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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내가 땅에서 들리면(요12:32~36)
2012년 07월 15일(일,가창)
(요12:32∼36)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듣고 고무가 되신 주님은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 지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하셨는데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고 해석하였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 이끌겠다.’ 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아버지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니까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이렇게 하시니까 예수께서는 “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 이 말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인지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했다.
땅에서 올려진다는 것은 본문 상으로 보면 높이 올려지는 것으로서 보좌로 올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이 이것을 죽으심과 연결한 것은 올려짐은 죽으심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음이 없는 부활이 없고 승천이 없기 때문이다.
‘들려 올려진다’ 하는 것을 그냥 문자 상으로 보면 ‘높이 올려진다. 귀하게 된다.’는 뜻이니까 ‘승천’과 비슷한 뜻이 된다. 높이 올려지는 것이니까 보좌로 올려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요한은 이것을 죽으심과 연결해서 올려짐을 말씀했다. 그 이유는 높이 올려진 것이 그냥 올려진 것이 아니고 죽으심을 경과해서 올려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죽음이 없는 부활이나 승천은 없기 때문에 올려진다는 것을 이렇게 해석한 것 같다. 본문을 보게 되면 높이 올려진다, 귀해진다 이런 뜻이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서(죽어서) 증가 되고 예수님은 땅에서 들려서(죽어서) 증가 되셨다. 결국 죽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씨는 죽음이 지배하는 땅에 떨어졌고, 예수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다시 살아서 오히려 무한히 증가 된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져서 증가된다. 예수님도 역시 땅에 떨어져서 증가되었다. 이럴 때는 ‘떨어져서’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예수님이 땅에 떨어져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말은 땅에 떨어져서라는 뜻이다. ‘땅에 떨어져서’ 이 말은 죽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씨는 죽음이 지배하는 땅에 떨어졌고, 예수는 사단이 지배하는 땅에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생명은 거기에서 다시 살아서 오히려 무한히 증가 되었다.
땅이라는 것은 모든 만물을 다 썩혀 버리는 가장 부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생명만은 거기서 살려내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 안에 묘한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썩어야 할 것은 다 썩게 하고 살려야 할 것은 살게 하는 것, 이것이 흙이다. 만일 썩어야 할 것이 썩을 데가 없다면 큰 문제다. 지금 공해가 문제 되는 것은 사람들이 썩지 아니하는 플라스틱류를 만들었는데 안 썩으니까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은 죽으면 다 썩도록 되어 있는데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은 시간이 오래 가도 안 없어진다. 그게 좋은 것 같은 데 안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땅을 지으신 것은 썩을 것은 썩게 하고 살 것은 살아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항상 생명의 동산이 되도록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도 그렇고, 우리 인생에서도 그렇고 이 원리가 다 마찬가지다. 나는 아깝게 생각하지만 내 인생에서도 없어질 것은 없어지게 한다. 내 안에 있는 것도 썩을 것은 빨리 썩어야 한다. 우리 인생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처리해야 될 것, 썩어야 할 것은 빨리 썩어야 하는데 그것이 남아 있으면 이것이 인생을 괴롭게 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마치 플라스틱 병이 계속해서 안 썩고 돌아다닐 때는 태평양까지도 건너간다고 하니까 온 세상에 돌아다니면서 안 썩고 있어서 공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썩을 것은 썩게 하고 살 것은 살게 한다. 우리가 그 세계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없어질 것은 빨리 없어지고 살 것은 빨리 살아야 된다. 고름이 빨리 나와야 새 살이 돋아날 게 아닌가? 죽을 것이 그냥 있으면 새 살이 날 수가 없다. 우리가 아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빨리 없어져야 된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것들이 많이 있어서 우리가 계속해서 붙잡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썩게 하고 새 것을 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으면 이런 생명의 세계 안에 있기 때문에 썩을 것은 썩고 살 것은 살고 그래서 자연은 항상 싱싱하고 그런 세계 속에서 우리는 살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생각 속에, 선악을 하는 지식의 세계 속에 살게 되면 이것이 그대로 나와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된다. 그게 좋을 것 같지만 아주 안 좋은 것이다.
씨는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고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서 증가 된다. 하지만 생명은 다시 살아서 오히려 무한히 증가 된다. 그 분은 죽음의 땅, 부정적인 땅에 와서 무한히 증가되었다. 우리도 환경이 부정적이고 좋지 않을 때 사람들은 ‘환경 때문에 망한다.’고 생각하는데 살아 있는 것은 환경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흙 때문에 씨가 살아나듯이 우리에게 들어온 환경이 어떤 것은 잡아먹지만 생명은 살게 한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가 간증하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온 부정적인 것이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간증하게 만든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간증을 못하고 부정적인 것이 오면 같이 죽어 버린다. 생명이 없는 것은 흙과 같이 썩어버리지만 생명은 흙과 같이 썩지 않고 후에 살아남는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간증을 들어보면 그것은 땅에서 씨가 나오듯이 꼭 부정적인 것에서 살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 이렇게 말씀했다.
