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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4일 온고을교회 부활주일설교-황의찬 목사
행복은 제로섬게임이 아니다
마20:1~19
<제로섬 (Zero Sum Game)게임>
제가 어린 시절 어머님이 장날 시장에 다녀오실 때, 간혹 튀밥을 사오셨습니다. 튀밥이 뭔지 아
시지요? 튀밥을 한 봉지 사오셨는데, 그 튀밥을 형제들이 나눠 먹어야 합니다. 이때 형이 많이 먹
으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먹을 수 있는 튀밥이 적어집니다. 또 내가 많이 먹으면 형이 먹을
수 있는 양이 적어집니다. 만일 내가 다 먹으면, 형은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뭐라고 하지요? ‘제로섬 게임’이라고 합니다.
내가 차지하면 남이 가질 수 없고, 남이 차지하면 내가 못 가지는 상황이 ‘제로 섬’입니다.
제로 섬 게임이란 말은 원래는 경제학 용어인데, 요즘은 두루 쓰입니다.
세상에는 제로 섬 게임 원칙이 적용되는 분야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야도 있습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는 어떻습니까? 내가 오래 살면서 산소를 많이 마셨다고 해서 옆 사람이 마
실 산소가 줄어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오래 사는 것과 옆 사람이 오래 사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 합니다. 저 사람이 산소를 너무 마셔서 내가 마실 산소가 줄어들었다고 오
해하고, 저 사람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면서 숨 쉬는 것을 시샘합니다.
이러한 착각 중에서 가장 심각한 착각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제로섬이 아닌데, 제로 섬 게임으로 생각함으로써 초래되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행복”이
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제로 섬 게임’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착각합
니다. 저 사람이 행복을 많이 가져가면 내가 차지할 행복이 적어진다. -그래서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서 행복 해하니까, 마치 내 행복을 뺏
긴 것으로 착각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달라져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착각에서 벗어났는지 아직도 못 벗어났는지, 오늘 테스트 한번 해 보겠습니다.
자, ‘사 촌이 땅을 샀습니다.’
‘1번, 배 아팠다.’ ‘2번, 안 아팠다.’ ‘3번, 똑같이 기뻐해줬다’ ‘4번, 사촌이 땅 산적 없다.’
행복은 결코 제로 섬 게임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몰라요. 이 사람들은 죽
을 때까지도 몰라요. 그래서 죽을 때까지 남의 불행을 기뻐합니다. 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
지만, 대단히 평범한 진리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가르쳐 줘도 못 깨우칩니
다. 그래서 이 진리는 믿는 사람들만 아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속합니다.
예수 믿었다면 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면 남이 잘 되는 일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 아닙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할렐루야~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도 오늘날과 똑같은 착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도 농사를 많이 짓습니다. 중동지방에는 건기와 우기가 있습니다. 포도 농사는 건
기 동안에 수확을 마쳐야 됩니다. 미처 수확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가 쏟아지면? 당도가 떨어져서
맛이 없습니다. 그러니 수확할 때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포도밭 주인들은 새벽부터 인력 시장에 나가서 젊고 일 잘하는 품꾼을 확보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합니다. 미처 인력을 구하지 못한 주인들은 인력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일꾼을 불러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지나서 해가 중천에 뜬 후에도 사람을 데려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 때로는 노약자나 장애인이라도 데려와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만약에 일기 예보에 내일부터 우기에 접어들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되는대로 눈에 띄는 대로 인부들을 불러다 수확해야 합니다. 시간도 상관없습니다. 해가
한 뼘 밖에 안 남았어도, 사람이 있으면 불러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인력 시장 인부들은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12시간 일하고 하루에 1데나리온을 받
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불러 온 품꾼들 품삯이 문제가 됩니다. 늦게 왔더라도 일꾼들은 좀 더 받고
싶고, 포도원 주인은 조금이라도 덜 주려고 할 겁니다.
이래서 노사 분규가 일어납니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노사 분규가 일어나,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회적 혼란기에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심각한 대립과 갈등으로 시끌시끌한 세상에 빗대어 천국을 설명합니다.
(1~2절)『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
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한 포도원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 주인이 아침 여섯시에 인력 시장에 나가서 일꾼을 불러옵니다. 당시의 관행대로 하루에 한 데
나리온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일손이 딸렸습니다. 그래서 추가로 더 데려 옵니다.
제3시, 제6시, 제9시 제11시 이렇게 네 번을 더 나가서 일꾼을 불러왔습니다.
이 시간을 우리 식을 바꿔서 말하자면,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오후 다섯 시가 됩니다.
오후 다섯 시에 와서 일한 품꾼은 한 시간 일하고 해가 저물었습니다.
이렇게 온 사람은 대개 한 데나리온의 12분의 1을 받게 됩니다. 12시에 와서 오후 6시까지 일한
사람은 반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합니까?
맨 나중에 들어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들부터 불렀습니다. 그리고 품삯을 지불하는데, 그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지급하는 겁니다. 눈이 똥그래졌어요.
“와, 오늘 땡 잡았다. 겨우 한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다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놀란 사람들은 이들뿐만 아니라, 포도원에서 일한 사람 모두가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우리는 얼마나 후하게 받게 될까?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그런
데, 세 시간 일 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 아침부터 와서 12시간을 꼬박 땀 흘려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10~12)『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
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불평을 옳다고 여깁니다. 왜 그렇지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옆 사람은 슬슬 농땡이나 치는데, 월급은 똑같이 받습니다. 그러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승진 발표 때 보니까, 그 사람이 나보다 먼저 승진합니
다. 그러면, “에이 이 회사 못 다녀!” 하면서 사표를 던지고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뭐라고 말하지요?
