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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어떻게 죽을 것인가? (Being Mortal) -- 현대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서울: 부키, 2015)
현대의학은 부상과 질병으로부터 인명을 구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있어 획기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저해하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하다. 요양원에서는 안전에 신경을 쓴 나머지 노인들을 24시간 (잘 때는 침대에, 일어나서는 휠체어에) 묶어 놓고 지내게 하는 수도 있으며, 병원에서는 종종 소생의 가망성이 없는 환자들이 화학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구토증과 고통스러운 두드러기, 피로감에 찌든 상태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격리된 채 보내게 하는 것이다. 하버드 보건대학원 교수이며 의사인 저자 아툴 가완디는 여러 가지 요양 모델과 호스피스 케어를 열거하며 환자나 노인들이 보다 사회적으로 유용하며 개인적으로 보다 인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월스트리저널』에 의해 ‘2014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고 2015년 영국 『프로스펙트』지가 ‘세계적인 사상가 50인’에 선정한 작가의 감동적이며 짜릿짜릿한 이 책의 내용을 발췌, 재구성하여 긴 책을 읽을 형편이 되지 않는 분들께 그 요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책은 저자가 의대생 시절 읽은 톨스토이(1828-1910)의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야기로 시작된다.
지적이며 세련된 상트페테르부르그의 중간급 치안판사인 마흔다섯 살의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그런 저런 문제들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 날 사다리에서 떨어진 뒤 옆구리에 통증을 느낀다. 통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져서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전에는 활기차고 상냥한 사람이었던 일리치가 점점 우울해지고 쇠약해지자 친구와 동료들은 그를 피한다. 그의 아내는 점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의사들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아무도 다른 의사의 진단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이 내린 처방은 하나같이 소용이 없다. 자신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는 이 상황에 일리치는 화를 내기만 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기만과 거짓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가 그는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플 뿐이며, 잠자코 치료를 받기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때로 어쩌면 상황이 좋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몸이 허약해지고 수척해가면서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고, 극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채 산다. 그러나 의사, 친구 가족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용납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일리치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다.
“아무도 그가 원하는 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계속된 통증을 겪고 난 후에 그가 가장 원했던 건 (수치스러워서 그 사실을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아픈 아이에게 그러듯이 자기를 동정해 주는 것이었다. 누군가 다독거리며 안심시켜주기를 갈망했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자리에 있는 공무원인데다 턱수염이 하얗게 세기 시작하는 나이임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위안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저자 가완디는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말고도 다른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직접 선택을 하며, 자신의 삶이 완결됐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점을 간파했다. 이반 일리치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되자 이전까지의 야망과 허영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는 그저 안식을 원했고 누군가 옆에 있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걸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족도, 친구도, 아내가 돈을 들여 데려오는 의사들도 말이다.
톨스토이는 생명의 덧없음과 씨름해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관점 사이에 얼마나 깊은 틈이 있는지를 본 것이다. 그는 특히 그런 사실을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이해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통찰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죽게 되고 말 거라는 생각에 욕구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해도, 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의 가족, 친구, 의사들 중 그 누구도 그가 필요로 하는 걸 알지 못하지만, 그의 하인 게라심은 이해한다. 게라심은 일리치가 고통스럽고, 두렵고 외롭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를 가엽게 여긴다. 언젠가 자신도 주인과 같은 운명을 겪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일리치를 피하지만, 게라심은 그에게 말을 붙인다. 게라심은 일리치가 여윈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올릴 때만 통증이 가라앉는 걸 알게 되자 밤새 같은 자세로 앉아 그의 고통을 덜어준다. 심지어 일리치를 안아서 변기까지 왔다 갔다 하고 뒤를 닦아주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일리치의 저물어 가는 삶에 차이를 가져왔다.
“개라심은 이 모든 일을 마음 편히, 자진해서, 꾸밈없이 유쾌하게 해냈다. 그게 이반 일리치의 마음에 와 닿았다. 일리치는 다른 사람의 건강하고, 힘 있고 생기 넘치는 모습을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게라심의 힘과 생기만큼은 그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위안이 됐다.”