1/3. 죽으심 안으로 모든 사람을 이끄심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어 각자의 지식과 능력으로 바벨을 건축하고 각각으로 흩어졌다. 모두가 말릴 수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어서 각자 아는 것으로, 각자의 능력으로 바벨을 건축하고 각각으로 흩어졌다. 자연히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각자 지식과 능력대로 흩어진다. 각자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모일 것 같지만 안 모이게 되고 다 각각 흩어져 버린다. 임금의 아들이라도 그 중에 한 아들이 아주 똑똑하고 다른 아들들은 힘이 없으면 괜찮지만 팽팽하게 아들들이 다 똑똑하면 나라는 갈라지는 것과 똑 같이 능력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연합이 될 것 같지만 연합이 되지 않고 분열된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연합이 될 것 같지만 연합이 안 되고 분열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대학 교수들과 목사들처럼 아는 사람들이 제일 연합이 안 되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식이 많고 능력이 있으니까 말릴 수 없는 사람들이고 누구도 그것을 제재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제재를 받지 않는 그런 특종 인간, 어디 가도 천하무적인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점점 분열이 되어서 자기 혼자 고립되고 마는데 그것이 참 이상한 이치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되면 좋을 것 같은데 생각하는 대로 되면 마지막은 분열이 되고 바벨로 가고 만다. 참 이상한 이치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사람이 원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인데 뭔가가 잘못 들어왔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나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 보면 나쁜 것이 되어 버리고 나는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 보니까 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사탄이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여서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타고나기는 선했는데 뒤로 악해졌다’(성선설)는 사람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악하게 태어났다’(성악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확실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선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이 악하게 태어나겠는가! 그리고 한번 악하게 태어난 사람을 무슨 수로 선하게 만들겠는가? 개를 소로 만들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이런 말들이 다 이치가 나름 있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해결방법이 없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어서 그렇다’ 이것은 해결의 길이 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먹은 것이 아니고 먹으라 해서 먹었으니까 속인 자만 없어지면 되는 것이니까 해결의 길이 있다. 내가 원래 타고 나기를 악하게 타고 났다면 못 고친다. 내가 타고 나기를 선하게 타고났다면 나빠질 이유가 없다. 이것도 저것도 안 맞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 가장 맞다. 사탄이 와서 먹으라고해서 속아서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니까 속이던 사단만 잡아내면 문제가 다 해결된다. 자기가 잘못해서 다 말아먹었다면 대책이 없지만 도둑놈이 와서 훔쳐갔다면 도둑만 잡으면 되니까 대책이 있다.
성경말씀이 묘하게 별것 아닌 것 같은데 해답이 딱 생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면 해답을 갖게 된다. 생각해보라!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답이 되겠는가? ‘원래 악하게 태어났다’ 그것이 무슨 대답이 되겠는가! ‘원래 선하게 태어났다’ 그것도 대답이 안된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식과 능력으로 유명해질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결국 바벨을 건축하게 되고 다 흩어지게 된다. 말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있으니까 말려지겠는가!
그 분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모든 인간이 지식과 능력만 있으면 하나님이 되는 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생을 드려서 지식과 능력만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그 분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모든 인간이 지식과 능력만 있으면 하나님 같이 되는 줄 알았다. 그것만 있으면 옳고 그른 것 잘되고 못된 것을 우리가 다 판단할 수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일생을 들여서 지식과 능력을 구하고 있다. 희랍인들은 지혜가 없어서 유대인들은 능력이 없어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중에는 능력이 없어서 그런 줄 알고 능력을 찾는 유대인도 있고 지혜가 없어서 그런 줄 알고 지혜를 찾는 희랍인도 있다. 능력이나 지혜를 구하러 다니는 사람 중에는 종교적인 능력과 지혜를 찾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을 통달하는 지식이 있고 산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 해도 인간은 원래대로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못하고 지음 받은 그대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하늘을 통달하는 지식이 있고 산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원래대로에서 조금도 안 변한다. 지음 받은 그대로 그냥 인간일 뿐이다. 지식을 더하나 능력을 더하나 똑같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보여진 길이다. ‘지식과 능력을 더해도 역시 사람이구나! 예수님 같은 그런 분이라도 십자가에 달리니까 역시 사람이구나!’ 이보다 더 명백한 사실은 없지 않겠는가?
악한 자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으면 저것은 악해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악한 것이 없었는데도 죽었다. 또 하나님에게 잘못해서 죽었다면 또 할 말이 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잘못한 것도 없다. 결국 아무 흠이 없어도 인간은 인간이다. 지식과 능력의 모든 면에서 완벽해도 사람이다. 물 위를 걸어가도 사람이다. 물 위로 걸어가면 사람을 초월한 줄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사람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판명해준 것이 십자가다.
그런데 이것을 가리고 극복하려고 힘을 쓰고 있으니 인생은 피곤하고 괴로워하든가, 아니면 거품처럼 부풀려서 허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음받은 그대로의 인간에 대해서 불만이 있어서 그것을 극복해보려고 지식과 능력을 더하려고 애를 쓴다. 개가 네 발로 기어가는 것을 극복해보려고 서서 두 발로 걷는 것을 연습하는 것과 똑같다. 원숭이가 계속은 못하지만 잠시잠시는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데 (원래 원숭이는 네 발로 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가만히 보면 아주 꼴불견이다.
사람도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주신대로 안 살고 그것을 극복할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원숭이가 두 발로 걸어가는 것과 똑같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위대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그렇게 본다. 아마 원숭이들끼리는 아마 ‘야~ 저 원숭이는 정말 위대하다! 우리는 네 발로 걷는데 저는 어떻게 두 발로 걷는가?’ 이러겠지만 사람이 보면 아주 꼴불견인 것과 똑같다. LA에 가니까 원숭이가 두 발로 걸어다니면서 사람처럼 아주 이상한 행동을 하던데 모두 그것을 보고 웃으려고 왔지 그것이 존경스러워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과 장난도 치고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더 우습다. 그것을 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까 인생은 피곤하고 괴로운 것이다.
아니면 거품처럼 부풀려서 허황한 생각을 해서 되지도 않을 일을 생각한다든지 되지도 않을 꿈을 꾸는 그런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니까 어디 가도 다 분열되지 연합이 될 수 없다.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애국자라는 사람들이 다 나왔는데 200개 이상의 정당(政堂)이 생겨나서 그대로 놔두면 200개가 2,000개 되는 상황이었다. 해방될 당시에 우리 동포들이 2천만명이었는데 2천만개의 애국자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다 서로 싸워서 연합이 안된다.
