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석(元天錫)’의 망국의 한을 노래한 시조
▲ 시조풀이
흥하고 망하는 것이 운수에 매여 있으니 고려의 옛 왕궁 터에 가을 풀만 우거졌도다.
고려 오백 년의 찬란했던 역사가 한낱 목동이 부는 처량한 피리 소리에 담겨 있으니
석양에 지나가는 나그네가 눈물을 참지 못하는구나.」
▲지은이: 원천석(元天錫, 1330년~?)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인이다.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고려가 망하자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에 숨어 살면서 세상에 나오지 안았으며, 죽은 연대도 미상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 선비들이 변절하던 시절에 고려조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지켰다. 태종 이방원이 그의 학덕을 높이사 3번이나 치악산까지 찾아와서 벼슬에 나서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 만월대: 경기도 개성시 송악산(松嶽山)에 있는 고려시대의 궁궐터.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악산 남쪽 구릉지에 있는 고려 궁터로, 1361년(고려 공민왕 10)에 모두 불에 타서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8·15광복 후 발굴하였다.
▲클릭해 주세요 (고려 유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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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년(태조 2) 정월에 태조가 송악산 남쪽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한 이래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왕의 주된 거처였다.
동서 445m, 남북 150m 정도의 대지에 위치한 왕궁터의 가운데에는 정사를 처리하는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이 위치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건덕전(乾德殿)을 정전이라고 하였으나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는 회경전을 정전이라 하였고, 《고려사》(희종 2년 4월조)의 기사 중에서도 회경전을 정전이라고 하였으므로 회경전을 정전으로 보는 것이 옳으나, 그 기능에서는 회경전과 건덕전이 서로 비슷하였던 듯하다.
회경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전면에 4개의 계단을 만들었고 좌우에는 동행각(東行閣)·서행각(西行閣)이 있었다.
회경전의 북쪽에는 고려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는 장화전(長和殿)과 비상시에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원덕전(元德殿)이 있었고, 서북쪽에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고 사신을 접대하던 건덕전, 희빈들이 거처하던 침전인 만령전(萬齡殿)이 있었다.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에는 사신 등이 바치는 물품을 받아들이던 장령전(長齡殿)과, 뒤에 집현전(集賢殿)으로 개칭된 연영전(延英殿)이 있었으며, 회경전의 바로 서쪽에는 왕의 침전이, 동쪽에는 세자가 거처하던 좌춘궁(左春宮)이 있었다.
또, 황성에는 13개의 성문과 15개의 궁문이 있었다고 하며 성문 중에는 동문인 광화문(廣化門)이, 궁문으로는 왕궁의 정남문인 승평문(昇平門)과 신봉문(神鳳門)·창합문(閶闔門)·의봉문(儀鳳門)이 유명하였다.
승평문은 정전인 회경전으로 연결되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신봉문이 있었고 그 동쪽에 세자궁으로 들어가는 춘덕문(春德門)이, 서쪽에 왕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태초문(太初門)이 있었다.
신봉문 안에는 왕이 천자의 조서를 받들던 창합문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회경전의 전문(殿門, 會慶門)이 있었다. 건덕전 앞에는 건덕전문·흥례문(興禮門)·의봉문이 있었으며, 의봉문 밖에 구정(毬庭 : 격구 경기를 하던 큰마당)이 있었다고 한다. 흥례문 역시 왕이 천자의 조서를 받들기도 하였던 곳이다.
중앙의 회경전터에서 동벽까지 135m, 서벽까지 230m, 승평문까지 250m 정도이며, 궁궐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넓지 않은 공간에 많은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고,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동물머리모양의 돌조각과 많은 기와조각·도기·철제장식·철창·철침 등이 수습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
- 『신증동국여지승람』
- 『고려고도징(高麗古都徵)』(한재렴)
- 『고려도경(高麗圖經)』(서긍)
- 『고려시대사』(김상기,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2018. 6. 28. 구본기
첫댓글 남북통일이 되어 고려, 고구려. 발해 유적을 볼날을 기원합니다.
선죽교에 남아있는 정몽주 선생의 혈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