴臺)가 있다. 또 부차는 사람을 시켜 향산(香山)에 향나무를 심어서 서시와 미인들을 시켜 배를 타고 다니면서 향(香)을 채집하게 했다. 오늘도 영암산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화살처럼 곧은 물이 있는데 민간에서 전경(箭涇)이라고 하고 바로 향을 채집하던 곳이다. 또 연꽃을 따던 냇물이 성의 동남쪽에 있는데, 오왕 부차와 서시가 연꽃을 따던 곳이다. 그리고 성안에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운하를 파고 비단 돛을 달고 노닐었는데, 그곳을 금범경(錦帆涇)이라고 했다. 원나라 고계의 시에 이르기를, “오왕이 있을 당시에는 온갖 꽃이 피었고, 악공이 탄 그림 배는 섬 주변을 돌았으나, 오왕이 가버린 후에는 온갖 꽃들이 떨어지고,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고 섬은 적막하네. 해마다 봄이 되면 꽃은 피었다가 지지만, 당시와 지금 꽃을 보고 감회를 느낀 사람은 명이나 될까? 단지 흐르는 물에 비친 가지들만 볼뿐, 편편히 떨어져 먼지가 된 것은 모르네. 해마다 비바람은 고소대를 황량하게 하고, 황혼에 우는 꾀꼬리는 남의 애를 끊으려 하네. 어찌 세상에 꽃구경하는 사람이 적다고 하랴만, 지금까지 이곳에는 볼만한 꽃이 없구나.” 했다.
又城南有長洲苑,為遊獵之所。又有魚城養魚,鴨城畜鴨,雞陂畜雞,酒城造酒。又嘗與西施避暑於西洞庭之南灣,灣可十餘里,三面皆山,獨南面如門闕。吳王曰:「此地可以消夏。」因名消夏灣。張羽又有《蘇臺歌》云:「館娃宮中百花開,西施曉上姑蘇臺。霞裙翠袂當空舉,身輕似展凌風羽。遙望三江水一杯,兩點微茫洞庭樹。轉面凝眸未肯回,要見君王射麋處。城頭落日欲棲鴉,下階戲折棠梨花﹔隔岸行人莫倚盼,干將莫邪光粲粲。」夫差自得西施,以姑蘇臺為家,四時隨意出遊,絃管相逐,流連忘返。惟太宰嚭王孫雄常侍左右,子胥求見,往往辭之。
또 성 남쪽에 장주원(長洲苑)이 있는데, 그들이 사냥하던 곳이다. 또 어성(魚城)에서 고기를 기르고, 압성(鴨城)에서 오리를 길렀으며, 계성(鷄城)에서는 닭을 치고, 주성(酒城)에서 술을 빚었다. 또 일찍이 서시와 함께 서 동정호(洞庭湖) 남쪽 물굽이로 피서를 갔는데 물굽이가 십여 리에 달하고 삼면이 모두 산이고 오직 남쪽만 궁궐의 문처럼 트여 있었다. 오왕 부차가 말하기를, “이곳은 여름의 무더위를 식힐만한 곳이다.” 하고, 이름을 소하만(消夏灣)이라고 했다. 명나라 장우(張羽)가 ‘소대가(蘇臺歌)’를 지어 이르기를, “관왜궁 안에 온갖 꽃이 피었는데, 서시는 새벽에 고소대에 올랐다. 붉은 치마와 푸른 소매가 허공에 휘날리니, 몸은 가벼워 마치 바람에 날리는 깃털 같았다. 멀리 삼강의 물은 한 잔 술 같고, 점찍은 듯 아득한 동정호의 나무라. 얼굴을 돌려 응시하여 돌아보지 않으니, 사슴을 사냥하는 군왕을 보려 함이라. 성 위에 해가 지니 갈까마귀 깃들려 하고, 서시는 섬돌을 내려와 팥배나무꽃을 꺾는구나. 강 건너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곳을 엿보지 말아라. 간장과 막야 같은 남녀가 찬란하게 빛나도다.” 했다. 부차가 서시를 얻고 나서부터 고소대를 집으로 삼아 춘하추동 마음 내키는 대로 나가서 놀았다. 거문고와 피를 든 악공들이 따라가서 돌아갈 줄을 몰랐다. 오로지 태재 백비와 왕손웅이 항상 부차의 좌우에 모시고 있어서, 오자서가 만나려 해도 번번이 허락하지 않았다.
