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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神父의 - 외줄위를 걷는 人生
47. 농민이 되자
내내 졸며 운전하는 이삿짐 센타 기사를 흔들어 깨우며 덕동에 도착했을 때, 미리 먼저 와있던 아내와 윤경이 그리고 예수원에서 우리와 합류한 병곤이가 반가움에 환호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어 나를 맞이해 주었다.
부산에서 노가다하며 만난 병곤이는 여기 덕동까지 우리를 따라나선 것이다.
돌고 돌아 백운산 정상에 가까운 마을 덕동은 푸른 하늘과 짙은 녹색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산수경관이 오히려 가슴을 아프게 했다.
문득 그토록 아름다웠던 군대시절 연평도의 코발트빛 하늘과 바다가 생각났다.
아마 외딴 곳에 왔다는 느낌 때문일까.
어쩌다 나는 살다 살다 낯 선 이 골짜기까지 흘러왔을까.
하루에 버스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이 산골오지에 말이다.
나도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갔다.
슬레이트지붕에 부엌이 아궁이식으로 되어있는 허름한 살림집에 들어서며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은 흥분을 느꼈다.
방 하나 밖에 없는 시골살림이지만 가슴 속에 그리던 꿈같은 삶이었다.
이삿짐을 길에서 언덕배기 살림집으로 나르며 나는 너무 기뻐 숨 차는 줄도 모르고 뛰어다녔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바짝 마른 장작을 연상시키는 작은 체구의 한 권사님이 지게로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엄청난 양의 짐을 거뜬히 져 나르는 모습이었다.
이삿짐을 대충 방에 들여놓고 집주변을 돌아보았다. 길 따라 30미터쯤 더 올라가면 집이 한 채 더 있고, 거기가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한 권사님 가족이 사는 집이 있었다.
노모를 모시고 딸 셋 아들 하나를 키우는 한 권사님가족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저녁식사가 다 되었으니 위채로 올라오라는 전갈이 왔다.
저녁밥상에 차려진 음식은 희한할 정도로 몽땅 주변에서 채취한 풀로 뒤덮혀져 있었고, 멸치 한 마리조차 찾을 수 없는 완전 채식인데 밥만은 화려한 현미8곡밥이었다.
채식은 이집의 철학이 담긴 철칙이었다.
육식을 하면 병 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식사시간 내내 한 권사님이 강의해 주었다.
그리고 초식만 하는 소가 왜 건강하고 근력이 좋은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단번에 그의 추종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제자였다.
이현주목사님은 미소만 짓고 계셨다.
다음날부터 이웃집 모내기를 도와주러 남자들은 다 논에서 살다시피 했다.
품앗이인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요청만 오면 무조건 가주는 무료봉사였다.
기실 한권사님 농사는 농법이 달라 동네사람이 도와주기도 어려웠다.
한권사님 밭은 거의 산꼭대기에 위치한 밭인데 그는 도대체 땅을 갈지를 않았다.
잡초를 낫으로 베고 그 사이로 씨를 심는 식이었다.
벼농사도 클로바를 심어 다른 잡초가 자라지 못 하도록 클로바를 웃자라게 했다가 물을 채워 클로바를 녹여서 잡초를 제거해 벼만 살리는 농법을 썼다.
또 그는 모든 병을 고쳤다.
아기 이유식병에 석고를 발라 자신이 직접 만든 부항기구로 아내와 나의 등짝에 매일 부항을 떠 주었다. 항문으로 관장을 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온몸에 소나무 숯가루를 발라 피부에 산소를 공급하는 법도 배웠다.
그러고 보니 이웃에 매일 치료를 받는 마사회 수의사가 있었다.
간암에 걸렸다가 한권사님을 만나 병을 고치고는 아예 지척에 방을 얻어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달려왔다.
말기 암환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끊임없이 연락을 해왔다.
그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대체의학의 달인이었다.
예수원에 살던 베트남전 참전 후유증을 앓던 분도 우리 집을 방문했다가 제천 근처 송학의 토끼 키우는 마을공동체로 간다고 갔다.
우리와 합류하려 했지만 여건이 안 되어 발길을 돌렸다.