사람이 생각한대로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있으면 하나가 될 줄 알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고 오히려 부풀려서 허황해지던가 아니면 꼴불견이 되던가 이렇게 되고 마니까 이것은 분열의 길이다. 왜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바벨탑을 쌓게 되었던가? 선악과를 먹고나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면 정해진 코스가 바벨로 가는 것이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바벨로 가고 있는데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 길로 가면 바벨로 가는 것이다. 여기서 연합의 길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자신의 죽으심 안으로 이끌어서 모든 지식과 능력을 소멸하고 인간의 실체 안에 집어넣어 모두를 하나로 구속하셨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자신의 죽음 안으로 이끌어서 모든 지식과 능력을 소멸하고 인간의 실체 안에 집어넣어서 모두 하나로 구속하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허황하고 분열된 모든 인간을 다 하나로 모으겠다’는 말이다. 세상에 이것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200개의 정당을 하나로 모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이 200개를 다 모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정당을 다 모아들인 사람이 바로 이승만 박사였으니까 대단한 사람이었다. 지금 좌파 사람들은 이승만 박사를 욕하지만 그 시대에 그는 영웅이었다. 200개의 정당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어느 사람이 와서 통폐합을 시키겠는가? 그 분의 카리스마(charisma;절대적 권위)가 그것을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 시대에서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정당이 다 통폐합이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고 공산당이나 중도파는 안 되었다.
온 인류를 하나로 묶으려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을 모으려고 총칼을 가지고 영웅들이 나와서 세상을 지배했다. 세상을 지배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그래놓고 얼마 못 가서 망한다. 칭기즈 칸이 몽골을 출발해서 유럽까지 들어가면서 세계를 휩쓸었으나 그 나라가 얼마 가지 못했다. 바벨론이 그렇고 페르시아가 그렇고 희랍이 그렇고 로마가 그랬다. 무력으로 통일시킨 것은 얼마가지 못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통일한 사람들도 있었다. 한 시대의 정신적인 세계를 지배한 사람 이런 인물들도 있었는데 이것도 얼마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일어나면 온 백성들이 그것을 다 그것을 주장하고 그 사상에 휩쓸려서 유행처럼 돌아다니는데 조금 있으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들이 내게로 올 것이다”즉 연합의 길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의 지식과 능력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인정을 받으신 분이었다.(마16;16) 하지만 십자가는 예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 하였다. (요19;34,35) 이 얼마나 지당하고 단순한 진실인가!
예수님은 그의 지식과 능력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을 받았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지금 이렇게 삼위일체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신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가장 위대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황제를 하나님의 아들(天子)이라고 했고,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위대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천사가 위대할 때는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이것은 ‘당신은 세상을 구원할 자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없는 분이다’이런 뜻이다.
이렇게 계신 분이지만, 십자가는‘예수는 사람이다’이것을 증명해줬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동안 여러 가지로 놀랬다. 말씀을 해도 놀랬지만 그가 행하시는 능력을 보고 더 놀랬다. ‘저가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를 순종케 하는고! 야~ 신이 아닌가!’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십자가에 높이 달리니까 ‘사람이다’이렇게 알게 되었고 다 원인 무효가 되었고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은 물론 ‘저것은 사람이고 죽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또 조롱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살아 날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제자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살아 날 것이다. 물위를 걸어간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죽겠는가? 생각해 보라! 죽은 나사로를 자기가 살렸는데 자기가 죽겠는가?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제자들이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이 사람 생각이나 저 사람 생각이나 다 무가치해졌고 사람들의 생각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은 인류 역사 속에서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를 만나면 어디를 가도 다 똑같이 생각한다. 그런데 그 생각은 다 완전히 무효화 시켰다.
요한은 이것을 아주 명백하게 표현했다.“군병들이 옆구리를 찌르니까 물과 피가 나오더라” 왜 그 말을 했는가? 죽었다는 얘기다. “물과 피가 나왔다. 이를 본 자가 증거했으니까 이 증거가 참되다”이렇게 요한복음에 쓰여 있다. 자기가 물과 피가 나오는 것을 확실히 봤다. 그 말은 확실히 죽은 것을 봤다. 왜냐하면 요한시대에는 영지주의가 나와서 영혼불멸사상(예수는 육신으로는 죽은 것 같지만 사실 죽은 것이 아니다. 신이 어떻게 죽겠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시대에 나왔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내가 확실히 죽는 것을 봤다!”
이제 예수를 보자! 그러면 즉시 무장해제 되고 거품이 빠져서 가볍고 쉬워질 것이다.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 하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예수를 보게 되면 무장해제(武裝解除)가 된다. 내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또는 능력으로 단단히 무장해서 평생 동안 무장해서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개발을 해도 더 높은 무기가 나오면 다 무장 해제된다.