越王句踐聞吳王寵幸西施,日事遊樂,復與文種謀之。文種對曰:「臣聞『國以民為本,民以食為天。』今歲年穀歉收,粟米將貴,君可請貸於吳,以救民飢。天若棄吳,必許我貸。」句踐即命文種以重幣賄伯嚭,使引見吳王。吳王召見於姑蘇臺之宮,文種再拜請曰:「越國洿下,水旱不調,年穀不登,人民飢困。願從大王乞太倉之穀萬石,以救目前之餒,明年穀熟,即當奉償。」夫差曰:「越王臣服於吳,越民之飢,即吳民之飢也,吾何愛積穀,不以救之?」時子胥聞越使至,亦隨至蘇臺,
월왕 구천은 오왕이 서시를 총애하여 매일 놀이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문종과 모의했다. 문종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에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고 백성은 먹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라고 했습니다. 올해에는 흉년이 들어 양식이 귀해질 것입니다. 주군께서 오나라에 양식을 빌려 달라고 청하여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하십시오. 하늘이 만약 오나라를 버린다면 반드시 우리에게 곡식을 빌려줄 것입니다.” 했다. 구천이 즉시 문종에게 명하여 많은 재화를 가지고 백비에게 뇌물로 바치고 오왕을 뵙게 해 달라고 했다. 오왕이 고소대의 궁에서 문종을 불러 보니, 문종이 두 번 절하고 청하여 말하기를, “월나라는 낮은 웅덩이라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해 곡식이 익지 않아서 백성들이 기아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 태창(太倉)의 곡식 만 섬을 빌려 목전의 기아를 구하려 합니다. 내년에 곡식이 익으면 마땅히 곧 갚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부차가 말하기를, “월왕이 오나라에 신하로서 복종하니 월나라 백성의 굶주림은 곧 오나라 백성들의 굶주림이라. 내가 어찌 쌓아 둔 곡식을 아껴서 그들을 구하지 않겠는가?” 했다. 그때 오자서가 월나라 사자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고소대에 따라 들어왔다.
得見吳王,及聞許其請穀,復諫曰:「不可,不可!今日之勢,非吳有越,即越有吳。吾觀越王之遣使者,非真飢困而乞糴也,將以空吳之粟也。與之不加親,不與未成仇,王不如辭之。」吳王曰:「句踐囚於吾國,卻行馬前,諸侯莫不聞知。今吾復其社稷,恩若再生,貢獻不絕,豈復有背叛之虞乎?」子胥曰:「吾聞越王早朝晏罷,恤民養士,志在報吳,大王又輸粟以助之,臣恐麋鹿將遊於姑蘇之臺矣。」吳王曰:「句踐業已稱臣,烏有臣而伐君者?」子胥曰:「湯伐桀,武王伐紂,非臣伐君乎?」
오자서가 오왕을 뵙고, 이에 오왕이 곡식을 빌려주려 하자, 다시 간하기를,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오늘의 형세는 오나라가 월나라를 가지지 않으면, 곧 월나라가 오나라를 가지게 됩니다. 제가 월왕이 보낸 사자를 살펴보니, 참으로 기근이 들어 곡식을 빌리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나라의 곡식을 축내려는 것입니다. 곡식을 빌려준다 해서 더 친해지는 것도 아니고, 안 준다고 해서 원수질 일도 없으니 대왕께서는 거절하는 게 낫습니다.” 하니, 오왕이 말하기를, “구천이 우리나라에 죄수로 있으면서, 마부가 되었던 일은 제후들이 알고 있는 바요. 지금 내가 그 사직을 회복시켜 주어 은혜가 다시 살려준 것과 같아서 공물을 바치는 것이 끊이지 않는데, 어찌 그가 다시 배반하리라 근심을 하겠소?” 했다. 오자서가 말하기를, “제가 듣기로 월왕 구천은 아침 일찍 조회를 열고 저녁 늦게 파하며, 백성들을 보살피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뜻은 오나라에 복수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왕께서 또 곡식을 보내 그를 돕는다면 신은 사슴이 장차 고소대에 놀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니, 오왕이 말하기를, “구천이 이미 신하라고 칭하는데, 어찌 신하가 군주를 치겠소?” 했다. 오자서가 말하기를, “탕왕(湯王)은 걸왕(桀王)을 쳤고, 무왕(武王)은 주왕(紂王)을 쳤는데, 그것은 신하가 군주를 친 게 아닙니까?” 했다.
伯嚭從旁叱之曰:「相國出言太甚,吾王豈桀紂之比耶?」因奏曰:「臣聞葵邱之盟,遏糴有禁,為恤鄰也。況越,吾貢獻之所自出乎?明歲穀熟,責其如數相償,無損於吳,而有德於越,何憚而不為也?」夫差乃與越粟萬石,謂文種曰:「寡人逆群臣之議,而輸粟於越,年豐必償,不可失信!」文種再拜稽首曰:「大王哀越而救其飢餒,敢不如約。」文種領穀萬石,歸越,越王大喜,群臣皆呼「萬歲!」句踐即以粟頒賜國中之貧民,百姓無不頌德。
백비가 옆에 있다가 꾸짖기를, “상국의 말은 너무 심합니다. 우리 왕을 어찌 걸주(桀紂)에 비합니까?”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신이 알기로 규구(葵邱)의 회맹에서 곡식 매매를 막는 것을 금지한 것은 이웃 나라를 구휼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물며 월나라는 스스로 오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있지 않습니까? 내년에 곡식이 익으면 그 수만큼 갚으라 하면 오나라에 손해가 없습니다. 월나라에 은혜를 베푸는 것이니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습니까?” 했다. 부차가 즉시 곡식 만 섬을 월나라에 주라고 명하면서 문종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여러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월나라에 곡식을 빌려주니 풍년이 들면 반드시 갚아서 신의를 잃지 마시오.” 했다. 문종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월나라를 불쌍히 여기시어 그 기아를 구해 주셨는데 어찌 감히 약속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했다. 문종이 곡식 만 섬을 가지고 월나라에 귀국했다. 월왕 구천이 크게 기뻐하고 여러 신하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구천이 즉시 곡식을 나라 안의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주니, 백성들이 월왕 구천의 덕을 칭송했다.
