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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1901∼?)이 그린 <격구도> |
덕천대군의 아버지 조선의 2대왕 정종은,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은 적통이었다. 그럼에도 그가‘정종’이라는 묘호를 받기까지는 무려 262년이나 걸렸다. (이 문제를 이야기 하자면 세종대왕의 공정치 않은 정치이야기가 있어서 이곳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게다가 조선 왕릉은 2009년 6월 27일, 우리나라에서 9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북한에 있는 정종의 왕릉이 여기에서도 제외되었으니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1차 왕자의 난’ 주동자는 이방원이 아닌 이방과(정종)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 주장을 읽고 여러 문헌들을 찾아보았지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혹자는 또한 정종이 격구를 즐긴 것은 대단한 처세술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여러 의문을 품고 덕천대군 사우가 있는 장군면 태산리로 19대 종손 이용구 씨를 만나러 갔다. 사상 최악의 폭염이라는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의 대서 날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있은 6년 2개월 동안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고려왕조의 추종세력과 현 정권의 불만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방원에 대한 서운함, 괘씸함 등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이성계의 마음을 헤아린 환관 김사행은 어느 날,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한 팔각정으로 태조를 안내했다. 그 후 이성계는 김사행에게 낡은 팔각정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 후로 두 사람은 행방이 묘연한 날이 많았다. 그리고 수국이 만개한 1408년 5월 24일 태조는 세상을 떠났다. 고려의 문벌귀족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불교를 견제했던 그의 장례는 불교 의식으로 행해졌다. 활 대신 꽃삽을 들었던 태조의 상여는 그가 가꾼 수국으로 장식되었다. 꽃 가꾸기로 마음을 다스린 태조, 그렇다면 태조를 가장 많이 닮은 아들 정종은 무엇으로 화를 다스렸을까?
《태종실록》에 의하면 화려하게 장식한 말안장 값이 기와집 10채 값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격구를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화려한 복식을 하게 되는데, 이때 말안장 한 개의 비용이 중인(中人) 집 열 채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 당시 말 한필이 노비 2~3명과 거래됐다고 하니, 말 가격이 사람 목숨보다 비쌌던 것이다.
이처럼 격구에는 경비가 많이 들어갔다. 정종은 재위 2년 동안 비온 날을 빼고는 매일 격구를 즐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실세 이방원의 측근인 대사헌 조박이
“전하께서 맨날 격구를 즐기시는데, 인군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므로 경각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유희이겠습니까?
하고 정종을 얕보는 직언을 했다고 한다. 정종은
“과인은 본래 병이 있어서, 잠저(潛邸) 때부터 밤이면 마음속으로 번민하여 자지 못하고, 새벽에야 잠이 들어 항상 늦게 일어났다. 그래서 여러 숙부와 형제들이 게으르다고 하였다. 즉위한 이래로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을 품어서 병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근일에 다시 병이 생겨서 마음과 기운이 어둡고 나른하며, 피부가 날로 여위어진다. 또 내가 무관(武官)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을 타고 물가에서 자며 말을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므로, 오래 들어앉아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잠정적으로 격구하는 놀이를 하여 기운과 몸을 기르는 것이다.” 하니, 조박이 아무 말 못하고 그저 ‘예, 예’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정종 1년 5월 1일의 기록에는 격구 폐지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린 신하들에게 징계를 내리기까지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용구 종손은 가족들을 지키고 방원과의 우애를 유지하기 위한 처세술이 아니었겠냐고 한다. 가슴속에 있는 화를 격구로라도 다스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루를 살 수 있었겠냐고 했다. 이런 처세술은 아들 덕천대군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덕천대군의 이야기를 하기 전 먼저 아버지 정종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려 말, 덕천대군의 아버지 이방과(정종)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왜구 토벌에 힘을 쏟았다. 1389년(창왕 1)에는 절제사 유만수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토벌했으며, 1390년(공양왕 2)에는 지밀직사사 윤사덕과 힘을 합쳐 양광도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치어 공을 세웠다.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왜구를 토벌한 공로로 그는 추충여절익위공신(推忠礪節翊衛功臣)에 책록되고,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겸 군부판서(奉翊大夫 知密直司事兼軍簿判書),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에는 적극 가담해 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아버지와 뜻을 함께 했던 정종은, 장남 방우처럼 역성혁명에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고, 방원처럼 적극적으로 조선건국의 입장에 서지도 아니하였다. 그럼에도 태조는 정종을 영안군(永安君)으로 책봉했으며,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 절제사(節制使)에 임명하였다. 그만큼 정종을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정종은 체구가 곰처럼 강건하고 왼쪽 눈 밑에 큰 사마귀가 있었다고 전한다. 아버지인 이성계의 무인적인 기질을 형제들 중 가장 많이 물려받아서, 활을 아버지 못지않게 잘 쐈다고 한다.
