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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이 빼낸 송유관 기름, 한 해 90억… 유출 휘발유 폭발, 주택가 수십 명 떼죽음
"석유다, 석유!" 1977년 3월 7일 경북 금릉군 어느 마을 땅속에서 석유가 나오기 시작했다. 온 동네 주민 100여 명은 "이게 웬 횡재냐"며 물통, 기름통에 비닐봉지까지 들고 나와 하루 종일 집으로 석유를 퍼 날랐다. 이런 난리가 3일이나 이어졌다.
하필이면 '포항 석유 발견 소동'(1976년 1월) 1년 뒤였지만, 시골 마을의 기름 소동은 유전과는 무관했다. 마을 인근 송유관의 기름 누출이었다. 절도범이 송유관을 뚫어 석유를 훔치다가 경찰 추적을 받자 그냥 놔두고 튄 것으로 밝혀졌다. 송유관 기름이 줄줄 새는데도 공권력이 개입하지 않은 사태가 며칠씩 이어졌다(동아일보 1977년 3월 9일 자). 당시 국가 중요 시설의 관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가난했던 1950년대엔 에너지의 대동맥인 송유관에 구멍을 뚫는 절도가 심심찮게 일어났다. 1955년 서울의 어떤 도둑은 송유관으로부터 자기 집까지 20m를 파이프로 연결해 꼭지를 틀면 휘발유가 콸콸콸 나오게 공사까지 했다. 간 큰 도둑은 4개월 동안이나 휘발유를 물 쓰듯 뽑아내 팔다 붙잡혔다. 언론은 '희대의 지능 절도'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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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도둑에게 뚫린 송유관의 상당수는 주한미군 시설이었다. 1957년 10월 데커 유엔군 총사령관은 "올해 미군 송유관으로부터 도난당한 휘발유가 152만6066갤런(약 578만L, 92억원어치)이나 된다"며 절도 중지를 촉구했다. 미군 경비병은 가끔 송유관 절도범을 사살했다. 1955년엔 한강변을 걷던 14세 소녀를 미군이 기름 절도범으로 오인해 발포, 중태에 빠졌다. 오늘 같으면 국민이 들고일어날 일인데 당시 신문엔 이렇다 할 비난 여론이나 미군 측의 사죄는 보이지 않는다.
송유관이 도둑에게 뚫렸든 낡아서 파열됐든 기름이 새면 재산 손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휘발유에 불이 붙어 주택가가 불바다가 되는 끔찍한 재앙이 이어졌다. 1952년부터 5년간 전국에서 송유관 파열로 일어난 화재는 47건이나 됐다. 최악의 기름 누출 화재 2건은 공교롭게도 모두 부산에서 일어났다. 1954년 4월 3일 부산 좌천동 송유관 화재 땐 38명이 숨졌고, 1957년 6월 23일 부산 수정동 미군 송유관 폭발 땐 사망자가 48명이나 됐다.
주민들이 송유관을 겁냈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송유관 화재 같은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기름 도둑질만큼은 여전하다. 전국 1200여㎞의 송유관망에서 한 해 27억원어치의 석유가 도난당하고 있다고 한다. 47년 전 미군이 송유관마다 강력한 경고문을 붙였을 때, 어느 신문은 "요즘도 송유관 도둑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경향신문 1971년 4월 24일 자). 그만큼 '배고프던 시절의 범죄'로만 여겼던 송유관 뚫기가 오늘에도 지능적 수법으로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붙잡힌 40명의 대형 절도단은 땅굴 55m를 파고 송유관 기름 15억원어치를 훔쳤다. 송유관공사 측이 첨단 탐지 장비를 도입해 보안을 강화하고 있지만 도둑들도 광산 갱도 공사 전문가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송유관공사는 '2020년까지 도유(盜油) 범죄 제로'를 선언했으나 기름도둑과의 전쟁은 아무래도 쉽게 끝내기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