기술에 의존한 의학적 처치는 종말을 앞둔 환자들의 그런 인간적인 욕구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완전히 실패했다고 저자 가완디는 주장한다. 보통 의료행위는 병을 낫게 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더라도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다면 그렇게 한다. 혈관에 화학약품을 투여하고, 목구멍에 관을 삽입하고, 살에 수술로 꿰맨 자국을 가진 채 죽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남은 시간을 더 단축시키고, 삶의 질을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낳는다. 의사들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자동모드를 켜고 그 뒤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인턴이었을 당시 경험한 라자로프라는 환자의 경우를 회상한다. 전립선암이 몸 전체에 전이 되어 복부 음낭 다리에 물이 차올라서 다리를 움직일 수 없고 배변도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암이 흉추까지 번져서 척수를 누르고 있다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암 자체는 고칠 수 없었다. 하지만 의료진은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비상 방사선 치료에도 암세포는 줄지 않았다. 신경외과 주치의는 그에게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하나는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완화치료, 다른 하나는 척추에서 점점 자라나는 암세로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이었다. 라자로프는 수술을 선택했다. 당시 신경외과 인턴이었던 가완디의 임무는 그가 수술에 따르는 위협을 이해하고 있으며, 수술하기를 원한다는 확인 서명을 받는 것이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척수손상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은 있었다. 하지만 암을 완치하거나 마비를 되돌릴 수도,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잘해야 몇 달 이상 살지 못 할 것이고, 수술 자체의 위험은 물론 그로 인한 마비 뇌졸중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을 수 있다. 병실에 있던 그의 아들이 그렇게까지 용기를 내어 수술 받는 것이 과연 좋은 생각인지 물었을 때, 그는 마뜩찮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날 포기하겠다는 거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라쟈로프에게 서명을 받은 후 병실 밖으로 나오자 그의 아들이 따라 나오며 저자를 잡았다. 어머니가 중환자실 인공호흡기에 매달린 채 임종했을 때 아버지 자신은 저렇게 죽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겠다고’ 저렇게 고집을 피운다는 얘기였다.
저자는 당시 라자로프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수술에 따르는 위험 때문이 아니라 수술을 받아도 그가 원하는 삶을 되찾을 확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변 능력, 활력 등 병이 악화되기 전에 그가 누렸던 생활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수술이 아니었다. 길고도 끔찍한 죽음을 경험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추구한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그는 그런 죽음을 맞이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그는 호흡부전이 생겼고, 전신감염에 걸렸으며, 움직이지 못해서 어혈이 고였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투여한 혈액 희석제 때문에 출혈을 일으켰다. 의료진은는 날마다 뒤처지고 있었다. 결국 의료진은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 후 14일째 되는 날, 그의 아들은 의료진에게 이 모든 것을 그만 멈춰달라고 말했다.
‘암에 대처하기(Coping with Cancer)'라는 2008년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심각한 질병을 앓는 말기 암 환자가 기계적인 인공호흡, 전기적인 심폐 소생술, 심방압박치료를 받았거나 중환자실에 들어가 집중치료를 받았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마지막 일주일에 경험한 삶의 질이 훨씬 나빴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환자가 사망한 지 6개월 후 그를 돌봤던 사람들이 심각한 우울증을 겪을 확률도 세배나 높았다.
2010년의 다른 연구에 참여한 완화치료 팀은 환자들을 만나 만약 상황이 악화된다면 그 때 우선순위와 목표를 어디에 둘 것인지 이야기 나눴다 (완화치료 팀은 환자들의 고통을 방지·완화하는 전문가들이고, 환자가 죽어 가는지 아닌지 상관없이 만날 수 있다). 그 결과 완화치료 전문가들과 상담한 환자들은 화학요법 치료를 더 일찍 중단했고, 호스피스 케어를 더 일찍 선택했으며, 삶의 마지막 순간에 고통을 덜 경험했다. 게다가 생존 기간도 25%나 늘어났다.
