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Ⅹ. 성경 시대 이스라엘의 역사
1. 역사 개관의 필요성
성경이 보도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가장 크게 다가오는 문제는, 성경의 이스라엘 역사가 본래 그대로의 사실적 보도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살아 계시고 현존하시는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밖에 따로 계시지 않고 언제나 역사 안에서 그들의 인도자로 함께 현존해 오셨다.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제시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보잘것없는 민족을 선택하시어 그들 안에서 당신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활동하시며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셨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제시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대한 객관적 보도라기보다 그들의 삶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재정리한 내용이다.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과 맞물려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크게 ‘부족동맹 시대→왕국 시대→식민지 시대’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부족동맹 시대 | 왕국시대 | 식민지 시대 | ||
왕정 도입 이전 시대 | ⇨ | 통일 왕국 시대 분열 왕국 시대 | ⇨ | 바빌론 제국의 식민 통치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 통치 그리스 제국의 식민 통치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 |
2. 역사 개관
(1) 부족 동맹 시대
① 민족 형성 이전 시대
성경이 제시하는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러 ‘부족들’이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오경의 내용을 짧게 정리하면 ‘두 개의 창조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세상의 창조’(창세 1-11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창조’(창세 12-50장)이다. 특히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는 이야기는 한 ‘부족’에서 모세라는 중재자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기원전 2000년경,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중동 지역의 여러 유목민은 살기 좋고 물이 풍부한 서쪽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그 부족들 가운데 창세기가 소개하는 성조사(창세12-50장)의 모델이 된 부족들이 속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목민들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지역에 정착하여 거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동화되거나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나일강 유역인 이집트의 비옥한 곡창 지대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이들과 관련하여 생성된 여러 구전이 현재 오경을 이루는 핵심 소재가 된다.
② 민족 형성 시대
이른바 ‘비옥한 반달 지대’에 흩어져 살던 여러 부족은 서서히 하나의 거대한 민족 공동체를 형성한다. 성경은 이러한 과정을 모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도하고, 그의 지도력 뒤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와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하나로 규합하면서 야훼 하느님을 예배하는 ‘계약-민족 공동체’가 만들어졌던 것인데, 이러한 내용이 탈출기부터 신명기까지의 주된 줄거리가 된다.
모세에 의해 규합된 민족들은 광야 여정을 거쳐 시나이에서 ‘계약’을 체결하면서 야훼 하느님만을 임금으로 섬기는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고, 이 계약이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러 율법을 수령하게 된다. 이러한 민족의 형성은 기원전 13세기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③ 가나안 정착 시대
기원전 13-12세기는 근동의 거대한 두 세력, 곧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모두 내부의 소요 사태로 말미암아 외부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공백을 틈타 가나안에서 새로운 신진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성경에 따르면 모세에 의해 민족 공동체를 형성한 이스라엘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정착한다. 그러나 실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성경의 묘사와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가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재 팔레스티나라고 불리는 지역에 이스라엘이 정주(定住)하게 되면서 하나의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여호수아기가 말하는 것처럼 뛰어난 영웅을 통해 이룩된 ‘정복’이었는지, 아니면 판관기의 묘사대로 점진적 ‘이주’를 통한 정착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가나안 정착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 가설을 제안한다. 첫 번째는 ‘이주설’이다. 곧 각처에서 떠돌아다니던 유목민들이 거의 2세기 동안 평화로운 ‘이주’ 과정을 통해 가나안 지역에 정착하였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이스라엘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판관기와 맥을 같이한다.
