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개국(開國)
임오년(1882년) 5월 2일(양력), 수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 항구로 들어왔습니다. 대청제국과 조선의 합의에 따라 북양통상대신 이홍장(李鴻章)은 미 해군제독 슈펠트(Shufeldt)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초안을 마무리지었고, 이 작업을 최종적으로 끝내기 위해 자신의 심복인 마건충(馬建忠)을 인천으로 보냈습니다. 조선 측에서는 판중추부사 신헌을 전권대사로, 통리기무아문 교섭사의 김홍집을 부사로 파견했습니다. 각기 다른 계기로 김홍집의 문하에 들어갔던 젊은 6인의 인재들은 공식 수행원으로서 조약안 확정 절차를 돕게 되었죠.
마건충이 타고 온 함선 위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유학파이자 국제법 전문가였던 마건충은 능숙한 영어와 서양식 예법으로 슈펠트에게 조선 대표단을 소개했습니다. 조선에 미리견말, 즉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는 전무하다시피 했으므로, 조선은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 전체를 청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죠. 특기할 만한 사항은 슈펠트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유심히 관찰하던 김영천은 ‘수군의 도독’인 슈펠트가 고작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즉 조약의 내용이나 체결 절차에 대한 불만이었던 것이었죠.
조약 초안은 관세, 방곡령, 최혜국 대우, 치외법권, 거중조정 조항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불평등조약이긴 하나 그 내용은 미국이 일본 또는 청과 맺었던 것보다 훨씬 관대했죠. 그러나 슈펠트의 불만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대국인 청나라가 비호하고 있는 입장에, 전쟁의 승전국쯤이 아닌 다음에야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약을 강요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조선은 청의 속방”이라고 명시된 조약 전문이었습니다. 서양 국제법에 의하면 종속국은 외국과 독자적 조약을 체결할 수 없었는데, 막상 협상을 끝내놓으니 청국에서 오리발을 내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더 의아한 사실은 오히려 조선 조정에서 문제의 ‘속국 조문’ 삽입을 요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려 500년간의 쇄국을 깨고 처음 국제무대에 나서는 조선으로서는 보호막이 간절히 필요했고, 따라서 상국이자 대국인 청에게 이를 의탁했던 것이었죠. 실제로 청은 서양 열강에 맞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지키기 위해 조선의 외교를 대행하기로 했고, 조선이 최대한 많은 이익을 얻도록 조정했습니다. 이러한 관행은 미국 대표단의 심기를 거스를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일은 의외의 곳에서 풀렸습니다. 일행들은 조선과 청의 ‘특수한 관계’를 어필했고, 이는 마건충의 통역을 거쳐 슈펠트의 동양 국제질서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켰습니다. 슈펠트는 즉시 이를 “지역 관습법” 정도로 이해했고, 이로 인해 덤으로 ‘최혜국 대우’에서 청-조선 간 특혜를 배제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슈펠트는 “일본도 청과 조공책봉 관계로 얽혀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그렇지 않다는 일행의 증언을 일본의 조약개정 요구를 거절할 명분으로 얻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은 서양 세력과 첫 근대적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역시 유사한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했죠. 이 모든 과정을 상세히 전달받은 이홍장은 나름대로 흡족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조선이 정말 ‘자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지 약간의 우려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와 별개로 개항장에 색목인들이 다량 등장하기 시작했고, 개항 이후 극심한 곡가 상승 및 인플레이션에 생계가 악화된 민중들은 정부의 개화정책에 대해 더욱 큰 불만을 가졌습니다. 이는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바람을 몰고 오게 되었죠...
02. 대지의 저주받은 이여, 의군의 기(旗)를 높이 들어라!
물경 500년간의 쇄국을 끝내고 나라의 문호를 열어젖힌 조선 사회는 격렬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마치 둑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강물이 세차게 들어치듯, 개방의 범위는 작았지만 그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일본과의 조약 체결 후 곡물가격은 2-3배 가량 상승했고, 이는 전반적인 인플레이션을 초래해 민생고를 가중시켰습니다. 개항으로 인해 중앙 관료 및 상인(주로 경강 시전)계층은 이득을 보고 있었지만, 나머지 민중들은 큰 피해를 보고 있었죠. 민중의 분노는 외국인들에게 향했습니다. 마침 미국과 조약을 체결해 양인들이 하나둘씩 조선 땅에 들어왔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듯 민중들은 개화정책 자체에 대한 불만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1882년 7월 19일(음력 6월 5일), 문제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3개월간 밀린 급료를 지급받으러 갔던 무위영 소속 구식 군인들이 형편없는 수준의 미곡, 그것도 1개월치만을 배분받아 창고지기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한 것입니다. 병졸들과 구실아치들이 푸닥거리를 벌이는 것 정도야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었기에, 국왕 이형(李㷗)은 "참으로 딱하다"는 반응만을 보이며 (사건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사태 수습을 지시했습니다. 7월 22일, 문제를 감추기에 급급했던 민겸호는 소란 주동자 4인을 체포하여 가혹하게 고문한 뒤 그 중 2명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 이튿날, 주로 성저십리 지역에 집단 거주중이던 장어영 및 무위영의 병사들은 '동지'를 구명하고 자신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든 불특정다수의 '탐관오리'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대문 인근 동별영에 모여 가두시위를 시작했습니다.