최근 많은 개혁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로원 요양원에서도 요원들은 ‘어시스티드 리빙,’ 즉 해당 노인이 잘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와 기쁨이 어떻게 하면 유지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려 하지 않는다. 저자는 말한다 - “잔인함에서 보다는 몰이해에서 그렇겠지만, 톨스토이가 말했듯, 그 둘이 결국 뭐가 다르겠는가?”.
요양원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어시스티드 리빙’의 성공여부를 잴 수 있는 척도가 없다는 점이다. 반면 위생과 안전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밀한 평가 기준이 있다. 이쯤 되면 노인들을 위한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어떤 부분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일지 짐작할 수 있다. 노인들의 내면이 어떤 상태일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넘어져서 다칠 노인들의 안전을 위해 24시간 결박해 놓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실망스럽고 보다 중요한 문제는 어시스티드 리빙 시설이 노인들을 위해서라기보다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노인들이 어디에서 살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대개 자녀들이다. 시설들은 고객유치를 위해 고급호텔의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현관 같은 ‘시각효과’에 주안점을 두고, 시설이 안전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중년에 이른 자식들이 자기 부모들을 위해 해줬으면 하는 것들이지만, 반드시 노인들이 바라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선택권을 갖기를 바라는데 이를 최우선시 하겠다는 시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1908년, 하버드 대학의 철학자 조시아 로이스Josiah Royce는 『충성심의 철학 (The Philosophy of Loyalty)』라는 책에서 인간이 삶이 가치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대의가 필요하다고 하며 그것을 인간 본연의 한 욕구로 보았다. 그 대의는 큰 것(국가, 인류, 정의)일 수도 있고 작은 것(애완동물, 작품완성과 같은 자잘한 계획)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대의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것을 위해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로이스는 자신을 넘어선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걸 ‘충성심(loyalty)'이라고 부르며 개인주의에 반대 개념으로 간주한다. 개인주의자는 자신의 이익을 가장 먼저 앞세운다. 개인주의자에게 자신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데, 죽으면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자기희생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개인주의주에게 죽음은 그저 공포로 다가올 뿐이다. 죽음을 의미 없는 것으로 느끼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가족, 공동체, 사회 등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 즉 ’충성심‘을 통해 우리같이 평범하고 유한한 존재가 자신을 넘어서는 대의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와 같은 개념을 ’초월(transcendence)'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모두 단순한 기쁨이 주는 안락함을 찾게 된다. 동료애와 우정, 규칙적인 일상, 맛있는 음식, 얼굴에 와 닿는 햇살의 온기 같은 것 말이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성취하고 축적하는 것보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에서 얻는 행복감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야망이 점점 줄어드는 걸 느끼게 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남기고 갈 것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다는 것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느끼도록 해 주는 목적을 우리 밖에서 찾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된다.
‘에덴 올터너티브(Eden Alternative)'이라는 이름으로 애완동물, 어린이 방문 프로그램, 가꿀 화분과 채소밭을 체이스 메모리얼리란 요양원에 도입하면서 이 요양원의 입주자들은 충성심을 표현할 기회를 얻었다. 아주 제한적이긴 했지만 단순히 존재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에 매달릴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를 얻은 것이다. 침울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무료한 생의 종말을 기다리고만 있던 사람들에게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나는 게 보였어요. 그들이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시작하고,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웃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보통 짜릿한 느낌이 아니지요.” 이 실험을 도입한 빌 토머스씨의 말이었다.
저자는 묻는다. 만일 우리가 전이 암 혹은 그와 비슷한 불치병으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면 의사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랄까?
이 문제는 최근 비용문제로 인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메디케어 비용의 25%가 생의 마지막 1년에 접어든 5%의 환자에게, 그것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최후 1~2개월에 집중되어 사용된다. (필자 주: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의료비 지출도 유사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최근 발표한 '2015년도 진료비 심사실적 통계'에 의하면, 작년 건강보험 가입 노인의 진료비가 21조원으로 전체 진료비의 3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건강보험에서 지급된 진료비는 전년대비 6.4% 증가한 58조원이었다. 진료비는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는 진료행위에 대한 환자 본인부담금과 건강보험 부담금을 합한 것으로, 환자가 100% 비용을 부담하는 비급여 진료행위의 진료비는 빠져 있다.)