두 번째는 ‘정복설’이다. 이 입장은 거의 백전백승의 전설적 영웅담인 여호수아기의 내용을 그대로 도입한 것인데, 기원전 13세기경 가나안의 성읍들이 한 민족에게 완전히 점령되었고 이러한 정복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내부혁명설’이다. 고대 가나안은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한 일이 거의 없고 오히려 내부의 정치적 소요와 사회적 혁명의 결과 이스라엘이 탄생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곧 기원전 13세기경 가나안은 군주봉건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지배 계급의 억압이 심해지자 민중들은 기득권층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외부에서 유입된 유목민들과 연합하여 기존 세력을 전복시키는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때 새롭게 부상한 신흥세력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초기 이스라엘의 형성에 대한 이상의 세 가지 가설을 말 그대로 가설일 뿐, 성서학계는 아직까지 어떻게 이스라엘이 가나안 지역에 자리를 잡고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단정적인 입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④ 동맹 체제 시대
아무튼 이스라엘은 가나안 지역에 정착하면서 ‘왕정제도’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하나의 통일된 행정 체제를 유지하며 생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을 규합시킨 통합적 체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성경은 스켐을 중심으로 여러 지파가 규합하는 ‘지파동맹 체제’가 형성되었다고 전한다(여호 24장).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협력 체제인 ‘암픽티오니(Amphictyony)’와의 유사성을 연결시키곤 했다. 암픽티오니란 하나의 ‘부족연맹 체제’로서 한 부족이 곤경에 처하면 다른 부족들이 일종의 연합군을 형성하여 그 부족을 돕는 체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도 확실한 역사 고고학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2) 왕국시대
① 통일왕국 시대
기원전 12세기경, 인류 역사 판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준 획기적인 발명이 등장하는데 바로 철기문화다. 철기시대의 개막은 비옥한 반달 지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파급력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다른 국가들에 앞서 철기문화를 받아들인 필리스티아가 제련술을 발전시켜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협했고(1사무 4장; 13장 참조), 이스라엘에게 이에 대항할 수 있는 통합된 군사적 방어 능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목 사회가 농경 사회로 변화되면서, 모두가 일정한 토지 안에서 공생(共生)해야 한다는 문제가 이스라엘 부족 간의 사회적 불평등과 부의 편재, 부족 상호원조 체결의 결함 등을 초래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러한 내외적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왕정(王政)’이라는 더욱 강력한 정치 체제를 도입하게 된다.
ⓐ 사울 시대
처음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추대된 이는 사울이다. 하지만 그가 완벽한 행정 체제를 갖춘 왕국의 임금으로 군림한 것 같지는 않다. 성경에서 그는 군사 지도자의 모습으로 부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중앙 산악 지대의 필리스티아인들을 몰아내고 다른 인근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지만(1사무 14,47-48), 결국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투에서 전사한다(1사무 31장).
ⓑ 다윗 시대
사울 통치 시기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으며 새롭게 부상한 인물은 사울의 사위 다윗이었다. 다윗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사울의 견제와 압박으로 이어졌고 결국 망명생활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그러던 중 다윗은 사울의 전사를 통보받고 헤브론으로 거처를 옮긴 다음 남쪽 유다의 지도자로 추대되고(2사무 2장), 이후 남북을 아우르는 임금으로 등극한다(2사무 5.1-5).
다윗은 필리스티아인들을 완전히 정복하고, 여부스족의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 도시를 ‘다윗성’으로 삼아 천도하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명실상부한 통일왕국 시대를 열었다.
ⓒ 솔로몬 시대
왕가의 정식 혈통이 아닌, 그저 사위에 지나지 않던 다윗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잔존하는 반대 세력과의 통합을 통해 임금의 정통성에 대한 정치적 명분을 확보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음을 의미했다.
다윗은 결혼정책을 통해 반대 세력을 잠식시키고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왕비들 사이의 갈등은 이른바 ‘왕자들의 난’으로 이어졌고, 결국 다윗의 후계자 자리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큰 세력을 확보하고 있던 밧 세바의 아들 솔로몬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이러한 계승은 솔로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아도니야와의 유혈 전쟁을 통해 획득한 결과였다(1열왕 1-2장).
등극 때부터 이미 무력 충돌과 철권 통치를 행사하던 솔로몬은 독재 노선을 지속하였고, 특별히 왕실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 야심 찬 경제 관련 프로젝트를 실행하였는데 지나치게 불균형한 경제구조는 신하들과 민생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결국 그의 죽음 이후 나라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된다.