며칠 뒤 이웃에 고추모 심으러 갔다 와서 거울을 보니 눈이 빨갛게 된 거친 수염의 낯 선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갑작스럽게 연일 계속되는 농사일에 몸이 극도로 피곤한 탓이었다.
내 배는 발사 직전의 미사일처럼 무겁게 튀어나와 있었다.
예수원에서 출판일을 한답시고 사무실에서만 생활한 결과였다.
한권사님과 밭에서 옥수수모를 심다가 갑자기 그가 내손을 붙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팬티만 걸치고 어린애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춤추는 모습은 동심 그 자체였다.
신명으로 추는 그의 춤은 흥겨움 그 자체였다. 나도 덩달아 몸을 움직였다.
“이 밭도 우리집도 다 현주형이 사 주신 거요.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투기농사를 짓다가 빚만 계속 졌소.
겨울에 비닐하우스에서 수박농사 짓다가 3천만 원 빚지고 농법을 바꿨소.
배추농사를 짓다가 홍수가 났소. 농사는 망했지.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걸 깨달았소.
내가 늘 밟고 다니는 밭 가장자리에 심은 배추는 잘 살아있는데 땅을 갈아엎고 그 자리에 심은 대부분의 배추는 힘이 없어 다 죽어버렸소.
그 때부터 나는 밭을 갈아엎지 않소.
나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왔지만 내가 깨달은 진리대로 살기로 결심했소.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소. 다 엉터리요.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거요.”
“아이를 학교에 안 보내다니요?”
“그렇소. 보내지 않소.”
“너무 한 거 아닙니까? 부모의 철학 때문에 아이의 교육선택권을 제한한다는 건 좀 그렇잖아요?”
“어쨌든 내 교육방침은 그렇소.”
그 날 우리는 참외 멜론 수박을 심었다. 다음날 토마토 모종을 위해 씨를 심었다.
그리고 잡초를 낫으로 베고 그 사이에 콩을 심었다.
한권사님의 밭은 온통 잡초밭이지만 낫으로 벨 때 풀이 잘리면서 내는 향기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코끝에 달았다. 오래 묵힌 밭에서는 그런 향기가 난다고 했다.
“저 하늘을 보시오. 별이 보입니까? 분명 별은 떠 있어도 이렇게 환한 대낮에는 별이 없습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별이 얼마나 밝게 빛납니까?
어려운 시절이 닥치면 우리가 농사지으며 깨달은 이 진리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날 겁니다.”
그에게 왜 그렇게 많은 대학생들이 찾아오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서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소설에 나오는 ‘희랍인 조르바’를 느꼈다.
사고가 터졌다.
설탕을 부어 솔순효소를 담았는데, 발효가 다되어 걸러내고 남은 솔순찌꺼기를 말려서 거름을 한답시고 마당에 뿌려놓았었다.
당연히 벌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었는데 세 살배기 윤경이가 장난친답시고 맨발로 그걸 밟아버린 것이다. 숨넘어가는 아이 비명소리에 모두들 달려가 보았더니 아이는 이미 기절상태다.
발에 깔린 벌들이 일제히 침으로 쏘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벌떼들 위로 쓰러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한원식권사는 지체 없이 숯가루를 발바닥에 뿌렸다.
그리고 다시 밀가루와 숯을 반죽해서 두껍게 발바닥에 바르고 헝겊으로 싸매어주니 아이가 어느새 깨어나서 웃고 논다.
나는 신기해서 숯가루의 효능을 물었다. 숯은 만병통치약이었다.
안식일교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모든 병을 숯가루를 바르거나 먹어서 해결한다고 하였다.
그날 우리는 술을 거나하도록 마시며 다함께 형제의 의를 맺었다.
“ 형님! 동생으로 삼아주셨으니 제가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그래 말해라. 아는 대로 얘기해 주마.”
“형님은 제도교육이 의미가 없다고 하는데 정말 그 이유 하나만으로 아이 학교를 안 보내는 것입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십시오. 형님 말에 일리가 있으면 나도 내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을 작정입니다.”
