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시골집을 장만했다. 울도 담도 없어 문만 열면 산과 들이 모두가 내 것이 되는, 손전화도 안 터지고 인터넷도 설치 불가능한 산골 오지마을의 농가주택이다. 한 개 리(里)에 세 개의 자연 부락, 겨우 열두 가구가 사는 깊은 산속이지만, 높은 곳에 집이 우뚝 자리해서 한눈에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무엇보다도 문명의 이기(利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마음에 쏙 든다. 집이래야 스무 평 남짓한 조립식 창고 건물에 화장실과 방 두개 들인 것을 우리 가족은 이 곳 행정구역 이름을 따서 가양재라고 부른다.
그리고 봄내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 와서 푸른 숲으로 먼지 낀 눈과 귀를 씻어내고, 쑥갓과 상추도 가꾸며, 고사리도 꺾어 말리면서 호사를 누렸다. 다만, 나는 휴식처지만 이곳 주민들은 적극적인 삶터인데, 도시 생활에 찌든 내가 어쩌면 이 맑은 마을을 오염이나 시키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될 때가 있다.
도시의 아침은 신문 배달부나 우유 배달부가 열고, 산골의 아침은 산새들이 연다. 아무리 굳게 잠겼던 어둠의 빗장도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스르르 열리고 만다. 부지런쟁이 뻐꾸기들이 이산 저산 다니며 기상나팔을 불어대자, 비리리릭 비리리릭, 비배쫑 배쫑, 깍깍깍깍, 소쩍소쩍, 산속 식구들이 기지개를 켜며 다투어 마을로 내려온다.
앞산 중턱에 안개가 드문드문 걸린 새벽 아침이다. 그 분이 일어났으려나, 눈을 비비며 커튼을 열었다. 어젯밤 그는 만취 상태라 남편이 집까지 부축해 모셔다 드릴 정도였으니 쉬이 못 일어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몸보다는 마음이 더 괴롭고 무거워서 자리를 털지 못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아직 어둑어둑해서 물체가 잘 보이지도 않는데 자꾸 그 분네 밭으로 눈이 간다. 긴 배추 이랑을 따라다녀 보아도, 저 건너 산 아래 고추밭에도 빨간 모자는 끝내 보이지 않는다. 부지런한 분이라 여느 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볕이 제법 짱짱하던 지난 오월, 아기 배추가 사열 받는 군인처럼 줄 지어 선 배추밭에서 빨간 모자에 분홍 고무줄 바지를 입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농부가 있었다. 올 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런 모습을 보고 연극 무대의 피에로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 50 후반으로 정씨 성을 쓰시며 다니던 회사를 퇴직한 후 서울에 부인과 아들을 두고 혼자 이곳에 내려와 농사짓는다는 것도 차차 알게 되었다. 그 후 언제부턴지 가양재에 도착하면 빨간 모자가 어디 보이나 빙 둘러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는 모종할 때는 물론 배추가 자라나면서 인근 여러 배추밭 중에서 자기네 배추가 가장 실하다며 자못 기대가 컸다. 그런데 엊저녁, 우리를 붙잡고 그는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봄부터 1000여 평에 심어 길러온 배추가 어제 밭뙈기로 팔렸는데, 그 값이 겨우 120만원이라고 한다. 소비자는 한포기에 1500원씩 사야하는 배추를 생산자는 반에 반값도 못 건진다며 그래도 자기는 팔기나 했지, 다른 사람들은 잔류농약검사에 걸려 그냥 뽑아서 내버리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농약을 안 하면 배추가 병이 나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고, 농약이 좀 세다 싶으면 검사과정에서 걸리니 농부들만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다. 두 달 동안 밤도 낮도 없이 애지중지 노심초사 길러온 배추를 제값도 못 받고, 피땀 흘린 보람도 없이 헐값에 넘겨버리자니 헛김 빠져서 농사 못 짓겠다며 밤이 이슥하도록 하소연을 했다.
농업이 생계수단인데 그 허탈한 심정이 오죽할까? 고단한 몸과 마음을 누이고 싶어 여기 오는 우리는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가양재에 오는 주말이면 그 분이 가로등 불빛아래서 봄 가뭄에 물을 대거나 비료를 주기도 하며, 분무기를 짊어지고 농약 뿌리는 것을 종종 보았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만 있어도 이렇게 힘이 빠지지 않을 거라며 눈물까지 흘리는데, 더 보기 민망해서 밖으로 나왔다. 더도 덜도 말고 노력한 대가 만큼만을 바란다는데 그게 그리 어렵다니, 이러니 모두들 농촌이 싫어 떠나갈 밖에. 하늘엔 별이 총총 빛나고, 앞산 뒷산에서는 소쩍새가 구성지게 울어댄다. 소쩍 소쩍, 솥 작다 솥 작다. 솥 작아서 밥 못 먹는 며느리나 농사지어 제값 못 받는 농부나 매한가지로세. 소쩍소쩍, 솥 작다 솥 작다...... .