次年,越國大熟,越王問於文種曰:「寡人不償吳粟,則失信﹔若償之,則損越而利吳矣。奈何?」文種對曰:「宜擇精粟,蒸而與之,彼愛吾粟,而用以布種,吾計乃得矣。」越王用其計,以熟穀還吳,如其斗斛之數。吳王嘆曰:「越王真信人也!」又見其穀粗大異常,謂伯嚭曰:「越地肥沃,其種甚嘉,可散與吾民植之。」於是國中皆用越之粟種。不復發生,吳民大飢,夫差猶認以為地土不同,不知粟種之蒸熟也。文種之計亦毒矣!(此周敬王三十六年事也。)越王聞吳國飢困,便欲興兵伐吳。
다음 해, 월나라에 큰 풍년이 들었다. 월왕 구천이 문종에게 묻기를, “과인이 오나라에서 빌린 곡식을 갚지 않으면 신의를 어기는 것이고, 만약 갚으면 월나라에 손해가 되고 오나라의 이익이 되는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문종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가장 좋은 곡식을 골라 삶아서 보낸다면 그들은 우리가 보낸 곡식을 아껴서 다음 해에 종자로 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의 계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했다. 월왕이 그 계책을 써서 익은 곡식을 오나라에서 받은 수량만큼 상환했다. 오왕이 탄복하며 말하기를, “월왕은 참으로 신의 있는 사람이다!” 했다. 또 그 곡식이 비상하게 큰 것을 보고 백비에게 말하기를, “월나라의 땅이 비옥하니 그 종자가 매우 좋다. 우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 심게 하시오!” 했다. 이에 오나라 안에서는 모두 월나라의 곡식을 종자로 사용했다. 그러나 싹이 나지 않아, 오나라 백성이 크게 굶주렸다. 부차는 오히려 그것이 토양이 달라서 그렇게 된 줄 알았지, 곡식 씨를 삶은 것인 줄은 몰랐다. 문종의 계교는 또한 악독했다. (이때가 주경왕36년의 일이었다.) 월왕은 오나라에 기근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文種諫曰:「時未至也,其忠臣尚在。」越王又問於范蠡,蠡對曰:「時不遠矣!願王益習戰以待之。」越王曰:「攻戰之具,尚未備乎?」蠡對曰:「善戰者,必有精卒,精卒必有兼人之技,大者劍戟,小者弓弩,非得明師教習,不得盡善。臣訪得南林有處女,精於劍戟﹔又有楚人陳音,善於弓矢,王其聘之。」越王分遣二使,持重幣往聘處女及陳音。單說,處女不知名姓,生於深林之中,長於無人之野,不由師傅,自然工於擊刺。使者至南林,致越王之命,處女即隨使北行。
문종이 간하기를,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충신이 아직 있습니다.” 했다. 월왕이 또 범려에게 물으니, 범려가 대답하기를,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더욱 전투 훈련에 힘쓰고 기다리십시오.” 했다. 월왕이 말하기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가 아직도 덜 되었다는 말이오?” 하니, 범려가 대답하기를, “싸움을 잘하는 자는 반드시 정예병(精銳兵)이어야 합니다. 정예병은 반드시 두 사람을 겸한 출중한 무예를 지녀야 합니다. 큰 사람에게는 검과 극을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작은 사람에게는 활과 쇠뇌를 쏘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데 훌륭한 선생의 교습을 받지 않으면 참으로 잘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이 찾아보니 남쪽 숲에 처녀가 있는데 검(劍)과 극(戟)에 정통했습니다. 그리고 초나라 사람 진음(陳音)이 활을 잘 쏜다고 하니 대왕께서는 그를 초빙하십시오.” 하니, 월왕이 두 사자를 시켜 많은 재물을 가지고 처녀와 진음(陳音)을 모셔 오게 했다. 한편, 처녀는 이름을 알 수 없는데, 깊은 숲속에서 태어나서 사람이 살지 않은 들판에서 자라나 어떤 선생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자연히 치고 찌르는 법에 공교해졌다. 사자가 남쪽 숲에 이르러 월왕의 명령을 전하니, 처녀가 즉시 사자를 따라 북쪽으로 나섰다.
