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클래식]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인생은 아름다워
La Vita es Bella 1997
로베르토 베니니(귀도), 니콜레타 브라스치(도라)
유대인 수용소의 참혹한 현실에서 아들을 지키려는 아버지 노력을 그려낸 영화
'Barcarolle scene' from movie "La Vida es Bella"
몇 년 전, 독일을 여행하다가 뮌헨 근교 다하우에 있는 강제수용소를 찾은 적이 있다. 중세풍의 아름다운 전원마을에 독일 최초로 들어선 이 수용소에는 모두 20만 명이 수감되어 있었으며, 이 중 2만 5천 명이 각종 질병과 영양실조, 자살, 처형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마찬가지로 이 수용소의 입구에도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길을 따라 쭉 들어가니 도망자를 향해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던 높은 감시탑과 한때 고압전류가 흘렀던 철조망, 그리고 멀리 유태인 막사가 나온다. 본래 이 수용소의 적정 수용인원은 한 막사당 2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무려 1,600명을 집어넣었으니 상황이 어땠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막사 안에는 3층 침대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그것을 보니 문득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떠오른다. 이 영화의 주인공 ‘귀도’도 수용소로 끌려와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매우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하는 일이 모두 어설프고, 매사에 실수투성이이지만 마음만큼은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와 신분이 다른 상류사회 처녀 ‘도라’를 만나게 된다. 그녀와는 늘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것도 인연이었는지 귀도는 도라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그 후 ‘조수아’라는 귀여운 아들까지 얻는다.
세 식구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이들에게 시련이 닥친다. 유태인인 귀도가 강제수용소로 잡혀가게 된 것이다. 귀도는 아들과 함께 수용소로 향하고, 도라는 유태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수용소행을 자처한다. 귀도는 어린 아들이 수용소의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을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아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지금 자기들은 재미있는 게임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수용소 생활을 하는 중에 온갖 고초를 당하지만 그는 행여 아들이 눈치챌세라 모든 것이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기를 한다. ▶귀도는 아내를 위해 축음기를 창문 쪽으로 돌려 음악을 튼다.
어느 날, 귀도는 독일군 장교 숙소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음식 시중을 들게 된다. 한창 음식을 나르던 그의 눈에 축음기가 들어온다. 귀도는 여자 수용소 어딘가에 있을 아내가 혹시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음반에 바늘을 올려놓는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중 ‘뱃노래’. 수용소의 차가운 침대에 누워 있던 도라가 정말로 이 음악을 듣는다. 젊은 시절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오페라를 본 적이 있었던 도라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귀도가 자신에게 보내는 노래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서서히 창가로 다가가는 도라. 귀도가 보낸 뱃노래에 귀 기울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도라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남편 귀도가 자기를 위해 튼 음악이란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린다.
며칠 후, 귀도는 독일군에게 끌려간다. 총살을 당하러 가면서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숨어서 자기를 지켜보는 아들에게 윙크를 보낸다. 그 후 곧 여러 발의 총성이 울린다. 귀도가 사살된 것이다. 그렇게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아버지. 스스로 희극배우가 되어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아버지. 짧은 몇 발의 총성으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마음에 하늘이 감동했나보다. 곧 수용소가 해방되고, 조수아는 엄마를 만난다. 그리고 아버지가 약속한 탱크를 타고 수용소를 나선다.
귀도는 총살당하러 가는 순간까지도 조수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게임을 하는 척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수용소에서 귀도가 틀어 놓은 ‘뱃노래’를 듣고 도라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뱃노래’는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의 3막에 나오는 노래이다. 작곡가 오펜바흐는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났지만 1833년 가족이 모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생 이곳을 근거지로 살았다. 오펜바흐는 당시 파리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오페레타 분야에서 남다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지옥의 오르페>, <아름다운 헬레네>와 같은 오페레타를 썼는데, 이 작품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완전히 ‘비현실적인 가공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오펜바흐의 오페레타가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비웃고 풍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작곡가 스스로 그 권위를 원칙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배 계층에게는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오펜바흐의 오페레타는 제2제정기의 천박하고 냉소적인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유쾌하고 즐거운 자조(自嘲)’일 뿐이었다. 오펜바흐에게 ‘제2제정기의 앵무새’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즐거운 오페레타만 썼던 오펜바흐가 말년에 <호프만의 이야기>라는 진지한 오페라에 도전했다. <호프만의 이야기>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모두 5막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호프만의 이야기>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호프만의 소설에서 따온 것이다. 1막은 ‘모래 사나이’, 2막은 ‘고문관 크레스펠’, 3막은 ‘섣달 그믐날의 모험’인데, 각 막이 서로 독립된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작의 주인공은 서로 다른 인물이지만, 오페라에서는 주인공을 호프만 한 사람으로 통일했다. ▶1860년대 자크 오펜바흐 초상화.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는 소설에 나오는 각기 다른 세 가지 사랑 이야기를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한 작품으로 여기에는 호프만이 사랑했던 스텔라, 올림피아, 안토니아, 줄리에타라는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옛 애인 스텔라의 초청을 받고 뉘른베르크의 한 술집에 나타난 호프만은 그곳에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가 그동안 경험했던 세 가지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중 마지막 이야기 3막의 무대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이다. 향락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호프만은 줄리에타라는 여자를 만난다. 줄리에타는 바람기가 많은 가벼운 여자지만 호프만은 마법에 걸린 듯 이 향락의 화신에게 뛰어든다. 줄리에타는 이미 정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프만을 유혹하고, 사랑에 눈이 먼 호프만은 그로 인해 줄리에타의 정부인 슐레밀을 죽인다. 그러나 무모한 살인 뒤에 돌아온 것은 철저한 배신뿐. 달빛 흐르는 밤, 줄리에타는 다페르투토라는 남자의 팔에 기댄 채 곤돌라를 타고 그의 곁을 떠나간다.