조선 초기 상황은 혼란하였다. 아래로는 왜구가 계속해서 침탈하고 있었고, 위로는 명나라로부터의 압박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 영안군 이방과는 1393년에 문화현(文化縣, 황해남도 신천군), 영녕현(永寧縣, 평안남도 녕원군)의 두 현에 출군하여 왜구를 물리쳐 공훈을 세웠다.
태조는(1395년)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개편하고 여기에 10위를 중, 좌, 우의 3군으로 나누고 각 군마다 종친, 대신들을 절제사로 임명하였다. 영안군 이방과는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에 임명해 병권에 관여케 하였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행동한 그였지만, 동생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에는 차라리 난을 피해 숨어버린다.
‘방원의 난’ 또는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하는 ‘제 1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을 놓고 벌인 왕자 간의 싸움이기도 하고, 정도전과 방원과의 권력 쟁탈전이기도 하다(1398. 태조 7년). 이때에 덕천대군의 아버지 정종(이방과)은 급히 궁 밖으로 달아나 측근인 김인귀의 집으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난이 수습되고, 세자 책봉문제로 시끄러울 때에도 조선왕조가 개국하기까지는 모두 정안군(5남 이방원)의 공이 크며 나는 세자가 될 수 없다고 버텼다고 한다. 이런 그의 태도를 두고 사람들은, 그가 권력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어서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정말로 정종은 권력에 욕심이 없었을까?
형제들이 방원의 편에 서서, 정도전과 방석, 방번 형제를 제거하는 데 동참하는 동안, 방과는 소격서에서 아버지 태조의 건강을 빌고 있었다. 그는 방원이 일으킨 난에 직접 참여하지도, 지원하지도 않았다. 너무 소극적인 그의 태도를 19대 종손 이용구 씨는 정치적 포석이 아니겠냐며 훌륭한 처신이라고 설명했다. 어쨌거나 방과는 그런 행동덕분으로 세자가 되었고, 열흘 만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다.
우리가 허수아비 왕으로 기억하는 정종은 결코 허수아비 왕이 아니었다. 그는 약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우선 한양을 버리고 옛 도읍인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벼슬 청탁 관습인 ‘분경(奔競)’을 법으로 금지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을 구제하기 위한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는 등 개혁적인 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를 지지해주는 정치적인 세력이 미미했다. 무엇보다 방원과 그를 따르는 지지 세력은 그에게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방원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2차 왕자의 난’ 이후엔 방원 스스로 세제(世弟)가 아닌 세자(世子)의 자리에 올랐다.
정종이 정치적인 야망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궐 밖에 있던 가의궁주 유 씨의 아들 불노를 불러들여 원자로 삼으려 한 사건이 유일하다. 불노는 방원의 반대로 정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정종 또한 불노의 목숨을 구하고자 불노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 그 후 불노는 공주에 유배되었다가 승려가 되어 전국을 떠돌다가 죽었다고 한다. 정종의 장남이라고 소리치고 다녔지만 이미 정권을 손에 쥔 태종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후릉: 조선 2대왕인 정종과 정안왕후가 잠들어 있다. 출처: 지식백과 조선향토대백과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해방시 주소,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 북한 문화재 보존급 제551호 |
덕천대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덕천대군 사우 |
세종 시는 전국에서 한글이름이 가장 많은 도시이다. 아파트, 도로, 공원 등의 한글 이름이 1060건이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원래의 지명과 연관성이 없는 우리말 이름으로 원주민들이 안타까워하는 곳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방축리(현재 도담동)이다.
방축리 지명의 유래는 덕천대군으로부터 시작된다. 덕천대군 사우는 현재 장군면 태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사우는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모셨던 사당을 1739년(영조15)에 현재의 장군면 위치로 옮겼다. 방축리와 현재 사우가 있는 장군면 일대는 전주이씨 집성촌인데, 덕천대군의 후손들은 임진왜란 당시 난을 피해 장군면(구 공주시 의당면)으로 낙향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고종 때에는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덕천군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서울과 공주에 거주하는 종인들이 합심하여 재실을 건축하였고, 2010년에는 종손주택을 건립하였다.
