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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1]
살며생각하며
한울님이 축복하는 새해를 기대하면서
수암 김응조_선도사
어느덧 한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하고 보니,
문득 오래 전에 가수 나훈아가 불렀던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라는 노래가사가 생각난다.
되돌아보면 지난해는
우리 사회가 통합의 리더십이 실종되고
갈등과 국론분열로 얼룩진 채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는, 한마디로 혼돈스럽고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다.
더구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계가
국민보다 자기네의 권력을 거머쥐기 위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인해 국가기강과 사회규범에
균열이 생기면서 서민들의 불안이 가중되었다.
이처럼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나훈아의 노래가사처럼
세월은 고장없이 흘러가게 마련이고,
서민들은 그 너머로
임인년의 밝은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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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의 갈림길에 들어선 임인년
우리나라는 과거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불과 반세기를 넘기는
짧은 기간에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부국을 이룩한데 대해 세계가 경탄하고 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국가지도자가 등장하여
국가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 우리나라 정치계와 사회 일각에서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면서
국가의 정체성이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더구나 6·25사변을 도발하면서 기습남침하여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국토를 초토화시킨 북한에
동조 아부하는 일부 계층을 보게 되면
과연 우리나라가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국가인지 혼란에 빠질 때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념적 갈등과
아울러 현정권이 우리 국체를
자유민주주의로 기술한 역사교과서에서
‘자유’를 삭제하고
단순히 민주주의로 기술하도록 바꾼 것을 보면
국가적 정체성이 변질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올해 100세를 넘긴 김형석 교수는
“21세기는 열린사회로 가느냐 폐쇄사회로 가느냐가
중요한 선택이 됐다”고 말하면서
열린사회는 행복하게 자유를 누리지만
폐쇄 사회는 자유를 상실한다며 북한을 예로 들었다.
아울러“불행하게도 현정권은 촛불혁명을 내세우면서
좌파적 이념정치를 정책화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이념정권은 예외 없이 국민을 위한 정치보다
정권을 위한 정치를 하기 때문에
국민들을 전례 없는 분열과 대립으로
몰아넣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를 떠나 대한민국다운 위상까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국민 아닌 정권을 위한 정치를 하면 안된다.
법치국가는 권력이 법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역행”이라고 말했다.
법은 윤리 도덕을 기초로 한다.
따라서 법이 정의와 공정을 외면하고
권력의 시녀로 전락할 때 그 사회는
무규범의 악순환에 빠져 내로남불이 횡행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으로 자기 도그마에 빠진
무분별한 지도자를 경계하게 된다.
옥스포드대의 저명한 경제학자 폴 콜리어 교수는
지난해 12월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지난 70년 사이 가난을 벗어나
OECD 회원국으로 성장한 유일한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사회가 단합해
함께 일하면서 변화할 수 있었다. 참 역동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공동체의 실패로
개인주의적인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잘못되고 있다.
너무나 비극적이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동귀일체가 실종되고
각자위심의 개인주의사회로 변모하면서
발전적인 동력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의암성사가 일본에서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천도교 현도 후 포덕 47년(1906) 1월에 환국하자
부산에 환영인파가 모여들었다.
그중에 훗날 3·1운동의 민족대표가 된 이종훈이
의암성사에게
“선생께서 다년간 해외에 체류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이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의암성사께서
“한울을 뜯어고치기 전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고 생각하오”라고 대답하셨다.
이종훈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머뭇거리자
의암성사께서 “내가 말하는 한울은
푸른 하늘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곧 한울이니
사람의 마음을 바로 고치기 전에는
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뜻이오”라고 하셨다.
지금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보면서
의암성사의 그 말씀이 가슴 깊이 울려나온다.
비록 현재 불가항력적인 코로나 사태와
정치적인 혼란으로 일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우리나라는 과거
배고픈 보릿고개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수십년에 걸쳐 태평성대를 이어왔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과 대규모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난민들이 넘쳐나고 있는 사태를 감안할 때
그동안 우리나라가 누렸던 태평성대가 실로
한울님이 내려주신 축복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금년 3월의 대통령 선거가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 모두가 태평성대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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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귀일체는 성盛하는 길이요 각자위심은 쇠衰하는 길
임인년 새해는 우리 교단 역시
진운進運의 갈림길에 들어선 중요한 해이다.
아시다시피 올 3월의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교령을 비롯한 중앙총부 임원진이 새로 개편되고
3년 임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교령으로 선출되느냐가 아니라
새로 구성되는 교단 지도부가 앞으로 침체된 교단을
발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교단 체제상 3년이라는 짧은 임기 안에
교단중흥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실질적으로
교단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조성에 역점을 두고
혁신적인 체제 및 제도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해월신사께서
“대저 도는 용시용활하는데 있나니
때와 짝하여 나아가지 못하면
이는 죽은 물건과 다름이 없다”고
경고하신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한다.
따라서 혁신적으로 체제와 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스승님의 말씀대로 우리 교단이 시대와 더불어
나아갈 수 있는 기초적인 기반조성을 위한
시급한 과제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여기에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전문교역자제도이다.
