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악과 죄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으면, 인류의 역사와 세상에 희망이 없으리라는 사상이 이른바 구원주의이다. 세상에 악과 죄가 도도히 범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동안 서양의 철학과 종교는 역사 속에 넘쳐 나는 악과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했으나, 실제로 세상의 악과 죄는 사라지지 않고 거듭거듭 태어난다. 과거의 병을 퇴치하면, 새로운 병이 또 생기는 것과 같다.
새로운 질병은 과거의 멸균법에 내성이 생겨서 더 고약해지고 악독해 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양의 윤리학도 선을 권장하고 증장시키기 위하여 악을 퇴치하고 제거시킬 의지력을 권장해 왔다. 오직 악과 싸워 이기는 길은 도덕적 선의지가 세상을 지배하는 길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세상의 선이 승리하는 그날까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숭고한 사명감을 지녀야 한다고 투쟁의식을 강화시킨다. 이른 서양적 구원주의가 근대에는 마르크시즘으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말하자면 마르크시즘은 서양적 구원주의 종교와 철학의 한 변형인 셈이다.
나는 불교가 이런 구원주의의 종교와 철학과는 다른 사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세상을 선의 왕국으로 회개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불교는 이 세상의 본질적 사실이 선악과 시비가 분리되지 않고 동봉되어 있는 이중성과 같으므로 그런 세상을 어떻게 경영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사실주의적인 지혜의 경영학이겠다.
악의 생각이 없으면 선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옳음의 생각이 늘 그름의 생각을 뒤 안에 달고 다니므로, 이 세상의 구조가 근원적으로 천 짜기처럼 결코 단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불교는 가르친다. 선악과 시비는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와 같은 그런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선의 생각으로 강하게 무장되어 있으면, 그만큼 악의 종자가 불청객으로 이미 선으로 무장된 그 의식에 들어와 있게 된다. 그래서 바깥의 악과 투쟁하고 싸우는 그 성진(聖戰)의 투사는 그 악을 닮은 선의 화신이 되어 간다.
역사에서 이런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다. 구악을 일소하기 위하여 벌렸던 혁명의 성스러운 사업이 성공하자마자 신악을 씨뿌리는 역할을 본의 아니게 한다. 이런 사례는 혁명주체가 선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모든 선의지가 구조적으로 악의 성향을 자기의 이면에 감추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구원주의는 필연적으로 투쟁주의를 자신의 찌꺼기로서 동반하고 있다. 서양의 종교와 철학은 이 투쟁주의의 신념으로 세상을 분열시켜 왔다.
불교는 구원주의와 투쟁주의를 다 덧없는 짓으로 본다. 이 세상이 어차피 구조적인 사실로서 이중적이고 양가적으로 짜여져 있기에, 불교는 그 양가성을 다 환영(幻影)으로 보기를 종용하다. 환영으로 보는 법을 익혀야 선이 악을 몰고 오고, 악이 선의 이름으로 자신을 명분화하는 위선을 다 아침이슬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무선무악(無善無惡)이라는 혜능조사의 가르침은 절대로 도피주의나 허무주의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선악의 대결로 보는 구원적 투쟁주의를 넘어서 세상을 부드립게 경영해 나가는 지혜의 길을 암시한 것이다. 선이 악을 지우지 못한다. 그 자리에 무선무악이 들어서야 한다.
첫댓글이제 우리모두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그만 하라고 하고 싶다. 무엇이든지 어린아이 달래듯 나누는 사고 절대적인 것은 어느것이든 없다. 이분법적인 사고 위에서는 행하는 모든 행위 자체는 나라는 절처히 무장된 자아도취적 사고 방식속에서 행하여 지기 때문에 나또한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오직 믿는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을 뿐이다. 나무아미타불
첫댓글 이제 우리모두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그만 하라고 하고 싶다. 무엇이든지 어린아이 달래듯 나누는 사고 절대적인 것은 어느것이든 없다. 이분법적인 사고 위에서는 행하는 모든 행위 자체는 나라는 절처히 무장된 자아도취적 사고 방식속에서 행하여 지기 때문에 나또한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오직 믿는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을 뿐이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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