至山陰道中,遇一白鬚老翁,立於車前,問曰:「來者莫非南林處女乎?有何劍術,敢受越王之聘?願請試之!」處女曰:「妾不敢自隱,惟公指教!」老翁即挽林內之竹,如摘腐草,欲以刺處女。竹折,末墮於地,處女即接取竹末,以刺老翁。老翁忽飛上樹,化為白猿,長嘯一聲而去。使者異之。處女見越王,越王賜坐,問以擊刺之道。處女曰:「內實精神,外示安佚,見之如好婦,奪之似猛虎。布形候氣,與神俱往,捷若騰兔,追形還影,縱橫往來,目不及瞬。得吾道者,一人當百,百人當萬。大王不信,願得試之。」
사자의 일행이 산의 응달진 북쪽 길을 지나던 중에 수염이 흰, 한 노인이 나타나 수레 앞에 서서 묻기를, “오는 사람이 남림에 산다는 처녀가 아닌가? 검술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감히 월왕의 초빙을 받았는가? 내가 한번 시험해 보겠다!” 하니, 남림의 처녀가 말하기를, “첩이 감히 스스로 재주를 감추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공께서 가르쳐주십시오.” 했다. 노인이 즉시 숲속의 대나무밭에서 대나무 한 개를 마치 썩은 풀을 뽑듯이 뽑아내더니 처녀를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대나무는 부러져 끝이 땅에 떨어졌다. 처녀가 즉시 그 대나무 끝을 취하여 그 노인을 찔렀다. 그러자 노인은 홀연히 나무 위로 날아올라서 흰 원숭이로 변하여 길게 휘파람을 한번 불더니 사라져 버렸다. 사자가 기이하게 생각했다. 처녀가 월왕을 뵈니, 월왕이 자리에 앉게 하고 검으로 치고 찌르는 방법을 물었다. 처녀가 말하기를, “안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겉으로는 한가한 표정을 지어 마치 부녀자처럼 보이되, 맹수와 같이 빼앗아야 합니다. 몸과 기운이 정신과 일치되어 빠르기가 달리는 토끼 같고, 형체를 쫓다가 다시 그림자로 변하며 종횡으로 움직이기를 사람들이 미처 볼 수 없이 해야 합니다. 저의 도를 깨달은 사람은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 낼 수 있으며 백 사람은 만 사람을 당해 낼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원컨대 시험하여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했다.
越王命勇士百人,攢戟以刺處女。處女連接其戟而投之。越王乃服。使教習軍士,軍士受其教者三千人。歲餘,處女辭歸南林,越王再使人請之,已不在矣。或曰:「天欲興越亡吳,故遣神女下授劍術,以助越也。」再說,楚人陳音,以殺人避仇於越。蠡見其射必命中,言於越王,聘為射師。王問音曰:「請聞弓弩何所而始?」陳音對曰:「臣聞弩生於弓,弓生於彈,彈生於古之孝子。古者人民朴實,飢食鳥獸,渴飲霧露,死則裹以白茅,投於中野。有孝子不忍見其父母為禽獸所食,故作彈以守之。
월왕 구천이 용감한 군사 백 명에게 명령하여 극을 들고 그 처녀를 찌르게 했다. 처녀가 잇달아 군사들의 극을 쳐서 땅에 떨어뜨렸다. 월왕이 이에 승복하고, 처녀로 하여금 군사들에게 칼 쓰는 법을 가르치게 했다. 그녀에게서 검술 훈련을 받은 군사들이 모두 3천 명이었다. 일 년이 지난 후 처녀는 작별하고 남림(南林)으로 돌아갔다. 월왕이 다시 사자를 보내 청해 오려고 했으나, 그녀는 이미 거기에 있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월나라를 일으키고 오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신녀(神女)를 내려보내 군사들에게 검술을 가르쳐 월나라를 돕도록 한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초나라 사람 진음이 살인을 하고 원수를 피하여 월나라로 도망쳐 와서 살고 있었다. 범려가 그가 활을 쏘면 틀림없이 과녁에 명중하는 것을 보고, 진음을 월왕에게 말하여 활쏘기 스승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월왕이 진음을 불러 묻기를, “활과 쇠뇌는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 하니, 진음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쇠뇌는 활에서 생기고 활은 탄궁(彈弓)에서 생겼으며, 탄궁은 옛날 어떤 효자에게서 생겼습니다. 옛날에 사람들이 순박하고 성실하여 배가 고프면 새나 짐승을 잡아먹고, 목이 마르면 안개나 이슬을 마셨으며, 죽으면 띠풀로 싸서 들판에 버렸습니다. 어떤 효자가 자기 부모의 시신이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탄궁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時為之歌曰:『斷木續竹,飛土逐肉。』至神農皇帝興,弦木為弧,剡木為矢,以立威於四方。有弧父者,生於楚之荊山,生不見父母,自為兒時,習用弓矢,所射無脫。以其道傳於羿,羿傳於逢蒙,逢蒙傳於琴氏。琴氏以為諸侯相伐,弓矢不能制服,乃橫弓著臂,施機設樞,加之以力,其名曰弩。琴氏傳之楚三侯,楚由是世世以桃弓棘矢,備禦鄰國。臣之前人,受其道於楚,五世於茲矣。弩之所向,鳥不及飛,獸不及走。惟王試之!」越王亦遣士三千,使音教習於北郊之外。音授以連弩之法,三矢連續而去,人不能防。三月盡其巧。陳音病死,越王厚葬之,名其山曰陳音山。此是後話。
그때 그것을 노래하기를, ‘나무를 자르고 대나무를 엮어서 흙덩이를 날려서 짐승들을 쫓았다.’라고 했습니다. 신농황제(神農皇帝)가 일어나기에 이르러 나무를 휘어 시위를 걸고,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사방에 그 위엄을 세웠습니다. 호부(弧父)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초나라의 형산(荊山)에서 태어났습니다. 날 때부터 부모를 보지 못했고, 혼자서 성장하며 활과 화살의 사용법을 익혀서 그가 쏜 화살이 빗나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호부가 그 활 쏘는 법을 예(羿)에게 전하고, 예는 봉몽(逢蒙)에게 전했으며, 봉몽은 금씨(琴氏)에게 전했습니다. 금씨가 제후들이 서로 싸우는데 활과 화살로는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활을 옆으로 눕혀 어깨에 대고 쏠 수 있게 기계를 설치해서 그 힘을 더하게 했습니다. 그 이름을 쇠뇌라고 했습니다. 금씨가 그것을 초(楚)의 세 제후에게 전수하여 초는 그 때문에 대대로 복숭아나무로 활을 만들고 대추나무로 화살대를 만들어 그 이웃 나라의 침략에 대비했습니다. 신의 조상이 쇠뇌의 방법을 초나라로부터 물려받아 5대인 저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쇠뇌가 향하는 곳에는 새도 날지 못하며 짐승도 달아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한 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했다. 월왕 구천이 역시 진음에게 3천의 군사를 보내어 쇠뇌의 사용법을 성의 북쪽 교외 밖에서 교습받게 하였다. 진음은 연속 발사의 쇠뇌의 방법을 전수하여 화살 세 개를 연발로 쏘면 사람이 막을 수가 없었다. 진음이 3개월 동안 그 기교를 다 전수해 주더니, 병이 들어 죽었다. 월왕 구천이 그를 성대하게 장사지내주고 그 산 이름을 진음산(陳音山)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뒷날의 이야기다.