우리 교단은 한마디로
전문적인 종교교육을 전수專修한 교역자가 없는
아마추어 교단이나 다름이 없다.
과거 의암성사 시대에는 전국에
8백여개소가 넘는 교리강습소와
중앙에 사범강습소를 두고 전문교역자를 양성했다.
그런데 지금은 교인들의 신앙교육을 담당하는
기초적인 교육기관마저 한군데도 없다.
오늘날은
전문가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전문화시대이다.
뿐만아니라 AI를 비롯한 첨단기술이
세상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면서
인간의 의식구조마저 달라지고 있다.
이런 시대와 더불어 나가기 위해서는
전문화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다.
따라서 정성만 가지고 교단을 운영하던
고전적인 체제에서 탈피하여 비록 때가 늦었지만
지혜를 모아 전문교역자 양성을 비롯해서
교단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교단의 개혁적인 제도개선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천도교는 본질적으로 개벽하는 종단이다.
우리 교단은 3.1운동을 주도한 후
엄청난 피해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을 표방하면서
당시 우리 사회의 신문화운동을 선도해나갔다.
뿐만아니라 과거 은도시대에 선열 도인들은
도산검수刀山劍水의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희생적인 헌신을 통해 교단발전을 이룩해왔다.
이를 감안한다면 교단체제와 제도를
혁신적으로 개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다만 여기에는 기득권과 사심을 배제하고
제도개선에 대한 확고한 결의 아래
동귀일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왜냐하면 과거 우리나라 최대의 종단이었던 천도교가
침체하게 된 일차적 원인이 동귀일체를 도외시한
신구파분규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침체의 원인이
일제의 압제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 교단이 이른바 3백만 대종단으로 발전한 시기가
일제치하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신구파분규는 의암성사가 환원하신 후 발생했다.
1926년 1월에
신파와 구파로 분립하여 시작된 1차 분규는
1930년 12월에 합동되었다가
1932년 4월에 2차 분규가 일어나
1940년 4월에 2차 합동이 이루어진 후
1945년에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이 되었으면
그동안 침체된 교단중흥에
박차를 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해 5월에 다시 3차 분규가 일어났고,
1948년 4월에 3차 합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신구파 분규는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가운데
장장 20여 년 간이나 지속되면서
스스로 교단을 침체의 늪으로 빠지게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해방 후 남북분단으로
절대다수의 북한교세가 침몰하는 가운데서도
1976년 1년 동안 명분없는 교단분규가 다시 일어나
당시 최덕신 교령이 월북하는 등
신문지상에 교단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면서
교세는 계속 침체국면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여기서 한가지 과거 신구파 분규로 몰락한
강계江界대교구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평안북도에 위치한 강계교구는
천도교가 현도된 후 1906년 10월에 설립된 이래
1914년 7월에 후창군·자성군과
만주 임강현의 4개 군교구까지 관할하는
대교구로 승격하였다.
이처럼 교세가 팽창하자 1918년에
대지 4천 평을 매입하여 1만 여 원의 공사비로
한식으로 된 교당 70칸을 신축하였다.
이 교당은 당시 강계읍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3.1운동 당시에는
17,700원의 독립자금을 모금한 바 있는 강계대교구는
1921년에 중일학원中一學院을 설립하여
중학교 과정의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관내 각 면에 8개소의 강습소를 개설 운영하는 등
계속 발전을 이어갔다.
그처럼 역동적인 모습을 보였던 강계대교구였으나
신구파의 교단 분규로 인해 완전히 퇴락하게 되었다.
그 과정을 환원하신 오근(吳槿, 본명 吳允珍) 선생은
저서「회고와 염원」에서
다음과 같이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분규가 거듭되는 와중에서
대교구의 대지와 중일학원 2층 교사가 처분되었고,
70칸의 대교당은 풍우에 퇴락되었으며,
교구에 상주할 한 사람의
경비조차 마련하기 어렵게 되었다.
파벌에 휩싸인 교인들은
서로 비방·음해·중상을 하는 가운데
이단자, 배신자가 되었고,
교구의 간부나 연원주들의 지역 순회는
교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흡사 전투를 하러 나가는 것 같았다.
이처럼 대교구가 혼란에 빠지자
사회적 신망마저 떨어져
그동안 지역사회의 중요행사에 빠짐없이 초청되었던
천도교의 존재는 점차 사라져갔다.
그 후 중앙에서 신구파가 합동되어
분규가 끝났다고는 하였으나 그것은
중앙의 사무적인 합동에 그칠 뿐
지방 교인들간의 누적된 감정은
그렇게 간단히 치유될 수 없었다.
어찌 이것이 사인여천을 표방한
천도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동귀일체는 성盛하는 길이요
각자위심은 쇠衰하는 길’이라고 교시하신
스승님의 경고를
거듭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강계가 고향인 오근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 강계지국장을 역임하였고,
해방 후 월남하여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대한공론사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1948년 3월의
남북분열저지운동(일명 3.1재현운동) 당시에는
북한에 밀사로 파견된 부인 유은덕 여사가 체포되어
희생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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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처럼 승기운乘其運하는 해가 되어야
대신사께서는 ‘교훈가’에서
“운수야 좋거니와 닦아야 도덕이라.