다음날인 7월 23일 오전, 무위영 파총 이유하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동별영으로 향했습니다. 비슷한 기별을 받은 나머지 일행들 역시 발걸음을 재촉했죠. 그리고 이들은 무려 2-3천명을 헤아리는 군졸(과 그들의 가족들)이 동별영 마당을 가득 메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해산시키려 애쓰는 무위대장 이경하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죠. 군졸들은 무위대장 이경하 영감에게 민겸호의 소환을 요구했으나, 애초에 종2품 무관에 물과한 이경하가 당상관(종1품) 민겸호를 데려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군기시 별좌 이현이 병졸 봉급 문제 해결을 위해 호조판서를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경하는 탈주의 명분을 잡았다는 듯 자신이 가서 호판을 만나겠다고 나섰습니다.
무위대장이 말을 타고 도주하기 직전 그에게서 “민겸호에게 병졸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서찰을 받아낸 이유하는 그대로 돌변하여 무기고를 열어제꼈습니다. 병졸들의 임시 지도자격으로 나섰던 고참 허춘병은 의아해하면서도 수천에 달하는 군병들을 무장시킬 수 있었죠. 나머지 일행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하고 말았습니다. “대원위 합하를 모셔 나라를 바로잡자!”는 메시지는 매우 강력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나머지 일행들은 고민 끝에 하릴없이 흥선대원군을 향한 대의... 또는 이유하의 대의를 좇을 수밖에 없었죠. 기회의 냄새를 맡고 중간에 끼어들었던 젊은 관료 이완용 또한 재빠른 두뇌회전으로 이 대열에 낄 수 있었습니다.
이왕 역적이 되기로 했다면, 이겨야 했습니다.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이었으니까요. 젊은 엘리트 관료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자, 단순한 군란은 순식간에 ‘의병’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을 의군으로 자처한 이 군졸들은 도시 빈민 등을 흡수하여 1만을 헤아리는 규모로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박태양의 지휘를 받고 민씨 척족 및 탐관오리들의 자택을 급습하는 한편 종로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죠. 불과 수 시간만에 도성은 의군의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일본 공사관은 박태양의 조치로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김한립, 이유하, 이현, 이완용 등은 운현궁으로 향했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만나기 위해서였죠. 이하응은 매우 당당한 태도로 이들을 맞았습니다. 노회한 정치가였던 그는 일행이 자신을 찾은 이유, 이들이 군란을 의병으로 만든 이유, 자신과 이들이 연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줄줄 꿰고 있었죠. 입이 마르게 이하응을 찬양해대던 이유하, 한숨을 쉬며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이 쿠데타에 동참하게 된 이현, 그리고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하던 김한립은 어느새 운현궁 앞에 도열한 의군 제1대와 함께 창덕궁으로 향했습니다.
