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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편(Mordern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 *** 제4장 에라스무스와 모어
* 일반적으로 에라스무스와 모어를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라 한다. 둘은 일단 지리적 특성을 지닌다. 그 영토에서 탈영토화의 과정에서 역할과 반역할을 하였다. 네델란드 출신인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는 새로운 부(富)의 형성기에, 기존의 고착적 종교를 조롱하고 새로운 유머를 통한 새로운 종교성의 발흥을 대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부르주아 층이 바라는 세속화와 일반화에서 허수아비 논증과 같은 신을 비웃고, 표면의 평민들이 서로 웃을 수 있는 상식의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런 면에서 당대의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어느 쪽에도 지지를 표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종교성을 세우고 종교심의 전향을 만들 수 있는 철학적 내용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토마스 모어(More, 1478-1535)는 선량한 소 귀족 가정에서 자라난 모범생 더하기 샌님인 것 같다. 자기 지식(법률)에 충실하고 소시민의 생활과 같은 검소한 일생을 보내며, 주지주의적인 지식에 위배되면 낙향 또는 은거도 한다. 왕과의 적대관계에서 굽히지 않은 점은 선비 정신 같은 것을 볼 수 있다(사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나름대로 지적으로 이상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소박한 심성이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지향하지만, 아직 인민 즉 심층이 솟아나지 않은 가운데, 공산화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길을 잘 그려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시대에 공상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사회가 있다는 것을 제시한 것으로 의의가 있다. (50QKE)
*** 르네상스 인문주의에서 프랑스의 라블레(François Rabelais, 1483/1494?-1553)를 첨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1510년경에 프란체스코파·베네딕트파의 수도원에 들어가 고전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푸아티에에서 1527년에 법학학위를, 몽펠리에에서 1530년에 의학학위를 취득하고 히포크라테스의 의서를 연구로 명성을 얻고, 1532년 리옹 시립 병원 의사가 되었다. 팡타그뤼엘(Pantagruel, 1532)[제1서, 아들이야기]. 그리고 가르강튀아(Gargantua 1534)[제2서]에서는 수도원의 입구에 “네 멋대로 하라(« Fay ce que vouldras »”고 한다. 제3서(Tiers Livre, 1546))이 철학적이다. (50QMJ)
** 르네상스에서 인문주의자들은 인성에 대한 초기 자각으로 인성이 심층 속에 있다는 것 까지는 가지 못한다. 그들은 고급 지식인이다. 라틴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사고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나라 말ᄊᆞᆷ을 가지고(la langue), 다른 말ᄊᆞᆷ들과 일반적인 소통은 어렵지 않더라도, 정교한 선분들 만들기는 부족하였다. 이 선분들 사이의 관계 설정에서 한계와 문턱을 정해주는 것은 일반 문법이다. 이 시기에 인민들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인민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문법(규칙 법칙 법률)들이 새롭게 정리된다. 그것이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 독일어 등등의 나랏말의 문법체계(le lanuage)가 생긴다. 인문주의자는 라틴 문법의 공통적 체계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점에서 상층이다. 인문주의자와 달리 종교개혁가들은 인민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성서를 자국어로 기준으로 독해하고 설교한다. 종교개혁과 달리 반 종교개혁은 도덕성과 종교성은 과거의 토대위에 어떻게 선전하고 전파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50QMC)
* 우리나라는 위의 두 인문주의자들 보다 더 중요한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로 부관참시를,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로 능지처참을,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1504년 서거 직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로 부관참시를,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로 사약을 ...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로 유배지에서 사망 ... 조식(曺植, 1501-1572)과 이황(李滉, 1501-1570)이 등장하여 완화된 방식으로 ... 한세대 다음으로 이이(李珥, 1536-1584)는 기득권의 이콘(icone, 우상)으로 포장되어 남게 될 것이다. 서양 지식인들이 깜짝 놀랄 사건들의 연속이다. (50QMC) / 우상은 명나라로, 일본제국(산업자본)으로, 미국제국(금융자본)으로 이어진다. 일베, 어벙이, 현서북청년단은 우상숭배의 한 극한이다. 서북청년단과 엄마부대의 성주에서 사드배치를 주장하는 성조기 시위는 그 실증이다. (50QMJ)