② 분열왕국 시대
ⓐ 북 이스라엘
성경에 따르면 남 왕국은 북 왕국보다 훨씬 견고한 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 유다에는 이미 솔로몬의 궁전과 성전이 있었기에 일단 거대한 자산을 보유한 듯이 보이는 반면, 새롭게 왕국을 건설해야 했던 북 이스라엘은 여러 측면에서 불리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특별히 신명기계 역사서와 역대기계 역사서)이 남 유다의 신학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에 산출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지파가 연합하여 건국된 북 이스라엘은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남 유다보다 훨씬 풍요로웠고 인재들도 대거 포진되어 있었으며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매우 세련된 문화를 이룩해 두고 있었다.
특별히 북 이스라엘의 왕조 중 가장 번성했던 왕조는 오므리(기원전 886-875)와 예후(기원전 841-814년) 왕조였다. 오므리는 사마리아에 수도를 세우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였으며 그 결과 지중해 지역의 맹주(盟主)로까지 부상하였다.
그의 아들 아합(기원전 875-853년)때는 시돈(페니키아)의 공주 이제벨을 왕비로 맞아 종교 혼합주의를 정책적으로 허용했는데, 이는 국제 사회 안에서 이스라엘의 상호 교류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초석으로 작용했다.
한편 성경은 이러한 국제 자유방임주의에 맞서는 일련의 예언자 집단을 소개하는데 바로 테스베 사람 엘리야와 그의 제자단이었다.
오므리에서 아합으로 이어지는 북 이스라엘 왕조는 외교·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는 왕실 안에 이방종교들을 허용하면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에 민족주의적 예언자 그룹과 재야 지식인 그룹은 야훼만이 유일한 하느님임을 강조하며 순수 야훼 신앙으로의 회귀를 촉구하는 강력한 사회 운동을 벌이게 된다. 그렇게 예언자 그룹과 왕조 기득권층의 대립이 노골적으로 불거지자 예언자들은 암살당하거나 박해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열왕기에 등장하는 엘리야의 이야기 안에 잘 묘사되어 있다(1열왕 17-19장).
결국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합 가문이 예후에게 완전히 몰살되고 숙청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예후는 단순한 정치적 쿠테타를 일으켜 성공했다기보다 엘리야와 엘리사 그룹이 이끄는 종교적 혁명을 수행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후 북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맞고, 유명한 예로보암 2세의 부국 강병책이 펼쳐지면서 전성기를 이룬다. 그러나 기원전 747년 예로보암 2세가 죽자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근동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여 주변국들을 점령하면서 유배까지 단행하는 강력 규제 정책을 실시한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이스라엘은 티글랏 필에세르가 죽자, 다시 반란을 꾀함으로써 아시리아를 자극하였고, 결정적으로 호세아 임금 때 친이집트 노선으로 돌아서면서 새로 등극한 아시리아의 살만에세르 5세에게 보복적 침입을 당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사르곤 2세 통치 때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한다(기원전 722년).
ⓑ 남 유다
남 유다는 단 한 번의 쿠테타 없이 다윗 왕조의 계승을 인정하면서 북쪽보다 무난한 역사를 이어간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할 무렵 남 유다에는 아하즈(기원전 735-716년)와 히즈키야(기원전 716-687년)의 통치가 이어졌는데, 특별히 히즈키야는 북 이스라엘에서 남하(南下)한 사제들과 지식인층 인사들을 받아들여 북쪽의 신학 전승을 대거 수용했다.
이러한 관대한 조치는 그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심을 극대화시켰고, 북 이스라엘의 실패를 교훈 삼아 더욱 강하게 야훼 종교의 전통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성찰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히즈키야의 개혁 정책은 아시리아의 군사적 무장으로 위협을 받았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히즈키야의 아들 므나쎄는 혼합주의 정책으로 돌아선다. 남 유다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므나쎄의 정책에 불만을 품었고, 결국 므나쎄의 아들 아몬이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되면서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요시야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기원전 640년).
요시야가 장성했을 때는 마침 아시리아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신흥 바빌론이 부상하고 있던 시기였다. 요시야는 이러한 정치적 판세를 이용하여 신명기적 개혁을 단행했는데(기원전 622년), 개혁은 그의 죽음으로 좌절되고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한 신흥 바빌론에 의해 남 유다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기원전 587년).
