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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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투쟁으로 「야산대」의 시작
나와 순희 그리고 강성호는 동내청년들과 함께 7, 8명쯤이 함께 나섰는데 그 가운데는 카빈총을 멘 두 청년도 있었다. 두 청년은
일제 때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일제 패망과 더불어 귀향한 일본군 일등병 군인이었다. 그래서 무기를 다룰 줄 알아서 조직에서는
카빈총을 주어서 초동면 봉기 후 면당을 호위하는 임무를 주었다. 이 둘은 낫과 톱 그리고 도끼를 들고 산으로 가는 우리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받고 우리들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
나와 순희는 아침에 할머니가 만든 주먹밥으로 점심요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은 오후 2시경이나 되었다. 성호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점심을 마치고 있었다.
우리들은 종남산 정상에 정월 대보름날 하는 달집을 커다랗게 지어 ‘달불’처럼 불을 놓아 봉화를 올리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남조선 단독선거로, 이승만•김성수를 우두머리로 하는 친미사대주의자들과 친일파무리들을 끌어 모아 미제의 예속정권을 만들어서 조국의
남반부를 분단하여 영구점령하려는, 미제의 음모를 반대하여 전 민중이 궐기하여 일어 나설 것을 호소하는 봉화를 올리려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 봉화는 저녁 어둠이 온 천지에 깔리는 시간 8시를 기해서 올리기로 했다. 마침 내일모레가 그믐이라서 봉화의 빛은 어둔데서 더욱 빛날 것이다.
이 봉화가 오르면 이를 신호로 산 아래 민중들은 동내 야산에 올라 함성을 올릴 것이다. 밀양읍내에서는 북과 징 그리고 꽹과리를 치면서, ≪단선반대≫, ≪단정반대≫의 구호로 아우성을 쳐서 모두 투쟁에 궐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들은 일단 종남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풀밭이었다. 풀이라도 길어야 한두 뼘이나 될까하는 풀이고 그것도 바싹 마른 풀이었다.
일단 달집을 지을 자리를 정하고 그 둘레를 지름 3미터 정도로 좀 넉넉하게 잡아서 그 바깥 2미터 정도를 불이 못 번지도록 마른
풀을 깨끗이 베어 청소하였다. 정상아래 조금 내려가면 너럭바위가 부서져 납작한, 돌들은 가져다 둘레를 대강이라도 깔았다.
그리고 모두 초동면 쪽 양달 진 데에 무성한 숲으로 들어가 지름 15센티미터, 길이가 길반이나 되는 나무를 톱과 도끼로 기둥감으로
할 나무 세 개를 벌목해서 가지를 대강 쳐서 기둥으로 세웠다. 칡넝쿨을 쳐 가지고 와 그 넝쿨로 좀 굵은 가지를 가로 빙 둘러
얽어매고, 솔가지를 쳐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그 사이에 끼워 둥근 움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낫을 든 사람들은 종남산의 주능선에서 잘록 진 데 무성하게 자란 마른 갈대와, 소나무 숲 마른 땅바닥에 무수히 깔린 불땀
좋은 솔 갈비를 긁어 한 짐 뭉쳐온 것을 그 달집 안에 가득 채워 넣었다. 이로써 봉화 불을 지필 준비는 끝났다.
이렇게 준비하는 동안 시간은 7시가 다 되어가고,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때 아래 방동고개 마루에 너덧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지게에 무엇을 담은 지게를 지고 온다. 아마 저녁밥인가
보다. 정상 바로 밑은 제법 가풀막지고 거리가 좀 된다. 정상의 청년들이 몇 사람들이 마중삼아 내려갔다.
이윽고 이들이 산 정상에 올라왔다. 당의 면책인 계음아재가 함께 올라오셨다. 모두 인사를 하고 봉화 움집 옆 평평한 곳에 빙
둘러앉았다. 해가 지자 날씨는 추워졌다. 바지게에 담긴 것을 내려놓고 한 청년이 자칭해서 배식을 맡아 일단 먼저 면책 동지에게
밥그릇을 그 앞에 놓자, 면책 동지는
“나하고, 나와 함께 올라온 동무들은 미리 저녁밥을 먹었으니 여기에서 일하신 동무들만 식사를 하면 됩니다. 그리고 닭도 서너 마리 쪄서 가지고 왔는데 모두 한 저씩이나 돌아갈는지 모르겠네. 적지만 많은 냥 하시고 잡수시오.”
