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Romanticism)음악
2019.01.26 20:40
낭만주의라는 말은 영어의 로맨티시즘(romanticism)을 한자어로 번역한 것이다. 로맨티시즘은 ‘로망스어로 쓴 이야기’라는 말이고 로망스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의 언어를 통틀어 일컫는다. 로망스어 된 이야기들은 영웅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중세의 이야기로 장르적으로는 시(詩)와 같은 문학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낭만주의란 말은 모든 예술이 시와 혼합되려는 양상을 보이는 것과도 상통한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낭만적이라는 말은 뭔가 거리가 먼 것, 전설적인 것, 허구적인 것, 환상적인 것, 실제 세계와는 대조를 이루는 상상의 세계나 이상의 세계를 의미하는 말이 되어가고 있었고 여기에 아름다움이 더해지면서 19세기에는 아름답고도 기묘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정신이 되었다.
고전주의가 질서와 균형, 통제, 일정한 한계를 완전성으로 보는 반면에 낭만주의는 이런 한계성을 극복하려고 한다. 즉 성취될 수 없는 것을 목표로 하고 갈망하기 때문에 당면한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영원한 것을 잡으려 하고 현실 세계의 범위를 넘어 우주로 나아가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구분을 기피하고 의도적인 애매함이 고전적인 명료함을 대신하고 임시와 상징이 명확한 표현이 되기도 한다. 물론 전기 낭만파(대략 1820 ~1850)가 선율은 민요곡풍이기도 하고 지방색을 강하게 나타내면서도 음정이나 동기의 배열, 매듭을 짓는 법 등은 아직 고전주의의 틀 안에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계급성을 어느 정도 탈피한 시민계급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고전주의가 가진 엄격한 형식이나 규율에 얽매이는 것을 차츰 벗어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현실과 동떨어진 일 상상속의 일을 소재로 한 문화적인 풍조가 퍼지면서 문학, 미술, 사상 등에 영향을 미쳤고 1820년대에는 음악에도 그 분위기가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또한 사회가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가능한 구조로 바뀌면서 연주장이 넓어지고 오케스트라의 규모도 커질 수 있어 이전과는 다른 훨씬 다양한 음악을 만들 수가 있었다. 한 예로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211 ~ 18690308)는 360명의 합창단과 467명의 기악 연주자를 동원하기도 했다. 악기도 많이 개량되어 바이올린류에 사용하는 활의 모양이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 관악기에 키나 밸브 등을 부착해 연주하기가 더 편리해졌고 소리도 커지고 더 정확해졌다. 또한 아마추어 합창단이 융성했다. 독일에서는 맥주집을 중심으로 그 전통이 아직 내려져 오고 있다.
음악사에서 낭만주의는 19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 융성했다. 낭만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인정받는 작품은 베버(Carl Maria Friedrich Ernest von Weber, 17861118 ~18260605)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다. 독일의 숲을 배경으로 한 사냥꾼의 이야기로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민요풍이 선율, 호른을 4개나 등장시킬 정도의 환상적인 관현악법. 합창의 멋을 보여준 사냥꾼의 합창 등으로 전대미문의 음악 가극이 탄생했다.