2011년도 연구결과에 따르면, 전이성 유방암 환자가 마지막 1년에 들이는 비용은 평균 94,000달러다. 현대의학은 한달에 1만2000달러가 드는 화학요법, 하루에 4000달러짜리 집중치료, 시간당 7000달러짜리 수술 등으로 죽음을 미루려 애쓰는 데 능하다. 그러나 결국 죽음은 오고야 마는데도 어느 시점에 치료를 멈춰야 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드는 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줄 복지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한 때 많은 사람들이 호스피스 케어가 죽음을 재촉한다고 믿은 적이 있다. 환자들이 병원치료를 포기하고 높은 용량의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의 연구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한 연구에서 말기 암이나 말기 울혈심부전증을 가진 4493명을 대상으로 추적 조사한 결과, 유방암, 전립선암, 대장암 환자들의 경우 환자들의 생존기간에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췌장암 환자는 평균 3주를 더 살았고, 폐암 환자는 6주, 울혈심부전 환자는 6개월을 더 살았다. 이 결과는 거의 선(禪)적인 메시지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더 오래 살려는 노력을 멈춰야 더 오래 산다는.
저자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개인적인 축복이며 사회적으로 유용한 복지 시스템의 바탕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한 사례들을 보여 준다.
위스콘신주 라 크로스에서는 단지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완화치료나 호스피스케어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지역 병원 중환자실 환자들의 증상은 대부분 여느 중환자실과 다름없지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말기 전이성 암이나 치료 불가능한 심부전이나 치매와 고통스런 전투를 벌이는 환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 노인들이 생의 마지막 6주 동안 병원에서 보내는 날짜 수는 전국 평균의 절반밖에 되지 않고 노인들의 마지막 병원비 또한 그만큼 낮다.
1991년부터 라 크로스 지역 보건당국은 담당 의료진과 환자들로 하여금 삶의 마지막 시기에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 켐페인을 벌려왔고, 병원과 요양원 시설에 들어가는 모든 환자들에게 다음 네 가지 주제로 압축될 수 있는 설문지를 작성토록 관례화 시켰다.
1. 심장이 멈추면 심폐소생술을 받을지 여부.
2, 삽관이나 기계적 인공호흡기 같은 공격적 치료를 받을지 여부.
3. 항생제 투약을 원하는지 여부
4. 음식을 먹지 못할 경우 관이나 정맥주사로 영양공급을 받을지 여부
이 서식에 중환자실에 들어 올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상세히 적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예/아니오’로 답해 놨다 하더라도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복잡한 뉴앙스까지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설문지 자체가 아니라 이를 계기로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환자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환자 자신이나 가족들과 논의하기가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
저자와 같은 보스톤의 병원에서 완화치료 전문가로 일하는 수전 브록 교수의 경우는 더욱 교훈적이다. 그녀는 결정을 내여야 할 시점이 오기 전에 환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꼭 물어야 할 질문 목록을 가지고 있다. 병의 예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앞으로 일어날 일 중 무엇이 염려스러운지, 기꺼이 희생할 용의가 있는 것은 무엇인지, 건강이 더 악화되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할 상황이 되면 누구에게 위임할 것인지 등이다.
10년 전, 수전의 아버지 잭 블록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당시 그는 일흔 네 살이었고 버클리의 명예 교수로 있었다. 블록 교수는 목 부분 척추에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소식을 들은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버클리로 갔다. 신경외과 의사는 종양제거 수술을 해도 목 아래 전신마비를 일으킬 확률이 20%나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수술을 하지 않으면 100% 전신마비가 올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수술 전날 저녁, 아버지와 딸은 친구와 가족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수전은 한동안 그렇게 아버지와 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돼서야 병원에서 나왔다. 베이 브리지를 반쯤 건넜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맙소사, 아버지가 원하는 게 뭔지 난 전혀 모르잖아.’ 아버지는 그녀를 자신의 건강 문제 대리인으로 지정해 둔 상태였다. 수전은 차를 돌려 병원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그런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게 정말 싫었어요.” 그럼에도 그녀는, “아버지, 제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하며 자신의 목록에 있는 이야기들을 모두 꺼내 놓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이 충격적이었다. “글쎄,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미식축구 중계를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살고 싶구나.” 대학교수로서 미식축구 중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이 뜻밖의 대답은 정말 중요한 것이 되었다. 수술 후 블록 교수의 척수에 출혈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아버지를 살리려면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아버지가 이미 출혈로 거의 사지가 마비된 상태이고, 적어도 몇 달 동안, 어쩌면 영원히 심각한 장애를 겪을 거라는 전망도 덧붙였다.