형님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가진 돈이 없으니까 못 보냈지. 농사를 짓기만 하면 실패하는데 어떻게 학교를 보내니?
내가 여태껏 살면서 어릴 때 가난해서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천대와 수모를 겪었는지 아냐? 너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그래서 나는 평생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얼마든지 올바른 진리를 깨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고, 그것을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자식을 통해서도 증명하려고 했던 거야.”
“그래요. 형님. 그걸 제가 어떻게 가늠하겠어요? 그래도 형님은 가난하게 살았다면서 어쩌면 그렇게 베풀고 삽니까?”
“그게 농사짓는 마음이지. 콩을 심어도 한 구멍에 세알을 심잖아.
한 알은 새가 먹고 한 알은 쥐가 먹고 나머지 한 알은 사람이 먹는 거야. 나눠먹어야 돼.”
형님이 인근 안골이라는 곳에 사는 최성원이라는 분의 강의초대를 받았다.
그 역시 비슷한 철학을 갖고 농사를 지으며 자연학교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형님은 며칠 단식까지 하면서 강의 준비를 했다.
안골에 도착하니 도시에 사는 삼십 여명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형님이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한국 유일의 농민입니다. 오늘날 진정한 농민은 하나도 없습니다.
농민은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농민들이 그저 과거에 해오던 대로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 흙을 갈아엎는데 그런다고 해서 땅이 부드러워지는 게 아닙니다.
물을 머금으면 저절로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물과 흙의 비율이 3대 7일 정도일 때 가장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흙을 그렇게 흔들어놓으면 그 안에 자리 잡았던 미생물이나 생태조직이 다 흔들려서 흙의 생명력이 약화되고 맙니다.
지금 같은 농법으로는 농약으로 인해 다 병들어 죽습니다.
흙도 죽고 미생물도 죽고 농사짓는 사람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산삼은 사실 귀한 게 아닙니다.
가장 흔하다고 생각하는 양식, 잡초 같은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는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흔하디흔한 잡초를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걸 녹분으로 만들어 먹으면 얼마든지 양식으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잡초를 가짓수만 많이 섞어먹으면 독초도 독성이 중화됩니다.
백초가 그래서 좋은 겁니다.
먹는 음식이 가장 기본 아닙니까. 기본이 되어있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는 것을 생산하는 농민이 가장 귀한 존재요, 이 땅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던 일을 다 때려치우고 농민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바다에서 일하는 선장인데 저도 농사를 지어야 합니까?
내 옆의 이분도 시를 쓰는 시인이고 의사인데 그것도 그만 두고 농사를 지어야합니까?”
“당연히 모두 농사를 지어야죠. 농사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게 없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몇 년 안 가서 농민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현대의학은 독극물로 병을 치료하는 겁니다. 의학은 없습니다.
우리 몸 자체가 치료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토론은 불꽃을 튀기며 점점 치열해져갔다.
형님은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이 농민임을 자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흙에 대한 사랑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6월12일.
이사 오고 처음으로 전체모임을 가졌다.
이현주목사님이 회의를 주재하고 공동체삶의 원칙을 정했다.
첫째, 매주 월요일 저녁식사를 끝내고 모여서 다음 한 주일 일정을 계획하고 지나간 주일을 점검한다. 그리고 기도모임으로 끝낸다.
우선은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예배를 인도한다.
둘째, 월요일 저녁식사는 경일이 집에서 한다.
셋째, 이현주목사, 한원식권사, 경일이, 병곤이 순으로 예배를 인도한다.
넷째, 큰 딸이 4학년 2학기로 편입할 수 있는지 학교에 찾아가서 문의하고,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을 때까지 교육은 윤경이 엄마가 맡는다.
다섯째, 살림은 원식이네 집에서 맡기로 하고 모든 경제는 공동운영 정신으로 하기로 한다.
여섯째, 아침 늦게까지 자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일찍 자는 훈련을 하자.
일곱째, 모든 안살림과 음식은 다 자유롭게 공동으로 하기로 했다.
낮에 솔잎을 따러갔다가 산딸기 한 주전자를 훑어서 잼을 만들었다.