髯仙詩云:「擊劍彎弓總為吳,臥薪嘗膽淚幾枯﹔蘇臺歌舞方如沸,遑問鄰邦事有無。」子胥聞越王習武之事,乃求見夫差,流涕而言曰:「大王信越之臣順,今越用范蠡,日夜訓練士卒,劍戟弓矢之藝,無不精良。一旦乘吾間而入,吾國禍不支矣。王如不信,何不使人察之?」夫差果使人探聽越國,備知處女陳音之事,回報夫差。夫差謂伯嚭曰:「越已服矣,復治兵欲何為乎?」嚭對曰:「越蒙大王賜地,非兵莫守。夫治兵,乃守國之常事,王何疑焉?」夫差終不釋然,遂有興兵伐越之意。
염선(髥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칼과 활을 훈련함은 모두 오나라를 치기 위함인데, 와신상담하여 눈물도 거의 말랐도다. 고소대에는 가무가 한창 끓어오르는데, 오왕이 황망히 묻기를 이웃 나라에 무슨 일이 있냐고 하네.” 했다. 오자서는 월왕이 군사들을 훈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부차를 뵙기를 청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월왕이 신하로 순종한다고 믿지만 지금 월나라는 범려를 써서 밤낮으로 사졸들을 훈련하여 칼과 창과 활을 다루는 솜씨가 정통하지 않은 게 없다고 합니다. 하루아침에 우리의 허점을 틈타 쳐들어오면 우리나라는 재앙을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께서 믿지 못하겠다면 어찌하여 사람을 시켜 살펴보지 않으십니까?” 하니, 부차가 과연 사람을 보내 월나라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사자가 처녀와 진음의 일을 갖추어 알고 돌아와 부차에게 보고하였다. 부차가 백비에게 말하기를, “월나라가 이미 복속했는데, 다시 군사를 훈련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백비가 대답하기를, “월나라도 대왕께서 주신 땅을 받아 군사가 없으면 지킬 수 없습니다. 무릇 군사를 훈련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보통 일인데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의심하십니까?” 했다. 부차가 끝내 마음속의 의심이 풀리지 않아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칠 생각을 했다.
話分兩頭。再說,齊國陳氏,世得民心,久懷擅國之志。及陳恒嗣位,逆謀愈急,憚高國之黨尚眾,思盡去之。乃奏於簡公曰:「魯鄰國而共吳伐齊,此仇不可忘也。」簡公信其言。恒因薦國書為大將,高無平宗樓副之,大夫公孫夏、公孫揮、閭丘明等皆從。悉車千乘,陳恒親送其師。屯於汶水之上,誓欲滅魯方還。時孔子在魯,刪述《詩》《書》。一日,門人琴牢字子張,自齊至魯,來見其師。孔子問及齊事,知齊兵在境上,大驚曰:「魯乃父母之國,今被兵,不可不救!」因問群弟子:「誰能為某出使於齊,以止伐魯之兵者?」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제나라에서는 진씨(陳氏)들이 대대로 민심을 얻어 오랫동안 국정을 제멋대로 할 뜻을 품었다. 진항(陳恒)이 자리를 물려받기에 이르러, 역적모의가 더욱 급하게 되었으나, 고씨와 국씨의 무리가 아직 많아서 그들을 모두 없애버리려고 생각했다. 이에 진항이 제간공(齊簡公)에게 아뢰기를, “노나라는 이웃 나라이지만, 오나라와 함께 우리나라를 쳤습니다. 그 원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제간공이 그 말을 믿었다. 진항은 국서(國書)를 대장으로, 고무평(高无平)과 종루(宗褸)를 부장으로 천거하고, 대부 공손하(公孫夏), 공손휘(公孫揮), 여구명(閭丘明) 등을 모두 종군하게 했다. 전차가 모두 천 대이고 진항이 친히 그 군사를 환송했다. 제나라의 군사들은 문수 가에 주둔하면서 노나라를 멸하고 돌아갈 것을 맹세했다. 그때 공자는 노나라에 있으면서 <시경>과 <서경>을 정리 기술하고 있었다. 하루는 문인 금뢰(琴牢)가 자는 자장(子張)인데, 제나라부터 노나라에 이르러 그 스승을 뵈었다. 공자가 제나라의 사정을 물어서 제나라의 군사들이 노나라의 경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자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노나라는 곧 부모의 나라인데, 지금 침략을 받게 되었으니 내가 구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하고, 인하여 여러 제자에게 묻기를,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제나라에 사자로 가서 노나라를 치려는 군사를 멈추게 하겠느냐?” 했다.