일본도 대단한 나라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조금한 섬나라지만 우리보다 두 배 이상 큰 나라이고, 인구도 두 배 이상 많고, 우리는 조그만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통 큰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때 그들의 문명이 그 만큼 발달된 사람들이다. 과학기술도 그 만큼 발달한 사람들이었고 비행기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 사람들도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원자폭탄 하나 떨어지니까 완전히 박살나서 모든 무기와 용맹이 소용없게 되었다. 가미가제 특공대! 조그마한 비행기 가지고 미군의 큰 함대를 침몰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계산해 보니까 (요즘 같으면 미사일로 하겠지만 그 때는 미사일이 없으니까) 작은 비행기에 한 사람 태워서 폭탄을 싣고 가서 함대 연통에 들어가서 폭발하고 자폭하는 것이니까 요즘 같으면 자살 폭탄 테러다. 그것을 보고 가미가제(神風) 라고 한다. 가기 전에 손톱 발톱 다 깎아서 자기 고향에 보내고 자기는 죽으러 가는 것이니까 용맹스러운 것이다. 이 용맹에 겁많은 미국 사람들이 놀라서 중국에 있는 일본의 관동군(關東軍)이 엄청나게 센 줄 알고 안 불러도 될 건데 전쟁 막판에 며칠 안 남겨놓고 소련한테 참전하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용맹이 있어도 원자폭탄 하나 떨어지니까 다 무장해제 되었다. 더 큰 세력이 오니까 아무 소용이 없다. 옛날에는 관운장의 칼인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같은 것은 무게만 80근 즉 쌀 한 가마니다. 쌀 한 가마니를 휘두르고 자기만이 아니고 말까지도 보호하면서 싸운다. 얼마나 힘이 세면 그렇게 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것은 권총 한 방 가지면 무장해제하고 마는 것이니까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그것보다 더 나은 것 더 나은 것을 가지고 늘 살고 있다. 전쟁은 알고 보면 무기 전쟁이다. 세계 대전은 알고 보면 무기를 만드는 전쟁이고 무기를 먼저 개발한 나라가 승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능력에 대해서 더 능력으로가 아니고 지식에 대해서 지식이 아니고 정반대로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이것을 무장해제 시켰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산주의가 나오고 공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신자본주의가 나오고 자꾸 더 나은 것을 가지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전보다 더 실력이 있어야 되고 전보다 더 능력이 있어야 된다. 세상은 그렇다보니까 계속 군비 경쟁을 해서 누가 먼저 가고 누가 더 가느냐이다. 소련과 미국이 서로 견제해가면서 발전을 하다가 결국 소련이 무기 경쟁에서 수몰된 것이다. 더 커야 더 능력이 있어야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반대로 죽음으로 무장해제를 시켰다. 능력이 있으면 죽었겠는가? 지식이 있으면 죽었겠는가? 희랍인의 지혜가 있었더라면 안 죽을 수 있을 것이고 유대인이 바라던 그 능력이 있었으면 십자가에 달아놓아도 살아났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죽었던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통해서 무장해제를 시켰다. 우리는 계속해서 ‘내가 남보다 더한 능력을 가져야 되겠다. 남보다 실력을 더 개발해야 되겠다.’ 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예수님을 보고 나면 손에 맥이 다 풀려버리고 만다. 흙으로 내가 이겨질 수 있는가? 없다.
내가 무기를 개발하면 상대방이 또 무기를 개발하고 내가 개발하면 그 위에 또 덮으려고 할 것이고 계속 그렇게 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세계대전 후로 그렇게 했던 것인데 그러다가 소련이 도저히 못 따라 가겠으니까 포기하고 다시 체제를 바꿔서 자본주의로 돌아선 것이다. 미국의 힘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기술의 힘은 미국보다 앞서서 인공위성도 앞서 있었지만 재력이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덮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세상은 그렇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만다. 우선은 되는 것 같은데 점점 망해가는 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반대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도 세상에서 무기 경쟁을 할 것이냐 아니면 내가 먼저 무장해제를 하고 들어갈 것이냐 이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경우에는 무기경쟁도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장해제를 하고 들어가면 너무 편하다. “땅에서 들리면 내가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그렇게는 못할지라도 우리가 먼저 죽은 사람으로 들어가면 세상이 쉬워진다. 세상이 살기 어렵다는 말은 내가 무기를 가지고 가기 때문에, 나도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둘 다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누가 먼저 쏠지 모르니까 위험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쉬운 길을 줬다. 그래서 무장해제가 되고 거품이 빠진다. 예수를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무장해제가 빠진다. 나도 그 경쟁 속에서 앉아보려고 발버둥치던 그 무장이 해제되면 ‘이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구나’ 하게 된다.
중국의 무협지를 보면 계속해서 원수 갚고 또 원수 갚고 계속 그것이다. 대대로 올라가면서 원수를 갚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무장해제가 되지 않고는 평화가 오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서 무장해제가 되어야 가벼운 사람, 쉬운 사람, 남이 나를 볼 때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이 된다. 내가 무장을 단단히 하고 있으면 나는 그 짐을 지고 있느라 힘이 들고 다른 사람들은 내가 무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 앞에 와서 힘이 드는 것이다. 내가 무장해제를 하고 나면 사람들이 쉬워진다. 나도 쉬워지고 남도 쉬워진다.
시어머니가 무장을 해제해버리면 며느리가 편해진다. 그리고 무장을 해제해 버리니까 ‘어머니 어머니’ 하다가 ‘엄마 엄마’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장을 하고 아랫목에 지키고 앉아 있으면 자기도 아랫목에 앉으려니 힘들고 며느리도 무릎 꿇고 앉아있으려니 힘들고 서로가 힘든 일이다. 왜 그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팔자다 팔자!
우리는 예수 안에서 무장을 해제하고 거품이 빠지고 가볍고 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예수 앞에 가면 무장해제가 되어버리니까 짐이 없어져 버린다. 잔뜩 짊어지고 갔다가 그 앞에 가면 그것을 벗어버리니까 얼마나 쉬운가!
군인들이 등에 짊어지는 완전군장이 상당히 근수가 나가는 것이다. 군화는 보통 신발처럼 가벼운 것이 아닌데 그것을 신고 총을 들고 어떤 사람은 박격포를 짊어지고 행군을 하면 얼마나 무겁겠는가. 그런데 무장해제를 하고 나면 얼마나 가볍고 편하겠는가.