수천명의 ‘의군’과 이하응, 김한립, 이유하, 이현, 이완용, 박태양, 그리고 추가로 합류한 대원군의 지지파 관료들은 위풍당당하게 창덕궁 인정전 앞에 모였습니다. 이하응은 자신의 아들, 즉 조선국왕 이형을 사실상의 가택연금에 처하고 쿠데타의 완수를 선언했죠. 이하응의 장남 이재면은 좌의정, (미국과의 조약 체결 시 대표였던)신헌은 우의정, 대원군 집권시기 여러 개혁들을 주도했던 이유원 대감은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또한 병조와 선혜청에 그의 측근들을 배치해 군권과 재정을 장악했죠. 창덕궁에 숨어 자비를 구걸하던 민씨 척족과 탐관오리들은 잔혹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홍문관 교리 김영천은 동대문 밖에서 부대를 수습하던 별기군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번 쿠데타는 그 정당성이 결여된 폭거에 불과했죠. 이하응이 집권하여 개화정책을 취소하기라도 한다면, 조선은 또 다시 도탄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별기군 정령관 한성근, 우령관 김노완, 그리고 교관 호리모토 소위는 김영천에게 좌령관 대행을 맡긴 채 창덕궁으로 향했습니다. 당연히 대치가 이어졌고... 흥선대원군이 별기군과 김영천을 직접 대면하여 설득에 나섰습니다. 요지는 “이미 열어젖힌 문호를 다시 닫겠느냐” 였죠. 즉 이하응은 권력을 지향할 뿐 딱히 척화정책을 되살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뾰족한 방책이 없었던 김영천은 금상의 안전을 확인해야 하겠다며, 일단 한 발짝 물러섰습니다. 이하응은 흔쾌히 그를 인정전으로 들여보내주었고, 그는 결국 매우 쇠약한 인상의 국왕 이형을 알현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명분 없는 쿠데타’에 반대했을 뿐인 김영천은 이렇게 ‘근왕파’로 알려지게 되었죠. 아무튼 국왕의 안전을 확인한 영천은 자신의 ‘소소한 반란’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그렇게 기나긴 하루가 끝났습니다. 역사책에 임오의병 또는 임오정변으로 기록될 이 사건은 이후 매우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었죠. 흥선대원군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오군영과 삼군부를 부활시키는 대신 개화에 더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개화파를 새로운 권력기반으로 삼은 ‘늙은 여우’ 이하응은 민영익을 쫓아내고 김홍집, 박정양, 김옥균, 박영효 등을 중책에 등용했습니다.
조선의 급격한 정세변화는 청국, 일본 등 주변국을 긴장시켰습니다. 이들은 새 정권과의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하응 개화파 정권(...)은 시작과 함께 강한 태풍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03. 서쪽의 용, 동쪽의 파도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부터 조선 조정은 대일 관세 책정 및 방곡령 근거 마련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 해당 내용이 삽입되면서 일본 역시 이 요청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죠. 임오정변 이후 일본은 제국육군 총참모장 야마가타 아리토모 후작을 전권대표로 보내 조선과의 조약 개정협상에 나섰습니다. 조선 측에서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 김병시를 대표로, 협판 김홍집을 부대표로 보냈죠. 실무진으로는 최신우, 이현, 박태양의 3인이 나섰습니다.
일본 쪽에서는 관세 및 방곡령 조항을 삽입하는 대가로 공사관 경비 1개 중대의 파견을 요구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했는데, 청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더 나아가 청국의 조선 종주권을 배제해 일본의 국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죠. 조선 측의 대응은 “이들의 목적을 어느 정도 들어주는 대신 실리를 챙기는 것”이었기에, 논의는 차근차근 진전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청국 견제를 넘어 조선이 ‘자주독립국’이라는 조문을 삽입하려는 시도를 강행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청을 완벽히 배반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조선 대표단 일행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마가타는 조선을 청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막대한 당근을 제공하려 했습니다. 대규모 군사고문단, 무기 및 차관 도입 등 여러 가지가 제시되었죠. 그러나 조선은 청의 분노를 직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김영천은 인천에 도착해있던 청국 관리들을 찾아가 이 내용을 유출했고... 이는 청국 군관 원세개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더구나 일본 측이 이 협상에 임하기 직전 국왕 이형의 밀사 민영익을 만나 근왕파 쿠데타 음모를 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분위기는 더욱 기묘해졌습니다.
최신우가 이 분위기를 타고 “청국은 무슨 수를 써서든 조선을 지킬 것”이라는 문서를 위조해 야마가타에게 보여주자, 당장 청과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은 공세적 전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사관 경비의 규모는 60명 가량으로 축소되었고, 방곡령과 관세 조항이 포함되는 대신 최혜국 대우 조항이 삽입되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자주 독립국’ 조항은 조일수호조규의 내용(자주지방)을 준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렇게 조일수호조규속약, 조일무역통상장정의 두 조약문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교두보를 두게 되었고, 조선은 청의 무리한 요구를 견제할 수단을 미약하게나마 얻었습니다.
일본과의 ‘서대문 조약’이 체결된 지 두 달이 지난 계미년(1883년) 5월 17일, 이번에는 청국에서 조선과의 주종관계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를 걸어왔습니다. 이홍장의 측근이자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를 지냈던 진수당(陳樹棠), 부대표 마건충, 종사관 원세개가 자리했죠. 호위를 위해 따라온 청국 군사들은 조선 백성들에게 갖은 행패를 부리며 한껏 해이해진 군기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위압적인 분위기 하에서, 청국 대표단은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조약안을 ‘통보’했습니다.