고개 밑 가난한 방동의 가난한 농가, 뙤기 밭에 강냉이나 수수와 조를 심고 그것들과 산채로 끼니를 이어가는 농가라서, 닭을 잡아도
찜이라도 할 수 있는 양념 준비도 없는 처지라서 그냥 솥에 쪄서 가지고 왔다. 간으로는 소금과 종남산 양달 진데 늦봄에 열매로
나는 산초가루만 치고, 그것을 간으로 해서 먹었다. 그래도 일하고 난 다음이라서인지 모두 잘 먹었다. 밥이래야 감자와 강냉이에
삶은 보리쌀만으로 한 밥, 그리고 군데군데 박힌 양대 콩으로만 지은 것이다. 우거지된장국에다 멸치조차 들지 않은 떫떠름한 국 맛,
소금 간으로만 담은 허연 김치, 그래도 모두 일한 다음 한참 시장할 때라서 그런지, 그리고 모두 가난한 농민이라서 그런지 어느
진수성찬 부럽잖게 입맛 다시고 군소리 없이 다 먹어치웠다.
이윽고 식사를 끝내자 곧 봉화를 올릴 예정시간이 다 되었다. 모두 봉화의 움집 앞에 모여 대강 줄지어 둘러섰다.
강성호 동무가 사회를 했다.
“지금부터 밀양읍 어느 곳에서든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이곳 종남산의 정상에서 2.7구국애국투쟁의 불길을 지펴 올리는 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들의 투쟁의 의의를 이곳 초동면의 당책동지께서 간단히 말씀해주셔서 오늘 여기에서 올리는 봉화의 의미를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의 면책은 앞에 나서시어 아주 간략하게 2.7구국투쟁의 의미를 해설하시고 그 투쟁에서 봉화투쟁의 의의를 말씀해주셨다.
“8.15해방과 더불어 우리 땅에 올라온 미제는 일제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한 국제협약을 마치고서는 물러날 생각은 않습니다.
그들의 제국주의침략을 본성을 발동시켜 기어이 38도선 이남의 조선 땅을 영구히 강점하기 위하여 남조선단독선거를 하여, 친미사대의
무리들과 그들이 군정에서 부려먹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로 남조선단독정부를 세워서, 반만년을 하나의 나라로 살아온 우리민족을 둘로
갈라놓으려도 획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갈라진 나라로 만들어 미래의 자손에게 결코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미국 놈과 그 앞잡이들이 총으로 단선•단정을 획책하면 우리도 총을 쥐고 저항할 것이며. 기어이 하나의 나라 조선을 지킬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올리는 봉화는 그 새로운 해방투쟁을 3천만 동포들에게 알리고 온 세계에 알리는 불길이 될 것입니다. 조선의 통일된 자주독립을 결의하는 만세소리로 봉화의 횃불과 더불어 투쟁을 선언합시다.
조선통일독립만세! 조선민주주의통일공화국 만세! 조선의 노동자, 농민, 민중의 완전독립의 나라 만세!”
모두 이 만세의 선창을 따라 만세를 불렀다.
점화는 면책의 손에 들린 커다란 관솔에 달린 불을 봉화의 움집 안에 있는 마른 풀에, 소나무 갈비에 붙였다. 그 불씨를 그곳에 참가한 여러 청년들이 돌려가면서 이곳저곳에 붙여 불길이 점점 세어지고 높이 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이 높이 올라가자 누구의 입에선지 ≪해방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노래 .......”
노래가 끝나자 모두 만세를 불렀고, 만세의 손이 내려지자 그 손은 저절로 옆 사람의 손과 잡혀져 곧 봉화를 둘러싸고 돌기 시작했으며, 노래는 국제노동해방의 노래인 「인터내셔널」(주)로 이어졌다.
