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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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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실마을 스크랩 경북 주실마을과 호은종택...조지훈 생가 있는 곳
경천애인 추천 0 조회 66 15.07.22 08: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주실마을과 시인 지훈 종택

 

포항에서 경북 봉화의 청량산으로 가는 길에 주실마을(注谷里)이 있다.

 

이곳은 경북 영양의 시인 지훈 종택이 있는 곳으로서

6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 배치도를 세워 놓았는데

지훈생가, 옥천종택, 만곡정사, 월록서당이 눈에 뜨인다.

 

 (전체 배치도)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저만치 가을 햇빛을 받고 조용하게 앉아 있다.

 

(마을 원경)

 

자갈이 깔린 소로를 따라 가면 작은 개울이 나오는데 이름하여 장군천이다.

 

(마을 가는 길)

 

작은 물고기들이 노니 왜가리 종류의 새들이 날아든다.

 

(장군천)

 

다리를 건너면 바로 마을이다.

정면 가운데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창주정사이며,

오른쪽 하단에 있는 것이 조지훈 생가 호은종택이다.

 

(근경)

 

호은종택을 먼저 찾았는데 집 앞의 논에서 벼가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가 난다.

이 논은 약 50마지기 (1만 평)으로서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조지훈의 선조

호은공 때부터 마련한 땅인데 현재까지 남의 손에 넘어 가지 않고 자손들에게 내려오고 있다.

 

(호은종택 앞 논)

 

논 바로 앞에 호은종택이라고 쓴 큰 바위가 있는 고가(古家)가 보인다.

 

호은(壺隱)’은 주실 조씨들의 시조이자, 조지훈의 선조로서

1629 (인조 7) 주실에 처음 들어와 이 동네를 일군 분의 호이다.

 

호은이란 호리병을 가지고 숨었다는 뜻인데,

정치에 염증을 느껴 은둔생활을 염두에 두고 지은 호가 아닌가 싶다. (1)

 

집터를 잡은 것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호은공이 터를 잡을 때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매가 앉은 곳에 집터를 잡았다는데

매가 앉은 곳이 늪이라서 그 늪을 메우고 집을 지었다 한다.

본래 불교에서는 늪을 메워 절을 짓는 풍습이 있었지만 일반인들이 그런 일은 매우 드물다.

아마도 호은공이 풍수에 매우 능한 사람이거나 도가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실제 조선시대 선비들은 천문, 지리에 밝아 대부분 풍수를 잘 알았다)

 

(호은종택...조지훈 생가)

 

집 대문 윗부분에는 태극 문양이 붙여져 있다.

음양의 이기(二氣)가 태극의 일원에서 생성되었고

오행으로 만물이 생성되니 태극은 만물 조화의 근원이다.

 

따라서 태극 문양은 성리학을 공부한 조선시대 선비의 집안을 대표하는 문양이 아닌가 한다. 

 

(대문...조무열씨가 집 주인)

 

 

집의 구조는 자 구조로 되어있는데

사랑채가 전면에 배치되고 안채는 뒤쪽에 위치하며 측면에는 태실 등이 있다.

 

(이러한 구조를 중국에서는 사합원 (四合院) 구조라 하는데 일반인들은 짓지 못하였다)

 

(호은종택 측면)

 

조씨 집안의 유명한 가훈이 하나 있다.

바로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가 그것인데

삼불차란 재불차(財不借), 인불차(人不借), 문불차(文不借)를 얘기한다.

 

재불차는 재물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인불차는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문불차는 글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채)

 

재물에 대해서는 앞서 얘기한 집 앞의 50마지기 논에서 나는 소출로 살아왔고

양자를 한번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자손이 귀하지 않았으며

이 작은 산골마을에서 박사가 14명을 비롯하여 조치훈 같은 문인이 배출되었으니

삼불차가 이루어져 온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 원칙을 370년간 지켜온 호은종택에서 출생한 조지훈지조론’ (2)을 말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가풍에 연유한다고 할 수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별채)

  

(안채 뒷면)

 

호은종택의 대문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작고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문필봉(文筆峰)’이다.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는 집안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자가 배출된다는 풍수설이 있다.