《백제뉴스》 2009년 9월 11일자에는 공주대 김진교 교수가 집필한 《민족극예술연구소 판》에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곳 충남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는 이씨 조선 2대 정종의 열 번째 왕자인 덕천군(德泉君)의 사우(祠宇)가 있는 왼편 마을이라 하여 ‘사우말’이라 부르기도 했다‘며 덕천군 사우가 옮겨지기 전에는 공산 이 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마을도 ’샛터‘ 또는 ’신대(新垈)‘라 불렀다고 한다. 200여 년 전에 방축골에서 덕천군 사우가 옮겨오면서부터 전주 이 씨들이 많이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태산리 마을 모습 |
덕천대군은 왕자라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방축리에 전장(田庄)을 두고 살면서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다. 어느 해 여름 금강이 범람해 강변의 촌락 수백호가 떠내려갔다. 덕천대군은 이 광경을 보고 물을 잘 아는 일꾼을 사서 배를 만들게 하고 강변의 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수천의 이재민을 구했다. 이때부터 덕천대군을 덕을 쌓은 어른 즉, 적덕공(積德公)이라고 불렀다.
방축이라는 지명은 덕천대군이 제방을 쌓고 홍수를 막으려 해서 방축(防築)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어릴 때 동네 어르신들한테 들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조사를 해보니, 방축(防築)이 아니고, 방축(方丑)이라니 당황스럽다. ‘소가 들어 있는 방향’으로‘커다란 황소가 외양간에 누워있다’ 하여 방축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니, 어느 설이 더 신빙성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두 설을 다 인정해도 무방할 것 같다.
덕천대군의 군호는 삼촌인 태종이 내렸다. 태종은
"인덕이 하늘에서 나온 듯하고 그 어미의 성이 지(池)씨인데, 지(池)는 연못으로 샘솟는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뜻이 있으니 복의 근원이다. 따라서 군호를 덕천불갈(德泉不渴 덕의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의 뜻을 따서 덕천으로 하라”
며 직접 덕천군 이라는 세글자를 써줬다. 그렇다면 덕천군은 대군이 아니고 군이 맞을까?
덕천대군의 어머니 성빈 지 씨가 성빈으로 된 것에 대해서 책을 인용해 본다.
‘성빈은 정안왕후 김 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정식 혼례를 올렸으니 정종의 첩이 아니라 둘째부인이다. 정식으로 입궁하고 성빈 역시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아들 둘을 낳았다. 소생으로는 덕천군과 도평군이 있다.(《조선의 왕실과 외척》, 2003 박영규. 김영사)
그러니까 덕천대군은 서자가 아니라 정실소생인 적자 대군으로 탄생한 것이다. 해서 필자는 덕천대군 사후 처음으로 덕천군을 덕천대군으로 부른 것이다. 후손들은 이 문제부터 바로 잡아야 하겠다.
성빈 지 씨가 정안 왕후 김 씨와 같은 왕후의 휘호를 받지 못한 것은 태종이 강 씨 소생에 대한 한 때문일 것이다. 태종은 정실은 하나만 인정하고 그 외에는 후궁으로 구별하는 정책을 쓴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에 정종의 재위기간이 길었다면, 그가 재위 기간 동안 격구에 탐닉하지 않고 힘을 키워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방원이 가만히 두고만 보았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정종의 뒤를 이은 왕은 태종이 아니고 덕천대군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그렇게 되면, 충녕대군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전히 한자를 쓰고 있을 테니, 그 가정은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 덕천군 묘소 면봉기 |
▲덕천군 묘 |
덕천대군의 초장지 묘소는 남한산성의 서문 밖인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여리(현재 송파구 거여동)에 있었는데 이 지역이 군용지로 편입되어 1974년 현재의 장군면 태산리(구,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 사우말)로 이장하고 석물도 그대로 옮겨 세웠다. 이장할 때 덕천대군 묘지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병 2점이 1978년에 유형문화재 제 81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덕천군의 후손들은 매년 음력 10월 1일 이곳에서 시제를 모시고 있다. 시제에는 전국에서 650여명의 후손들이 모인다.
▲덕천대군 시제 모습 |
덕천대군의 모후 충주 성빈 지 씨는 흰 기린을 꿈꾸고 대군을 잉태했다고 한다. 기린은 성인이 탄생할 길조라 하여 상서로운 동물로 여긴다. 공자의 어머니도 기린이 나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공자가 죽을 때도 기린이 나타나 마차에 치여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기린을 타고 승천했다고 전해진다.
대군은 천성이 효심이 깊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다. 7세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펴고 일어났을 때에 문안을 드리는 것을 행하였고, 상으로 귀중한 물건이나 음식이라도 받을라치면 반드시 형제자매와 나누어 먹었다. 활을 쏘고, 글 쓰고 시 짓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주이씨 덕천대군파 세보(족보)에 대군의 지혜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옮겨본다.