예수 앞에 가면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고 하는 분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가 이것을 잘못 만들어서 예수 앞에 가면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도록 만들었고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야 하는 그런 예수를 만들어 버렸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바벨론 출신의 천재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원래 천재들이 사람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학생들이 괴로운 것은 천재들 때문에 그렇다. 이 사람들이 계속 문제를 어렵게 낸다. 남이 쉽게 하는 꼴을 도저히 못 보는 것이다. ‘나도 고생했는데 너는 뭐냐’는 식으로 계속 들볶아서 초등학교만은 그래도 평화가 있었는데 요즘은 어떤 놈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전국 성취도 평가’를 만들어서 6학년 학생들은 만날 시험지 푸느라고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어떤 미친놈이 또 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미친놈이다.
과거에 한참동안 초등학교 학생들도 지금의 고등학생들과 똑같이 밤 10~11시가 되어야 그 무거운 책가방, 신 가방, 도시락을 들고 집에 들어왔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깨가 틀어진다는 등 난리가 나서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 초중고 교육 가운데 중학교 입학시험이 없으니까 초등학교만 정상적이다. 그런데 또 바벨론에서 나온 천재가 성취도 평가를 만들어서 아이들을 또 괴롭힌다. 가만 놔두고 편히 있는 꼴을 못 본다.
예수를 만나지 않으면 누구나 다 자기도 못 지는 짐을 남에게 짊어지게 하고 자기도 괴로운 것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것이다.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이 예수를 또 어떻게 만들었는지 도로 바벨론 사람을 만들어 버려서 예수 믿기가 너무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무릎이 다 닳아지고 관절염 걸린 권사님들이 많다. 겨울에 눈 밭이나 바위 위에서 기도를 하면 얼마나 차갑겠는가! 그러니 관절염에 걸리지 않을 방법이 없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역시 바벨론 출신들이 만들었다.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만들어놓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 교회 와서도 어렵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참으로 이해가 안 되고 대단히 섭섭하다. 나는 예수를 어렵다고 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왜 나는 안 되는가?’ 이러면서 뭔가 자기가 되어 보려는 사람은 우리 교회에 와서도 어렵다. 십자가에 못 박아 놓으면 다 똑같은데 되기는 뭐가 되겠는가? 그런데 기어코 되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람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자기가 의롭다는 말을 듣고 싶으니까 스스로 어려운 것을 만들어 내고 스스로 율법을 요구한다. 우리 교회에 와서는 뭔가 되려고 하지 말자!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 되는 것이 아니니까 되다가도 무장해제 해야 된다.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하시는 이 앞에 서게 되면 인생이 편안해진다.
2/3.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새 생명 안으로 이끄심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새 생명 안으로 이끌었다. 죽으심 안에다 모든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니 이제는 총칼이 없다. 사실을 알고 보면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놔두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놔둔 것이 아니라 새 생명 안으로 이끌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밭을 갈아엎는 이유는 씨를 뿌리기 위해서이다. 우리를 무장해제 시킨 이유는 새로운 것으로 무장 시켜주기 위함이다. 구식 무장으로서는 전쟁을 못하겠으니까 신무기로 무장을 시키려고 무장해제를 시킨 것이다.
옛날에는 M1소총을 가지고 전쟁을 했는데 8발이어서 ‘따르륵’하면 다 나간다. 그런데 북한이 가진 따발총은 70발이어서 ‘따르르륵’해도 계속 나가니까 8발짜리로 어떻게 당하겠는가? 새로운 것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지금은 M16인가 이런 것이 나왔는데 총이 가벼우면서도 성능이 더 좋고 더 연발이 많은 이런 무기로 개발을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모두 한 무덤 안에다 집어넣은 것은 다시 살려서 새 생명 안으로 이끌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지 결코 무덤에 넣어 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옛사람은 무덤에 넣어 버리고 새 생명으로 새사람을 살리려고 하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떠났던 것이다. 그가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보였을 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떠났다. 예수를 보고 왜 떠났던가? 실망해서 떠난 것이다. 그것이 자기의 미래가 된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것이다. 내가 예수를 보고 나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따랐는데 십자가의 예수를 보니 너무너무 실망스러워 떠난 것이다. 유태인은 유태인대로 자기들의 메시아를 기대하다가 실망해서 떠난 것이고 제자들은 제자들대로 자기들의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고 있다가 실망하고 떠난 것이다. 모두가 다 그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떠났다.
그가 물 위를 걷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할 때는 좇아왔는데 인간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는 자기의 미래, 자기의 운명이 드러난 것이니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떠난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다면 그를 따르던 사람도 당연히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떠날 수 밖에 없다. 뭘 기대하고 있겠는가?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그래서 보고 싶지 않으니까 떠난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은 새로운 힘(생명)을 받았다. 자신들의 비극적 운명이 높이 올려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은 새로운 힘을 받았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우왕좌왕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왔다고 한다. ‘방안에 들어왔다.’ ‘생선을 구워서 먹였다.’ 이런 말들이 더러 있는데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오락가락한 것 같다. 같이 늘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가 없기도 하고 없다가 있기도 하고 늘 이러니까 ‘유령인가’ 하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헷갈리고 있었다. 부활 후에 사람들이 바로 뭐가 된 것이 아니었다. 40일 동안 같이 있었지만 그 기간은 옛날처럼 있는 기간이 아니라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기간이었다.