 

(경남 산청에 이런 문필봉이 있는데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대문에서 바라본 문필봉...가운데 뾰족한 산)

 

호은종택을 나와 옥천종택으로 향했다.

 

옥천종택은 호은공의 증손자 옥천 조덕림의 종택으로 동네의 윗부분에 위치한다.

가는 길에 이 집 저 집 담에 핀 꽃들이 정겹다.

 

 (옥천종택 가는 길의 담)

 

옥천종택은 언덕에 지은 집이라 원래의 땅 모양에 맞추어  지었는지

집은 높고 대문쪽은 낮아 대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조금 높다.

 

(옥천종택)

 

대문을 들어서면 공부를 하던 초당(草堂)이 왼쪽에 있는데

건립 당시부터 초가지붕으로 지어져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주인의 마음 씀씀이가 소박하다)

 

(초당...공부방)

 

오른쪽에 살림채가 있다.

자 형태로 지어졌는데 정면에 대청마루가 있고, 우측에 부엌이 보인다.

 

(살림채)

 

 (살림채 입구)

 

(대청...옥천고택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부엌)

 

집의 제일 우측에 사당이 있고 담 밖에 작은 우물 터가 있다.

 

(사당)

 

이 우물이 이 동네에 단 하나 밖에 없었던 유명한 것인데,

풍수적인 원리 때문에 다른 우물을 파지를 못했다.

 

이곳 주실은 배 모양 형국으로 지하수를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 것과 같은 이치로 인물이 안 나온다는 믿음에 기인한 것인데

현재도 우물이 없이 50리 떨어진 곳에서 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하고 있다.

 

(우물에 모인 아낙네들끼리 위아래가 분명하였을 것이니

집안 군기는 여기서 다 잡혔을 것이요,

대소사에 대한 안 식구들의 논의가 여기서 다 이루어졌을 것 같다)

 

(우물)

 

옥천종택 옆에 조금 높이 창주정사(滄洲精舍)’가 자리하고 있다.

옥천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인데 문중의 서원 역할을 한 곳이다.

 

(창주정사)

 

(창주정사 내부)

 

(림산서당 현판)

 

이곳에서는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이며

특히 문필봉과 그 왼쪽의 연적봉이 잘 보인다.

조씨 집안이 귀하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봉우리들이다.

 

(창주정사에서 내려다 본 마을...정면에 문필봉이 보인다)

 

 

조치훈의 시 한 수와 술에 대한 재미있는 생각을 음미하면서 탐방기를 마무리 할까 한다.

 

[낙화]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낙화 2]

 

피었다 몰래 지는
고운 마음을

흰 무리  촛불이
홀로 아노니

 지는 소리
하도 가늘어

귀 기울여 듣기에도
조심스러라.

杜鵑이도 한 목청

울고 지친 

 혼자만  들기
못내 설어라

 

 

조지훈 선생이 보는 술의 단계 [주단 (酒段)]

 

초단 (酒道) = 애주 (愛酒)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2 (酒客) = 기주 (嗜酒) 술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

3 (酒豪) = 탐주 (耽酒)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4 (酒狂) = 폭주 (暴酒)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5 (酒仙) = 장주 (長酒) 주도 삼매에 든 사람

6 (酒賢) = 석주 (惜酒)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7 (酒聖) = 낙주 (樂酒)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8 (酒宗) - 관주 (關酒)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더는 마실 수 없게 된 사람

9 (入神) = 폐주 (廢酒) 술로 인해 다른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1) 호은

원래 한양 조씨인 호은공 선대는 한양에서 거주하다가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를 만나

멸문의 위기에 처하자 전국 각지로 흩어져 피신했는데 그 후손 중 하나인 호은공이

인조 7년인 1629년에 주실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2) 조지훈의 지조론(志操論)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지조론' 1950년대 자유당 말기의 극도로 혼란하고 부패한 정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친일파들이 과거에 대한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 지도자들 마저 어떤 신념이나 지조도 없이

시대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는 세태를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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