너희라 무슨 팔자
불로자득 하단말가”라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전국대회에서 선출된 교령은
예외없이 교단중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다짐은 항상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은 교단중흥을 위한 실질적인 정성이나 노력없이
불로자득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우리 스승님들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저력은
관가의 압제를 피해다니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49일기도를 시행하면서
포덕활동과 언행일치를
솔선수범하는 정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결코 불로자득이 아니었다.
그래서 의암성사를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솔선수범하는 해월신사를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것이다.
옛글에 “몸으로 가르치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하고,
말로만 가르치면 명령하여도 따르지 않는다
(以身敎之 不令而行 以言敎之 令而不從)”는 말이 있다.
여기서 지도자의 리더십은
권위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행이 일치된 공경과 믿음과
솔선수범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대신사께서 ‘도수사’에서
“위가 미덥지 못하면 아래가 의심하며
위가 공경치 못하면 아래가 거만하니
이런 일을 본다해도
책재원수責在元帥 아닐런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번 3월의 전국대회에서
말을 앞세우는 지도자가 아니라
정성과 공경과 믿음으로 솔선수범하면서
교단을 시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개혁하는 지도자가 선출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절감하게 된다.
의암성사는 포덕 51년에 6월에
교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사람의 말 가운데는 참과 거짓이 있나니
말 잘하는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지 모두 그럴듯하지만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요
입술에 발린 말이기 때문에
들을 때에는 그럴 듯이 여기면서도
그대로 믿지 않는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실지가 있고 거짓이 없으므로
듣는 사람이 감화되어 그대로 믿는 것이다.
옛날 한고조 유방이
재주는 한신과 장량만 못하였으나
능히 그들을 부렸고,
삼국시절에 유현덕은
재주는 제갈량만 못하였으나 촉한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무식해도 진실한 사람이면
두목도 될 수 있고 기관장도 될 수 있느니라.”
대신사께서도 대아大我와 소아小我를
군자와 소인으로 비유하면서
‘군자는 기운이 바르고 마음이 정해져 있으므로
천덕에 부합하고,
소인은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옮기므로
천명을 어긴다’고 하면서,
성쇠지리盛衰之理, 즉 성하고 쇠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 말씀에서 성쇠(盛衰)를 거듭한 천도교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금년 임인년은 호랑이를 상징하는 해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산군山君이라 해서
전화위복의 영물로 여겼다.
우리 교사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
해월신사께서 포덕 11년(1870)에
이필제의 영해작변으로 인해 쫓겨다니면서
한때 남의 집 머슴살이까지 하다가
강수와 같이 소백산에 숨어들어가 노숙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큰 호랑이가 나타나 당황했는데
호랑이가 사라진 후에 보니
그 자리에 동굴이 있었다.
때는 음력 9월이라
낙엽이 떨어지는 스산한 산중에서
10여 일이나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어느날
그곳을 지나가던 박용걸의 도움으로
영월군 직곡리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해월신사는
그 집에 머무는 동안 박용걸을 입도시키고
49일기도를 시행하면서
대인접물 법설을 하는 등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포덕 39년(1898) 4월에
의암성사께서 강원도 원주 전거언에서
노환으로 와병 중인 해월신사를 간호하고 있을 때
갑자기 병정 수십명이 해월신사를 체포하기 위하여
교인 권성좌를 결박하여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이때 의암성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너희들은 어떤 병정들인데
무엄하게 사대부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느냐” 하면서
권성좌를 내려치려고 하자 그가 혼비백산하여
“제가 그만 잘못 보았습니다” 하고 물러갔다.
병정들도 따라서 나가자 의암성사는
그날 밤에 김연국·임순호 등과 함께
황급히 해월신사를 가마에 모시고
송곡松谷 지평砥平 방면으로 피신길에 나섰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백설이 쌓인 험한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산 위에서 불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올라가 보았더니 호랑이의 눈빛이었다.
호랑이가 앉았던 곳에 가보니
그곳은 지평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처럼 호랑이는 기사회생을 상징하는 영물이다.
그러므로 올해 임인년 호랑이해를 맞아
침체된 우리 교단이 침체에서 벗어나
호랑이처럼 활기 있게 중흥하는 원년이 되기를
한울님과 스승님께 간절히 심고한다.
의암성사께서는
“우리 교의 인내천 대지大旨는
오만년이 다하도록 하루와 같아야 하려니와
교회의 제도에 이르러서는
시의時宜에 합류함이 가可하리니
십년에 소일변하고 백년에 중일변하고
천년에 대일변하여 항상
신면목을 나타내야 하느니라”고 강조하셨다.
따라서 임인년을 맞아 승기운乘其運하기 위해서는
교단을 새롭게 개혁하여 일신하는 것이
금년 3월의 전국대의원대회에 주어진 명제임을
우리 교인 모두가 가슴에 깊이 새겨
한울님이 축복하는 포덕 163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