그러나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새 생명을 얻었다. 이것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곳이 오순절이다. 오순절에 약속한 성령이 왔다는 것이다. ‘기다려라 그러면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 올 것이다.’ 했고 오순절 날 모여 있는데 갑자기 불 바람이 불었다고 하는데 무엇인지는 우리가 모르지만 거기서 이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벌써 하늘에 올랐구나!’ 이 소망이 생긴 것이다. 자기들의 비극적인 운명이 높여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 절망이다”했던 것이 희망으로 바꿔진 것이다. “아~ 아니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구나! 우리가 본 그것이 끝이 아니었구나!”이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새 생명인 새 힘이 온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과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도들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부활과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가 만일 승천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들은 그렇게 못 했을 거라 생각한다.‘승천했다’는 말은 가장 높이 됐다, 아주 높이 됐다, 영광스럽게 됐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비참한 것을 봤는데 부활하신 후에 그들은 영광스러운 것을 봤다. 특별히 오순절에 그들은 영광스러운 것을 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만 알아서는 안 되고 그의 영광스러운 것도 봐야 한다. 그런데 “야~ 우리가 죽음을 보는 것은 쉽지만 영광스러운 것은 어떻게 보나?” 이것이 문제다. 그렇지 않겠는가? 죽는 것은 누구나 십자가에 가서 언제든지 볼 수 있는데 부활하신 것은 볼 수가 없다. 그와 같이 그 분의 영광스러운 것은 볼 수가 없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이 따로 있고 영광 받으심이 따로 있다’늘 이렇게 생각해서 ‘죽으심은 빼 버리고 영광만 보고 싶다’이렇게 생각한다. ‘왜 죽은 것만 자꾸 얘기하냐! 영광을 말해야지’이런 사람이 있는데 죽음이 없는 영광은 진짜 영광일 수 없고 죽음이 없는 영광은 바벨의 영광이다. 죽음과 영광 이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고 이것이 비밀이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 이것은 둘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이것을 둘로 갈라 생각하니까 “이 목사는 왜 죽음만 백날 얘기하노! 부활은 얘기 하지 않고 십자가만 왜 신물 나도록 얘기하노!”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래가지고 부활만 얘기하는 데로 간 사람들이 있다. 우선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 그러나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사람의 생각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알기 어렵다. 십자가 따로 있고 부활 따로 있고 그러면 알기가 쉬울 것 같은데 ‘둘이 하나다’이것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생명은 전부 둘이 하나다. 갈라져 있는게 아니고 둘이 하나다. 그러므로 부활은 경험이다. 역사적인 어떤 사건이나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부활은 경험이다. 십자가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부활은 경험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지가랑이를 잡아 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생선 얻어먹은 사람도 있듯이 자기들의 경험이다. 일정하거나 똑같은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일정하다. 누구나 봐도 똑같이 달려있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다 볼 수 있다. 십자가는 빌라도도 볼 수 있고 제사장도 볼 수 있고 다 볼 수 있지만 부활은 본 사람은 보고 못 본 사람은 못 본 것이다. 만일 빌라도가 부활을 봤더라면 빌라도 했겠는가? 그만 치우고 예수를 따라 갔을 것이다. 대제사장이 부활을 봤더라면 예수 따라가지 대제사장 그 까짓 것 하겠는가? 그러니까 이것은 계시이고 경험이지 역사가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살아 낼 때 거기서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영광이다. 십자가를 살아낼 때 무장해제하고 내가 간다는 말이다. 무기를 가지고 가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무장해제하고 가서 이기는 것을 봐야 그것이 영광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죽었는데 살았다는 것이다. 죽고 다시 살았다. 그와 연합하여 죽은 자는 그와 연합하여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비밀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었다.” 이것이 비밀이다. 그냥 공장에다 넣고 튀긴다. 이렇게 하면 누구든지 이해가 된다.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 본(틀)지를 찍어가지고 찍으면 다 밀이 나오면 누구나 이해가 된다. 예를 들어 못을 만들 때 본(금형)을 만들어 그 본 하나를 만들어 거기다가 계속 찍어 낸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해를 한다. 그런데 ‘죽어서 30배 60배 100배가 된다’이것은 우리가 모르는 일이다. 이것이 생명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부활도 마찬가지다. 죽음과 부활은 하나다.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먹고 그와 함께 죽었던 인류에게 이제 예수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 새 생명의 길이 열린 것이다.(롬6;5참)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먹고 그와 함께 죽었던 인류에게 이제 예수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새 생명의 길이 열린 것이다. (롬6:5참고) 거꾸로 됐다.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먹고 어떻게 됐는가? “너는 정녕 죽으리라.”이렇게 됐다. 그것이 아담의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산다”이렇게 바꿔졌다. ‘아담과 함께 먹고 아담과 함께 살면 아담과 함께 죽는다’이렇게 됐고, ‘예수와 함께 죽으면 예수와 함께 산다’이렇게 됐으니 완전히 새로 바꿔진 것이다.
세계 질서가 바꿔졌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질서에서 자본주의 질서로 바꿔졌다. 이런 것처럼 지금 내가 바꿔진 것이 아니라 세계 질서가 바꿔졌다. 자꾸 나를 생각하면 안 된다. ‘자기가 바꿔졌는가 안 바꿔졌는가’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지금 세계질서가 바꿔졌다. ‘내가 지금 일본사람인가 한국사람인가’이런 생각이 아니고 ‘지금 해방이 되어서 독립이 됐는가 안 됐는가’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 사람이라도 한국에 있으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으니까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있어도 주권(主權)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가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 생각이 자꾸 자신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이 말씀 알아듣기가 어렵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그저 예수라는 한 사람을 따라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산 것이다. 죽으심에서는 자신들의 진실한 모습을 보았고, 부활에서는 아담에게서 보지 못한 새로운 삶을 본 것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그저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 갔을 뿐이다. ‘저 사람 따라가면 뭐 되겠지~ 저 사람이 세상을 바꾸겠지~ 이스라엘을 바꾸겠지~’ 하고 그냥 따라 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어떻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죽고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내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혔는가 아니면 내가 무덤을 열고 나왔는가? 나는 그냥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냥 그를 보고 따라만 갔다. 같이 가다보니까 함께 죽은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십자가에 가니까 죽은 사람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십자가 이전에는 내가 십자가에 달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십자가의 예수를 보고나니까 내가 거기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나는 엉겹결에 죽어버린 것이다. 어찌된 것인지 모르게 순간적으로 나는 죽은 사람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느니‘ 그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그 한 사람 따라가다가 그냥 이렇게 된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전혀 아니다.