1. 일어나라, 저주로 인 맞은 주리고 종된 자 세계
우리의 피가 끓어 넘쳐 결사전을 하게 하네
억제의 세상 뿌리 빼고 새 세계를 세우자
짓밟혀 천대받은 자, 모든 것의 주인이 되리
<후렴> 이는 우리 마지막 판 가리 싸움이니
인터내셔널로 인류가 떨치리
이는 우리 마지막 판 가리 싸움이니
인터내셔널로 인류가 뭉치리
2. 하느님도 임금도 영웅도 우리 구제 못하리
우리는 다만 제 손으로 해방을 가져오리라
거세인 솜씨로 압박 부시고 제 것을 찾자면
풀무를 불며 용감히 두드려라, 쇠가 단김에
3. 우리는 오직 전 세계의 위대한 노력의 군대
땅덩어리는 우리의 것이니 기생충에게는 없으리
개 무리와 도살자에게는 큰 벼락 쏟아져도
우리의 머리 위에 찬란한 태양이 비치리
이 「2.7단선•단정반대구국투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경인일대를 비롯헤서 경남•북, 전남•북,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규모로 폭동과 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으로 생산은 정지되었고 동시에 교통•수송은 곳곳에 정지되고 교량도
폭파되었고 철도에서는 파업단을 탄압하자 기관차까지도 파괴되었다.
전신•전화의 파업으로 통신이 두절됨은 물론이고, 이를 탄압하자 전신선이 절단되고 전신주도 도괴되었다. 이 결과 행정기관도 경찰행정조차도 마비되었다.
부산항만의 파업은 물론이고 해상파업도 일어났다. 장성탄광, 화순탄광도 파업했다.
각급학교도 「민주학생연맹」의 주도로 거의 전부가 동맹휴학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들과 합세해서 경찰관서를 습격했다.
심지어 목포와 인천, 강릉 등지의 관상대와 측후소도 파업에 가담했다. 이들 모두는 ≪단선반대≫. ≪단정반대≫를 구호로 외쳤다.
이들 투쟁의 내용을, 한 종합된 어떤 자료에서 본다면 48년 2월 7일부터 20일 사이에, 파업 30건, 맹휴 25건, 반동단체와의 충돌 55건, 시위 103건, 봉화 204건, 총검거인원은 8,479명이라 한다.
서울지구만 보더라도, 철도파업에서 용산•수색기관구는 전원파업, 경성방적, 종방, 대한방적, 용산공작, 조선피혁, 경기염직,
신문사도 거의 전부, 출판사도 전부 참가, 시위는 영등포 지역 20건, 종로 35회, 남산과 북악산에 봉화 53회라고 한다.
폭력적 항쟁은 경남지방만 보더라도 그 수와 내용으로도 엄청났다. 이 숫자도 당한 경찰 측에서 실제와는 줄여서 발표한 것이다.
진주: 2월 7일 오전 4시, 100여명의 군중이 진성지서 습격, 무기 다량 탈취.
밀양: 2월 7일 오전 7~8시 30분 200명의 군중이 청도 오산지서와 초동 오방지서를 습격 점거 경찰 1명, 극우청년 2명 타살. 습격 때 경찰발포로 민중 측 사망 4명, 중상 10명, 나중에 마구 검거, 검거자수 109명.
합천: 7일 오전 10시에 200명이 봉진지서 습격, 오후 2시 4,000명이 청덕•봉산지서 전화선을 절단하고, 교량 폭파한 다음 습격.
함안: 7일 오전 10시, 약 4,000명이 산서출장소 습격
고성: 오전 2시께, 500명이 대하지서 습격•포위•투석.
2.7구국투쟁은 1946년의 10월인민항쟁과는 달리 처음부터 사전에 계획한 조직적이며 무력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적인 준비를
갖춘 투쟁이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무장투쟁으로 전환해가는 주요한 계기로 된 것이다. 이때부터 각 지방에는 폭력을 상비하는
유격소조가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생겨나고 있었고 이는 곧 제주도에서는 4.3인민항쟁으로 이어나갔고 그리고
5.10선거반대투쟁으로 이어져갔다. 나아가 「남조선인민유격대」로 발전해나갔다.
밤이 깊어가자 날씨는 추워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아픈 성호 동무가 걱정이었다. 나와 함께 한뎃잠을 자려고 했지만 나와 면책인 계음아재가 달래고 얼려서 방동으로 내려 보냈다. 떳떳한 군불 땐 방에서 자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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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내셔널」: 일명 ≪국제가≫. 이 노래의 가사는 요즘은 상당히 세련된 노랫말로
만들어졌는데 내가 소년 때 부르던 것과는 다르다. 옛 동지들과 함께 불렀던 것이라 나의 귀에는 요즘 것이 도리어 낯설고 부르는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객관적으로는 요즘 노랫말이 좋기는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