*** 현대편(Mordern Philosophy) 하권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에 이르기까지 11-269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271-487
제4장 에라스무스와 모어 43-61
북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르네상스가 이탈이아보다 훨씬 늦게 시작되었다. 그곳에서는 르네상스가 시작되자 곧 종교개혁이 뒤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짧은 시기가 있었다. 이 기간에는 학문이 신학논쟁에 말려들지 않고 프랑스, 영국, 독일로 활발하게 퍼져 나갔다. 그 북방의 르네상스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이탈리아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무정부적이거나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건하고 보다 도덕적이었다. (43) [서유럽이 각각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이다. 언어의 분화가 일어난 것은 인민이 성장할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 언어가 일반화되기에 각각의 나라가 200여 년이 걸릴 것이다. 즉 문법학이 나와야 하니까... 들뢰즈는 말이 랑그와 차원이 다른 랑가쥬(언어)는 일반화로 번역하기 위해 체계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한글이 언어로서 체계를 만드는 것은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일 것이다. 제자들 중의 김두봉(金枓奉, 1889-1960)과 최현배(崔鉉培, 1894-1970)는 북과 남에서 각각의 몫을 하였다. 그나마 남북이 우리글과 말을 공유할 수 있다. (50QLA)]
북방 르네상스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에라스무스(Erasmus)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두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정한 친구로 공통된 점도 적지 않다. .. / 루터(Luther)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1517] 전에 그들은 지도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로, 세상은 그들과 같은 타입의 인간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모어는] 순교자가 되었으며, 에라스무스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43) 에라스무스나 모어는 엄밀하게 말하면 철학자는 아니었다. .. 그들은 신학이나 철학에 체계를 세우는 것을 싫어했다. 이와 같은 체계에 대한 반대의 경향은 스콜라주의에 반대하는 특징이었다. (44) [인문학에 있어서 상층에서 표면으로 내려오는 과정 중에 있었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생아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출생의 환경에 대하여 낭만적이고도 허위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그의 부친은 실은 한 신부(神父)였으며 그리스어도 아는 유식한 사람이었다. .. 그리하여 그의 보호자들은 그를 슈타이어(Steyr) 수도원의 승려가 되도록 하였다. .. 그의 보호자의 한 사람은 학교 선생님이었지만 라틴어를 몰랐다. .. (44) [그는 라틴어를 배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상층이었다.]
1493년[스물일곱], 에라스무스는 캠브레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 그는 아름다운 라틴어 문장으로 책을 써낸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를 유난히 존경하였다. (44)
그는 한동안 파리 대학에 있었으나 그곳에서는 배울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 / [파리 대학에는] 고대주의자들이라 불린 토마스주의자와 스코투스주의자들은 오캄주의자들과 서로 적대시 했으며, 오캄주의자들은 명목론자 또는 근대주의자들로 불렸다. .. /에라스무스는 스콜라 철학자들을 싫어했다. 그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 그는 실제로 철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까지도 단지 옛날 사람으로 존경할 뿐 별로 탐독하지는 않았다. (45)
그는 1499년[서른셋]에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 나라에서 키스하는 소녀들과 같은 풍습을 보고 매우 호감을 가졌다. 그는 이 나라에서 콜레트(John Colet, 1467-1519)와 모어(Thomas More, Thomas Morus, 1478–1535) 등과 사귀었으며, .. 콜레트는 그리스어도 모르면서 성경 강의를 하고 있었다. .. 1500년[서른넷] 초에 영국을 떠나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 1506년[마흔]에 그는 이탈리아로 갔으나 이탈리아인들에게서는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45)
그는 성 제롬을 편집하고, 또 라틴어 대역으로 된 그리스어 성경도 출판하려고 생각했다. 이 뜻은 1516년에 이루어졌다. (45) [루터가 1517년 95개 조항 선언한다]