낭만주의 시대는 고전주의와 대비해 언어로 적극적인 표현을 했다는 데 있다. 19세기 가장 특징적인 형식 중 하나는 리트(Lied)로써 음악과 시 사이에 새롭고 친밀한 결합을 이룩한 성악 작품이다.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쓴 기악곡에서도 교향곡의 극적인 면보다는 리트의 서정적인 정신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이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은 문학적 표현에 관심을 가졌고 이것으로 음악적으로 어떻게 시도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베버, 베를리오즈,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0608 ~ 18560729)은 더 나아가 음악에 관한 수필을 썼으며 바그너는 시와 수필을 썼다. 문학과 음악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리스트는 표제음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수사적인 음형을 사용하거나 자연계의 음향이나 움직임을 모방하지 않고 상상력에 의한 암시를 사용한다. 표제음악은 표제가 있어서 한계를 긋는 것 같으면서도 상상의 소재를 음악으로 만들어 표제를 뛰어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로 인해 기악은 가사로 표현하기 힘든 사상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19세기 표제음악의 출발점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217 ~ 18270326)의 <전원 교향곡(Pastorale)>이다. 낭만주의 음악을 이야기와 시에 결부시키기 쉬운 이유는 이렇듯 작곡가들이 표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0131 ~ 182811월19)의 <마왕(Erlkönig)>과 <겨울나그네(Winterreise>, 슈만의 <시인의 사랑(Diechterliebe)>, <여자의 일생(Frauenlibe Und Leben)> 등의 가곡, 혹은 연가곡(여러 개의 노래를 묶은 것)이 이 시대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없는 기악곡임에도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Aufforderung Zum Tanz)>,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Kinderszenen)>처럼 작품에 제목(표제)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멘델스존(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0203 ~ 18471104)은 자신의 피아노 작품집을 <무언가집(Lieder ohne Worte)>이라고, 슈베르트는 <즉흥곡(Impromptu)>, <즉흥의 순간(Moments Musicaux)> 등의 이름을 붙였다. 교향곡에도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 멘델스존의 <스코틀랜드(Scottish)>, 슈만의 <봄(Spring)>처럼 제목이 붙었고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Fingal’s Cave)>,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등의 관현악곡에도 제목이 붙었다.
연주가 복잡해지고 화려해졌으며 전주와 후주 등이 길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바이올린의 귀재라 불리는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1027 ~ 18400527)가 있다. 리스트는 이전의 교향곡과는 다른 교향시라는 장르를 새로 확립했다. 위에 언급한 전기 낭만파의 작곡가들 외에도 오페라의 흥행사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0229 ~ 18681113), 벨칸토 가극의 대가 도니제티(Domenico Gaetano Maria Donizetti, 17971129 ~ 18480408), 천재 오페라 작곡가 벨리니(Vincenzo Salvatore Carmelo Francesco Bellini, 18011103~18350923), 그랜드 오페라를 확립시킨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 179109 ~ 18640502), 프랑스 희가극의 대표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06 20일 ~ 18801005), 종교음악의 미를 추구한 구노(Charles-François Gounod, 18180617 – 18931018), 피아노의 시인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0301~18491017) 등이 있다.
후기 낭만주의는 보수파와 급진파로 나뉜다. 보수파는 교향곡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데 주력한 음악가들로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0507 ~ 18970403), 말러(Gustav Mahler 18600707 ~ 19110518), 브루크너(Joseph Anton Bruckner, 18240904 ~ 18961011) 등이고 급진파는 교향곡이라는 굴레을 아예 벗어버리고 자유로운 형식의 새로운 표제음악인 교향시를 연구한 리스트( Franz Liszt, 18111022 ~ 18860731),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0522 ~ 18830213),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0611 ~ 19490908) 등이다. 급진파는 시나 소설, 극 같은 음악 이외의 요소를 음악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쪽으로 발전했고 가극도 바그너 같은 경우는 시와 미술과 음악이 무대 위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음악극을 만들어 이전의 가극과 완전히 구별되는 악극을 창시했다. 후기의 경우는 바그너의 입지가 너무나도 강하고 큰 인기를 얻었기에 대부분의 작곡가들, 심지어 보수파의 말러와 브루크너 역시 바그너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오로지 브람스만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거나 따르기보다는 과거의 음악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에서 언급한 작곡가들 이외에 후기의 작곡가들로는 이탈리아
가극의 일인자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010 ~ 19010127),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ß II, 18251025 ~ 18990603),
프랑스 기악곡의 구세주 생상(Charles-Camille Saint-Saëns; 18351009 ~ 19211216),
혁명적인 오페라 청년 비제(Georges Bizet, 18381025 ~ 18750603),
사실주의 가극의 결정판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222 ~ 19241129),
음악계의 아웃사이더 말러(Gustav Mahler 18600707 ~ 19110518),
낭만주의 최후의 극작가 볼프(Hugo Wolf, 18600313 ~ 190302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