한나절이 넘도록 정씨 아저씨가 안보이자 병이 나도 단단히 난거라고 창밖을 함께 바라보던 남편도 한마디 한다. 그런데, 문득 바라본 저 건너편 고추밭에 빨간 모자가 아른거린다. 이제 됐다, 어제의 절망을 털어내셨구나. 남편과 함께 맥주를 꺼내들고 집을 나섰다. 개구리 소리 요란한 논둑길을 지나, 뿌리째 뽑혀 가로누워 버린 양버짐나무 등걸 다리를 건너 정씨 아저씨가 계신 밭으로 가자, 자갈 반, 흙 반인 밭에는 고추모 옆으로 새하얀 비료가 한 줌씩 얹혀 있다. 아직 한 뼘 밖에 안자란 고추가 벌써 열매 시작을 알리는 방아다리 고추를 매달고 있는 게 여간 신기하지 않다.
아저씨는 비료를 얹으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왕의 무덤처럼 큰 저 돌산이 이 밭의 자갈을 주워 쌓은 것이라며 소리 내어 웃는다. 맥주를 마시는 아저씨 얼굴에서 희망이 고추밭 고랑의 빛나는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어둠 속에서 불씨가 더 선연히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서 더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이즈음 여기 산골 마을은 눈 두는 곳마다 한 폭의 실경산수화다. 푸른 산이 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분의 작품이라면, 초록으로 수놓은 이 들판은 저런 농부들이 온몸으로 치열하게 빚어낸 작품이다. 산수화 속에서 소쩍새가 장단 맞춰 울어댄다. 소쩍 소쩍, 힘내라 소쩍, 괜찮다 소쩍...... . 소쩍새 소리 깊어가는데, 어둠이 어느새 노을을 따라 훌쩍 산을 넘는다. (2005.6)
첫댓글'솥 작아서 밥 못 먹는 며느리나 농사지어 제값 못 받는 농부나 매한가지로세. 소쩍소쩍, 솥 작다 솥 작다...... .' 가슴 아프군요. 하늘나리님의 글 내용이 참 곱습니다. 예쁜 마음이 보여요.^^ 저도 같이 울어 볼까요. 아니 노래 부를게요.^^* '소쩍 소쩍, 힘내라 소쩍, 괜찮다 소쩍...... . ' 좋은 글 고맙습니다!
도시에 사면서도 목가적인 싦을 즐기기 위해서 가양재를 마련하신 님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어쨋거나 여유로운 삶이라 여겨져 부럽기도 하군요 후기산업사히 농업이 맥을 못추는 현실의ㅡ현장에서 농민들의 고뇌를 이해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네요 지연을 즐기는 시간 많이 가지세요 좋은글 감사해요
첫댓글 '솥 작아서 밥 못 먹는 며느리나 농사지어 제값 못 받는 농부나 매한가지로세. 소쩍소쩍, 솥 작다 솥 작다...... .' 가슴 아프군요. 하늘나리님의 글 내용이 참 곱습니다. 예쁜 마음이 보여요.^^ 저도 같이 울어 볼까요. 아니 노래 부를게요.^^* '소쩍 소쩍, 힘내라 소쩍, 괜찮다 소쩍...... . ' 좋은 글 고맙습니다!
'소쩍 소쩍, 힘내라 소쩍, 괜찮다 소쩍....... .'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농부들에게 들려드리고 싶네요.
솥작다고 소쩍소쩍 운다던가요?? 나리님 예쁜 마음이 넘 좋으네요.^^ 힘내세요 소쩍!~
오늘아침에두 밤값이 너무 없어서 차라리 수확을 포기 한다는 뉴스를 들었었는데... 그래두 힘내시라고 저도 소쩍~
졸고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엊그제엔 그 정씨 아저씨를 만나고 왔어요. 팔뚝만한 고구마를 가져오셨더라구요.
세상 무엇이든 모두 다가 좋을 수는 없는듯 산수가 빼어나고 물 . 공기 좋으면 그 곳이 외롭고, 도시는 휘황하기는 하나 달도 별도 부옇고... 가양재가 좋은 주인을 만났군요.
애쓰는 기쁨을 아시는 분들이 계시니까 농촌을 생활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도시에 사면서도 목가적인 싦을 즐기기 위해서 가양재를 마련하신 님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어쨋거나 여유로운 삶이라 여겨져 부럽기도 하군요 후기산업사히 농업이 맥을 못추는 현실의ㅡ현장에서 농민들의 고뇌를 이해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네요 지연을 즐기는 시간 많이 가지세요 좋은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