그의 저서 중 지금도 읽히고 있는 것은 우신예찬(Μωρίας ἐγκώμιον (Morías engkômion), Stultitiæ laus, The Praise of Folly, L'Éloge de la Folie)(1511년 출판)이다. 이 책의 윤곽은 그가 1509년[마흔셋]에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가는 도중 알프스를 넘을 때 머리에 떠올랐다고 한다. .. 이것을 써서 모어 경에게 바쳤다. 이 책의 제목[Encomium Moriæ, (Éloge de la folie, 1511)]으로 되어 있는 “모루스(morus, 어리석은 우둔한)”라는 라틴어는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재미있는 상징어가 되어 있다. 이 책은 어리석은 신이 독백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매우 흥겹게 찬양하고 있다. 홀바인(Hollbein, 1460-1524)의 삽화는 그 효과를 두드러지게 한다. 이 어리석은 신은 인생의 모든 면에 이르는 온갖 계급과 직업에 관련되어 있다. 어리석은 신은 지혜에 대한 해독제(解毒濟)로서 아내를 얻도록 충고한다. (46)
에라스무스는 계속하여 국민적인 프라이드나 전문가의 자만심 같은 것을 비웃는다. 거의 대부분의 예술가나 과학자, 교수들이 어리석은 자만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자만심에서 행복을 얻고 있는 것이다. (46)
삼위일체론과 육화(肉化: 수육 受肉) 등에 대한 신학자들의 사이의 논쟁, 성찬화육설(聖餐肉化說), 스콜라철학, 교황과 주교 등등 모든 것이 큰 조소(嘲笑)의 대상이 되어 있으며, 특히 수도원 제도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난한다. 그들은 미친 바보들이다. 그들은 종교라고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자기들의 행복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만족해한다. 그들은 종교란 마치 자세한 행동규칙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47) [이런 종교의 성직자들을 에라스무스는 바보로, 이런 주지주의적 유일 종교를 맑스는 인민의 아편으로, 벩송은 닫힌 종교로, 들뢰즈에 비추어보면 폭력을 수반하는 조폭조직 또는 다단계 조직과 같아서, 상층은 인민을 노리개로 삼아 노동 없이도 사적이익을 극대화한다. 요강공주와 순실이가 다단계의 꼭지점에 있는 셈이다. 노리개(개돼지)가 말 안 들으면 죽임을 불사하는 폭력도 (한센인도 동원할 수 있는) 행사할 지도 모른다(5촌과 다른 죽임들). (50QMJ)]
교황도 그의 비난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교황은 마땅히 그들의 주님에게서 겸손과 청빈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의 유일한 무기는 성령이어야 할 터인데, 그들은 사실상 이 성령과는 멀리 떠나 있다. (48)
이 책은 참된 종교는 우매함의 한 형태라는 심각한 암시로 끝마치고 있다. 이 어리석은 신은 두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 찬양하고 있으며, 또 하나는 진지하게 찬양하고 있다. 어리석은 신은 기독교적 단순성 속에 나타나 있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48) [이는 우신예산의 두 가지 분절(양태)은 상층과 표면의 관계이다. 심층의 두 가지 분절(속성)은 인민주권와 직접민주주의(인민독재)이다. 이를 인민영합주의(포퓰리즘)이라하는 것은 전도된 사고방식이다. 전자는 기회주의와 대중추수주의이며, 후자는 의지주의와 인도주의이며, 여기의 단순성은 스피노자와 벩송의 단순성이다. 이 단순성은 동적이고 열린 종교성이다. 이들의 종교성을 의사 심리학에서 다룰 것이다. (50QMJ)]
그러나 여기서 더욱 깊은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루소(Rousseau, 1712-1778)의 사브와 지방의 보좌신부(Savoyard Vicar)(La Profession de foi du vicaire savoyard,)[에밀(1762) 제4권]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견해가 문학에 있어서 처음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참된 종교는 머리에서가 아니라 가슴에서 온다는 것이다. ..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리스적인 지성주의[주지주의]에 반대하는 북방의 감상주의라고 하겠다.(48) [이런 구분은 특별나다. 지중해와 내륙에 대한 비교인데 .. ]
에라스무스는 영국을 두 번째 방문하여 런던과 캠브리지에 5년 동안(1509-1514)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이 동안에 영국인의 휴머니즘을 고무하여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영국의 초등학교 교육은 최근까지 에라스무스가 원하던 대로 되어왔다. 가령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산문(散文)과 운문(韻文)으로 된 작문까지도 철저히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다. (48)
여행기(旅行記)는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고대 로마의 자연과학자 플리니(Pliny, Plinius)가 쓴 놀라운 이야기들은 그대로 믿었다. 이 호기심은 점점 책에서 현실 세계로 옮겨졌다. (49)
그는 기독교 군병 수첩(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 Le Manuel du soldat chrétien)(1499경)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거기서 무식한 군인들에게 충고를 하면서 성서와 아울러 플라톤이나 암브로시우스, 제롬,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50)
