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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산 김천직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입니다ㆍ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신라시대인 418년(눌지마립간 2)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선산 도리사를 개창할 때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성주산문의 조사 무염대사가 머물렀던 심묘사에 부속된 절로 남종선의 가르침인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표방한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이 절을 세울 때 자[尺]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다고 해서 직지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645년(선덕여왕 14) 자장율사가 중창한 이래로 930년(경순왕 4), 936년(태조 19)에 천묵대사(天默大師)와 능여대사가 각각 중창하여 대가람이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출가하여 득도한 절로도 유명하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1735 중건)을 비롯하여 천불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1661 창건)·약사전·극락전·응진전·명부전·사명각 등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동6각사리함(국보 제208호), 석조약사불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앞3층석탑 2기(보물 제606호), 비로전앞3층석탑(보물 제607호), 대웅전삼존불탱화 3폭(보물 제670호), 청풍료앞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등이 있
한국불교 1천 6백년의 역사와 그 세월을 같이 하다.
서기 418년, 아도 화상에 의해 세워져 1천 6백년 가까운 세월동안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고, 우리민족의 가슴속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심어온 직지사는 아름다운 경내가 뭇 사찰중에서도 으뜸이다.
소백산맥의 준령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을 이루었고,다시 서남쪽으로 웅장한 산세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 동남쪽 산자수명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의 도계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번지이다.
황악산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직지사 안내도 》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직지사 사적비》
본사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을 비롯하여 태백산, 삼척등 동해방면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하고 있다.
《황학산 직지사 일주문 》
《일주문 뒷면에 자하문》
따라서 절의 위치가 산곡이면서도 높지 아니하고,야지인듯 하면서도 산사의 풍취가 항상 흘러 넘쳐서 4계절 내내 도량을 참배하는 신남신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양문》
잠시 황악산의 산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최상봉인 비로봉에서는 경상, 충청, 전라의 3도를 한눈으로 굽어볼 수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선유봉을 비롯하여 천룡봉과 운수봉이 있고, 조금 내려와서 절경대가 있으며, 그 중턱에 운수암이 있어 승경을 이룬다.
운수봉에서 다시 2km쯤 올라가면 백운봉이 있고, 그 아래로 만경대가 펼쳐진다.
다시 남서로 난 능선을 따라가면 망월봉과 함께 신선봉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위에 형제봉은 백운봉과 마주하여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악산은 대체로 3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능여계곡, 내원계곡, 운수계곡이 그것이다.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을 찾았다는 멱원대를 비롯하여 많은 대와 소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과 법수천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화엄일승법계도》
본사의 초창은 신라 눌지왕2년(418) 아도 화상에 의하여 도리사와 함께 개창되었다.
그 사명을 직지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아도 화상이 일선군 냉산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라 이름했다는 전설도 있다.
《금강문 》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천왕문 》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의 미화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와 선가의 직지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에 불교의 본지를 이처럼 극명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대웅전 보물 제1576호》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심검당 》
그 첫째는 선덕여왕 14년(645) 자장 법사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4년(930) 천묵 대사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배례석 》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대웅전 앞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606호)》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을 서사하여 신라 조정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감은전》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대웅전 》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웅전 법당 삼존불 탱화 (보물제670호)》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가 건립되고 있다.
《석등》
즉 고려 태조 왕건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의 도움으로 후백제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월 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를 개설하여 경찬회를 성대히 베풀었다.
《향적전 》
《직지사 단풍길》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을 건립한 낙성연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오유지족》
《관음전 앞 수각》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관음전 》
《관음전 주변》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를 새겨 절을 북정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의 탁본이며, 이는 왕우군의 집자로서 유명하다.조선시대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를 절의 북봉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가 본사에 출가하여 신묵 대사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명부전》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구국제민의 선봉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 8대가람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명월료 》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범종루 》
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 찰령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의 말사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가 재편성되면서 본산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서별당과 망일전》
현재는 국내 25본산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본사이며 소속 말사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청풍료 앞 삼층석탑 (보물제 1186호)》
《범종각 》
관할 구역은 4개시, 1개군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은 약 600정보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직지사를 나왔습니다 》
《세계도자기박물관》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 중수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을 이어 오다가 최근 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에 의한 중흥불사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평화의 탑 》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를 위하여 사유대지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에 따라 모든 불전과 당우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을 건립하는 한편 4기의 신라시대 고탑을 이건 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이며 일대변혁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YouTube에서 '️황악산 김천직지사 ️해운대반야선원 2023년3월5일 삼사순례3' 보기
https://youtu.be/1pq9UVLYXk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