(13절)『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
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인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2절에 보십시오. 아침에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오늘 일하면 한 데
나리온 지급하겠다. 그리고 그렇게 했어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돈을 받아가지
고 가야되는데, 입이 댓 자나 튀어나왔어요. 왜요?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유는 다른 사람과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고, 남과의 비교는 불행의 씨앗입니다.
비교하면 불행해집니다. 왜 그렇까요? 비교는 처음부터 곁눈질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비교는 당당하게 바라보는 눈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슬며시 훔쳐봅니다. “다섯 시에 와서 겨
우 한 시간 일 한 사람에게는 얼마를 주나?”
곁눈질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주시는 분이 아닙
니다. 아래위로 훑어보는 눈, 좌우로 째려보는 눈, 흘긋흘긋 넘겨다보는 곁눈질은 사탄이 우리 마
음에 심어주는 못된 태도입니다.
그래서 곁눈질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비교하게 하고, 비교하면 틀림없이 불평이 나옵니다.
아침 일찍 픽업되어 온 사람들은 건장하고, 일 잘하는 숙련공들입니다. 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데려온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 일을 잘 못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장애인이거나 노
약자입니다.
(6~7절)『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
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새벽 인력 시장 풍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 자기를 데려다 일 시켜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서 있습니다. 일 시킬 사람들이 와서 벽돌공, 미장공, 철근 등등 일 시킬
사람들을 차에 태우고 출발합니다.
점점 처지는 사람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습니다. 건강하지도 못합니다. 민첩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집에 가면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몇 푼이라
도 손에 쥐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불러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자니 아내 볼 면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가 다 가도록 인력 시장에서 빈둥거리면서 놀고 있습
니다. 포도원 주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불러 왔고, 그들에게 온전한 하루 품삯을 쳐서 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침 일찍 온, 건장한 사람들이 이렇게 할 수는 없을까요?
“이 포도원 주인은 참 좋은 분이네, 나중 온 사람들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온전한 품삯을 쳐 주시
네, 참 인자한 분이네, 세상이 이래야 돼, 이래야 살맛이 나지!” 그리고 자기가 받은 한 데나리온에
대해서 감사할 뿐 아니라, “늦게 온 품꾼들에게도 하루 품삯을 다 쳐주시니 더욱 고맙습니다! 주
인님 내일 또 오겠습니다.” 이렇게 될 수는 없을까요?
어때요? 현실에서 가능한 얘깁니까? 불가능한 얘깁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저는 아무래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왜 불가능합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과 태도는 죄의 결과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타락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죄의 문제 해결 없이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땅의 얘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1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이 땅의 현실이 그렇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14절)『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뜻이니라 누구의 뜻입니까? ··· 하나님의 뜻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력 시장에서 행여 늦게라도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끝까지 기다리는 힘없는 자들
까지도 다 불러서 일자리를 주고, 건강한 사람과 차별하지 아니하고, 한 데나리온씩을 주시겠다
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인력 시장에 나갔을 때, 아침 여섯시에 부름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오후 다섯 시까지 기다려야 할 처지입니까?
이렇게 냉혹한 현실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차가운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은 차가운 세상을 향해 따뜻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15절)『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선하신 분이고, 일찍 와서 일한 건장
한 청년의 불평이 악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우리가 머리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면서, 예배 마치고 세상에 나가면 선
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악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선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사람들은 어떻게
본다고요? 악하게 봅니다. 특히 누가 악하게 봅니까?
힘 있고, 건강하고, 남들보다 능력이 있어서 가장 먼저 발탁되는 사람들이 특히 선한 하나님을
악하게 봅니다.
가문 좋고 혈통 좋은 집에서 태어나 초일류 코스를 거쳐서 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자들이 포도
원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악하게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남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어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남보다 힘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대단한 착각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행복을 누리는데,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못한 자들에게 행복을 나눠줍니
다. 이들은 참지 못합니다. 왜요? 자기 행복을 가난한 자들이 나눠 가진다고 착각했습니다.
행복은 제로섬이 아닌데 제로 섬 게임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적으로 실권자입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권력으로 예수님을 잡아들입니다.
“당신이 뭔데 못 배운 자, 가난한 자들에게 행복을 나눠 주느냐?”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어요. 그래야 자기들의 행복이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예수님 당시 실권자들인 대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3일천하’였습니다.
사흘 만에 예수님은 무덤을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만약에 예수님이 지금까지 무덤에 계신다면, 다섯 시가 되도록 불러주지 않아서 인력 시장에서
놀다가 해지면 어깨 축 처져서 집에 들어가야 하는 불쌍한 인생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무덤을 깨뜨리고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오셔야 합니다. 부활하셔야 합
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예수님의 부활은 선이 악을 누르고 이긴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악이 영원히 선을 이기는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아나심으로 선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행복은 비교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남보다 많이 가졌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하나님 나라, 천국에 참여함으로써 누리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불러줄 때 행복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배합니다.
그러니 이 예배가 얼마나 귀합니까? 행복 그 자체입니다.
행복하세요?
이 행복을 위해서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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