에라스무스는 종교 개혁이 있은 후[1517년] 처음에는 루뱅에서 살았다. 이곳은 가톨릭 정통 일색이었다. 그는 나중에 바젤로 이주하였는데, 이 도시는 신교를 신봉하였다. 그리하여 신교와 구교의 양쪽에서 에라스무스를 자기편으로 끌려고 하였지만, 그는 오랫동안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 1518년 루터가 반기를 든 [다음] 해 그는 율리우스가 쫓겨나다(Julius exclusus)라는 제목으로 풍자가 가득한 글을 썼다. (50)
그러나 루터는[의] 난폭한 난동이 그에게는 비위에 맞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싫어하였던 것이다. 그[에라스무스]는 드디어 가톨릭에 가담하였다. 그는 1524년에 자유의지를 변증하는 글을 썼다. 그러자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내세워 그를 확대 해석하면서 이에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루터는 거칠게 반박하였으므로 에라스무스는 반동으로 나가게 되었다. ... 정직한 사람에게 열려 있는 길은 오직 순교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승리하는 것이었다.(51)
“모어 경은 위태로운 일에 개입하지 말고, 신학적인 문제는 신학자들에게 맡겨 두었어야 했다.” / 이 말은 에라스무스의 비겁한 성격을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너무 오래 살았다(일흔). (51)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인간으로서는 에라스무스보다 한결 훌륭하지만, 에라스무스가 영향력을 훨씬 더 크게 행사하였다. 그는 휴머니스트로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 부친은 변호사이며 그도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으려고 하였다. 1504년(스물여섯)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후에 100파운드를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1509년[서른하나] 헨리7세(Henry VII, 1457-1509, 1485-1509)가 죽자 다시 법률계로 돌아와 이번에는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51-52)
[추기경 겸] 월시(Thomas Wolsey, 1473경–1530)가 죽자 모어는 월시 대신 수상이 되었다. 모어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소송 관계자들로부터 뇌물을 일체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얼마 되지 않아서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다. 왜냐하면 왕이 안나 볼레인(Anne Boleyn, 1500–1536)과 결혼하기 위해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Aragon 1485-1536)과 이혼하려고 하자 모어가 강경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52)
이리하여 그는 1532년[쉰넷] 수상 직을 사임하였다. 그가 관직에 있는 동안 얼마나 청렴하였는가는 1년에 100파운드 밖에 쓰지 않았다는 것으로 입증된다. .. / 1534년[쉰여섯] 왕은 수장령(首長令)을 통과시키고 국왕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이며 교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선언 .. 서약을 강요했을 때, 모어는 이에 불응하였다. .. 모어를 반역죄로 몰아 사형에 처하였다. (52)
오늘날에 와서는 단지 그의 유토피아(Utopia, 1516)로 말미암아 기억에 남게 되었을 뿐이다. .. 라파엘 히틀로디(Raphael Hythloday)라는 선원이 우연히 [남반구에 있는] 이 섬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5년 동안 살면서 이곳에서 본 여러 가지 좋은 제도를 유럽에 알리기 위해 돌아왔던 것이다. / 이 유토피아 섬에서는 플라톤의 공화국처럼 모든 것을 공동으로 유지해 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이 있게 되면 어느 곳에서나 공동의 이익을 위할 수 없으며 또한 공산주의자는 인간을 게으르게 하고 고관들에 대한 존경심을 저버리게 한다는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53)
누구든지 어느 집에나 마음대로 들어가도 무방하다. 그리고 지붕은 편편하며, 사람들은 10년마다 한 번씩 집을 바꾼다. 이것은 소유권에 대한 의식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 이 나라의 농장에는 각각 한 농장에 40명 이상의 사람들이 종사하며 그 중에는 두 명의 노예도 포함되어 있다. ../.. 모든 사람들은 다 같은 옷을 입으며 오직 남자나 여자 또는 미혼자와 기혼자들의 복장이 다를 뿐이다. 옷 모양은 언제 변치 않는다. (53-54)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하루에 6시간 노동을 한다. 점심(정찬) 전후 3시간씩 일을 하는 것이다. 모두들 여덟 시에 잠자리에 들어 여덟 시간 동안 수면을 취한다. (54)
일부 사람들을 골라서 공부를 시키며 그들이 유망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다른 일에서 면제된다. 이 학자들 사이에서 선출된 사람으로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정체는 대의 민주정체로서 간접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최고의 수령은 종신(終身) 군주이지만, 그가 횡포를 부릴 때에는 면직될 수도 있다. (54)