“3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이미 결정을 해줬다는 걸 깨달았죠.” 그녀는 의사에게 아버지가 살아난다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미식축구 중계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예스”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재수술에 동의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아버지를 포기하고 말았을 거예요. 그리고는 내내 후회했겠죠 아버지를 너무 빨리 포기해 버린 게 아닐까 하고.” 아니면 순전히 자신 혼자만의 결정으로 아버지를 수술대로 보내 놓고, 그가 ‘끔찍한 재활치료’를 1년이나 받은 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의 아버지는 어떻게 결말이 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실제로 끔찍한 고통을 장기간 겪었다) “그런 고통을 안겨드린 것을 엄청나게 자책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결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이미 모든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그 후 블록 교수는 2년에 걸친 재활치료를 통해, 음식물을 삼키는데 어려움을 겪고 옷을 입고 벗는데 도움이 필요했지만, 정신은 멀쩡했고 손도 부분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수술 후 10년을 더 살았는데, 아이스크림을 먹고 미식축구 중계를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책 두 권을 집필하고 10여건의 과학 논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이른바 기술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학자들이 ‘죽는 자의 역할’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잊고 말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 ‘죽는 자의 역할’이라는 개념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죽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둔감하게 도외시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수행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의학계에 종사하는 분들이 삶의 마지막에 이른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도, 해를 입혔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 일을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페그 바첼더 선생님은 ‘죽는 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분이다. 저자의 딸이 피아노를 배우고 있던 페그 선생님은 결혼은 하였으나 자녀가 없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애정을 쏟고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던 사람이다.
그녀는 예순 둘의 나이에 육종이 골반을 먹어 들어가는 암에 걸렸는데, 1년 후엔 항암치료의 후과로 백혈병과 유사한 악성종양까지 겹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녀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저자가 물었을 때, 자신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안다고 했고 병원에서 “해줄 것이 별로 없대요”라고 말할 땐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이 순간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룰 가능성이 있는 목표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몸을 제어할 능력을 더 잃는 수치스러운 상황, 결국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등등 말을 이어 가는 그녀는 목이 메었다.
페그 선생님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 중에는 ‘존엄사’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질 경우 그렇게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게 분명해 보인다면 그것만이 유일하게 스스로를 제어할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주위의 설득으로 호스피스 케어를 받아들였다. 호스피스 케어가, 집으로도 돌아갈 수 있게 하고, 환자가 처한 상황에서 최상의 나날을 보낼 수 있게 한다는 설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처음에 페그 선생님의 목표는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호스피스 팀은 그녀가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도록 병원침대를 1층 거실에 설치하고, 침대 옆에 이동식 변기를 가져다 놓았으며 몸을 씻거나 옷을 입을 때 도와줄 도우미도 구해 줬다. 또한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모르핀, 가바펜틴, 옥시코돈을 처방했고, 그 약들로 인해 혼미해지는 증상은 메틸페니데이트를 사용해 효과적으로 잡았다.
페그 선생님은 일상적인 문제를 제어할 수 있게 되자 안정을 되찾았고 좀 더 높은 목표를 잡았다. 아이들의 레슨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라지기 전에 아이들에게 꼭 가르쳐 주고 싶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소중한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제자들과 이별하기 전에 조언을 남기는 것이 아내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녀의 남편이 훗날 그렇게 말했다.