이현주목사님은 요즘 매일 시 한편을 지어 저녁마다 발표를 했다.
여기 올라온 뒤로 시상이 잘 떠오르고 시가 잘 써진다고 했다.
애기똥풀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밤 열시 경에 마을에 불이 났다는 급한 전갈이 와서 불을 끄러 갔다.
샛별네 집에 난 불은 이미 마을사람들이 다 껐고, 샛별아빠는 얼굴과 팔에 화상을 많이 입었다.
원식이형은 숯가루를 우선 환부에 뿌려 화기를 가라앉히고 숯가루에 들기름으로 반죽을 해서 넓게 발랐다.
시원하게 밀가루로 하지 않는 이유는 반죽이 마를 때 상처부위를 당겨 덧나게 하기 때문에 기름으로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가 3년 동안 빚을 내어 공을 들인 잠실이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다 타버렸다.
불길에 싸인 헛간에 소를 구하러 들어간 샛별아빠는 소코뚜레를 끊어주려다 화상만 입었다.
소는 이미 고삐가 불에 타서 도망 나왔는데도 정신이 달아난 그는 빈 헛간에서 낫을 휘두르다 다친 것이다.
다행히 농협에서 돈이 나오는 날이라 동네사람들이 돈 받으러 집 근처에 다 모여 있었기에 쉽게 불을 잡을 수 있었다.
다음날 불난 집도 정리해주고 샛별네 뽕잎도 따줄려고 잠실에 올라갔더니 부부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샛별엄마가 갓난아이를 업고 웃으며 말했다.
“남편이 걱정이 많아요. 아이는 벌써 넷이나 되는데 불까지 났으니 내가 도망갈까 겁난데요.”
“무슨 그런 말씀을?”
“아기엄마가 나에게 시집오게 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서울서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하고 이 마을에 전도하러 온 걸 보고 제가 한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나하고 결혼만 해준다면 예수를 영접하겠다고 하니까 선뜻 결혼을 허락해 준 겁니다.
남들은 도망 못 가게 아이만 열심히 만든다고 흉봐요.
그런데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으니 속이 참 많이 상합니다.”
며칠 샛별네에 드나들며 뽕잎을 따주고, 화재 뒤처리를 해주는 사이 샛별아빠의 얼굴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숯가루요법 때문에 회복도 빠르지만 통증이 없어 살 만하다고 샛별아빠는 원식이형의 정성어린 치료를 고마워했다.
원식이형은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팔을 걷어붙이고 열성적으로 나섰다.
그런데도 마을사람들은 마음을 쉽게 여는 것 같지 않았다.
사는 방식이 너무 다르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저녁나절 카톨릭농민회 지도사제였던 정호경신부님과 이병철 전 국민운동본부 조직부장이 방문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이현주목사님을 찾는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이름만 들었던 명망가들을 직접 만나고 그분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며 나는 매일 귀동냥의 행복감에 젖어 사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기독교방송국에서 나와서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한 고희범기자와 문화일보 김영모기자도 인사하러 왔다.
그날 낮에 처음으로 지게를 지고 숯을 구울 죽은 소나무를 잘라 지게에 지고 내려오다 발을 헛디디면서 산 아래로 굴러버렸다.
나는 얼굴을 긁히고 팔목인대를 심하게 다쳐 기분이 좀 가라앉아 있었는데 희범이형이 한 마디 했다. “경일아! 너 농사지을 수 있겠냐?
지게 지는 거 보니까 독하게 마음먹고 달라 든 것 같기는 한데. 몸 만들려면 시간은 좀 걸릴 거다.”
“좋은 스승을 만났으니 농사를 제대로 한번 배워 보려고요.”
원식이형이 대구 깔멜수도원에 강의요청을 받아 가는 김에 부산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부산의 우리 가족들을 안심시키겠다는 뜻에서다.
제천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온 나에게 아내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내일 먼 길 떠난다는 사람이 여행준비도 안 하고 어딜 갔다 이제 와요?
나는 여름외출복이 하나도 없어 속상해 죽겠는데.
당신 결혼하고 나서 이제까지 나에게 속옷 한번 외출복 한번 사준 적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