남자는 한 의자에 앉으며, 여인들은 다른 의자에 앉는다. ... 다섯 살이 넘은 아이들로서 시중을 드는 일을 하기에 너무 어릴 때에는 “기이한 침묵‘ 속에서 어른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 그들은 따로 식사를 하지 않고 어른 들의 식탁에서 먹다 남은 것으로 만족한다. (55) [부부유별(夫婦有別)처럼 남녀의 구별은 동서양이 공통인 것 같다. / 그런데 먹는 것 가지고 어린이에게 하급(노예) 취급이라니, ... 그럴까? / 프랑스에서는 아버지만 칼을 가지고 있으면서, 먹을 것을 잘라서 나누어준다. 아버지의 탈영토화인 칼이 지배권이다. (50QLF)]
어느 한편이 간통을 하거나 또는 참기 어려운 외고집을 가졌을 경우에는 이혼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결함을 지닌 사람은 재혼이 허용되지 않는다. (55)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에만 전쟁에 호소한다. 즉 침략을 받아서 그들 자신의 영토를 방위해야 할 경우, 동맹국을 침략자로부터 구출할 경우, 참주정치에 억압당한 나라를 해방시키는 경우이다. 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용병(傭兵)을 사용하지 않는다. (55)
그들을 적국의 평민들을 가엾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의사와 달리 군주나 두목들에게 강제로 끌려다니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56) [인민은 인민에 대해 관대하다. 이런 류를 인도주의(humanitaire)라 한다.] [인민이 꼴꽁에 대해 관대한 것은 아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정원사가 되었다. 김기춘이 무슨 사림파라고 사약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엠병하네” 소리가 나올 때까지 그 곳 청소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50QMJ)]
유토피아 사람들은 윤리면에 있어서 행복한 [즐거움] 쾌락에 있다고 생각하며 지나치게 [즐거움] 쾌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 / 그들은 금욕주의적이 아니며, 또한 금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한다. (56)
상인들 중에는 육식과 결혼을 피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경건하기는 하지만 현인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여인들도 나이가 많거나 독신(獨身)이면 사제(司祭)가 될 수 있다. 사제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것은 명예직으로 권력은 부여되지 않기 때문이다. (56-57)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자살(自殺)하기를 권유하지만 이를 거절한 사람들은 조십스럽게 보살펴 준다. (57) [존엄사, 안락사, 그리고 21세기에 완화사 등은 소크라테스(일흔)에 이어 스토아 학파의 인도주의(humanitaire) 정신의 일종이다. // 존엄사 클럽(고원)은 소크라테스, 안티스테네스(Ἀντισθένης)를 이어서 ... 라파르그(Paul Lafargue, 1842-1911, 예순아홉)와 부인인 로라 맑스(Laura Marx, 1845–1911)[맑스의 딸]에 이른다. 이 부부는 “타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영위하기보다 자살하였다. 과거에는 69세 정도에 의지적으로 마감할 수 있지만, 요즘은 평균연령 78세까지 노동활동 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고원에서 입주자는 존엄사 회원으로 할 것이다. (50QLF)]
라파엘 히틀로디는 자기가 유토피아인들에게 기독교를 설파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사유재산을 반대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개종하였다고 말한다. 즉 공산주의의 중요성을 계속하여 강조하고 있다. (57)
[평가] 모어의 유토피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유롭다. 나는[럿셀] 많은 종교운동의 전통 안에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설명을 별로 많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전쟁에 관한 것이나 종교에 대한 것, 신교의 자유에 대한 것, 그 밖의 동물의 난폭한 살해에 반대하는 것(사냥을 금해야 한다는 가장 웅변적인 구절이 있다), 형벌을 가볍게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참작되어야 할 점이라 본다(이 책은 절도범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주장으로 시작된다.) (57)
그러나 모어는 유토피아에서의 그와 같은 생활은 견딜 수 없이 무미건조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화란 행복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그러나 유토피아에서는 변화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57) [변화란 자아의 자기 발전과 확장, 나아가 강도와 속도인데 이것이 없이는 무미건조하다. 이 과정에서 행복도 아름다움도 우아함도 부드러움도 관대함도 있다. 고정된 단순 반복은 물체화 되는 것이다. (50QLF)]
(10:13, 50QLF) (11:15, 50QME) (6:28 50QMH) (7:25, 50QMJ)