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답게 사는 것은 역할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전제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깨울 수 없는 잠
변현상
나날들이 그대에겐 턱 떨리는 영하 10도
굴 깊숙이 틀어박혀 허리를 움츠린 잠
이웃이 두려웠을까 무관심이 무서웠나
한 가정을 포기한 알코올 중독자였나
불치병에 찾아드는 자연인의 입산처럼
햇볕도 걸음을 끊은 열외 된 무직자인가
동면을 위해 굴속에 든 살모사의 궤적으로
삶은 밤껍질 속이 맨 처음의 본향인 듯
벌레가 벌레답게 사는, 그 세상은 영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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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아주 무서워하는 아내는 벌레 잡는 건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릴 적 뒤에서 덮친 트라우마에 아직도 길을 걷다 개줄이 풀린 작은 강아지에 몸이 경직될 정도다. 살아가는 동안 예기치 않게 뒤에서 덮치는 불의의 일격을 우린 겪곤 한다.
시인이 표현한 ‘굴 깊숙이’에서 ‘움츠린 잠’을 자는 ‘알코올 중독자’, ‘무직자’ 혹은 ‘벌레’로 추정되는 이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한 것이 두려운 ‘이웃’ 아니면 무서운 ‘무관심’으로 추정된다. 그를 ‘영하 10도’의 ‘굴’ 속에서 허리를 움츠린 채 잠들게 한 것도....., 이는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인 소포클레스가 「아이아스」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인생이 가장 즐겁다”라며 그 옛날에도 간파했던 문구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깊은 ‘굴’에 틀어박히는 인위적 ‘수동태’로 “생각의 진격”을 멈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연인의 입산’은 사실 “자연인이라 산에 드는 게 아니고 산에 드니까 자연인”이 되는 것이겠고 “햇볕”마저 남루한 그를 쫓아가지 않고 ‘한 가정을 포기하는’ 것은 주사酒邪 속에서조차 금기어였음을 사실 모르는 바 아니다. 차라리 역설이다.
‘동면’은 이탈의 다른 표현이다. ‘살모사’의 속성처럼 높은 산을 그러니까 상류 사회를 꿈꾸지 않고 그는 밭, 가시덤불, 잡초 주변의 바위 인근, 산 중턱쯤이나 낮은 산, 말하자면 기껏해야 중산층 아니면 중류층, 서민으로 살면서 방어용 독을 ‘궤적’마다 남겼을 것이다. 즉 힘들여 ‘살모사’ 흉내를 내며 살아가면서 ‘이웃’을 의식하고 관심을 갈망하며 ‘한 가정’을 지키려는 그런 ‘불치’의 역할론을 견뎌야 했으리라.
하지만 실상, 이 족쇄에서 벗어나 홀로라도 외롭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한 그런 ‘벌레’로 살아가길 바란다. 한 여인도 두려워하지 않는 나를 닮은 무척추동물 ‘벌레’를, 똑바로 살려고 “척추”를 곧추세우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는 움츠린 잠을 자는 그를 그대, 깨우겠는가?
나답게 사는 것은 역할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전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