(3) 대제국 치하의 식민지 시대
① 바빌론 제국의 식민 통치
결국 남 유다마저 무너지면서 유다는 국가도 임금도 정부도 없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비록 국가는 없어졌지만 각 처에 흩어진 유다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 할례, 안식일, 회당, 십일조, 음식 규정, 외국혼 금지 같은 여러 제도이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독특한 관습을 통해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다른 이민족들과 차별화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여러 분규와 생존에 대한 불확실성, 외부 압력과 회유에도 유다 민족을 현재까지 존속시키며 성장하게 한 비결로 작용한다.
한편, 이러한 제도들 외에도 자신들의 뿌리를 망각하지 않으려는 여러 지식인의 학문적 작업들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이 알고 있던 여러 구전과 기록 전승들을 집대성하여 왕국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를 전수하려는 작업들이 대거 진행된 것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오경의 대부분과 시편, 잠언, 예언서, 역사서 등의 일부분이고, 이러한 전승들이 현재 구약성경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②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 통치
기원전 550년경까지 메디아에 조공을 바쳐오던 페르시아는 메디아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왕국을 차지하면서 아시아 지역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한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바빌론은 이 신진 세력을 맞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광대한 영토를 내주게 된다(기원전 539년).
한편 정치적 실리에 밝았던 페르시아의 키루스는 이전까지의 대제국들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강압책’으로 식민지 주민들의 원성을 샀던 것에 주목하여 이에 정반대되는 ‘온건 관대책’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아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바빌론에 유배 왔던 각 민족들의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반포하게 된다(2역대 36, 22-23; 에즈1,1-4), 물론 이러한 조치가 각 민족들에게 자치적 독립권을 완전히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각 나라로 귀환한 민족들의 지도자는 페르시아 정부가 임명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정부가 유다에 파견한 인물은 세스바차르와 즈루빠벨, 느헤미야와 에즈라였다. 유다인들은 귀환하면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개축하였으며, 내부 기강을 재정립하기 위해 유배 중 형성된 율법서, 곧 토라(오경)를 실정법으로 반포한다. 또한 유배 중에 확립되었던 여러 유다이즘 제도(회당, 안식일, 할례, 음식 구정 등)들도 정착시켰다.
③ 그리스 제국의 식민 통치
유배에서 돌아와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가 안정을 찾아갈 무렵, 서방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이 서서히 세력을 통합하며 동진(東進)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전역을 통합하면서 대제국을 형성했는데 그의 제국은 인도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가 서른세 살의 나이로 요절하자(기원전 323년) 그리스 대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 왕조)와 셀레우코스(시리아 왕조), 안티고노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유다는 처음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식민지로 넘어가게 된다. 특히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 때 등장한 강력한 억압책은 민족주의적 봉기의 원인이 되었고, 그 선봉에 섰던 대표적인 인물이 마카베오 가문의 아들들이었다. 결국 쿠테타는 마카베오 가문의 승리로 돌아가고 이 가문은 정치적 독립을 주창하며 하스모네아라는 새로운 왕조를 수립(기원전 142년)하게 된다.
④ 로마 제국의 식민 통치
하스모네아 왕조의 통치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왕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리스 제국이 로마 제국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고, 기원전 67년 스페인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폼페이우스 장군을 로마 원로원이 지중해 동부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하면서 이스라엘이 다시 그의 세력권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기원전 63년).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살해되고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 부상하면서 유다 변방의 통치자였던 이두매아(에돔)의 안티파테르가 로마의 후원을 입고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였다. 로마 통치부에 열심히 조공을 바치며 환심을 샀던 그의 아들 헤로데는 결국 유다의 임금으로 임명되고 그들의 세력은 유다 사회 안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확립되었다.
헤로데는 유다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증축하는 등 여러 사업을 벌이지만, 그가 죽자 유다인들의 독립운동은 다시 발흥하게 된다. 헤로데가 죽은 뒤 팔레스티나는 그의 세 아들(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필리포스, 페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독립운동이 거세지면서 결국 로마는 직접 총독을 파견하는 총독 정치를 시작하였고, 이러한 시기에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다. 물론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제작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