태종은 성품이 어진 덕천대군에 불안을 느꼈는지 어느 날 그를 시험한다. 마치 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가 그 동생 조식을 시험하여 "칠보시”를 짓도록 강요한 경우와 흡사하여 조비와 조식이야기 먼저 옮긴다.
조조의 큰아들로 위나라의 문제가 된 조비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조식이 늘 신경 쓰였다. 조식은 온갖 경전을 외울 만큼 머리가 비상했으며, 특히 음악과 시에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조조가 사망하자 왕위를 차지한 조비는 동생을 지지했던 신하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식도 기회를 보아 없애려고 했다. 어느 날 왕은 조식을 궁정으로 불러 명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너의 詩才(시재)를 자랑스러워했으니, 이 자리에서 일곱 발자국 걸어가는 동안 시를 지어 보거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조식은 兄弟(형제)라는 시제를 받자 천천히 걸으며 읊었다.
“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上煎下太急(자두연두기 두재부중읍 본시동근생 상전하태급-콩대를 태워 콩을 삶으니 콩은 솥 안에서 울고 있구나. 본래는 한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그토록 다급하게 달이는 고).”
왕은 형의 비정함을 노래하는 동생을 어쩌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남조 송나라의 문학가 유의경이 쓴 일화집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전하는 조비 이야기이다. 태종의 시험을 지혜롭게 해결한 덕천대군의 ‘곡충’이야기가 이에 견줄 만 해서 옮긴다.
어느 날 태종은, 모빈의 첫 돌 잔치에 대군을 초대한다.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을 즈음, 음식을 들다가 갑자기 밥 속에서‘독충’이 나왔다고 펄쩍 뛰었다. 밥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것인데 정말로 밥에 벌레가 있었는지 아니면 태종 측에서 고의로 넣었는지,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인지는 태종 자신밖에는 모를 일이다. "이는 왕을 위해하려는 음모이다”
라며 태종은 음식을 준비한 궁녀 30여명과 자리를 함께 한 40여명을 목 베게 하였다. 하인들을 문초해서 이 모든 것은 덕천대군이 시켜서 한 일이라는 자백을 받고자 내린 명령이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선뜻 목숨을 걸고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 덕천대군은 태종의 음식에 있는 벌레를 집어 삼켰다. 그리고는 용상 아래 계단에 앉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 "전하! 이는 독충이 아니라 곡충으로 사람에게는 해가 없는 것이옵니다. 신이 자세히 보니 필시 우연히 일어난 일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중하니 바라옵건대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초의 장왕이 한저(寒菹)를 먹을 때 그 속에서 지렁이가 발견되었으나, 요리사가 벌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그것을 삼켰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사옵니까?” 태종은 덕천대군의 용기와 침착함에 명을 거두었다.
"허허 곡충도 있었던가? 내 무릇 많은 인명을 죽일 뻔 했구나. 나를 깨우쳐준 공이 현명하도다!” 이 일이 있은 몇 달 후에 태종은 덕천대군에게‘덕천’이란 군호를 내린 것이다. 대군은 지혜로써 왕권을 둘러싼 피바람을 미연에 막은 것이다.
덕천대군은 또한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였다. 어느 해 누이 덕천옹주(德川翁主) 댁에서 누이의 병을 간호할 때에 10여 명의 도둑이 담을 넘어 들어와 곳간을 뒤지다가 창고지기에게 붙잡혔다. 그때 대군은 처벌을 받게 된 도둑들을 불러 상세한 까닭을 물어 보았다.
“왜 도적질을 하였느냐?”
“저희 형제는 6명이고, 나머지 4명은 종친입니다. 저희아버지가 지부서사(地部書史)로 관의 은 이천 냥을 썼는데, 상관이 이를 알고 지팡이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만약 그 숫자대로 되갚으면 죽음을 면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 이라고 하여 저희들이 은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하다하다 방법이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담을 넘게 되었습니다.”
도둑들의 딱한 소식에 덕천대군은 은 이천 냥을 빌려주었다. 도적 10인은 감동하여 노비가 되어 은혜를 갚겠다고 하였다. 대군은 사람됨과 재주가 아까워 용서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평생 노비로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대군은 엄히 명하길 다시는 오지 말라 하니 그들은 집에 사당을 짓고 음식을 올려 대군에게 축복을 빌었다고 한다.
덕천대군은 1397년(태조 6)에 태어나서 1465년(세조 11) 11월 10일 별세하였다.