죽으심에서 그 분의 진실한 모습을 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나는 내가 아니고 진짜 나는 저기 있구나!’ 이렇게 봤다. 부활에서는 아담에게서 보지 못한 새로운 삶을 보게 되었고 전혀 자기들이 이해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삶을 살았다.
이것에 대해서 고린도전서를 쓸 때까지 사람들은 ‘우리가 부활할 때 어떤 모양으로 부활하는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씨를 뿌릴 때 장래 모양을 뿌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보리를 뿌리던지 벼를 뿌리던지 뿌려 놓으면 하나님이 각자 보리에게는 보리의 모습을 벼에게는 벼의 모습을 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경험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또 ‘아~ 그럼 벼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보리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 경험이다. 어떤 사람은 보리로 나타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벼로 나타날 것이라는 말이다. 별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해의 영광이 다르다고 했다. 각자 죽음을 살아낸 것 만큼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에게 나타나는 모양은 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데 부활의 모양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다 보니까 이상한 교리가 되었다. 그것을 교리적으로 그냥 믿다보니까 사람들이 모두 ‘몇일에 오는가? 어디서 오느냐? 백두산에서 오느냐? 계룡산에서 오느냐? 한라산에서 오느냐?’ 이러고 있다. 그것(죽음을 살아낸 결과로써 나타난 모양)을 객관화시켜 놓았는데 그것은 객관화 시킬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객관적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이 왔다. 죽음을 살아내면 분명히 새로운 삶이 온다. 집에서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어디가도 자기가 죽은 자로 알고 살면 반드시 새로운 삶이 나온다. 어떤 모양일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모르지만 어제하고 다른 삶이 나온다. 내가 죽은 사람인 줄 알고 살게 되면 어제하고는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된다. 사람을 대해 보면 알게 된다. 당연히 달라진다. 내가 죽은 자로 안 사람하고 내가 산 자로 안 사람하고 같겠는가? 틀리다. 새로운 삶에서 우리는 부활을 본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는데 왜 그런가?
내가 그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려고!
한번 부활하면 그만일텐데 무슨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냐?
부활의 권능은 날마다 다르니까, 내가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부활의 권세가 달라지니까 나는 그 부활의 권세에 참여하려고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음의 삶을 산다. 참 신기한 말이다. 죽고 다시 산다.
“주와 함께 죽었으면 주와 함께 살 줄을 믿나니”
주와 함께 죽은 것은 이미 과거(過去)이다. 내가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어야 될 텐데 안 죽는다는 것이 아니고 (눈을 안뜨고 안봐서 그렇지) 모든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죽었다. 이미 다 거기서 선고가 나고 다 죽었다. ‘사람은 저런 것이다’ 라고 다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다 그런 것이다. 내가 일일이 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저것이 사람이다’고 했으니까 나는 죽은 사람이다. 십자가에 죽은 것은 이미 과거 사건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말한다. “주와 함께 죽었으면”하는 그 말은 과거에라는 말이다.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하는 것은 과거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부활은 오늘부터 사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것이다. 그 죽음을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서 삶이 달라지니까 부활의 모습이 다르다. “나는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려고 날마다 죽노라”, “더 좋은 부활, 첫째 부활”이라는 말도 있다. 왜 그런가? 이것은 부활의 질이 다르다는 말이다.
왜 그 질이 달라지는가? 씨가 다르니까 달라지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그 씨가 다르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너무 조금 죽었으면 조금 나타나고 많이 죽었으면 많이 나타나는 것이니까 각자 다르고 똑 같을 수 없다. 새로운 삶이 부활이다.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으로 믿습니다’ 이것은 유태인들의 신앙이었고 또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기도 하다. 마지막 날이니까 그것은 믿어도 좋다. 지금! “지금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이것이 다시 산 것이다. 내가 산 것이 아니니까 다시 산 것이다. 마지막 날에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지금 중요한 것이다.
예수는 들려짐으로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 안으로 이끌었다. 즉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 자신과 하나인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무슨 가르침도 아니고 무슨 능력도 아니다. 단지 자기는 드려졌을 뿐이다.
예수는 들려짐으로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 안으로 이끌었다. 묘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으로 자신과 하나인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사람을 나와 같게 만들려면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할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식도 안되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남편이 아내를 그렇게 해 보고 싶어도 안되지 않는가? 아내가 남편을 그렇게 해 보려고 해도 안 된다. 다 자기 것 만들어 볼려고 하지 않는가? ‘너는 내꺼!’ 써 붙여 놓아도 안 되는데 예수는 아주 간단하게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 안에 이끌어서 자기와 똑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 한사람, 자신과 하나인 사람을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무슨 가르침도 아니고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능력도 아니다. 단지 자기는 드려졌을 뿐인데 그렇게 되었다.
여러분이 억지로 무엇을 만들려고 할 것이 없다. 억지로 만들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사람 만들려고 억지로 해도 되겠는가? 별 짓을 다해도 안된다. 다 바벨로 간 사람을 불러 놓고 무슨 수를 써서 하나가 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를 드리면 하나님께 드리면 저절로 되는 것이다.
