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이 이제 62세.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황혼의 나이가 되도록 난 20대 때부터 지금까지 천상 장사꾼으로 살아왔다.
한때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이더스의 손이라 불릴 정도로 손을 대는 장사마다 거의 성공의 깃점까지 오르곤 했었지만, 우리나라 3대 악재를 중심에서 다 겪어내면서, 내 삶은 갑짜기 블랙홀에 빠진듯 13년이란 긴 시간을 헤어나올 수 없는 위기로 어린 딸과 나는
몸과 마음이 치유할 수 없을만큼 너덜너덜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처분하여 1억이라는 권리금을 주고 곱창집을 인수해 서울종로 신진시장으로 이사를 하였더니 몇개월 되지않아 촛불집회가 무려 6개월이 넘게 이어지더니 종로의 교통이 마비되기까지 했다. 단골하나없이 신출내기인 나는 당연히 괴로울 수 밖에 없었다.
3년을 버텼지만, 급기야는 밀려만 가는 임대료에 인건비까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르자 힘들게 샀던 아파트까지 처분하고, 계룡이라는 낯선 곳으로 내려가서 '오리굼터' 라는 가든을 운영하게 되었지만, 또 몇개월만에 천안함이 터지고 이어서 세월호 사건까지 터지면서, 군인지역이라는 특수한 조건을 가진 계룡은 전 지역에 회식 금지령이 내려진다.
그때부터 난 남아있는 것 하나없이 빚쟁이로 살게되고, 급기야는 신용불량자라는 딱지까지 거머쥔 채 눈을 뜨면 수십통의 독촉전화로 두려움에 떨며 살게되었다.
매일같이 아침이 오지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살기를 몇년이던가?
새벽비를 맞으며 산에올라 꺼이꺼이 설움을 토해 내던 날들이 또 몇년이던가?
그러던 어느봄날에 나물을 뜯으로 산에 올라 잠시 불어오는 순풍에 눈을 감고 누웠다.
내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니, 그저 억척스럽게 살아오기만 했지 단 한 가지도 의미있는 착한 일을 해본 기억이 없었다.
산에서 내려온 나는 50평이나 되는 식당을 어떻게든 활용하여 동네 어르신들을 대접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장소가 문제였다. 우리 가든은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르신들이 개인으로는 오실 수 없는 거리여서 주변에서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자동차로 모셔오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다 한들 오실 분은 한분도 없는 빈 마음일 뿐이기에 난 목사님과 동네 약사님께 도움을 청해, 그분들의 차로 모시고 와서 모셔다 드릴 수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 매일매일 기적같은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갖은 나물이나 버섯이 박스로 나를 반겼고, 어느날은 보리쌀이나 콩 또는 쌀까지도 누군지도 모르는 귀한 손길들의 사랑이 날마다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살던 내게 희망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었다.
어차피 가난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리라는 마음으로 고작해야 할 수 있는 것이 보리밥이어서 어르신들께 대접하고자 했던 것인데 그것이 나에게 살아야하는 의미를 주고 기쁨을 주고 행복하게 하는 일이 될줄 누가 알았으랴
하지만, 그것으로 내 고생이 끝날 수 있기에는 나는 너무 깊은 내리막으로 곤두박질 했던 것 같다. 매주 월요일 그분들께 대접하는 점심 한끼 식사는 내게 더 할 수 없는 기쁨이었지만, 매일 시달리는 금융권의 독촉전화는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계룡에서 죽기살기로 버텨온 7년은 보따리 하나들고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지경으로 나를 내몰고, 난 다시 예전에 살았던 이곳 시흥으로 완전히 빈털털이인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살기 시작한 지 어느새 10년!
오로지 어린딸 하나 책임지고 살아야지 하는 맘으로 닥치는 대로 일만하고 살았다.
오뚜기처럼 일어나 이제는 살겠구나 싶은 날들을 지내는 중에 난 평생 겪지 말아야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2023년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