페그 선생님은 호스피스 케어를 받기 시작한 후 6주를 더 살았다. 그 사이 아이들 레슨은 4주를 했고 그녀를 위한 두 번의 연주회가 있었다. 하나는 당시 배우고 있던 초등학생 아이들의 연주회였고, 다른 하나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예전 제자들의 연주회였다. 모두들 그녀의 집 거실에 모여 사랑하는 선생님을 위해 브람스, 드보르작, 쇼팽, 베토벤을 연주했다. 마지막 연주회가 끝나 갈 무렵, 그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저자의 딸아인를 데려간 다음 음악책을 한 권 건네면서 어깨를 꼭 감싸 안았다. 그리곤, 딸아이의 귀에 속삭였다. “너는 아주 특별한 아이란다.” 아이가 꼭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이 담긴 말이었다.
그 후 3일간 페그 선생님은 고열로 의식을 잃은 후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를 반복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정체성과 충성심을 잃지 않은 채.
완화치료나 호스피스 케어 통한 ‘어시스티드 리빙’은 병들고 노쇠한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가능성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삶에 대한 자율성과 통제력을 유지하게끔 한다는 논리는 이를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하는 미묘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 논리는 스스로 종말을 앞당기기를 원할 때도 돕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보통 우리가 말하는 ‘안락사assisted suicide’를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오늘날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와 미국의 오리건, 워싱톤 등 일부 주에서는, 비록 오용을 방지하기 위한 매우 엄격한 세부 규정을 두고 있지만, 의사들의 안락사 처방을 허용하고 있다. 안락사는 개념적으로 인간이 자살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윤리적 난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안락사가 불법인 나라에서조차도 현실적으로 안락사를 일부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누군가가 음식물이나 물, 투약이나 치료를 거부할 경우 그 뜻을 존중해 주는 것이나 마약성 진통제와 진정제가 죽음을 앞당긴다는 걸 알면서 고통과 불편을 줄이기 위해 처방하기도 한다. 저자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고통을 받는 것이 피할 수도 견딜 수도 없는 일이 되는 경우 스스로 그 비참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도울 필요가 있음을 인정한다. 결국 안락사 논쟁은 우리가 고통을 연장시키는 실수와 가치 있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실수 중 어떤 실수를 저지르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지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의료행위가 그 지평을 넓혀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일에까지 손을 뻗을 경우, 즉 안락사에의 의존이 심화될 경우에 대한 두려움을 숨기지 않는다. 수십 년 전 안락사 제도가 정착한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의 빈도가 증가해 와서 2012년 현재 35명 중 1명이 이 제도를 택하는데, 네덜란드의 이 수치는 성공의 척도가 아니라 실패의 척도라는 것이다. 안락사 시스템이 정착돼 있는 탓에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완화치료와 같은 ‘어시스티드 리빙’ 프로그램의 개발에 뒤져 있다. 장애가 발생하거나 심각한 질병에 걸렸을 때 다른 방법으로 삶을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믿음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안락사가 허용되어 있지 않지만 매년 수십명이 돌아오는 항공권을 끊지 않고 스위스로 죽음의 여행을 떠나는 독일에서 ‘어시스티드 리빙’이 뒤져 있고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네덜란드의 실패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 필자 주)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일관되게 주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Being Mortal』의 한글판 제목 또한 『죽을 때까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에 보다 부합하는 의역일 것이다. 끝
첫댓글 이 글을 올려야 할 마땅한 방이 확실치 않아 "사랑방"으로 했습니다. 제가 다른 일정과 겹쳐 지암원 월례 사랑방 모임에 좀체 참석할 수가 없어 온라인으로 대신합니다. 신우백낙서
부이사장님 좋은글과 사랑방을
사랑하시는 큰마음 느끼게 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린 후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일명 웰다잉법(호스피스 완화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치료 결정에 관한 법)이 2015년 12월 국회를 통과하였으며, 2014년 말 현재 전국에 54개의 완화의료 전문기관이 보건복지부의 지정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는 호스피스완화의료 (hospice.cancer.go.kr) 홈페이지를 통해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