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5066]退溪先生-上聾巖李先生
원문=退溪先生文集卷之一
上聾巖李先生
退溪
高臺新曲賞深秋。
手折黃花對白鷗。
仰德至今淸夜夢。
月明時復到中洲。
높은 대에 오르샤 새 곡조 부르시며 깊어가는 가을 즐기시리
국화 꺾어 손에 드시고 해오라비 바라 보시리
오늘도 높은 덕 존앙하여 맑은 꿈을 꾸나니
달 밝은 때 다시 강물 속 섬으로 갑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9
1555년 농암 89세. 3월, 55세 퇴계가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수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절구 두 수를 지어 보냈다. 퇴계가 임강사의 반도단으로 농암을 찾아뵈었다. 이날 퇴계와 만대정(晩對亭)에서 꽃을 감상하였다. 또 퇴계와 반도단을 유람하였다. 퇴계는 〈숭정대부 행 지중추부사 농암 이선생 행장(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聾巖李先生行狀)〉에서 이때의 일을 반추하며 “올해 봄에 내가 서울에서 돌아와 임강사의 반도단에서 공을 두 번 뵈었는데, 매우 기쁘게 맞아주었다. 이제부터 길이 문하에서 제자의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퇴계는 스스로를 ‘제자’라 자처하였다. 4월에 농암은 장편 율시를 지어 퇴계의 모당(茅堂)으로 보냈다. 6월에 농암의 병환이 점점 위독해졌다. 이때 퇴계가 와서 문병하고 곁에 있었다. 농암은 13일 긍구당(肯構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퇴계가 아들 첨정공 이준(李寯)에게 보낸 편지에 “지사 선생(知事先生)이 결국 돌아가셨으니, 나라의 불행이요 우리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1556년, 7월에 퇴계가 지은 〈행장〉이 완성되었다. 퇴계의 명언 가운데 하나로, “소원하는 바는 선인이 많은 것, 선인은 천지의 벼리이기 때문〔所願善人多, 是乃天地紀.〕”주-D0012이라는 시구가 있다. 퇴계는 농암이야말로 천지의 벼리인 선인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구에 대한 주석이라고 말해도 좋을, 퇴계가 〈행장〉에서 서술한 농암의 덕행은 다음과 같다.
고을에 다급하게 구휼할 때는 여유가 있고 없음을 따지지 않아, 간혹 자신은 남에게 꾸어서 먹은 적도 있었다. 임금의 하사품은 이웃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혹은 술과 안주를 차려서 노인들을 불러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즐겼다. 남을 위하는 데는 부지런했으나 자기를 위하는 일은 못하였으며, 몸가짐을 곧게 하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한 가지 경사가 있으면 근심이 낯빛에 드러나고 한 번 벼슬이 오르면 즐거워하기보다 조심하고 두려워하였다. 담박하고 욕심이 적어서, 입고 쓰는 모든 물품이 간소하고 화려하지 않아서 서생(書生)이나 다름없었다. 평소 생활에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였으며, 정침(正寢)에 나가 하루 종일 거처하였는데, 주렴과 책상이 깨끗하였으니, 비록 춥고 더울 때라도 항상 그러하였다. 자제와 비복에 대해 편애하지 않았고, 문벌 있는 집과 혼사 맺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성품이 고상하고 깐깐하였지만 사람을 상대할 때는 어리석고 빈천함을 가리지 않았고 겉과 속이 한결같아, 혹 술상을 차리고 초청하면 구태여 거절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살 때에는 사정(私情)으로 해서 공사(公事)에 지장을 준 적이 없었다. 본현은 호구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종전의 부역법이 한집에서 한 사람씩 내게 되어 있었으므로 식구가 적은 집이 폐해를 입었다. 공이 발의(發議)하여 전답 8결(結)에 1명씩을 내도록 하니, 이때부터 부역이 균일하여 나라와 개인이 모두 도움을 받았다. 일을 요량할 때는 명철하게 살펴 곡진하고 세심하게 하여, 만약 의심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허심탄회하게 자문하여서 행하였고, 이미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가리거나 숨기지 않고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고 고쳤으니, 이것이 더욱 남들이 미치지 못할 점이었다.