청국의 목표는 전통적 조공책봉관계를 근대 국제법의 종속국 제도로 확정짓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맞게 조약 내용은 주찰조선각국통상교섭사의(통상사의)를 파견해 조선의 외교권을 대행하고,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명시하고 있었죠. 심지어 청국 측은 “우리는 지금 조선을 우대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죠. 이는 사실임이 밝혀졌습니다. 청의 실권자인 서태후는 조선을 마치 하나의 성처럼 여기고 있었고, 이홍장은 그나마 조선과의 신뢰관계를 확고히 하는 선에서 마무리짓고자 했던 것이었죠.
즉, 중요한 것은 조선이 청을 사대의 예로서 대한다는 신뢰를 다시금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하응 정권이 반청정책을 펼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죠. 이에 조선 대표단은 임오정변 이후 갈 곳이 없어진 수천명의 의군 병력을 대남국(베트남)에 파견한다는 안을 내세웠습니다. 청의 제2번국이었던 대남국은 프랑스군의 침탈에 시달리고 있었고, 청은 직접 개입에 앞서 흑기군(黑旗軍) 등을 동원해 대리전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이 전선에 조선군 3천명 가량이 참여함으로써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심산이었죠.
결론적으로,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결코 싸지 않은 대가였지만, 대신 조선은 귀중한 유예기간을 얻어냈습니다. 그렇게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오로지 무역에 관한 사항만을 규율했고, 조선과 청의 관계에 대해서는 결론을 짓지 않았습니다. 월남파견군의 생활과 처우를 감독할 조선인 관료로는 친국왕파(?) 김영천이 선발되었습니다. 근대식 무기와 훈련을 받고 훗날 조선군의 주력이 될 3천명의 병력은 그렇게 청국 배를 타고 낯선 땅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04. 갑신경장, 혹은 ‘흥선 유신’
갑신년(1884년)이 밝았습니다. 일본, 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 등 서양 열국들과 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서서히 관세수입을 받으며 재정을 늘리고 있었으나, 대규모 경장을 위해서 더욱 많은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임오정변 이후 권력자원이 집중되어 있을 때 최대한의 개혁을 완수해야 했으므로 모두의 관심사는 재정 마련에 쏠리고 있었죠.
크게 세 가지 의견이 대두했습니다. 박정양은 당오전 주조를, 김옥균은 차관 도입을, 그리고 김가진은 금본위제 또는 은본위제 도입을 주장했죠. 당오전이나 차관은 그 부작용이 명백한 방법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금본위제를 도입하는 안이 논의되었습니다. 문제는 조선에게는 이를 실시할 만한 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금광은 있었지만, 이를 효율적으로 채굴할 기술이 부재했습니다.
일행들은 외국의 투자를 유치해 금광을 개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의 소개로 미국에서는 “조선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미국 투자자들의 대표 격으로 영세 사업가 허버트 도슨이 찾아왔습니다. 도슨은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자’의 전형이었습니다. 전재산을 처분하고 ‘기회의 땅’ 조선에 당도한 도슨은 어떻게든 계약을 체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속한 컨소시엄에게 최소한의 이익을 보장하려면 조선 정부의 제안 정도로는 택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죠.
심지어 최신우와 목인덕(묄렌도르프)이 “극동광산개발회사”라는 독일계 페이퍼 컴퍼니에 관한 사항을 위조해 보여주기에 이르자, 도슨의 잔머리는 풀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자신에게 권한을 위임한 투자자들을 모두 배신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슨은 곗돈을 모두 횡령하여 “도슨 앤 프린스(D&P) 광업회사”를 설립하자고 제안했고, 초기 자본금으로 30만원이라는 거금(물론 자기 돈은 아닌)을 쾌척했습니다. 5년간 조선 정부와 도슨이 금광 채굴분을 6:4로 나누고, 그 이후로는 채굴수익의 20%를 영국계 홍콩상해은행(HSBC)을 통해 배당금으로 지급하는 계약이었죠. 그 외에도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도슨은 광산 노동자들과 그 자녀들을 위한 기독교계 학교 및 교회의 설립을 약속받았습니다.