子張子石俱願往,孔子不許。子貢離席而問曰:「賜可以去乎?」孔子曰:「可矣。」子貢即日辭行,至汶上,求見陳恒。恒知子貢乃孔門高弟,此來必有遊說之語,乃預作色以待之。子貢坦然而入,旁若無人。恒迎入相見,坐定,問曰:「先生此來,為魯作說客耶?」子貢曰:「賜之來,為齊非為魯也。夫魯,難伐之國,相國何為伐之?」陳恒曰:「魯何難伐也?」子貢曰:「其城薄以卑,其池狹以淺,其君弱,大臣無能,士不習戰,故曰『難伐』。為相國計,不如伐吳。吳城高而池廣,兵甲精利,又有良將為守,此易攻耳。」
자장(子張)과 자석(子石)이 모두 가기를 원하였으나 공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자공(子貢)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자에게 묻기를, “제가 가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너라면 될 것이다.” 했다. 자공이 그날로 공자에게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떠나 문수(汶水) 가에 가서 진항에게 접견을 청했다. 진항은 자공이 공자의 문인들 가운데서 학식이 뛰어난 제자임을 알고 이렇게 자공이 찾아온 것은 틀림없이 자기를 설득하기 위해서라고 짐작했다. 진항은 이에 미리 엄숙한 기색을 하고 그를 대했다. 자공은 태연히 들어가서 옆에 사람이 없는 듯했다. 진항이 맞이하여 서로 보고 자리에 앉아 묻기를, “선생께서 이렇게 오신 것은 노나라를 위해 나를 설득하려는 것이지요?”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제가 온 것은 제나라를 위해서지 노나라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무릇 노나라는 정벌하기 어려운 나라인데 상국은 어찌하여 정벌하려고 합니까?” 했다. 진항이 말하기를, “노나라가 어찌하여 정벌하기 어려운 나라입니까?”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노나라는 성이 보잘것없고 높이가 낮으며 그 해자(垓字)는 좁고 얕습니다. 노나라의 군주는 유약하고 대신들은 무능하며 군졸들은 싸움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그 때문에 정벌하기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상국의 계획을 위해서는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낫습니다. 오나라는 성이 높고, 해자가 넓으며, 병사들은 정예하고 병장기는 날카롭습니다. 또한 훌륭한 장수들이 지키고 있으니 이래서 공격하기 쉽습니다.” 했다.
恒勃然曰:「子所言難易,顛倒不情,恒所不解。」子貢曰:「請屏左右,為相國解之。」恒乃屏去從人,前席請教。子貢曰:「賜聞『憂在外者攻其弱,憂在內者攻其強。』賜竊窺相國之勢,非能與諸大臣共事者也。今破弱魯以為諸大臣之功,而相國無與焉,諸大臣之勢日盛,而相國危矣!若移師於吳,大臣外困於強敵,而相國專制齊國,豈非計之最便乎?」陳恒色頓解,欣然問曰:「先生之言,徹恒肺腑。然兵已在汶上,若移而向吳,人將疑我,奈何?」子貢曰:「但按兵勿動,賜請南見吳王,使救魯而伐齊,如是而戰吳,不患無詞。」
진항이 버럭 화를 내며 말하기를, “그대가 말하는, 어렵고 쉽다는 것은 거꾸로 실정에 맞지 않으니 내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청컨대 좌우를 물리쳐 주시면 상국을 위하여 해명해 드리겠습니다.” 했다. 진항이 이에 시종들을 물리치고 앞으로 다가앉으며 가르침을 청했다. 자공이 말하기를, “제가 듣기에 ‘우환 거리가 밖에 있는 자는 약한 것을 공격하고, 우환 거리가 안에 있는 자는 강한 것을 공격한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가만히 상국의 형세를 살펴보니, 능히 여러 대신과는 함께 일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허약한 노나라를 깨뜨려서 여러 대신의 공으로 삼으면, 상국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 대신의 세력이 날로 융성하면 상국은 위태로워집니다! 만약 군사를 옮겨 오나라를 공격한다면, 대신들이 바깥에서 강적으로 곤란해져서 상국께서는 제나라에서 전제할 수 있게 됩니다. 어찌 이것이 가장 편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진항의 안색이 풀어지며 흔연히 묻기를, “선생의 말씀은 제 폐부를 뚫었습니다. 그러나 제나라 군사가 이미 문수 가에 주둔하고 있는데 만약 군사를 이동시켜 오나라를 향한다면 사람들이 장차 나를 의심할 것이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다만 군사들을 움직이지 마시고, 제가 남쪽으로 가서 오왕을 뵙고 그로 하여금 노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제나라를 정벌하게 하면, 이같이 해서 오나라와 싸우게 되니 말이 없을 것이고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했다.