퇴계가 기술한 농암의 면모들은 퇴계의 선인론에 하나하나 부합한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남을 위하는 데는 부지런했으나 자기를 위하는 일은 못하였으며, 몸가짐을 곧게 하고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한 가지 경사가 있으면 근심이 낯빛에 드러나고”라는 기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종전의 부역법이 한집에서 한 사람씩 내게 되어 있었으므로 식구가 적은 집이 폐해를 입었다. 공이 발의(發議)하여 전답 8결(結)에 1명씩을 내도록 하니, 이때부터 부역이 균일하여 나라와 개인이 모두 도움을 받았다.’라는 기술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암의 이 선행은 공정을 기초로 한 덕행이다. 자신의 계층 이해를 떠나 아니 손해가 있더라도 공도(公道)를 지향하는 근본이 표출된 사례라고 할 것이다.주-D0013
이러한 두 분의 관계에서 농암과 퇴계를 사제로 규정해야 하는지 아닌지는 후세에 논란이 있었다. 논란이 있을 수 있고 또 양측의 견해가 일리 있다고 할 수 있다. 농암이 퇴계의 학문의 길에 영향을 끼친 메시지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앞에서 살핀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안동향교에서 농암은 퇴계에게 사서오경 관련 강설을 하였고, 퇴계의 은일과 면학의 여정에 유례없는 지지와 격려를 하기도 하였으니, 이런 관점에서 두 사람을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퇴계가 침잠하여 마침내 성취한 학문의 본령은 성리학(性理學)이고 농암이 퇴계에게 ‘성리학’을 계도(啓導)하였다는 구체 증좌는 없기에 이런 관점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고 하기 어렵다. 바탕은 유가(儒家)이면서 강호의 풍류를 향유하며 도가(道家)의 분위기가 있던 농암을 퇴계가 ‘노선백(老仙伯)’, ‘지선(地仙)’이라고 존칭하였던 1550년 사례 등을 참조하면 퇴계는 농암을 유도절충론자(儒道折衷論者)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퇴계에 있어서의 농암은 무엇보다도 귀중하며 둘도 없는 ‘인생의 스승’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두 분의 소통을 형영불리(形影不離)였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퇴계가 농암에서 느낀 ‘인생의 스승’임이 가장 절실했던 상황은 1547년에 있었던 봉성군(鳳城君) 사건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집》 〈연보〉 47세 조에 “농암 이 선생께 올리는 시가 있다.
〔有上聾巖李先生詩〕”라 하고 다음의 시를 수록 하였다.
높은 대에 오르샤 새 곡조 부르시며 깊어가는 가을 즐기시리
/ 高臺新曲賞深秋
국화 꺾어 손에 드시고 해오라비 바라 보시리 / 手折黃花對白鷗
오늘도 높은 덕 존앙하여 맑은 꿈을 꾸나니 / 仰德至今淸夜夢
달 밝은 때 다시 강물 속 섬으로 갑니다 / 月明時復到中洲
〈연보〉는 이 시가 지어진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달에 규암 송인수, 준암 이약빙이 사사(賜死)되었다.
또 회재 이 선생 등 20여 명의 현인들이 모두 조정에서 쫓겨나 귀양 갔다.
선생은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용퇴할 수 없었다. 이에 국화와 해오라비 사이에서 선유(船遊)를 하며 휴한(休閑)히 지내는 농암 선생의 풍절(風節)을 돌이켜 생각해 보며 더욱더 그리워하고 우러르며 탄식하였다. 농암 선생과 함께할 수 없었으므로 시의 뜻이 이와 같았다.〔是月, 宋圭菴麟壽, 李罇嵓若冰賜死. 又晦齋李先生, 凡諸賢二十餘人, 皆竄逐. 先生方於危疑之際, 亦勇退不得. 于以回想聾嵓先生之休閑風節於黃花白鷗之間, 更足以願慕歎仰, 而恨不同之故, 詩意有如此.〕”
퇴계는 고향에서 양병(養病)하다가 불려와 당시 홍문관 응교 직에 있었는데 그 와중에 봉성군(鳳城君) 문제도 야기되었다. 이기(李芑)ㆍ윤원형(尹元衡) 등은 중종의 다섯째 아들인 나이 겨우 20살 봉성군도 연루시켜 사사하였다. 삼사(三司)에서 그의 처형을 논의할 때 퇴계는 직책상 어쩔 수 없이 참석하였으나 홀로 가담은 하지 않았는데, 뒷날 정인홍이 〈정맥고풍변(正脈高風辨)〉에서 퇴계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 일은 퇴계의 사환(仕宦) 생애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이때 퇴계의 절친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도 죽음을 당했다. 이 괴로운 상황에서 퇴계는 농암의 ‘휴한풍절’을 우러르며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시 뿐 아니라 농암 〈연보〉에서 퇴계 관계 기사를 점검하며 유례가 드물게 아끼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공경하는 두 마음의 교직(交織)을 읽을 수 있다. 농암의 퇴계 사랑과 기대가 표현된 절창(絶唱)은 말년에 서울에서 사환 중에 있는 퇴계에게 보낸 〈여퇴계서(與退溪書)〉의 다음 한 구절일 것이다.
자네가 언제 남쪽으로 돌아올지 기약하기 어렵고 나는 늙어 숨소리가 날로 가늘어지니 더욱 그리움만 더하네. 다만 더욱 평소 절개를 가다듬어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랄 뿐이네.〔南還久近難期, 老我氣息, 日益奄奄, 尤增戀念. 只冀益礪素節, 以副民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