영화에 나오는 ‘뱃노래’는 줄리에타가 호프만의 친구인 니콜라우스와 함께 곤돌라를 타고 부르는 이중창이다. 여기서 줄리에타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니콜라우스는 본래 남자지만 오페라에서는 대개 메조소프라노가 남장을 하고 이 역할을 맡는다. 결국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의 이중창이 되는 셈이다. 잔잔한 물결이 뱃머리에 부딪치는 것을 묘사한 하프 반주가 감각적인 느낌을 주는 노래다.
아름다운 밤. 오! 사랑의 밤이여.
우리 기쁨을 향해 미소 지어라.
밤은 낮보다 달콤한 것.
오! 사랑스런 밤.
시간이 흐르면
서로를 애무하던 이 추억도
기억 저 너머로 흘러가겠지.
이곳에서 아주 먼 곳으로
부드러운 산들바람이여!
애무하는 듯한 그대 숨결을 우리에게 보내 주오.
그리고 키스해주오.
아! 아름다운 밤이여.
오! 사랑의 밤이여.
호프만이 줄리에타의 정부 슐레밀을 살해한 후 줄리에타의 방으로 가자 호프만에게 칼을 빌려 주었던 다페르투토는 슐레밀의 사망을 확인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칼을 거두어들인다. 사랑에 눈이 먼 호프만은 결국 줄리에타와 다페르투토가 꾸민 음모의 희생자가 된 셈이다. 이렇게 호프만이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른 후에도 멀리 무대 밖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람들이 부르는 ‘뱃노래’가 무심하게 들려온다.
아름다운 밤. 오! 사랑의 밤이여.
우리 기쁨을 향해 미소 지어라.
밤은 낮보다 달콤한 것.
오! 사랑스런 밤.
무대 위의 상황은 비극적이지만 이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감미롭기 그지없다. 그것은 일종의 반어법이리라. 영화에서도 그렇다. 도라는 사랑하는 이와 닿을 수 없는 차갑고 어두운 공간에서 이 달콤한 노래를 듣는다. 비현실적이기에 더욱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 멜로디. 이 노래와 관련해 귀도와 도라 두 사람은 공통의 추억을 갖고 있다. 비록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오페라 극장에서 두 사람이 함께 <뱃노래>를 들은 것이다. 무대 중앙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오는 곤돌라. 그리고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 하프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의 이중창이 마치 꿈속의 멜로디처럼 달콤하고 감미롭게 극장 안을 흐르고 있었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귀도는 2층에 앉아 있는 도라가 자기 쪽을 바라보도록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가 보낸 텔레파시가 효과가 있었는지 도라가 천천히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수용소에서도 귀도가 보낸 텔레파시가 도라에게 전달된 모양이다. 멀리서 들리는 ‘뱃노래’를 듣고 도라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으로 조수아는 결국 아버지가 약속한 탱크를 타고 엄마를 만난다.
이것은 사실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상황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 유태인 출신의 신경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 박사이다. 나치 치하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한 후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쓴 그는 바로 이 책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잡혀갔던 두 번째 날 밤의 일을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나는 지금도 아우슈비츠에서 맞은 두 번째 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 내가 왜 깊은 잠에서 깨어났는지를. 나는 음악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막사 입구에 있는 고참 관리의 방에서 무언가 축하연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왁자지껄하는 소리 중에 흔해 빠진 노랫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그 방이 조용해졌다. 곧이어 바이올린이 흐느끼듯 토해 내는 애끓는 탱고 선율이 조용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너무 많이 연주되어서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곡이 아니었다.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흐느꼈다. 바로 그날은 어떤 사람이 24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었다. 그 사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다른 편 막사에 누워 있다. 어쩌면 겨우 몇 백 야드 혹은 몇 천 야드에 불과한 거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그곳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내 아내였다.”
프랭클은 당시 자기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다. 사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내와 영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여전히 더 말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그리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랭클의 아내는 자기 남편이 들었던 그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을까.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워>의 도라처럼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하는 남편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까. 푸른빛 안개가 자욱한 수용소의 차가운 공기를 위무하는 음악. 생사와 시공을 초월한 그 소리가 간절한 독백처럼 들린다.
‘시간이 흐르면 이 고통스러운 시간도 기억 저 너머로 사라지겠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게 되겠지. 음악 소리가 장벽을 넘어 내 귀에 들리듯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죽음의 장벽을 넘어 나에게 다가오겠지.’
글 진회숙(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첫댓글 모처럼 좋은 음악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디어 가는 가슴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는군요.
감동을 함께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글에서 다시 영화의 장면이 살아나고 들려주는 음악은 이 밤에 나를 진정시켜 주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