3/3. 빛 안에서 보고 행함
예수께서 들려질 것을 말씀 하시니 무리들은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는데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고 하니 이 인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 “들리면 모든 사람에게 이끌겠다” 이러니까 유대인이 하는 말이 ‘어디로 간다는 말인데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함을 들었거늘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고 하니 이 인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어떤 인자냐? 우리는 분명히 성경에서 그 인자가 오시면 그리스도가 오시면 영원히 왕 노릇 할 것이라고 우린 믿고 있다’는 것이다.
시89;4. “내가 네 자손(그리스도)을 영원히 견고케 하며...”
110;4.“ 너는 멜리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사9;7. “자금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 하실 것이라”
겔37;25.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한 것을 그들은 문자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에 그렇게 있다. 시편 89편 4절에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10편 4절에 보면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이사야 9장 7절에 보면 “지금 이후로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에스겔 37장 25절에 보면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하고 그들은 알고 있다. 철저히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 요즘 같으면 아주 골통 보수주의자들 못말리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말을 듣고 네가 말한 인자 너는 누구냐!
예수께서는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러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하셨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 다녀서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바를 알지 못하느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러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너희가 왜 캄캄하냐? 왜 그래 까막눈이냐? 왜 너희들이 캄캄한 방에서 얘기하고 있냐? 잠시동안 빛이 있으니까 빛이 있을 때 제대로 보고 믿어라’ 이 말이다.
빛은 예수 자신이다. 그러니까 예수 자신이 있을 동안에 그 안에서 행하고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에게 속한 모든 것을 보여주는 빛이다.
이 빛은 예수 자신을 말한다. ‘내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 내가 있을 동안에는 그걸 보고 믿으라’ 이 말이다. 예수 자신이 있을 동안에 그 안에서 행하고 믿으라는 거다.
예수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보여주는 빛이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빛이니까 ‘너희가 나를 보면 될건데 왜 나를 보고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인자가 어디 있느냐? 빛이 있는데 그런 소리를 왜 하느냐?’ 이 말은 너희는 깜깜하다. 문자그대로 믿는 사람은 깜깜하다. 그런 사람 만나면 깝깝하다. 문자대로 믿는 사람을 보면 어두우니 답답하다. 성경에 대해서 너무 존경하기는 하지만 너무 깝깝하고 속터진다. 문자대로 믿는다 하면서 문자대로 안 믿으면 이단이라 하는데 너무 답답(깝깝)하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고~” 이 말을 못 알아 듣는다.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이 말을 못 알아 듣는다.
‘십자가(죽음)와 부활이 하나’라는 것을 못 알아 듣는다.
못 알아 듣는 것을 빛이 없다. 깜깜하게 어두우면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가 빛이 있어서 눈이 떠져야 한다. 대구 교회 사람들은 문자대로 안 믿으니까 깜깜한 사람은 없다. 조금 해이(解弛)한 사람은 많아도 깝깝하지 않으니 열심(熱心)만 생기면 된다. 깝깝한 사람은 융통성이 없다. 문자대로 믿는 사람은 그것만 그런게 아니고 다른 모든 삶에서 다 깝깝하니까 상대해 보면 답답하다.
아담은 선악을 아는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과 그에게 속한 것을 보는 빛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봐도 문자대로 밖에는 볼 수 없고,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밖에는 해석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담은 선악을 아는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과 그에 속한 것을 보는 빛이 없다.
‘선이냐 악이냐’ 혹은 ‘능력이냐 아니냐’는 잘 알지만 하나님을 아는 빛은 없다. 이 말은 ‘죽고 사는 것이 하나’라는 이 말 이러한 세계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성경을 봐도 문자대로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저 자기 생각이 옳은 대로 해석할 수 밖에는 없다. 문자대로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안 믿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자대로 믿는 사람들은 또 자기 생각대로 해석을 해야지 안 할 수가 없다. 문자대로 믿으니까 문자대로 해석하면 된다. 그런데 성경은 문자대로 해석할 수가 없는 것이니까 또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게 되고 만다. 참 이상하고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들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가 오시면 영원토록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나라를 견고히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올라가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가 오시면 영원토록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나라를 견고히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인데 올라가 버리면 어떻게 되나 이것이다.
예수 안에, 구속 안에, 그 빛 안에 있어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모든 영원한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어둠에 다니지 아니할 것이며 빛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예수 안에, 구속 안에, 그 빛 안에 있어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모든 영원한 것들을 볼 수가 있다. 문자대로 믿어서는 영원한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어둠에 다니지 아니할 것이고, 빛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빛의 아들’이라 함은 빛과 같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은 하나님과 같다는 말이다.
우리가 다른 눈으로 예수를 봐야 한다. ‘올라가 버리면 어떻게 하나’ 이러면 안 된다. 올라가는 것이 내려오는 것이고 내려오는 것이 올라가는 것이다. 오히려 절에서 공부한 사람이 말을 더 잘 알아 듣는다. 왜냐하면 절에서는 이러한 것을 많이 공부하기 때문에 이해를 잘 한다. 그러나 문자대로 믿는 사람은 이해를 못한다. 아예 먹통처럼 들어가지를 않는다. 문자대로 믿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참 답답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예수 안에, 구속 안에, 무장 해제 된 그 안에, 하나님이 사람된 그 안에 있어야 영원한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이 사람 된다’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 하나님이 사람 된 그 안에, 구속 안에, 우리가 다 무장해제 되어버린 그 안에, 그 빛 안에 있어야만 내가 영원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생명의 빛 안으로 인도하셔서 주님 당신의 가는 길을 따라가게 해 주시고, 당신이 이루신 일 안에 참여하게 해 주시고, 눈을 떠서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 구속 안에, 그 빛 안에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알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