금광 건을 해결한 일행들은 이하응의 다음 목표물인 왕실 재산, 즉 내수사 혁파에 나섰습니다. 김한립은 아직 재기를 노리고 있던 민씨 척족 및 각종 보수파 벌열 가문들을 습격해 그들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켰고, 김홍집과 김가진은 내수사를 내장원으로 확대개편해 그 관리주체를 왕실에서 ‘조정(정부)’으로 이관했습니다. 그렇게 임금은 순식간에 모든 자금과 권력을 잃고 완벽한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조선국왕 이형이 자신의 측근을 동원해 마지막 남은 비자금을 상해 조계지의 프랑스 은행에 이체하려 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는 완벽한 파렴치한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조정은 경장을 위한 초기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마련한 이 자금으로는 최대한의 효과를 내야 했기에, 이하응은 경장 작업의 개시를 지시했습니다. 온건파와 급진파의 타협으로, 갑신경장은 일견 속도를 조절하는 듯 보이면서도 매우 과감한 내용으로 반포되었습니다. 의정부와 6조를 폐지하고 내각을 만들었고, 궁내부를 설치해 왕실 사무와 정부 사무를 엄격히 분리했습니다. 또한 재정 사항을 탁지부로 일원화하여 내각총리대신이 탁지부 대신을 겸임케 했죠. 과거제도는 고등고시제도로 개편되었고, 중앙군은 단일화되었습니다. 징병법이 제정되었고, 근대적 경찰기관인 경무청이 신설되었죠.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사회상과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연좌제와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노비의 세습이 금지되었으며, 근대적 형법과 민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는 놀랍게도 이하응 본인이 선임되었습니다. 이는 국왕 이형에 대한 여론이 극히 악화되어 그를 허수아비로조차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으로, 왕위를 넘겼을 때를 염두한 결정이었죠. 모든 이들의 예상대로, 조선국왕 이형은 선대의 아름다운 전통에 따라 왕위를 자신의 조카인 영선군 이준용에게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양위 과정에서 이형이 ‘인아거청(引阿拒淸)’, 즉 러시아를 끌어들여 ‘친청 사대파 이하응(...)’을 몰아내려 했다는 증좌가 발견되며 모든 이들의 뒷목을 잡게 했습니다. 아무리 국제정세에 어두운 조선 관료들이라지만, 영국과 러시아가 앙숙이며 영국은 그 거대한 청국조차 무릎꿇린 세계 최강국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죠. 그렇게 ‘상왕’ 이형은 양위 즉시 사실상의 유배 및 가택연금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방년 14세의 이준용은 피휘를 위해 이름을 이준(李埈)으로 개명하고 즉위식을 치렀습니다.
조선이 과감한 경장을 통해 아슬아슬한 약진을 꾀하는 동안, 청불전쟁은 프랑스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청은 대남국의 종주권을 잃었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괴뢰국이 되었죠. 월남파견군 3천 군병들은 신식 무기 및 전술을 익혀 조선군의 최대 주력으로 떠올랐으나, 프랑스인들과 조우한 이들은 계몽 민족주의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마치 나폴레옹 전쟁 이후 러시아의 장병들이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일으켰듯, 이들은 조선의 최고무력이자 급진개혁(또는 혁명)의 기수가 될 것이었습니다.
-
경장 작업을 잘 마무리한 일행들은 견문을 넓히고 장차 조선의 앞날을 책임질 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약 5년간의 유학길을 떠났습니다. 최신우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소개장을 들고 그의 모교 뉴욕 주립대(NYU) 인문학부에 편입학했고, 영천과 유하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 2년 과정으로 입학했습니다. 한립은 독일 괴팅겐대학교 법학부에, 태양은 베를린의 육군군관학교에 진학했으며, 이현은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해군군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그 동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 명의 일행들이 어떤 포부와 사상, 능력을 지니고 돌아올 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들의 모습이 5년 전과는 몹시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번 주 계획
28일(수)
인터미션(유학) 진행 - 상시
29일(목)
메인 이벤트 3 진행 - 진행시간 협의(저녁시간으로 예상)
30일(금)
31일(토)
메인 이벤트 4 또는 팀미션 2 진행
|
@dear0904 영국이나 스웨덴도 신분제는 없지만 귀족 작위는 있지 않습니까?
@돈이 곧 진리 귀족과 귀족이 아닌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신분제 입니다...
@돈이 곧 진리 ... 명목화되고 조직화 되며 실 생활에 불이익이 있어야지만 신분제인게 아닙니다...
@렌지파일 아니... 어떻게봐도 개그인거 같은 말인것 같으면서도 중의적인데 무지하게 무섭네요... 곱씹을수록...
2화 올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