陳恒大悅,乃謂國書曰:「吾聞吳將伐齊,吾兵姑駐此,未可輕動,打探吳人動靜,須先敗吳兵,然後伐魯。」國書領諾,陳恒遂歸齊國。再說,子貢星夜行至東吳,來見吳王夫差,說曰:「吳魯連兵伐齊,齊恨入骨髓。今其兵已在汶上,將以伐魯,其次必及吳。大王何不伐齊以救魯?夫敗萬乘之齊,而收千乘之魯,威加強晉,吳遂霸矣。」夫差曰:「前者齊許世世服事吳國,寡人以此班師。今朝聘不至,寡人正欲往問其罪。但聞越君勤政訓武,有謀吳之心,寡人欲先伐越國,然後及齊未晚。」
진항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국서에게 말하기를, “나는 오나라가 장차 제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소. 우리는 잠시 이곳에 주둔하며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오나라의 동정을 탐문하여 반드시 먼저 오나라 군사를 패퇴시킨 뒤에 노나라를 쳐야겠소.” 하니, 국서가 그러겠다고 했다. 진항은 즉시 제나라로 돌아갔다. 한편, 자공은 밤낮으로 달려가 동오에 이르러 오왕 부차를 만나 말하기를, “오나라와 노나라가 군사를 합하여 제나라를 정벌했기 때문에 제나라의 원한이 골수에 맺혀 있습니다. 지금 제나라의 군사들이 이미 문수 가에 주둔하여 장차 노나라를 치고 그다음에 틀림없이 오나라를 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제나라를 정벌하여 노나라를 구하지 않으십니까? 무릇 만승(萬乘)의 제나라를 패퇴시키고 천승(千乘)의 노나라를 거둔다면 그 위세가 진(晉)나라보다 강하게 되어 오나라가 마침내 패자(霸者)가 될 것입니다.” 하니, 부차가 말하기를, “전날에 제나라가 대대로 오나라를 섬기겠다고 허락하여 과인이 군사를 거두었소. 그런데 지금은 알현 사절도 오지 않으니 과인이 마침 그 죄를 가서 물으려고 했소. 다만 월왕 구천이 정사에 부지런하고 군사들을 훈련하여 오나라를 도모할 마음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과인이 먼저 월나라를 정벌한 뒤에 제나라를 쳐도 늦지 않을 것이오.” 했다.
子貢曰:「不可!越弱而齊強,伐越之利小,而縱齊之患大。夫畏弱越而避強齊,非勇也﹔逐小利而忘大患,非智也﹔智勇俱失,何以爭霸?大王必慮越國,臣請為大王東見越王,使親櫜鞬以從下吏何如?」夫差大悅曰:「誠如此,孤之願也。」子貢辭了吳王,東行至越。越王句踐聞子貢將至,使候人預為除道,郊迎三十里,館之上舍,鞠躬而問曰:「敝邑僻處東海,何煩高賢遠辱?」子貢曰:「特來弔君!」句踐再拜稽首曰:「孤聞『禍與福為鄰。』先生下弔,孤之福矣,請聞其說。」
자공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월나라는 약하고 제나라는 강합니다. 월나라를 치는 이익은 작고, 제나라를 놓아주는 근심은 큽니다. 무릇 약한 월나라를 두려워하고 강한 제나라를 피하는 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작은 이익을 좇아 큰 근심거리를 잊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와 용기를 모두 잃고서 어떻게 패권을 다투겠습니까? 대왕께서 반드시 월나라가 걱정되신다면 제가 대왕을 위해 동쪽으로 가서 월왕을 뵙고 그로 하여금 친히 활집과 화살통을 메고 종군하는 관리로 따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부차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진실로 그렇게 한다면 내가 원하는 바이오.” 했다. 자공이 오왕 부차를 하직하고 동쪽으로 가서 월나라에 이르렀다. 월왕 구천이 자공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후인(候人 ; 척후나 영송 담당)을 시켜 미리 길을 쓸게 하고 성 밖 30리까지 나가 맞이하여 좋은 관사에 묵게 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묻기를, “우리나라는 동해의 구석진 곳에 있는데, 무슨 일로 고상하고 현명하신 선생께서 멀리까지 오셨습니까?”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특별히 와서 군주를 조문합니다!” 했다. 구천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묻기를, “제가 들으니 ‘재앙과 복은 이웃한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조문하는 것은 저의 복입니다. 청컨대 그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했다.