▲신도비- 1754년(영조 30년), 서예가 이광사가 글을 짓고 썼다. 나주괘서 사건으로 많은 지친들이 연루되어 유배를 가면서 모든 공사가 중지되었다가 55년이 지난 1808년(순조8년, 덕천대군 사후 343년))에 건립. |
덕천대군의 유지를 잇는 사람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덕천대군의 유지를 받들고자, 후손들은 여러 가지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1958년 덕천대군 종회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발전시켜 왔다. 1937년 정축보 족보발행을 시작으로, 1961년 신축보, 1983년 계해보, 2003년 계미보등의 족보를 편찬하였다. 2011년에는 <덕천>이라는 덕천대군파 종회 소식지 창간호를 발행하기도 했다.
종손 이용구 씨를 만나 종회가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사업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어 보았다.
그중의 첫 번째 사업은 사우 앞에 장서각을 짓는 일이다.
▲강당-덕천군의 유지인 호학숭례 전승공간 |
강당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중앙연구원, 국립고궁박물관 등에서 고서 영인 및 번역 발간한 도서 2,800여권과 아이들을 위한 아동서적 등 500권을 소장하고 있다. 앞으로 규장각에서 2만여 권을 더 기증받아 장서각을 지은다고 한다. 800평의 포도밭은 장서각을 짓기 위해서 현재 포도나무를 다 캐어 놓은 상태이다. 강당은 현재 체험 객들의 체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선비체험’으로, 선비 옷을 입고 붓글씨 체험을 하는 것이다.
▲덕천대군 유지 해설비 |
▲홍살문과 (구)포도밭 |
▲현재 장서각을 지으려고 포도나무를 캔 상태 |
두 번째로는 내 고장 경제·문화 살리기 차원으로, 우리지역 농산물을 이용한 된장, 고추장, 청국장, 간장사업을 확장하는 것이다. 농수산물의 수입개방으로 인한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타파하고자 시작한 사업이란다. 지역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작은 시작으로 지역의 농산물을 활용해 장 담그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지금은 공장의 일손이 부족해서 학생이나 일반인 체험은 못하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되지 않겠냐는 것이 종손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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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만든 된장 |
▲영덕당에 걸린 메주 |
▲공장 마당의 항아리 |
▲덕천대군 사우 마당에 있는 항아리들 |
▲영덕당 풍경 |
세 번째는 추모전과 관련한 사업이다. 이곳은 2008년 공자를 시작으로 태조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선조영정 9점을 봉안하였고 (이충원,이준,이억기,이경석,이정영,이덕성,이광사,이주국,이면구)문집 24종류, 교지, 교서, 유서, 족자41점과 ‘백헌상공 궤장연회도’와 서곡공의 ‘사시연희도’를 영인 전시하였다. 이곳 추모전에 덕천대군 및 선조들과 관련한 유물이나 관련 사료를 계속해서 발굴하여 전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추모전에는 어느 곳에 박쥐가 서식하고 있는지 박쥐 똥이 보였다. 종손은 사당 밖 처마는 제비집이 있고 안에는 박쥐가 있어 매일매일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한다. 기둥에 흰개미라도 생길까봐 꼼꼼히 살피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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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는 덕천대군과 관련이 깊은 동네우물을 본존하기 위한 사업이다. 상수도가 없던 시절 동네를 먹여 살린 우물을 없애지 말고 보존하는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에 사우가 옮겨오고 부터 어떤 가뭄에도 우물이 마르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종손은 이 우물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중이고, 이름이 없는 우물명도 덕천샘이라고 부르면 좋지 않겠냐고 한다. 훼손된 지붕을 수리하고 수질검사도 하고 해서 학생들의 체험거리로도 활용할 계획이란다. 마중물을 부어서 펌프의 물을 끌어 올리는 체험을 통해, 기다림의 미학을 배울수 있지 않겠냐고 한다.
▲송덕비와 19대 종손 이용구씨 |
▲덕천샘 |
▲추모전 |
다섯 번째는 동네사람들의 화합과 노인들을 위한 위안잔치를 해마다 여는 것이다. 사우 앞 넓은 마당에 동네 어르신들을 초대해서 순수한 위안잔치를 열고 싶다고 한다.
“지금이야 환갑잔치가 가족들의 식사나, 여행으로 축소됐지만, 예전에는‘환갑잔치’를 성대하게 했잖아요. 조선시대에는 장수한 노인에게 벼슬까지 내렸다고 하더군요. 그런 의미로 순수하게 동네어르신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싶은 거지요”
사우 마당은 덕천대군 시제에 참석한 후손들 700여명이 식사를 하는 넓은 곳이다. 종손 이용구 씨는 덕천대군이 백성들을 위한 삶을 살았듯이 대군의 뜻을 이어 마을
을 위해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 일들은 계속 고민해야할 부분이고 현재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겠다며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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