子貢曰:「臣今者見吳王,說以救魯而伐齊,吳王疑越謀之,其意欲先加誅於越。夫無報人之志,而使人疑之者,拙也﹔有報人之志,而使人知之者,危也。」句踐愕然長跪曰:「先生何以救我?」子貢曰:「吳王驕而好佞,宰嚭專而善讒,君以重器悅其心,以卑辭盡其禮,親率一軍,從於伐齊,彼戰而不勝,吳自此削矣﹔若戰而勝,必侈然有霸諸侯之心,將以兵臨強晉,如此,則吳國有間,而越可乘也。」句踐再拜曰:「先生之來,實出天賜。如起死人而肉白骨,孤敢不奉教!」
자공이 말하기를, “제가 지금 오왕을 뵙고 노나라를 구하기 위해 제나라를 정벌하기를 설득하니, 오왕은 월나라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먼저 월나라를 정벌하여 대왕을 죽이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릇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사는 일은 못난 짓입니다. 원수를 갚고자 하는 뜻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니, 구천이 깜짝 놀라 공손히 꿇어앉아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어떻게 저를 구해 주실 것입니까?” 했다. 자공이 말하기를, “오왕은 교만하고 아부를 좋아하며, 백비는 세도를 부리고 아첨을 잘합니다. 대왕께서는 귀중한 보물로 태재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공손한 말로 예를 갖춘 후에 친히 한 무리 군사를 거느리고 오왕을 따라 제나라를 치십시오. 오나라가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오나라는 스스로 깍이는 것이며, 만약 오나라가 이기면 반드시 잘난 체하여 제후에게 패권을 휘두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장차 군사들을 강한 진(晉)나라로 향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나라에는 틈이 생길 것이고 월나라는 그 틈을 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구천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선생이 온 것은 사실 하늘이 보내준 것입니다. 마치 죽은 사람을 살려서 백골에 살을 붙여 준 것과 같습니다. 제가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했다.
乃贈子貢以黃金百鎰,寶劍一口,良馬二匹。子貢固辭不受。還見吳王,報曰:「越王感大王生全之德,聞大王有疑,意甚悚懼,旦暮遣使來謝矣。」夫差使子貢就館,留五日,越果遣文種至吳,叩首於吳王之前曰:「東海賤臣句踐,蒙大王不殺之恩,得奉宗祀,雖肝腦塗地,未能為報!今聞大王興大義,誅強救弱,故使下臣種,貢上前王所藏精甲二十領,『屈盧』之矛,『步光』之劍,以賀軍吏。句踐請問師期,將悉四境之內,選士三千人,以從下吏。句踐願披堅執銳,親受矢石,死無所懼。」
구천은 즉시 자공에게 황금 백 일과 보검 한 자루, 좋은 말 두 필을 주려고 했다. 자공은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돌아와서 오왕을 뵙고 보고하기를, “월왕이 대왕께서 살려준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대왕께서 의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송구하게 생각한 나머지 조만간에 사자를 보내어 사죄한다고 했습니다.” 하니, 부차가 자공으로 하여금 역관에 머물게 했다. 5일이 지나자 월나라에서 과연 문종을 오나라에 보내어 부차를 배알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월왕의 말을 전하기를, “동해의 미천한 신하 구천이 대왕께서 죽이지 않고 살려주신 은혜를 입어 종사를 받들고 있으니, 비록 간과 뇌를 땅에 바른다 한들 능히 그 은혜를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대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키어 강포한 자를 주살하고 약한 자를 구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신하인 문종으로 하여금 저희가 소장한 견고한 갑옷 20벌과 굴로(屈盧)라는 창과 보광(步光)이라는 검을 대왕께 바쳐 군관에게 축하하라고 했습니다. 구천이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묻사오니 장차 월나라 방방곡곡에서 뽑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원정에 종군하겠습니다. 구천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어 친히 화살과 돌을 맞으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夫差大悅,乃召子貢謂曰:「句踐果信義人也。欲率選士三千,以從伐齊之役,先生以為可否?」子貢曰:「不可。夫用人之眾,又役及其君,亦太過矣。不如許其師而辭其君。」夫差從之。子貢辭吳,復北往晉國,見晉定公,說曰:「臣聞『無遠慮者,必有近憂。』今吳之戰齊有日矣。戰而勝,必與晉爭伯,君宜修兵休卒以待之。」晉侯曰:「謹受教。」比及子貢反魯,齊兵已為吳所敗矣。
부차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자공을 불러 말하기를, “구천은 과연 신의 있는 사람이오. 그가 군사 3천 명을 뽑아 제나라 정벌군에 종군시키겠다 합니다. 선생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그것은 안 됩니다. 무릇 남의 군사를 쓰고, 또 싸움에 그 군주까지 동원한다면 역시 너무 지나친 일입니다. 군사만 허락하고 그 군주는 사양하는 게 좋습니다.” 했다. 부차가 그 말을 따랐다. 자공이 오나라에 작별을 고하고 다시 북쪽으로 진(晉)나라에 갔다. 진정공(晉定公)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앞날을 길게 내다보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오나라는 제나라와 싸우는 날이 올 것입니다. 싸워서 이기면 반드시 진(晉)나라와 패권을 다툴 터인데 군주께서는 마땅히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휴식하게 하여 대비하십시오.” 하니, 진정공이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했다. 자공이 일을 마치고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 제나라 군사는 이미 오나라 군사에게 패배한 뒤였다.
不知吳如何敗齊,再看下回分解。
오나라는 어떻게 제나라를 패배시켰는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다시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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